여건
1. 與件
주어진 조건. 생활 여건, 여건을 갖춤 등으로 쓰이는 단어이며, 조건과 마찬가지로 '''껀'''이라 발음하므로 역건이나 여껀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2.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1
呂虔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로 자는 자각(子恪).
조조가 연주목이 되었을 때 재주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로 기용한다. 처음엔 기병을 이끄는 직책을 맡았으나 창희에 가담한 도적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의 두목을 술자리에 초대한 뒤 일망타진한다. 그 공으로 태산 태수로 승진하였고 이곳에서 백성들을 잘 다스린다.
이 때는 산적들이 많았는데 여건은 군을 이끌고 여러차례 산적들을 소탕하여 백성들의 환심을 산다. 그 뒤 황건적의 일당인 서화가 여러 읍을 점령하자 하후연과 함께 출진하여 이들을 진압한다. 그 뒤 동래에서 이조라는 산적이 발호하자 또다시 공을 세운다. 조조는 이것을 치하한 뒤 그를 기도위로 삼았지만 그는 계속 태산을 다스렸다.
조비가 즉위하자 비장군이 되었고 익수정후에 봉해졌으며, 나중엔 서주자사로 승진한다. 서주자사가 되자 왕상을 발탁하여 내정을 모두 맡기는데 왕상에게 자신의 보검을 주며 '왕상은 훗날 삼공이 될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훗날 왕상은 사공, 태위직을 역임할 정도의 엄청난 거물이 되니 사람보는 눈은 확실히 있었다고 할 수 있다.[1]
서주자사 직을 역임하면서도 반란의 무리를 진압하는 등 솜씨를 발휘했고 조예가 즉위할 때 까지 살다가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을 땐 식읍이 6백호였다.
2.1. 미디어 믹스
2.1.1. 삼국지 시리즈
그를 평가한다면 산적 토벌의 스페셜리스트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인지도가 낮아서 그런지 삼국지 시리즈에선 전형적인 쩌리 무장. 능력치 중 80을 넘는 게 하나도 없다. 순욱으로 시작하는 조조군의 연속 천거 이벤트[2] 로 영입할 수 있는 장수 중에서도 능력치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좋지 않다.
일러스트도 시리즈별로 일관성이 없는 편. 삼국지 7부터 10까지의 일러스트는 무슨 늙은 선비처럼 나왔다. 막상 능력치는 무력이 70인데... 하지만 12의 일러스트는 11의 일러스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9에서는 45/72/61/70으로 통솔이 아주 눈에 띄게 낮다. 그래도 연사와 주사, 정란이 있어서 공성전에서 부장으로 잘 써먹을 수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58/70/61/70/58로 뭔가 일관성이 없는 능력치. 보통 무관형이라면 통솔,무력에 특화되고 문관형이라면 지력, 정치에 특화, 제독,사령관형이라면 통솔, 지력에 특화되는데 특이하게 전혀 관련이 없어보이는 무력, 정치에 특화되었다. 물론 그래봤자 딱 70밖에 안되는지라 효용성은 낮다. 특기는 9개나 되지만 기본적으로 능력치가 별로인데다가 정치를 살릴 만한 특기도 상업 1개 밖에 없는데 통솔이 58밖에 안 되는 주제에 통솔 의존 특기가 4개나 되는 등 여러모로 미묘한 존재. 전체적으로 특기는 상업, 치안, 징병, 화시, 진정, 은밀, 반목, 유인, 회복. 총 9개다.
삼국지 11에서는 산적토벌 일화를 반영했는지 그에게 사수라는 특기를 주는데 이것은 숲에서도 궁노 전법을 쓰는게 가능하게 하는 특기이다. 더구나 노병전법이 S. 주력은 못 되지만 보조병력으로는 쓸 만하다.
삼국지 12에서의 일러스트는 여포의 부하장수인 설란에게 활을 쏘려는 모습이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57/70/62/72. 특기는 상업 1 단 하나. 전수특기도 당연히 상업이고 전법은 궁병속공진.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57, 무력 70, 지력 61, 정치 72, 매력 59로 전작에 비해 지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교화, 위무, 인정, 주의는 왕도, 정책은 지역순회 Lv 3, 진형은 안행, 학익, 전법은 연노, 업화, 친애무장은 만총, 모개, 왕상,[3] 유엽, 혐오무장은 없다.
2.1.2. 영걸전 시리즈
등장하는 것으로 오해들하는데,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등장하는 여건을 한자로 확인해보면 呂虔이 아닌 呂建이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궁기병으로 등장한다
2.1.3. 삼국지톡
[image]
백성을 괴롭히던 도적 두목들을 술자리에 초대해서 몰살시키고 옷에 피가 튀어 짜증내는 모습으로 첫 등장한다.[4][5][6] 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감이 온다.'] 만총의 추천으로 조조에게 임관한다. 참모[7] 지만 사격술이 뛰어나는지, 협천자 40화에서 허저가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놓친 설란이 도주하려 하자, 들고 있던 노트북을 상관인 조조에게 던지고, 옆에 있던 궁병의 석궁을 가져다 단번에 저격해 죽였다.
이후에 등장이 전혀 없다가[8] , 최신인 관도대전 시즌 2 38화에 위기에 처한 유비를 구하려다 하후돈이 함진영이 쏜 화살에 눈을 맞은 걸 이전, 하후연과 함께 놀란 표정으로 등장한다.
3.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2
呂建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다.
조인이 번성에서 관우에게 포위되고 서황은 함부로 진격하지 않고 상황을 살펴보기로 해 대기하면서 원군을 기다렸으며, 조조가 여건을 서상과 함께 서황에게 파견하면서 조조로부터의 전언으로 병마가 집결하면 함께 전진하라는 명령을 전하게 된다. 원군이 파견되면서 서황은 조조의 명에 따라 관우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서상과 함께 서황의 부장으로 참전해 관평이 번성의 북쪽인 언성, 요화가 번성의 동쪽인 사총에 주둔했는데, 이 때 서황이 자신은 500명으로 언성의 뒤를 기습하려고 했다. 여건은 서황의 명으로 서상과 함께 언성으로 나아가 관평과 싸우러 갔는데, 서상이 관평과 싸우다가 도망가는 것을 보고 관평과 대 여섯 합 정도 싸우다가 달아났다.
3.1. 미디어 믹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3에 등장하고 쭉 출연이 없었다가 삼국지 14에서 오랫만에 복귀했다. 14에서 능력치는 통솔 60, 무력 71, 지력 35, 정치 30, 매력 34이며 일러스트는 100만인의 삼국지의 여건을 재활용했다. 개성은 축성, 주의는 패도, 정책은 성벽확장 Lv 3, 진형은 봉시, 전법은 제사, 친애무장은 서상,[9] 혐오무장은 없다. 생년은 182년, 몰년은 231년까지 되어있다.
[image]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도 등장하여 서황을 보조한다.
삼국전투기에서는 빈란드 사가의 토르켈로 등장한다. 인물 소개컷에 1번과 합쳤다. 거기다가 관우한테 죽기까지 한다.[10]
창천항로에서는 나름 1세대 조조군 장수인 1의 여건은 등장하지 않고 이 여건만 등장한다. 번성 전투에서 서상과 함께 등장하며, 오랫동안 변경을 떠돌며 토벌에 종사한 장수답게 중원의 전투, 그리고 관우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만 오랫동안 씻지 못했는지 그와 그가 이끄는 부대는 모두 꾸리꾸리한 악취가 난다는 설정이다. 이건 파트너인 서상도 마찬가지. 서황, 조엄의 번성 구원군과 함께 등장하며, 서황의 책략대로 무사히 만총이 지키고 있는 번성 내로 병력과 군량을 무사히 수송하는데 성공한다. 다만 그 냄새는 어떻게 안되는 모양이다.
삼국지 영걸전에서는 맥의 전투에서 서상과 세트로 조인 군의 원군으로 등장하며 클래스는 발석차.
[1] 왕상은 죽으면서 이 칼을 동생인 왕람에게 물려줬다고 한다. 왕람 가계의 유명인사가 왕도(동진), 왕희지 등이 있었고, 먼 후손이 왕양명이다.[2] 순욱-정욱-희지재-곽가-유엽, 여건, 모개 등으로 이어진다.[3] 왕보의 사촌 형 왕상이 아닌 위나라 태위 왕상이다.[4] 다만 외모나 체형이 남성인지 TS화 된 건지는 아직까지 잘 모른다.[5] 어머니가 사 주신 옷을 더럽혔다며 짜증을 내는데, 같은 컷에 주석으로 '여건은 자신을 미워하는 계모를 극진히 모셨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에 독자들의 반응은 '저런 옷을 입으라고 사 주다니 계모가 [[왕상#s-1]|의붓자식][6] 정사 여건전[7] 연의에선 만총과 함께 군중종사(軍中從事)에 임명된다. 종사중랑(從事中郞)의 연의 버전.[8] 사실, 협천자 후반과 관도대전 편 중반까지는 수 많은 조조 진영의 책사들 중에서 순욱, 곽가, 정욱만이 대화에 등장하며, 특히 곽가와 정욱이 많이도 나온다. 순욱은 협천자 과정에서 조조와의 갈등이 벌어진 뒤로 대화 대신 모습이 나오는 것이 전부다.[9] 오나라 관료 서상이 아닌 서황의 부장 서상이다.[10] 다만 최훈은 엑스트라급 비중의 장수가 쓰러질 때 죽는 건지 그냥 쓰러지는 건지 모호하게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장료가 송겸을 쓰러트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착각한 선례도 있고, 태사자가 유반을 잡았을 때 모호하게 묘사를 해놓아서 나중에 해명까지 한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