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톡/오류
1. 개요
2. 내용 오류
2.1. 시즌 1
2.2. 시즌 2
2.2.1. 41화
2.2.2. 42화
2.2.3. 43화
2.2.4. 44화
2.2.5. 45화
2.2.6. 46화
2.2.7. 47화
2.2.8. 48화
2.2.9. 49화
2.2.10. 50화
2.2.11. 51화
2.2.12. 52화
2.2.13. 53화
2.2.14. 54화
2.2.15. 55화
2.2.16. 56화
2.2.17. 57화
2.2.18. 58화
2.2.19. 60화
2.3. 시즌 3
2.3.1. 61화
2.3.2. 62화
2.3.3. 63화
2.3.4. 67화
2.3.5. 68화
2.3.6. 70화
2.3.7. 72화
2.3.8. 75화
2.3.9. 80화
2.3.10. 81화
2.3.11. 96화
2.4. 시즌 4
2.5. 시즌 5
2.6. 시즌 6
3. 나이 계산 관련 오류
1. 개요
삼국지톡에 있는 고증오류와 설정오류에 대해 정리했다.
☆ 표시 - 삼국지톡이 아닌 원전인 '''삼국지연의 자체에서 일어난 오류'''이다.
■ 표시 - 실제 역사와 사실관계가 명백히 불일치한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내용의 단순 생략, 연의와는 충돌하지만 정사에는 가까운 경우, 원전 사료 자체가 모호한 경우 등이 이에 속하며, 작품 속 해석의 여지가 충분한 경우에 쓴다.
2. 내용 오류
2.1. 시즌 1
삼국지톡/오류/시즌1 참조.
2.2. 시즌 2
2.2.1. 41화
- 첫 컷에 낙양의 장락궁을 묘사한 듯한 화려한 건축물의 처마가 묘사되어 있는데, 트레이싱 내지는 모작으로 보인다.[1] 그런데 해당 사진의 건축물이 이화원(頤和園)[2] 의 배운전(排雲殿)이다. 즉, 청나라 시절의 건축물이라는 것. 사실 외견이 화려해서 황실을 나타내는 것으로는 부족함이 없고 한나라 시기의 건축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사용했다고 할 수 있지만, 다음 시기인 위진남북조 시대의 건축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건축물의 부분에서는 중국 사극이나 다큐멘터리 등에서도 고증이 어느 정도 잘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3] 그런 방면에서 자료를 구할 수도 있었는데 구태여 청나라의 건축물을 사용한 것이다. 9컷의 묘사를 보면 완전 자금성이다.
실제 일어난 일로 비유하자면 고구려 시기를 다룬 사극인 칼과 꽃에서 대왕 세종의 세트장을 쓰는 바람에 시대 상으로 있지도 않았을 광화문과 흡사한 건축물이 화면에 등장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4] 물론 역덕후가 아닌 이상은 그런 건축물에 대한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쓸 독자들은 많지 않겠지만 그만큼 스토리 및 설정을 담당한 작가가 자료 조사 및 선정 등에 있어서 신경을 안 쓴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 조조와 원소가 궁궐에서 나름 복식을 갖춘 모습으로 돌아다니는데 중요한 건 관모를 쓰지 않고 있으며 상투에 관을 쓴 괴상한 형태로 돌아다닌다는 점이다.
[image]
위의 사진은 후한의 광무제의 초상화인데 그 옆에 선 인물들의 복식을 통해 당시의 관복의 형태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아무리 작가의 창작의 영역이라지만 조조와 원소가 현재 황제의 즉위식에 참여하러 궁에 들어왔다는 상황 및 공간적인 여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5] 위의 자료 조사 부족과 같은 오류로 보인다.
위의 사진은 후한의 광무제의 초상화인데 그 옆에 선 인물들의 복식을 통해 당시의 관복의 형태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아무리 작가의 창작의 영역이라지만 조조와 원소가 현재 황제의 즉위식에 참여하러 궁에 들어왔다는 상황 및 공간적인 여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5] 위의 자료 조사 부족과 같은 오류로 보인다.
- 뉴스 기사의 방식으로 조조와 원소가 십상시를 체포한 것으로 묘사되나, 연의나 정사에서나 그런 묘사는 없다. 두 자료 모두 건석이 하진을 죽이려다가 실패한 일이 원인이었고[6] 연의에서는 원소가 금군을 이끌어 군을 통제해 소제가 즉위 하게 한 뒤 건석을 찾았지만 건석은 이미 곽승에게 살해 당했고 하태후의 옹호로 인해 십상시 주살이 실패로 돌아갔다. 정사에서는 하진과 친분이 있고 그를 존귀하게 만든 중상시 곽승이 건석의 하진 암살 계획이 적힌 편지를 하진에게 넘긴 덕에 하진이 건석을 죽이고 그 병력을 거두어 드렸다. 이후 전개는 연의와 같이 황태후의 반대로 십상시 주살이 실패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 황제 즉위식인데 소제가 제대로 된 복장도 갖추지 않고 나온다. 황제의 면류관은 응당 류가 12가닥이어야 한다.
- ■ 갓 즉위한 소제를 유약한 인물로 묘사했다. 실제 아버지인 영제가 내린 유변에 대한 평은 아래와 같다.
>群臣請立太子, 帝以辯輕佻無威儀, 不可為人主...
> 군신들이 태자를 세우자고 청을 올리자 황제(영제)께서 "변은 가볍고 경박하며 위의가 없어, 사람을 다스릴 주인이 될 수 없다" 하셨고... (후략)
> 군신들이 태자를 세우자고 청을 올리자 황제(영제)께서 "변은 가볍고 경박하며 위의가 없어, 사람을 다스릴 주인이 될 수 없다" 하셨고... (후략)
즉, 황자 유변에 대한 영제의 평가는 나약하다기보다는 '행동거지가 가벼워서 남에게 귀감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윗사람 노릇을 제대로 못할 것'이라 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연의에서도 유변은 어머니 하태후가 섭정을 했을 뿐이지, 본인 자신이 특별히 나약하다는 묘사는 없다. 흔히 소제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어리석고 약하다'는 말은 동탁이 실제로 황제의 폐위를 논하면서 한 말이다.[7]
그러나 소제가 묘사상 멍청하고 나약한 인물로 그려졌다고 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영제의 승하 전후 정국이 워낙 살벌했고, 온 국민과 매스컴의 관심이 쏠려 있는 가운데 갑자기 즉위하게 된 상황이니만큼, 연설문을 제대로 외우지 못해서 손에 적어 보거나 말을 더듬는 모습은 오히려 꽤 자연스러운 묘사에 가깝다.2.2.2. 42화
- 환관의 권력구조에 대해 매우 커다란 오류가 있다. 환관의 세력이 너무 커서 뿌리깊은 나무의 밀본이나 육룡이 나르샤의 무명처럼 조정 안에 자기 사람 채워놓고 맘에 안들면 황제나 외척들까지 제거할 수 있어서 '살아남기 위해' 하태후가 그들을 용서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무적핑크는 후한 이전에 전근대 전제왕조 국가의 권력구조에 대해서 이해를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태후가 환관들을 옹호한 건 본질적으로 이 둘이 같은 뿌리기 때문이다. 환관과 외척 모두 황제와의 관계성을 통해서 권력을 쥔 집단이고, 황제와의 관계성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에 황제가 의도적으로 힘을 실어준 집단이다. 그래서 이들의 흥망도 황제의 의중이 좌우했다. 외척은 전한의 왕망이나 북주의 양견처럼 스스로가 세력을 키워 황위를 찬탈한 사례가 있지만 생식능력이 없는 환관은 황권에 기생해야만 했다. 외척 양기나 두무가 환관과 권력다툼 끝에 밀려난 건 단순히 환관들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황제의 의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태후는 황제의 모후로 어린 황제를 대신해 섭정을 하고 있었다. 황제를 통해서만 권력을 얻을 수 있는 환관들이 황제를 대신해 정사를 보는 태후에게 잘 보이는 길과 협박하는 길이 있다면 무엇을 택할지는 뻔하다.
정치가인 하진은 균형 감각을 발휘해 탁류와 청류 모두에 줄을 댔지만[8] 환관을 통해 누이를 바쳐 출세한 백정이 단숨에 청류에 넓은 지지기반을 만들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나마 하진이나 그렇지 구중궁궐 한가운데 들어앉은 하태후는 자신을 모시는 환관과 척을 질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환관들도 하태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재물을 아낌없이 바치고 하태후의 의붓동생 하묘와 하태후의 생모인 무양군에게도 열심히 줄을 댔다. 환관에 매수된 이들은 태후에게 항상 환관들을 두둔하는 말을 했고 때문에 하태후는 환관들을 계속 두둔했다. 누이를 통해 권력을 얻은 보정대신 하진이 이를 거스르는건 정치적 자살이었다.
군주가 마음에 안들면 암살한다는 이덕일같은 사이비 역사학자나 김영현 같이 고증 같은 것 할 생각 없는 드라마 작가의 음모론적 발상에 가깝고, 실제로는 '태후마마께 어떻게든 잘 보여서 처벌을 피하자'였다.
심지어 이건 연의에서도 그대로 나오는 내용이다.[9]
군주가 마음에 안들면 암살한다는 이덕일같은 사이비 역사학자나 김영현 같이 고증 같은 것 할 생각 없는 드라마 작가의 음모론적 발상에 가깝고, 실제로는 '태후마마께 어떻게든 잘 보여서 처벌을 피하자'였다.
심지어 이건 연의에서도 그대로 나오는 내용이다.[9]
2.2.3. 43화
- 외부 군벌들을 끌어들여 십상시를 몰아내자는 원소의 계획에 느닷없이 노식이 나타나 '역모'를 운운하며 반대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연의에서 원소의 계획에 좋다고 찬성하려는 하진을 뜯어 말린 사람은 당시 주부(注簿)[10] 를 맡고 있던 진림이었다. 후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노식은 이후에 하진이 직접 동탁을 끌어들이려 할 때 동탁은 '흉포하고 사나우니(凶悍) 제어할 수 없고 살려두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다' 라고 경고하였다.
- 22컷 설명 부분에 '원소의 숙부인 원외가 젊은 동탁을 한참 아랫사람으로 부린 적이 있다고.'라고 적혀 있다. 해당 기록은 정사 오서(吳書)에 등장하는 내용인데 해당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 이전에 양주자사인 성취(成就)가 동탁을 종사(從事=보좌관)로 삼았는데 동탁이 성취의 명으로 도적떼를 1천여명이나 참획한 일이 있었다. 때문에 병주자사 단경이 삼공의 관청인 공부에 천거한 것이고 원외는 그것을 수락한 것이다. 즉, 동탁이 공을 세워 상관에게 천거를 받았고 원외는 승인했을 뿐이다. 표현상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마치 원외가 동탁을 직속부하로 두고 부려먹었다는 식으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2.2.4. 44화
> 原子建陽, 本出自寒家, 為人麤略, 有武勇, 善騎射. 為南縣吏, 受使不辭難, 有警急, 追寇虜, 輒在其前. 裁知書, 少有吏用.
>원의 자(字)는 건양이며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됨됨이가 거칠고 날카로우며 무용을 가졌고 기사[13] 를 잘했다. 남현(南縣)의 관리가 되었는데 명을 받으면 꺼리거나 사양하지 않았고 급박한 경보가 있으면 늘 앞장서서 도적들을 쫓아가 사로잡았다. 글을 알고 헤아려서 어릴 때부터 관리로 일했다.
즉, 정원은 거친 군벌들 중 하나였으나 적어도 수하장수가 휘하의 졸병들을 죽이는 걸 보고 웃으며 즐거워 할 정도로 잔혹하고 사리분별 못하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특히나 연의에 등장하는 정원은 동탁에 맞서는 정의로운 성품을 지녔으나 양아들에 손에 의해 죽은 비참한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에 삼국지톡에서의 묘사와 더더욱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감안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즌3에서 황제 유협을 동탁에게서 구해내고 새차 뽑겠다는 여포에게 국민 세금 함부로 쓰는 거 아니라며 충고하는 개념인으로 묘사된다.
>원의 자(字)는 건양이며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됨됨이가 거칠고 날카로우며 무용을 가졌고 기사[13] 를 잘했다. 남현(南縣)의 관리가 되었는데 명을 받으면 꺼리거나 사양하지 않았고 급박한 경보가 있으면 늘 앞장서서 도적들을 쫓아가 사로잡았다. 글을 알고 헤아려서 어릴 때부터 관리로 일했다.
즉, 정원은 거친 군벌들 중 하나였으나 적어도 수하장수가 휘하의 졸병들을 죽이는 걸 보고 웃으며 즐거워 할 정도로 잔혹하고 사리분별 못하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특히나 연의에 등장하는 정원은 동탁에 맞서는 정의로운 성품을 지녔으나 양아들에 손에 의해 죽은 비참한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에 삼국지톡에서의 묘사와 더더욱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감안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즌3에서 황제 유협을 동탁에게서 구해내고 새차 뽑겠다는 여포에게 국민 세금 함부로 쓰는 거 아니라며 충고하는 개념인으로 묘사된다.
- 소제가 5류 면류관을 쓰고 나온다. 황제의 면류관은 응당 류가 12가닥이어야 한다.
2.2.5. 45화
- ■ 공손찬의 '학살' 표현에 대하여
>공손찬, 적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다.<정사>
일단 삼국지톡 시기와 맞추어보면 공손찬이 장거-장순의 난을 진압하기 전, 혹은 그 이후로 보이는데 딱히 공손찬 측에서 학살을 자행했다는 기록이 없다. 물론 정사인 후한서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 每聞有警, 瓚輒厲色憤怒, 如赴讎敵...
> (전략) 늘 (이민족들이) 경계하도록 알렸으며 찬은 번번이 분노한 기색을 보이기를 원수나 적에게 하는 것과 같았다. (후략)
>瓚志埽滅烏桓, 而劉虞欲以恩信招降, 由是與虞相忤.
> 찬은 오환을 쓸어서 없애려는 뜻을 세웠지만 유우는 은혜와 신뢰로서 항복을 받고자 했으니 이로 말미암아 우와 서로 미워하게 되었다.
> (전략) 늘 (이민족들이) 경계하도록 알렸으며 찬은 번번이 분노한 기색을 보이기를 원수나 적에게 하는 것과 같았다. (후략)
>瓚志埽滅烏桓, 而劉虞欲以恩信招降, 由是與虞相忤.
> 찬은 오환을 쓸어서 없애려는 뜻을 세웠지만 유우는 은혜와 신뢰로서 항복을 받고자 했으니 이로 말미암아 우와 서로 미워하게 되었다.
전자는 변방을 어지럽히는 이민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공손찬이 사용한 방법에 가깝고 후자는 이민족을 대하는 노선이 유우와 어떻게 달랐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공손찬이 강경책이면 유우는 유화책이었던 셈. 때문에 공손찬이 이민족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는 내용과는 무관해지는 셈이다. 또한 정사 삼국지에는 장거-장순의 난 이전에 수십기의 기병을 이끌고 순찰중이던 공손찬이 선비족 기병 수백명과 맞닥들여서 그들을 대거 살상했다는 기록도 있긴 하나, 그 다음 문장을 보면 공손찬은 선비족 기병들을 뚫으며 당시 이끌던 기병의 절반을 잃고 나서야 겨우 탈출했다고 되어 있다. 즉, 이 경우는 공손찬과 기병대가 적을 만나 분전(奮戰)을 한 셈이지 일방적으로 학살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분명히 정사를 인용했다고는 하는데 어느 부분에서 인용한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대략 추정이 되는 부분이 있긴 한데 아래를 참조. 출처는 '후한서 유우공손찬도겸열전(劉虞公孫瓚陶謙列傳)'이다.
분명히 정사를 인용했다고는 하는데 어느 부분에서 인용한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대략 추정이 되는 부분이 있긴 한데 아래를 참조. 출처는 '후한서 유우공손찬도겸열전(劉虞公孫瓚陶謙列傳)'이다.
>初平二年, 青, 徐黃巾三十萬眾入勃海界, 欲與黑山合. 瓚率步騎二萬人, 逆擊於東光南, 大破之, 斬首三萬餘級. 賊棄其車重數萬兩, 奔走度河. 瓚因其半濟薄之, 賊復大破, 死者數萬, 流血丹水, 收得生口七萬餘人, 車甲財物不可勝筭, 威名大震.
>
>초평 2년(191년), 청주 서주의 황건적 삼십만의 군세가 발해군 경계에 침입하여, 흑산적과 합류하려 하였다. 공손찬은 보군과 기병 2만을 이끌고 동광 남쪽에서 영격하여, 이들을 대파하였다. 삼 만에 달하는 수급을 취하였다. 적군은 수레 수만 기를 버리고 강을 건너 도망갔다. 적도들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공손찬이 육박하여 이를 다시 대파하여 전사자 수만에 달하고, 흐른 피가 강을 붉게 만들었다. 포로 칠만 여명을 획득하고, 수레와 갑주, 재물은 셀 수 없이 많이 취하였다.
>
>초평 2년(191년), 청주 서주의 황건적 삼십만의 군세가 발해군 경계에 침입하여, 흑산적과 합류하려 하였다. 공손찬은 보군과 기병 2만을 이끌고 동광 남쪽에서 영격하여, 이들을 대파하였다. 삼 만에 달하는 수급을 취하였다. 적군은 수레 수만 기를 버리고 강을 건너 도망갔다. 적도들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공손찬이 육박하여 이를 다시 대파하여 전사자 수만에 달하고, 흐른 피가 강을 붉게 만들었다. 포로 칠만 여명을 획득하고, 수레와 갑주, 재물은 셀 수 없이 많이 취하였다.
근데 저런 전투에서의 공적이나 적의 수급을 베었다는 기록은 후한서나 정사 등에서도 꽤 자주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학살을 나타낸다고는 보기 어렵다. 동일한 후한서의 열전을 보면 공손찬이 유우를 죽이자 오환사마였던 염유(閻柔)가 공손찬이 임명한 어양태수인 추단을 포함한 「4천여명의 목을 쳤다(斬丹等四千餘級)」는 기록이 있고 흥평 2년(195년)에 이들이 원소의 장수인 국의와 함께 공손찬을 어양현 포구에서 격파하고 「2만여명의 목을 쳤다(斬首二萬餘級)」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이렇듯 단순히 교전비로 따지자면 비슷한 경우도 많았다. 다만 유화책을 사용하려 한 유우와 대립각을 세웠고, 그 때문에 세력이 몰락하고 말았다는 독특한 드라마를 갖고 있으므로 잔혹성을 강조하려 한 듯하다. 작품 내적으로는 꽤나 영리한 선택이다.
더 큰 문제는 초평(初平)이라는 연호는 다름 아닌 헌제가 황제가 되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즉, 저 기록은 현재 삼국지톡 내의 시기인 소제(유변) 시기가 아닌 그 다음 황제이자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유협)가 즉위한 지 3년이 되던 해[14] 에 일어난 일이라는 셈이다.2.2.6. 46화
- 하진이 십상시를 척결하려는 과정에서 범죄자들까지 불러모으는 듯한 장면이 연출되는데 실제 기록은 아래와 같다.
>紹等又為畫策, 多召四方猛將及諸豪傑, 使並引兵向京城, 以脅太后.
> 소(원소) 둥은 또 계책을 꾀하며 사방의 맹장과 모든 호걸들을 많이 불러모아 그들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경성(낙양)으로 향하게 해 태후를 위협하고자 했다.
> 소(원소) 둥은 또 계책을 꾀하며 사방의 맹장과 모든 호걸들을 많이 불러모아 그들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경성(낙양)으로 향하게 해 태후를 위협하고자 했다.
즉 하진이 모은 것은 병력을 통솔할 인재들을 모은거지,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구한 게 절대 아니다. 유비가 독우를 때리고 달아난 죄를 이 시기에 씻었다는 점 때문에 저렇게 묘사한 거 같은데 유비는 하진이 단양(丹楊)[15] 도위(都尉)였던 관구의(毌丘毅)를 보내 모병했을 때 참여했고 공을 세워 죄를 씻고 청주 북해국 하밀(下密)의 승이 되었다가 스스로 벼슬을 버린 뒤 다시 청주 평원국의 고당(高唐)의 현위가 되었다가 현령으로 승격했다. 하진은 유능한 인물을 모으면서 그들이 지은 죄의 경중을 보아 죄의 일부를 탕감한 것이지, 범죄자들을 모집한 게 아니다. 묘사 자체가 잘못된 셈.
- 정사를 기준으로 보면 유비는 이미 사면이 된 상황이다. 정확히는 후한서 효영제기에 나오는 중평 6년(189년)에 영제가 서거했을 때의 기록이다.
>丙辰, 帝崩于南宮嘉德殿, 年三十四. 戊午, 皇子辯即皇帝位, 年十七. 尊皇后曰皇太后, 太后臨朝. 大赦天下, 改元為光喜.
>병진일, 황제(영제)께서 남궁 가덕전에서 붕어하셨는데 34세였다. 무오일, 황자 변(소제)이 곧 황제에 오르니 17세였다. 황후를 황태후라 불렀고 태후가 (임시로) 조정을 다스렸다. 천하에 대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광희로 고쳤다.
>병진일, 황제(영제)께서 남궁 가덕전에서 붕어하셨는데 34세였다. 무오일, 황자 변(소제)이 곧 황제에 오르니 17세였다. 황후를 황태후라 불렀고 태후가 (임시로) 조정을 다스렸다. 천하에 대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광희로 고쳤다.
황당한 점은 그 이전에도 대사면은 당연히 있었다. 황건적의 난이 시작된 중평 원년(184년) 3월 임자일부터 12월 기사일 중평 3년(186년) 2월 경술일, 중평 4년(187년) 정월 기묘일, 영제가 죽기 1년 전인 중평 5년(188년) 봄 정유일까지 대사면령이 있었다. 유비가 독우를 두들겨 패고 달아난 게 저 사이의 일이니 당연히 사면을 받았을 것이 확실하다.
즉, 정사의 유비는 황건적의 난 이후 소제가 즉위하기까지 내려진 5번의 대사면령으로 인해 사실상 사면을 받은 상태고[16] , 때문에 굳이 죄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쓸 이유가 없었다. 만약 5번의 대사면령 이후에도 유비가 여전히 죄인이려면 유비가 그 사면령 기간 동안에 꾸준히 범죄를 저질렀거나, 도저히 사면 받을 수 없는 대역죄인이 아니면 안 된다. 연의에서도 유비가 장거-장순의 난을 토벌하는 유우를 따라 도위로서 전공을 세우긴 했지만 딱히 죄를 씻으려고 애를 썼다는 내용은 없다. 삼톡에선 이 사면령이 편집당한 탓에 유비는 열심히 구른다(...)
즉, 정사의 유비는 황건적의 난 이후 소제가 즉위하기까지 내려진 5번의 대사면령으로 인해 사실상 사면을 받은 상태고[16] , 때문에 굳이 죄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쓸 이유가 없었다. 만약 5번의 대사면령 이후에도 유비가 여전히 죄인이려면 유비가 그 사면령 기간 동안에 꾸준히 범죄를 저질렀거나, 도저히 사면 받을 수 없는 대역죄인이 아니면 안 된다. 연의에서도 유비가 장거-장순의 난을 토벌하는 유우를 따라 도위로서 전공을 세우긴 했지만 딱히 죄를 씻으려고 애를 썼다는 내용은 없다. 삼톡에선 이 사면령이 편집당한 탓에 유비는 열심히 구른다(...)
2.2.7. 47화
- ■ 하진은 맹장과 호걸을 모으면서 '죄에 대한 사면'을 공약한 적이 없다. 유비의 경우도 하진이 파견한 도위인 관구의(毌丘毅) 밑에서 종사하며 세운 공이 이전에 지은 죄를 덮고 새로 공직생활을 할 만 했기 때문에 하밀의 승으로 임명된 것에 가깝다.
2.2.8. 48화
- ■ 유비는 유우 밑에서 장거와 장순의 난을 토벌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작중 이 두 사람의 이름은 아예 언급도 없다. 삼국지집해 선주전에 인용된 전략에 따르면 유회의 추천을 받아 유우 밑에서 장거-장순을 어양(漁陽)에서 토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유비가 어양에서 도적을 토벌했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장순, 장거의 반란군'이 되는데 그걸 작가가 의도적으로 두 사람을 누락해버린 것이다. 의도적 누락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30컷에 있는 공손찬의 프로필 정보인데 기도위 직은 공손찬이 장거-장순의 난을 진압하고 받은 벼슬이다. 아마도 장거-장순의 난은 유비와의 연관에서 아예 뺀 것으로 보인다. 장거와 장순의 난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사건도 아니거니와, 황건적 토벌과 너무 전개가 비슷하다보니 오히려 늘어질 염려가 있어 생략된 듯하다.
- 연의에서 유비는 유회의 천거로 토벌군을 맡은 유주목 유우 밑에서 도위로 활약했으며 이후에 하밀의 승(丞), 고당현의 현위(縣尉)가 되었다. 즉, 일개 졸병으로서 활동한 게 아니라 나름 군을 감독하는 입장에서 토벌군에 참가한 셈이 되는데 유비 삼형제의 고단함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유비가 도위로서 참전한 부분이 누락되었다.
- ■ 14컷에 유비가 '현승, 현위 직을 제의받았다는 언급이 있다. 정사와 연의 모두 여기서 除(제)라는 글자를 사용한다. 이것은 벼슬에 임명했다는 의미로서 유비는 그 벼슬을 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특히 정사에서는 그를 뒷받침하듯 '다시 벼슬을 버렸다(復去官)' 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즉, 제의 단계에서 머무르지 않고 유비는 실제로 벼슬을 얻었다.
2.2.9. 49화
- 18컷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등장한다.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내시)들이 '수십년간 황제를 갖고놀아', 매관매직, 부정부패로 백성들 삶이 어려웠다.
상황 자체는 십상시가 정권농단을 한 게 사실인데, 중요한 건 매관매직을 적극적으로 한 이는 당시 황제인 영제였고 십상시들은 영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부패를 재생산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즉, 황제가 자신의 착복과 향락을 위해 환관들을 기용한 것이지, 환관들이 황제를 가지고 놀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영제의 매관매직에 의한 축재에 대한 기록[17] 은 아래와 같다.
> 是歲, 鮮卑寇酒泉. 京師馬生人. 初開西邸賣官, 自關內侯, 虎賁, 羽林, 入錢各有差. 私令左右賣公卿, 公千萬, 卿五百萬.
> 이 해에 선비족이 주천[18] 을 약탈했다. 경사(수도)에서는 말이 사람을 낳았다. 처음으로 서저(西邸)를 열어 관직을 팔았는데 관내후부터 호분, 우림이 각각 들어가는 돈에 차이가 있었다. 사사로이 좌우로 하여금 공경(公卿)직도 팔았는데 공은 천만전, 경은 오백만전이었다. - 후한서 효영제기
> 時賣官, 二千石二千萬, 四百石四百萬, 其以德次應選半之, 或三分之一, 於西園立庫以貯之.
> 관직을 팔 때, (녹봉이) 이천석이면 이천만전, 사백석이면 사백만전이었고, 만일 덕으로서 도달한 이는 응당 골라서 그 반을 받거나 혹은 삼분의 일만 받았다. 서원 곳곳에 곳간을 세워 (돈을) 비축하였다. - 산양공재기
> 이 해에 선비족이 주천[18] 을 약탈했다. 경사(수도)에서는 말이 사람을 낳았다. 처음으로 서저(西邸)를 열어 관직을 팔았는데 관내후부터 호분, 우림이 각각 들어가는 돈에 차이가 있었다. 사사로이 좌우로 하여금 공경(公卿)직도 팔았는데 공은 천만전, 경은 오백만전이었다. - 후한서 효영제기
> 時賣官, 二千石二千萬, 四百石四百萬, 其以德次應選半之, 或三分之一, 於西園立庫以貯之.
> 관직을 팔 때, (녹봉이) 이천석이면 이천만전, 사백석이면 사백만전이었고, 만일 덕으로서 도달한 이는 응당 골라서 그 반을 받거나 혹은 삼분의 일만 받았다. 서원 곳곳에 곳간을 세워 (돈을) 비축하였다. - 산양공재기
물론 효영제기 기록에 좌우로 하여금 공경직을 팔았다는 기록을 십상시에 의한 매관매직으로 볼 수 있겠으나, 그 또한 영제의 윤허가 없으면 불가했고 이들이 벼슬을 판 돈 일부도 대부분은 매관매직의 주체인 영제가 받아갔다.
- 하진의 자를 '거고(巨高)'라고 오기했다. 하진의 자는 수고(遂高)이다. 거고는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의 자이다. 다음화에도 그대로 사용했다. 나중에 수고로 다시 수정되었는데 처음 자를 언급하는 컷은 아직도 수정되지 않았다.
2.2.10. 50화
- 동탁을 하동 군벌이라고 표현했으나 이는 굉장히 큰 오류이다. 동탁이 사예교위부 소속 하동(河東) 태수직을 역임한건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이전의 일이다. 동탁은 황건적의 난에서 노식의 후임으로 진압하려다가 패배해 죄를 받았고 이후 한수 등이 농서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참전해 전장군(前將軍) 겸 태향후(斄鄕侯)가 되었고 진창 승전으로 반란이 수그러들자 군을 사병화 했다. 군벌화하는 그를 경계한 조정에서 그를 소부로 삼아 중앙으로 부르고 군권을 박탈하도록 시도했지만 군심을 핑계로 거절, 같은해 다시 병주목으로 임명하고 군대를 좌장군 황보숭에게 넘기도록 했으나 이번에는 자기 군대를 병주로 데려가겠다며 거부해 버텼다. 하동태수 시절의 군사력이 이 시기까지 특정 가능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2.2.11. 51화
- 연의에선 하진의 부름을 받은 동탁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가후가 '우보의 책사'로 설명되나 틀린 설명이다. 가후는 동탁이 낙양에 입성했을 때 태위연(太尉掾)[20] 에 임명되었고 이후 동탁에 의해 평진도위(平津都尉), 토로교위(討虜校尉)로 승진된 이후 우보가 동탁의 지시로 섬현에 주둔했을 때 그 군에 있었다. 즉, 가후가 우보 밑에 있던 건 동탁이 정권을 쥐고 난 이후이며 애당초 가후와 동탁이 처음 인연을 맺은 것도 동탁이 낙양에 입성한 이후다.[21] 동탁의 낙양 입성 전에 등장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인 셈.
- 맹진의 화재 동영상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등장한다.
> 도적들의 기세가 너무 대단해, 이전 황제 시절 벼슬을 주거나 사면령을 내려 달랬다.
이전 황제라고 한다면 영제 시기를 말하는데 후한서의 효영제기를 참고하자면, 영제 시기에 대사면령에 관한 기록은 상당히 많이 나오며[22] 주로 2월 정월이나 역병이 돌거나 홍수가 났을 때, 그리고 연호를 바꿀 때 주로 있었으며 당고의 금에 연류된 인물들에 대해서는 점차적으로 사면을 내렸으며 죄인들의 경우는 아직 형을 살고 있거나 집행되지 않은 이들을 사면하기도 했다.[23] 즉, 위기의 순간이 올 때나 불만이 높아지거나 정국을 안정시킬 요량으로 대사면령을 내린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도적떼에 대한 사면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도적에게 벼슬을 줬다는 부분은 장연에 대한 내용으로 보이는데 장연이 자신과 함께 하던 장우각(張牛角)이 죽으면서 유언을 남겨 자신의 무리가 장연을 따르도록 하고, 그 기세에 힘입어 장연이 도적떼를 백만에 가깝게 규합해 흑산(黑山)이라 이름짓고 북방에서 난리를 쳐도 영제가 하지 못한 것은 분명 사실이나, 먼저 장연이 낙양에 사람을 보내 항복하겠다는 서신을 보냈고 그에 따라 영제가 명목상이지만 평난중랑장(平難中郞將)에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건 장연의 세력이 워낙 감당이 안 되게 컸기에 생긴 특별한 경우이지, 삼국지톡에서의 내용처럼 도적들이 생길 때마다 벼슬을 줘서 무마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군을 동원해 제압했다는 기사가 훨씬 많다.
또한 도적에게 벼슬을 줬다는 부분은 장연에 대한 내용으로 보이는데 장연이 자신과 함께 하던 장우각(張牛角)이 죽으면서 유언을 남겨 자신의 무리가 장연을 따르도록 하고, 그 기세에 힘입어 장연이 도적떼를 백만에 가깝게 규합해 흑산(黑山)이라 이름짓고 북방에서 난리를 쳐도 영제가 하지 못한 것은 분명 사실이나, 먼저 장연이 낙양에 사람을 보내 항복하겠다는 서신을 보냈고 그에 따라 영제가 명목상이지만 평난중랑장(平難中郞將)에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건 장연의 세력이 워낙 감당이 안 되게 컸기에 생긴 특별한 경우이지, 삼국지톡에서의 내용처럼 도적들이 생길 때마다 벼슬을 줘서 무마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군을 동원해 제압했다는 기사가 훨씬 많다.
2.2.12. 52화
- ■ 4컷에 '맹진에 화재 "인명피해 속출'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정작 정사[24] 를 보면 해당 일이 벌어지기 전에 '태후를 협박하려 했다(脅太后)'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즉 원소 등이 하진에게 계책을 냈으나 이는 아무리 설득해도 십상시를 죽이지 않는 태후를 협박하기 위한 의도가 강했기 때문에 실제로 백성들에게 위해를 가해 스스로의 명분을 내던지는 짓을 했을 가능성은 낮다. 후한서가 인용한 속한서(續漢書)에 등장하는 정원의 행적을 보면 더 명확하게 등장한다.
>何進欲誅中常侍趙忠等, 進乃詐令武猛都尉丁原放兵數千人, 為賊於河內, 稱黑山伯, 上事以誅忠等為辭, 燒平陰, 河津莫府人舍, 以怖動太后.
>하진은 중상시 조충 등을 베고자 했고 이에 거짓으로 무맹도위(武猛都尉) 정원에게 천 명의 병사를 풀어 하내의 도적처럼 가장하고 흑산백(黑山伯)이라 부르게 했다. 앞의 일을 근거로 조충 등을 베라는 말을 올리고 평음(平陰)과 나루터가 불타 마을과 집과 사람이 없다고 함으로써 태후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후한서의 기록 또한 마찬가지다.
>...使武猛都尉丁原燒孟津, 火照城中, 皆以誅宦官爲言. 太后猶不從.
> (전략) 무맹도위 정원으로 하여금 맹진을 불태우고, 불빛이 성 안까지 비추자 모두가 환관을 베라고 말하였다. 태후는 되려 따르지 않았다.
자꾸 망설이는 하진과 하태후를 움직이기 위해 벌인 일이라 발상이 돌아이스러워 그렇지, 철저히 계획 하에 진행된 일이라서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했을 가능성은 낮다. 진수는 조조의 서주대학살에 대해서는 '잔륙'이라는 표현을 써 학살을 인정한 바 있다. 후한서야 그렇다쳐도 정사 삼국지에서 원소를 어떻게 다뤘는지 생각하면 대규모 학살이 있었으면 반드시 기록했을 것이다. 다만 '인명피해 속출'이라는 표현이 반드시 대규모의 인명 손실이 필요한 것은 아니기에, 비약에 가까운 지적이다.
>하진은 중상시 조충 등을 베고자 했고 이에 거짓으로 무맹도위(武猛都尉) 정원에게 천 명의 병사를 풀어 하내의 도적처럼 가장하고 흑산백(黑山伯)이라 부르게 했다. 앞의 일을 근거로 조충 등을 베라는 말을 올리고 평음(平陰)과 나루터가 불타 마을과 집과 사람이 없다고 함으로써 태후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후한서의 기록 또한 마찬가지다.
>...使武猛都尉丁原燒孟津, 火照城中, 皆以誅宦官爲言. 太后猶不從.
> (전략) 무맹도위 정원으로 하여금 맹진을 불태우고, 불빛이 성 안까지 비추자 모두가 환관을 베라고 말하였다. 태후는 되려 따르지 않았다.
자꾸 망설이는 하진과 하태후를 움직이기 위해 벌인 일이라 발상이 돌아이스러워 그렇지, 철저히 계획 하에 진행된 일이라서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했을 가능성은 낮다. 진수는 조조의 서주대학살에 대해서는 '잔륙'이라는 표현을 써 학살을 인정한 바 있다. 후한서야 그렇다쳐도 정사 삼국지에서 원소를 어떻게 다뤘는지 생각하면 대규모 학살이 있었으면 반드시 기록했을 것이다. 다만 '인명피해 속출'이라는 표현이 반드시 대규모의 인명 손실이 필요한 것은 아니기에, 비약에 가까운 지적이다.
- 군벌들이 낙양 주변으로 모이자 환관들이 위기감에 동태후에게로 몰려드는 장면이 존재하는데, 연의에서 동태후는 그 시기에 이미 죽은지 오래였다. 정확히는 후계 싸움에서 황자 유협을 내세우던 동태후가 패배한 뒤 유배를 갔고 이후 하간(河間)[25] 의 역참에서 독살을 당했다. 정사에서도 비슷하게 흘러가는데 하태후와의 충돌이 발생하자 하진이 삼공(三公) 및 동생 하묘를 데리고 가 "효인황후(孝仁皇后)[26] 는 죽은 중상시 하운(夏惲) 및 영락태복 봉서(封諝) 등과 함께 매관매직했다" 는 이유로 탄핵하게 했고 '제후의 비(蕃后)는 궁에 둘 수 없으니[27] 고향으로 보낸다'는 명목을 내세워 하간으로 쫓아냈다. 이후 하진이 군사를 몰아 동태후의 오빠이자 표기장군이던 동중을 죽였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동태후는 두려움과 근심 끝에 병에 걸렸고 '급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이래저래 하진이 사망할 즈음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 ■ 주부 진림의 등장이 또 누락되었다. 사실 연의에서 하진이 군벌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반대한 것도 진림이고, 하진이 십상시의 흉계로 궁에 들어가기 전에 그걸 뜯어말린 것도 진림인데 그냥 누락된 것이다. 중요한 건 이 진림이 나중에 하진이 죽은 후 원소 휘하에서 일하게 되며, 관도대전 당시의 격문을 작성한 것도 진림이고 나중에 조조에게 잡혀서 그 밑에서 일하게 된 것도 진림이라는 점이다.
2.2.13. 53화
- ■ 원소가 호위병도 없이 입궁한 하진에게 경고하는 내용을 담은 톡을 보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연의에서는 하진이 궁으로 가기 전에 십상시의 음모니 가지 말라고 말리다가 결국 조조와 함께 자신들이 군을 이끌고 하진을 따르겠노라고 해서 함께 이동했고 청쇄문(青瑣門)을 통해 궁에 들어갈 때만 하진 홀로 들어갔다. 즉, 원소가 멀리서 '귀가하시라'고 연락하는 장면은 원전과는 상당히 다른 셈이다.
- ■ 십상시 장량이 하진의 목을 내던지면서 역적을 처벌했다고 말하는 대상이 '백성들' 로 등장하는데, 실제로는 하진을 호위하고 온 제장들과 금군들에게 한 말이었다. 아래는 연의에 등장하는 장량의 말이다.
>何進謀反, 已伏誅矣! 其余脅從, 盡皆赦宥.
>하진이 반역을 꾀했으나 이미 베었다! 그 나머지는 위협에 따랐던 것이니 모두 너그러이 용서해 주겠다.
그리고 삼국지톡에서는 원소의 목을 베라는 말이 덧붙여졌는데 당연히 원문에는 없는 작가의 창작 내용이다.>하진이 반역을 꾀했으나 이미 베었다! 그 나머지는 위협에 따랐던 것이니 모두 너그러이 용서해 주겠다.
- 원술이 원소에게 '가문을 역적 집안으로 만들었다' 면서 칼을 들이대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당연히 이 부분도 작가의 창작이다. 정사나 연의나 원술은 십상시의 난에 있어서 주동적인 인물이었다. 정사에서는 원술이 호분중랑장으로서 자신이 임의로 호분에서 뽑아온 병사들을 풀어서 궁으로 들어가 환관을 도륙했고, 연의에서는 하진의 부장인 오광(吳匡)이 청쇄문에 불을 지르고 원소가 십상시를 치라고 명령하자 원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서 십상시를 도륙했다. 즉, 원소나 원술이나 적극적이었는데 묘사가 상당히 잘못 되었다. 간혹 어차피 다음 화에 원술이 등장하니까 관계없지 않냐고 하는 팬들도 있는데 원술은 십상시의 난에 있어서 원소와 의견을 같이한 사이다. 즉, 원술이 원소에게 반항하며 멱살잡고 따지는 장면 자체가 정사 및 연의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오류가 되는 것이다.
- 원외가 원소에게 원씨 가문의 병사를 내어주며 비장하게 말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이 역시 창작이다. 낙양에 거주하는 이들은 당연히 사병을 거느릴 수 없었고 궁궐은 남군, 도성 내의 수비는 북군이 맡아 담당했다.
- 원소의 지위를 계속 서원팔교위의 직위인 중군교위로 부르는데, 정사 기준으로 당시 원소는 하진과의 인연을 계기로 중군교위에서 사예교위(司隷校尉)로 진급한 상태였다. 장안과 낙양의 주변부인 하남윤, 하내윤, 하동윤, 홍농태수, 경조윤, 우부풍, 좌풍익의 관리들을 감독하는 직위로서 자사(刺史)와 기능은 흡사하나, 훨씬 높은 직책이었다. 하진이 죽었을 시 신속하게 군사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원술이 호분중랑장으로서 호분의 병력을 끌고 온 것도 있지만 수도 근방을 감독하는 원소의 직책 또한 중요하게 작용했다.
2.2.14. 54화
- ■ 해당 화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 <정사> 조조, 하진과 원소 의견에 반대해 잠수타다.
실제로 연의를 제외하고는 조조가 십상시의 난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하진과 원소의 의견에 반대해서 잠수를 탔다는 내용 또한 없다. 그냥 자신이 소속된 가문이 환관 조등의 가문이다 보니 나서기도 애매한 입장이었고 조조 자신이 보기에도 바깥의 장수들을 불러 태후를 압박하고 환관을 몰살시킨다는 계획은 허술한데다 위험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28] 발을 뺀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연의를 제외하고는 조조가 십상시의 난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하진과 원소의 의견에 반대해서 잠수를 탔다는 내용 또한 없다. 그냥 자신이 소속된 가문이 환관 조등의 가문이다 보니 나서기도 애매한 입장이었고 조조 자신이 보기에도 바깥의 장수들을 불러 태후를 압박하고 환관을 몰살시킨다는 계획은 허술한데다 위험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28] 발을 뺀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 진림을 황실미디어대응팀 기자로 묘사했는데 주부(注簿) 직은 삼공부(三公府)부터 각 지방 군까지 널리 있던 직책으로 문서와 기록을 담당하는 직위였다. 즉, 현대의 기자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만일 기자에 맞게 구색을 갖추려면 진림이 주부가 아니라 당시 조신과 황제 사이의 문서를 담당하던 상서성(尙書省)의 시랑(侍郞)[29] 정도가 되어야 한다. 즉, 문서 담당을 맡은 주부 진림을 기자로 묘사해 버린 건 연의나 정사 모두[30] 어긴 셈이다.
2.2.15. 55화
- 장양이 전 황제인 영제(유굉)를 이용한 것처럼 묘사하는데, 이전에도 나왔던 지적이지만 나라망친 간신, 혹은 간신집단은 동양사학에서 고전적인 클리셰로 왕을 비판할 수 없는 전근대 왕조국가 특성상 왕의 책임까지 몰아준 경우가 많다. 생식능력이 없어 황권에 기생해야하는 환관은 특히 그런 면이 강하다. 후한말 환관의 난맥상은 영제가 이들에게 권한을 줘서 부리면서 발생한 것으로 조조 역시 정사와 연의 모두에서 '엄수의 관(환관)은 예나 지금이나 있었고 당대의 군주과 부당하게 총애와 권력을 주어 이 지경이 된 것이다(閹豎之官, 古今宜有, 但世主不當假之權寵 使至于此)' 라고 평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후한의 혼란은 환관 뿐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과도한 총애를 준 황실에게도 책임이 있는데 삼국지톡에서는 그 모든 책임을 환관에게만 돌리고 있는 것이다.
- ☆ 흔히 조조의 명검으로 알려진 의천검(倚天劍)이 등장하게 되는데 의천(倚天)이라는 말 자체는 진-한 교체기의 시인인 송옥(宋玉)의 대언부(大言賦)에 등장하는 싯구이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검이다. 연의에서도 중반쯤[31] 에나 청강검이 언급되면서 등장했다.
>曹操有寶劍二口 一名倚天, 一名青釭.倚天劍自佩之, 青釭劍令夏侯恩佩之...
>조조에게는 보검이 2개 있었는데 하나는 의천(倚天)이라 불렸고, 하나는 청강(青釭)이라 불렸다. 의천검은 자기가 찼고 청강검은 하후은으로 하여금 차게 했으며 (후략)
>조조에게는 보검이 2개 있었는데 하나는 의천(倚天)이라 불렸고, 하나는 청강(青釭)이라 불렸다. 의천검은 자기가 찼고 청강검은 하후은으로 하여금 차게 했으며 (후략)
2.2.16. 56화
- 조조가 건석의 숙부를 때려죽인 것 때문에 그의 아버지 조숭이 집안 재산을 팔아 건석에게 헌납하고 며칠을 건석의 집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한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이런 일은 없었다. 일단 조숭 자체가 삼국지톡의 묘사처럼 되바라진 인물이 절대 아니었을 뿐더러[32] 조숭의 양부이자 조조의 양할아버지인 조등은 황제를 보위하여 양자를 들일 권리를 얻은 인물이자 십상시를 손수 꼬마시절부터 키운 인물로 전성기엔 황제조차 갈아치우는 세도를 누린 십상시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때문에 십상시는 광동 조아만이 뭔 짓을 하든 건드릴 수가 없었으며, 조조는 젊어서 그리 망나니짓 하고도 무탈히 관직에 나가 비교적 평탄하게 공무 생활을 지냈다.[33] 후한서 효영제기에 중평 4년(187년) 11월에 당시 태위였던 최열(崔烈)을 파직시키고 그 자리에 대사농(大司農)이던 조숭을 앉혔으나[34][35] 달랑 6개월만인 중평 5년(188년) 4월에 파직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조조가 건석의 숙부를 죽였던 사건이 일어난 시기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기 때무에 그 일로 인해 파직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 ■ 조조가 단독적으로 조충, 정광, 하운, 곽승을 학살하는 것으로 묘사해 놨는데 십상시의 난은 연의 및 정사 공통으로 원소와 원술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연의에서는 원소와 조조가 빗장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고(袁紹曹操斬關入內) 위의 네 명의 십상시가 취화루(翠花樓) 앞에서 붙잡혀 다진 고기(肉泥)가 되었다고 되어 있다.[36] 즉, 조조가 원소 일행과 합류하지 않고 따로 행동했다던가 십상시 중요 구성원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였다는 내용은 없다. 순수 작가의 창작인 셈.
2.2.17. 57화
- ■ 8컷에 '조조가 혼세를 한탄하며 쓴 시'라면서 일부 구절을 삽입했다.
>왕조 스무해 내내 / 벼슬한 이들 실로 형편없구나.
>원숭이가 모자쓰고 띠를 매고선 / 우둔한 주제에 큰일을 꾀했도다.
실제 이 시는 조조가 지은 해로행(薤露行)이라는 시로서 16행의 긴 시임에도 딱 4줄만 인용했다. 삼국지톡에서 인용한 실제 호리행의 부분은 아래와 같다.>원숭이가 모자쓰고 띠를 매고선 / 우둔한 주제에 큰일을 꾀했도다.
>惟漢二十世
>생각해보니 한 왕조도 20대[37] 가 지났는데
>
>所任誠不良
>소임에 정성을 다하지 않고
>
>沐猴而冠帶
> 원숭이가 관복(관과 띠)을 입었으며
>
>知小而謨强
> 아는 것은 적으면서 꾀하기에만 힘쓴다.
문제는 해로행은 조조가 동탁의 강제 천도로 인해 폐허가 된 낙양을 보고 쓴 시라는 점이다. 즉, 해로행의 문구가 등장하기엔 너무 이른 시점인 셈이다. 초안을 이때 잡았다가 나중에 완성했다고 하면 아귀가 들어맞긴 한다.>생각해보니 한 왕조도 20대[37] 가 지났는데
>
>所任誠不良
>소임에 정성을 다하지 않고
>
>沐猴而冠帶
> 원숭이가 관복(관과 띠)을 입었으며
>
>知小而謨强
> 아는 것은 적으면서 꾀하기에만 힘쓴다.
- 15컷에 사예교위가 황궁 문을 잠그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일단 사예교위가 중앙관리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나 후한 시기에 부활하면서 감찰의 역할보다는 수도 주변을 통괄하는 중앙장관에 가깝게 변했다. 때문에 삼국지톡에서의 설명은 이른바 삼독좌(三獨座)[38] 로 불리던 전한 시기에 가깝다.
- 가절(假節)을 무슨 직책처럼 써놨는데 가절이라는 말은 '부절(符節)[39] 을 받았다' 는 의미로서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는 것이지 직책 같은 것이 아니다. 게다가 가절을 받은 이가 처벌할 수 있는 영역은 '전시에 군령을 어긴 이' 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십상시가 아니라 되려 십상시를 토벌하는 와중에 군령을 어긴 자가 된다.
- 원소가 사예교위와 가절의 권한을 모두 가졌으므로[40] 기소권과 판결권을 모두 쥐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미 언급되었듯이 당시 사예교위는 후한 정부에 의해 부활하면서 사실상 감찰 역할에서 행정직으로 변화한 상태[41] 였고, 가절 또한 처벌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적이었다. 실제로 관리에 대한 감찰과 탄핵은 어사대(御史臺)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2.2.18. 58화
- 제갈근이 '사립자유중학교' 라는 어느 학당에 다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정사인 오서(吳書)에서 제갈근이 살았던 학문을 배운 곳은 수도(낙양)라고 떡하니 나온다.
>瑾少游京師, 治毛詩, 尚書, 左氏春秋.
> (제갈)근은 어릴적 경사(수도)에서 유학을 했고 모시(毛詩), 상서(尚書), 좌씨춘추(左氏春秋)를 배웠다.
즉, 십상시의 난이 터지는 현장에 제갈근이 있는 셈인데, 마치 딴 지역에서 소식을 접하는 양 묘사가 된 것이다. 단, 후에 일어날 서주대학살로 인한 충격을 서술하기 위한 극적 허용으로 볼 수 있다.
> (제갈)근은 어릴적 경사(수도)에서 유학을 했고 모시(毛詩), 상서(尚書), 좌씨춘추(左氏春秋)를 배웠다.
즉, 십상시의 난이 터지는 현장에 제갈근이 있는 셈인데, 마치 딴 지역에서 소식을 접하는 양 묘사가 된 것이다. 단, 후에 일어날 서주대학살로 인한 충격을 서술하기 위한 극적 허용으로 볼 수 있다.
- 노식이 낙양 외곽 공터에서 황실을 겁박해 가는 환관 무리와 마주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42] 연의에서는 아직 낙양은 커녕 황궁의 일부인 북궁도 빠져나가지 못한 상황이었다. 장양이 황제와 진류왕을 북망산으로 끌고가는 장면이 이후에 나오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전개 속도를 높이기 위한 의도적인 변경으로 보인다.[43]
2.2.19. 60화
- 유협을 계속해서 '황자(皇子)'라고 부르는데 황자는 '황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유협은 전황제인 영제의 아들이지, 현 황제인 유변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황제의 형제를 의미하는 황제(皇弟) 내지는 유협의 당시 공식 직함인 '진류왕(陳留王)' 이라고 칭하는 게 맞다.
2.3. 시즌 3
2.3.1. 61화
- 소제와 유협이 동탁에게 발견된 곳을 '낙양 외곽 황야'라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연의나 정사 모두 황제 일행이 발견된 곳이 명확히 명시되고 있다. 우선 연의에서는 아래와 같이 서술된다.
>且說張讓, 段珪劫擁少帝及陳留王, 冒煙突火, 連夜奔走至北邙山.
> 각설하고[44] 장양, 단규는 소제와 진류왕을 겁박해 낀 채 갑작스러운 연기와 불을 무릅쓰고 밤중에 급히 달려 북망산에 이르렀다.
> 각설하고[44] 장양, 단규는 소제와 진류왕을 겁박해 낀 채 갑작스러운 연기와 불을 무릅쓰고 밤중에 급히 달려 북망산에 이르렀다.
즉, 연의에서 장양과 단규가 황제를 겁박해 도착한 곳은 낙양성 북쪽의 북망산이었다. 한편 후한서에서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讓, 珪等復劫少帝, 陳留王走小平津.
> 양, 규 등이 다시 소제와 진류왕을 겁박해 소평진으로 달아났다.
> 양, 규 등이 다시 소제와 진류왕을 겁박해 소평진으로 달아났다.
정사의 기록에 등장하는 소평진은 이른바 낙양을 둘러싼 낙양팔관(洛陽八關)이라 불리는 8개의 관문 중 하나를 의미하며[45] 8관에 속하는 곳은 함곡(函谷)[46] , 이궐(伊闕), 광성(廣成), 대곡(大谷), 환원(轘轅), 선문(旋門)[47] , 맹진(孟津)[48] , 소평진(小平津)이다. 소평진은 맹진보다도 더 북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장양과 단규가 소제와 진류왕을 끌고 북궁을 탈출해 제법 멀리 도망갔음을 알 수 있다.
정사의 소평진은 엄연히 낙양을 감싼 8개의 관문 중 하나였기 때문에 당연히 '외곽 황야' 라고 묘사될 수 없으며 연의의 북망산 또한 낙양과 멀지 않은 지점인데다 역대 황제들과 명사들이 묻힌 곳이라 오늘날의 어감과는 달리[49] 참배객들이 많이 오가던 곳이라 황야라고 부를 수 없는 곳이다. 더군다나 (연의 기준으로) 동탁은 낙양 외곽인 홍농의 민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북망산이나 소평진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즉, 민공이 황제 일행을 구출하고 동탁이 낙양의 사태를 관망하다가 이내 군을 휘몰아 황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는 장면이 한꺼번에 누락되면서 발생한 오류다.
2.3.2. 62화
- 아직도 유협을 황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전에도 지적되었지만, 형제인 유변이 황제가 된 이후로 황자라고 불릴 수 있는 존재는 황제 유변의 아들 뿐이다.
- 장료가 정원 휘하로 나오는데, 당시엔 경도(낙양)로 파견되어 하진 밑에 있었다. 십상시의 난 이후 하진 세력이 동탁에게 흡수되면서 자연스럽게 장료도 동탁군 소속이 되었다.
2.3.3. 63화
- 2컷에 장료의 나이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삼국지톡 장료 나이는 20살. 169(20세) ~ 171(18세)년생 설이 있음.[50]
일단 장료의 나이는 정사에서 단 한 번 언급이 된다.
>布為李傕所敗, 從布東奔徐州, 領魯相, 時年二十八
> 여포가 이각에게 패했을 때 여포를 쫓아 동쪽의 서주로 달아났고 노국[51] 의 상(相)에 임명되었는데 그 때 나이가 28세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언급은 사서의 주석 등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부분이며 이 설명과 동일한 말을 하고 있는 게 다름 아닌 위키백과이다. 아래 부분은 장료의 나이에 대한 위키백과의 주석이다.
일단 장료의 나이는 정사에서 단 한 번 언급이 된다.
>布為李傕所敗, 從布東奔徐州, 領魯相, 時年二十八
> 여포가 이각에게 패했을 때 여포를 쫓아 동쪽의 서주로 달아났고 노국[51] 의 상(相)에 임명되었는데 그 때 나이가 28세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언급은 사서의 주석 등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부분이며 이 설명과 동일한 말을 하고 있는 게 다름 아닌 위키백과이다. 아래 부분은 장료의 나이에 대한 위키백과의 주석이다.
> 여포가 서주를 차지한 후 장료가 노국상에 임명되었을 때의 나이가 28세였다. 여포가 서주를 차지한 시기는 196년부터 198년이므로 생년은 169년부터 171년 중 하나이다.
거의 설명이 동일하며(...) 위키백과에서 가져온 것이 명백해 보인다. 나무위키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위키백과 역시 편집과 수정이 자유롭게 위키 자체에서도 '위키백과는 정확성을 보증할 수 없다'고 공언한 상태이기 때문에 위키백과의 자료를 긁어와 그것이 사실인 양 '이러한 설이 있다'고 말하는 건 심각한 문제가 있다. 사서상 정해져 있지 않은 장료의 생년을 설정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없는 설을 착오로 있다고 하면 명백한 오류가 되기 때문.
참고로 연의에서 장료의 향년을 언급한다. 224년 조비가 서성에게 대패할 때, 장료는 정봉의 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고 오래지 않아 죽었고 이 때 54세라고 나온다. 연의 설정을 가져오면 장료는 171년생이 된다.
거의 설명이 동일하며(...) 위키백과에서 가져온 것이 명백해 보인다. 나무위키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위키백과 역시 편집과 수정이 자유롭게 위키 자체에서도 '위키백과는 정확성을 보증할 수 없다'고 공언한 상태이기 때문에 위키백과의 자료를 긁어와 그것이 사실인 양 '이러한 설이 있다'고 말하는 건 심각한 문제가 있다. 사서상 정해져 있지 않은 장료의 생년을 설정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없는 설을 착오로 있다고 하면 명백한 오류가 되기 때문.
참고로 연의에서 장료의 향년을 언급한다. 224년 조비가 서성에게 대패할 때, 장료는 정봉의 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고 오래지 않아 죽었고 이 때 54세라고 나온다. 연의 설정을 가져오면 장료는 171년생이 된다.
- 3컷에 여포가 어울리지 않는 모자를 쓴 장료를 지적하는 장면 하단에 '십상시의 난은 8월 말 늦여름에 벌어진 일'이라고 두루뭉술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정사인 후한서 효영제기에 보면 하진이 십상시들 손에 죽은 것이 '중평 6년(189년) 8월 무진(戊辰)일'이라고 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만, 후한서에 나온 8월과 무진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서로 맞지 않은데 우선 영제 시기 마지막 연호인 중평은 189년 4월까지만 쓰였고 소제가 즉위하자마자 연호를 광희(光熹)로 바꿨기 때문이다.[52] 또한 육십갑자로 계산했을 때 189년 8월에는 무진일이 나올 수가 없다. 때문에 60갑자에서 189년이 해당되는 기사년(己巳年)에 무진일을 찾을 경우 그 다음 달인 9월 22일이 해당된다. 그리고 9월 22일을 음력으로 계산할 경우 8월 25일이 나온다.[53] 즉, 음력으로 따지면 8월 말인 셈이고 양력으로 따지면 9월 중순인 셈인데[54] 둘 다 여름이 아니다. 양력에서 가을로 접어든다는 입추(入秋)는 8월 7일에서 8일 정도이며[55] 9월 22일 정도되면 추분(秋分)에 접어든다. 굳이 계절을 추론하면 가을이 되어야 한다. 삼국지 시리즈의 계절 설정을 생각해보면 쉬운데, 음력을 사용하는 개념이라 1~3월, 4~6월, 7~9월, 10~12월이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설정되어 있다.
2.3.4. 67화
- 24컷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 혼란한 와중에 황제의 도장 전국옥새 도둑맞다.
십상시의 난 도중에 옥새가 사라진 것은 분명 사실이나, 그것이 누군가가 '훔쳐갔다'라고 단정 짓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연의에서도 해당 부분은 '전국옥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不見了傳國玉璽)' 라고 표현이 되어 있으며 나중에 손견이 이 옥새를 발견했을 때 손견의 장수 정보가 손견에게 옥새에 대해 설명할 때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近聞十常侍作亂, 劫少帝出北邙, 回宮失此寶.
>근래에 들으니 십상시가 난을 일으켜 소제를 겁박해 북망으로 갔을 때 회궁하면서 이 보물을 잃었다고 합니다.
즉 연의의 기준에서 전국옥새는 장양 일당이 황제를 끌고 북망산으로 가면서 같이 가져갔고 그들이 모두 죽은 후 회궁하는 도중에 분실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사에서도 옥새의 행방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손파로토역전』에 인용된 '오서'에서는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黃門張讓等作亂, 劫天子出奔, 左右分散, 掌璽者以投井中.
> 황문 장양 등이 난을 일으켜 천자를 겁박해 달아나자 좌우가 나뉘어 흩어지고 장새관(掌璽官)[56] 이 우물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정사에서도 난이 일어난 와중에 황제와 함께 이동 중이던 인원들이 흩어졌고 그 중 장세관이 전국옥새를 가진 채로 우물로 뛰어든 것이다. 정리하자면 연의나 정사 둘 다를 살펴보았을 때 전국옥새는 난리 중에 사라진 것이지, 삼국지톡의 기술처럼 '도둑맞은 경우'는 아니라는 것이다.
십상시의 난 도중에 옥새가 사라진 것은 분명 사실이나, 그것이 누군가가 '훔쳐갔다'라고 단정 짓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연의에서도 해당 부분은 '전국옥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不見了傳國玉璽)' 라고 표현이 되어 있으며 나중에 손견이 이 옥새를 발견했을 때 손견의 장수 정보가 손견에게 옥새에 대해 설명할 때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近聞十常侍作亂, 劫少帝出北邙, 回宮失此寶.
>근래에 들으니 십상시가 난을 일으켜 소제를 겁박해 북망으로 갔을 때 회궁하면서 이 보물을 잃었다고 합니다.
즉 연의의 기준에서 전국옥새는 장양 일당이 황제를 끌고 북망산으로 가면서 같이 가져갔고 그들이 모두 죽은 후 회궁하는 도중에 분실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사에서도 옥새의 행방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손파로토역전』에 인용된 '오서'에서는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黃門張讓等作亂, 劫天子出奔, 左右分散, 掌璽者以投井中.
> 황문 장양 등이 난을 일으켜 천자를 겁박해 달아나자 좌우가 나뉘어 흩어지고 장새관(掌璽官)[56] 이 우물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정사에서도 난이 일어난 와중에 황제와 함께 이동 중이던 인원들이 흩어졌고 그 중 장세관이 전국옥새를 가진 채로 우물로 뛰어든 것이다. 정리하자면 연의나 정사 둘 다를 살펴보았을 때 전국옥새는 난리 중에 사라진 것이지, 삼국지톡의 기술처럼 '도둑맞은 경우'는 아니라는 것이다.
2.3.5. 68화
- ■ 손견이 '양주 서현' 이라는 곳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굳이 정확히 표현하자면 '양주 여강군(廬江郡) 서현(舒縣)'이 된다. 이러한 표기는 예를 들자면 MBC의 본사 주소가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암로 267' 인데 그것을 '서울특별시 성암로 267' 이라고 표기한 것과 동일한 경우다. 해당 컷은 지도 앱에서 찾은 양주 서현을 가리키고 있기에 주소가 전부 나오지 않는 것은 조금 부자연스럽긴 해도, 양주에는 서현이 하나뿐이기 때문에[57] 양주 서현이라고만 해도 지리적 위치를 특정할 수는 있다.
거기다가 손견은 연의와 정사 모두에서 '장사태수' 로 등장한다. 정사에서는 사공 겸 거기장군으로 임명되었던 장온을 도와 양주(서량)의 반란을 토벌하는데 동참했다가[58] 이후 구성의 난이 발발했을 때 장사태수로 임명되었고, 구성과 호응한 계양과 영릉까지 평정하면서 오정후(烏亭侯)의 직위를 받았다. 연의에서도 반동탁연합 참전 당시 '오정후 장사태수'라는 직함을 달고 등장한다.
여강군 서현은 주유의 고향이다. 정사에서는 ''''손견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할 때 집을 서현으로 옮겼다(孫堅興義兵討董卓, 徙家於舒)''''[59] 고 되어 있다. 즉, 손견이 동탁을 토벌하러 떠나기 전에 그 가족이 여강군 서현에 있다는 점이 오류가 된다는 견해가 있는데, 70화 문단에서 후술하겠지만 수춘에 있었던 손견의 가족이 주유의 설득으로 서현에 왔기 때문에 오히려 역사적으로도 매우 자연스러운 전개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 원소가 동탁에게 항의하다 벼슬을 버리고 낙양을 떠나는 장면이 마치 원소가 절대권력자 동탁에게 오기만으로 덤비다가 조조가 반거짓으로 때리는 연기를 해서야[60] 겨우 원소에 대한 동탁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동탁이 원소를 비웃고 조롱하며 죽일 수 있지만 백성들의 원성 때문에 그냥 보내준 것처럼 묘사된다. 일단 조조의 때리는 연기는 연의나 정사에 안 나오는 순수한 창작이며, 원소와 동탁의 대립 자체가 다르다. 이 장면은 정사에서는 동탁의 황제 폐위 의견에 원소가 칼까지 뽑아들고 정면으로 대립하며 "천하의 힘 있는 자가 동공 하나만은 아니다"라고 한 뒤 보란듯이 부절을 낙양성문에 걸어두는 시위를 한 뒤에 떠난다. 연의에서는 더욱 극적이 되어 다들 아무도 말 못하고 있는데 대놓고 동탁을 반대하고, 분노해 칼을 뽑아든 동탁에 맞서 칼을 뽑고 대놓고 욕설을 퍼부은 다음 떠난다. 즉, 삼톡처럼 원소의 굴욕이 아니라 오히려 연의에서 묘사된 몇 안되는 원소의 멋있는 장면이다. 원소는 당시 청류파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집권한지 얼마 되지도 않는 동탁이 죽이고 싶다고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며[61] , 원소가 저런 시위를 벌이고 갔음에도 오히려 발해 태수 자리를 줘서 그를 회유하려고 했다. "저런 겁쟁이가 뭐함? ㅋㅋㅋㅋ 가다가 울지나 마라"라는 상황이 전혀 아니라, 동탁조차 원소의 명성을 부담스러워한 것. 그런데 여기선 발해 태수를 주는 것도 생략됐다.
2.3.6. 70화
- ■ 68화와 이어지는 손책의 소재지와 주유에 관한 문제. 6컷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써져 있다.
>주유, 손책이 비범하다는 명성을 듣고 10세의 나이에 직접 그를 만나고자 하다.
물론 정사에 비슷한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 기록은 아래와 같다. 출처는 손파로토역전에 사용된 강표전이다.
물론 정사에 비슷한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 기록은 아래와 같다. 출처는 손파로토역전에 사용된 강표전이다.
'''策年十餘歲, 已交結知名, 聲譽發聞. 有周瑜者, 與策同年, 亦英達夙成, 聞策聲聞, 自舒來造焉 便推結分好, 義同斷金, 勸策徙居舒, 策從之.'''
(손)책이 10여세일 때, 이미 교우를 맺어 이름이 알려지고 성예(명성)가 자자했다. 주유라 불리는 자가 있었는데 손책과 동년배였고 또한 영민하고 총명했으며 성숙했다. 책에 대한 소문을 듣고 스스로 서현(舒)으로 가서 예를 갖춰 방문[62]
했다. 곧바로 관계를 맺고 좋은 것을 나누니 의(義)가 쇠를 끊음과 같았고 책에게 서현으로 옮겨올 것을 권하자 책이 따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유가 손책을 만나러 서현으로 이동했다는 부분인데, 강표전에서는 주준이 손견을 좌군사마로 임명했을 때 '가족을 수춘에 머무르게 했다(留家著壽春)' 라는 기록이 있다. 즉, 강표전의 기록을 따른다고 하면 손책은 수춘에 있었던 셈이고 주유가 손책을 설득해서 서현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서현은 여강군에, 수춘현은 구강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수춘에 머무르고 있을 손책의 가족들이 만화의 내용처럼 주유 일가를 만나려면 주유 일가가 수춘에 온 상황이어야 한다. 여기까지 작품에서 묘사된 바는 전부 일치한다.[63] 이 과정에서 손견 일가가 수춘에서 서현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주유가 설득하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고 있지만, 해당 편의 서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내용이기에 생략되어도 문제라고 할 수 없다.
* 오히려 이 대목에서 역사와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은 '십여 세'를 정확히 10세로 잡은 것이다. 둘이 만난 나이를 보다 어리게 잡아서 우정을 보다 각별히 묘사하려는 생각이었던 모양.2.3.7. 72화
- 14컷에 동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등장한다.
>동탁, 화폐법을 개정하고 탐관오리를 벌하는 등 친백성 정책을 펴기도 하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거 없다. 동탁의 행적은 정사 삼국지보다는 후한서에 더 자세하게 나타나 있는데 그 행적을 보면 아래와 같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거 없다. 동탁의 행적은 정사 삼국지보다는 후한서에 더 자세하게 나타나 있는데 그 행적을 보면 아래와 같다.
> * 낙양의 귀족과 외척 등이 쌓아놓은 재산을 군사를 풀어 몽땅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면서 그것을 '수뢰(搜牢)'라고 부름.
> * 사람들의 인심이 두려움으로 붕괴되고 아침저녁의 일을 보장할 수 없었다(人情崩恐, 不保朝夕).
> * 하태후의 장례가 치뤄질 때 문릉(文陵)[64] 을 파헤쳐 보물을 꺼내서 자기가 가짐.
> * 공주와 궁인들을 간음하고 혹독한 형벌을 남발해 눈만 흘겨도 죽임.
> * 양성(陽城)에서 제례를 지내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도적을 토벌했다고 자랑함.[65]
> * 기존에 통용되던 오주전(五銖錢)을 없애고 새로이 소전(小錢)을 만들었는데 낙양과 장안에서 구리로 만든 인물상 등을 모조리 가져온 것도 모자라 백성들로부터 구리로 만든 물건을 죄다 수거한 뒤 그걸 녹여 동전을 만들었지만 제작 자체도 너무 조잡해 동전에 무늬도 없었고 너무 많이 풀리는 바람에 대규모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으며 사람들은 동탁의 행위를 보고 같은 임조 출신인 진시황을 떠올렸다.[66] 즉 화폐개혁을 하긴 했으나, 완전히 실패해 민생고를 불러온 것이지만 부작용이 생략된 나머지 멀쩡한 정책을 편 것처럼 오해할 만하도록 기술되었다.
> * 사람들의 인심이 두려움으로 붕괴되고 아침저녁의 일을 보장할 수 없었다(人情崩恐, 不保朝夕).
> * 하태후의 장례가 치뤄질 때 문릉(文陵)[64] 을 파헤쳐 보물을 꺼내서 자기가 가짐.
> * 공주와 궁인들을 간음하고 혹독한 형벌을 남발해 눈만 흘겨도 죽임.
> * 양성(陽城)에서 제례를 지내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도적을 토벌했다고 자랑함.[65]
> * 기존에 통용되던 오주전(五銖錢)을 없애고 새로이 소전(小錢)을 만들었는데 낙양과 장안에서 구리로 만든 인물상 등을 모조리 가져온 것도 모자라 백성들로부터 구리로 만든 물건을 죄다 수거한 뒤 그걸 녹여 동전을 만들었지만 제작 자체도 너무 조잡해 동전에 무늬도 없었고 너무 많이 풀리는 바람에 대규모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으며 사람들은 동탁의 행위를 보고 같은 임조 출신인 진시황을 떠올렸다.[66] 즉 화폐개혁을 하긴 했으나, 완전히 실패해 민생고를 불러온 것이지만 부작용이 생략된 나머지 멀쩡한 정책을 편 것처럼 오해할 만하도록 기술되었다.
간혹 동탁이 선비들을 많이 등용한 것과 채옹이 동탁의 시체를 붙들고 통곡한 일 때문에 재평가를 하기도 하는데 후한서에는 그 부분에 언급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기술도 함께 적고 있다.
>卓素聞天下同疾閹官誅殺忠良, 及其在事, 雖行無道, 而猶忍性矯情, 擢用群士.
>동탁은 본디 엄관(환관)이 충성되고 좋은 이들을 베어죽인다고 천하가 한가지로 외치는 것을 듣고는 그 일을 살펴서 비록 무도하지만 오히려 잔인한 성품을 바로잡고 학식있는 무리를 뽑았다.
즉, 동탁은 당시 너무 이미지가 나빴던 환관들과 동급으로 취급당할까봐 선비들을 대거 기용한 것이지, 본인이 좋은 마음으로 한 게 절대 아니다. 이렇게 등용된 하옹, 정태 등이 모두 동탁의 패망에 일조하였으니 사대부 사회의 지지를 얻지도 못했다.
>동탁은 본디 엄관(환관)이 충성되고 좋은 이들을 베어죽인다고 천하가 한가지로 외치는 것을 듣고는 그 일을 살펴서 비록 무도하지만 오히려 잔인한 성품을 바로잡고 학식있는 무리를 뽑았다.
즉, 동탁은 당시 너무 이미지가 나빴던 환관들과 동급으로 취급당할까봐 선비들을 대거 기용한 것이지, 본인이 좋은 마음으로 한 게 절대 아니다. 이렇게 등용된 하옹, 정태 등이 모두 동탁의 패망에 일조하였으니 사대부 사회의 지지를 얻지도 못했다.
2.3.8. 75화
- ■ 작중에서 표현되는 진궁의 모습이 검문소의 대장 정도로 나오는데 연의에 등장하는 진궁은 무려 중모현(中牟縣)의 현령(縣令)이었다. 현령은 당시 1만호가 넘는 현을 관리하는 직위였기 때문에 삼국지톡에서 그 휘하의 병사들이 가볍게 얘기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셈.[67] 그럼 왜 현령 정도나 되는 인물이 검문검색을 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연의에서 동탁은 조조가 달아난 뒤 사방에 조조의 얼굴을 그린 전단지를 뿌리고 수배령을 내린 상태였다. 때문에 현령급 인물이 조조 하나를 잡으려고 길목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 ■ 진궁 역시 연의에서 벼슬을 버리고 노자만 챙긴 채 조조를 따라갔기 때문에 삼국지톡 내에서처럼 현령의 권위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삼국지톡에서의 창작인 셈.
- ■ 조조의 아명(小字)인 '아만(阿瞞)'을 '거짓말쟁이'라고 해석한 설명을 조조가 시체로 위장해 탈출한 장면에 넣었는데[68] 조조의 아명의 한자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는 하나[69] 정말로 '거짓말쟁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지는 알 수가 없는 부분이다. 실제로 그의 아명을 기술한 조만전(曹瞞傳)[70] 에서도 이 아명이 거짓말쟁이라는 해석은 등장하지 않으며 더 황당한 건 조만전에도 '태조가 따로 불리는 이름은 길리이다(太祖一名吉利)' 라는 기록이 함께 나온다. 즉, 조조가 불리던 이름은 진짜 이름인 '조'와 길리, 그리고 아만이었던 셈. 더군다나 길리(吉利)라는 이름 자체는 '운이 좋고 이롭다'는 뜻이다.
또 아명은 태몽 등을 반영하기도 하나, 아이가 무병장수 할 수 있도록 일부러 나쁘거나 천한 이름으로 짓기도 했다. 즉, 조조의 저 아명이 실제 조조의 성격을 나타낸다기 보다는 조조가 건강하게 성장하라는 의미에서 일부러 부여한 이름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얘기다. 실제로 고구려 동천왕의 경우는 아명이 '제사용 돼지(郊彘, 교체)', 황희는 '도야지(돼지)', 고종 황제는 '개똥이'였는데(...) 이것 역시 아만이라는 아명이 조조의 성품을 진지하게 반영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예가 된다. 그럼에도 아명을 정말 거짓말쟁이로 지었을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기에 오류라는 표현은 부적합하다.
2.3.9. 80화
- 조조가 거병할 때에 조숭이 돈을 빌려주지 않아 조홍이 대신 자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나온다. 조조가 처음 거병했을 때는 관직이 겨우 효기교위라 지방에 공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조홍이 돈을 대신 내 주는 것은 오류이다. 조홍은 조조가 모은 병력을 이끌고 연주 인사들이 집결해 있던 산조로 나아갔을 무렵에야 합류한다.
- ■ 조조가 어린 나이에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조조의 어머니는 생몰이 알려지지 않았다.
2.3.10. 81화
- 하후연이 조조가 지은 죄를 대신 받은 정사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조조가 하후연을 이용해 먹은 장면만 등장해서 조조가 나쁜 놈처럼 보이게 묘사되었다. 실제로는 조조가 하후연이 자기 대신에 중죄(重罪)를 치르는 사이에 방책을 생각해 하후연을 구하고 죄를 면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즉, 짤막한 고사에서 앞 부분만 인용하고 뒷 부분은 누락한 셈.
2.3.11. 96화
- 연의 전개를 그대로 따라가서 한동안 별게 없었는데 별 해괴한 오류가 튀어나왔다. 작가 자기 손으로 19번째 제후라는 제목을 써서 유비가 합류하기 이전에 반동탁연합 18로 제후가 모인 걸로 설정해 놓고는 공손찬이 참여하지 않은 정사의 전개를 가져다 썼다. 정사를 따라가 공손찬이 빠졌다면 당연히 제후가 18명이나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손견과 유비는 실제론 원술과 조조 아래서 종군했고, 실제론 참여했으나 연의에서 빠진 유표까지 포함해도 정사상으론 참여한 군벌이 18명이나 되지 않는다.
2.4. 시즌 4
2.4.1. 127(27)화
순욱이 원소군 소속인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는 순욱이 원소군에서 일했던 적이 없다. 한복이 순욱을 초빙하자 이에 응하였는데, 순욱이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한복 세력이 원소에게 멸망. 이후 원소도 순욱을 극진히 대접하나 순욱은 관직에 응하지 않고 나중에 조조에게 임관하게 된다. 즉 손님으로서 잠시 원소 세력에 있기는 하였으나 원소군의 책사로 있던 적은 없다. 아마 삼국 전투기에서 원래 원소군이었다는 설정을 써먹었기 때문에 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2.4.2. 129화
- 26컷에 만총의 추천과 함께 여건이 등장하는데, 피묻은 키티옷을 보며 어머니가 사준옷이라는 말과 각주에
>※ 백성들을 괴롭히던 도적단 두목들을 모두 술자리에 초대해 한번에 죽여버리다.
>여건,자기를 미워하는 새어머니 극진히 모시다. <여건전>
앞 내용은 맞지만 뒷내용은 아니다. 우선 도적토벌건은 조조가 종사로 삼은 후에 도적 창희와 결탁한 계모등 반란주동자들을 술자리에 불러 처단한거지 백성들을 괴롭히던 도적무리들을 처단한건 아니다. 자신을 미워한 새어머니건은 먼훗날 자신이 서주자사 시절에 발탁한 왕상#s-1이다. 정황상 여건전에 있는 왕상 주석을 착각한 것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여건,자기를 미워하는 새어머니 극진히 모시다. <여건전>
앞 내용은 맞지만 뒷내용은 아니다. 우선 도적토벌건은 조조가 종사로 삼은 후에 도적 창희와 결탁한 계모등 반란주동자들을 술자리에 불러 처단한거지 백성들을 괴롭히던 도적무리들을 처단한건 아니다. 자신을 미워한 새어머니건은 먼훗날 자신이 서주자사 시절에 발탁한 왕상#s-1이다. 정황상 여건전에 있는 왕상 주석을 착각한 것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 ■ '연주 기획전략실 친목방'이라는 채팅방에서 순욱이 인사들을 천거하는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등장한다.
>정욱 선생님: 글게? 순선생. 왜 갸는 여기 없어? 온갖 연주 똑쟁이들 다 부르고는?
>모개 선생님: 그러게요.....머리는....솔직히.....그 친구가.....연주.....넘버원..........아닌지?
이때 곽가는 연주 사람이 아니라 예주 영천군 출신이며, 곽가가 관직에 나가기 전부터 교류하던 사람들도 대체로 영천 사람들이라는 것을 근거로 이 부분은 오류로 간주되기도 한다. 상당히 오해를 사기 쉬운 서술이지만, '연주 출신'이 아니라 '연주에 거주 중인 사람 중 조조군에 들어올 만한 사람'과 같은 의미라면 말은 된다.>모개 선생님: 그러게요.....머리는....솔직히.....그 친구가.....연주.....넘버원..........아닌지?
2.5. 시즌 5
2.5.1. 156화
2.5.2. 180화
- 여몽의 무지몽매함을 보고 글을 익히라고 한 사람은 손책이 아니라 손권이며, 그마저도 손책 사후에 있었던 일이다.
2.6. 시즌 6
2.6.1. 199화
조조의 벼슬을 태위라고 한다. 원소와의 마찰로 대장군을 주었다는 기록에서 착안한듯한데 조조는 정사든 연의든 한번도 태위 벼슬에 올라본적이 없다. 당시 조조의 벼슬은 정사에서는 사공이었으며 연의에서는 승상이었다.
2.6.2. 246화
<정사>라는 말머리를 달고 '손책엄마 오국태는 명문가 출신'이라고 기재하였으나, 오국태는 정사에서 등장하는 무열왕후 오씨와 손견의 첩실을 연의에서 합쳐서 재창조한 인물로 실존하지 않는다. 그리고 명문가라는 말도 정사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2.6.3. 248화~271화
원술이 먼저 사망하고, 그 전에 있었던 일들을 전부 원술이 죽은 뒤로 몰아넣으면서 스토리가 완전히 꼬였다.
작가가 유비가 조조에게서 벗어날 때 <정사> 주석을 달면서 '''"원술이 이미 사망한 뒤"'''라고 적어놨으나, '''실제로는 유비가 조조에게서 휘하 병력을 받아 원술의 청주행을 차단하고, 우회하는 과정에서 원술이 사망한 게 맞다. 작가가 대놓고 오류를 저질렀다.'''
2.6.4. 265화
조조의 벼슬이 승상으로 나온다. 물론 연의대로의 설정이라면 승상이 맞겠지만 삼톡에서는 정사의 기록을 따라 원소가 조조가 대장군이 되는데 불만을 표했다.[72] 즉, '''고작 대장군으로도 저정도인데 하물며 승상에 올랐다'''면 원소가 조조를 어떻게 할지는 안 봐도 비디오이다.[73] 연의에선 원소의 불만을 생략했기에 무난하게 진행이 되었던것. 정사와 연의를 적절하게 조합하다가 간혹 가다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삼톡 특유의 고질병으로 전에 원술과 손책의 전국옥새건도 마찬가지다.[74] 이번 문제도 그렇게 된것. 사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삼톡에선 유독 조조의 벼슬오류 문제가 많다. 조조는 협천자 이후 대장군 임시 -> 사공 겸 거기장군 -> 하북평정후 승상이지만 삼톡에선 협천자 이후 대장군 -> 태위 -> 논영회시점에서 승상이 되었다.
3. 나이 계산 관련 오류
'''요약하자면 작가 무적핑크가 세는나이 계산[75] 을 전혀 하지 못한다.''' 작가가 이것을 인지하지 않는 한 이 오류들은 영원히(...)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인지만 하면 해결가능한 오류인데도, 아무런 피드백이 없다.
3.1. 1화
- 유비는 161년생으로 184년 당시 24살인데 1화부터 작품 통틀어 일관되게 23살로 묘사하는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만 나이를 쓰지 않았을 뿐더러, 만 나이를 쓰더라도 161년 6월생인 유비가 184년 1월에 23살이 되는 건 여전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3.2. 10화
- 155년생인 조조를 156년생으로 묘사했다.
3.3. 17화
- 유비의 고무줄 나이. 실제 역사에서 유비는 161년생으로 황건적의 난 당시 24살이지만, 이 작품에서 유비는 1화부터 꾸준히 23살로 언급되고 있다. (애당초 작가의 고유 창작물도 아니지만) 창작물에서 주인공의 나이를 각색하는 일이야 흔히 있으니 삼국지톡에서의 유비는 162년생으로 설정된 것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정작 1화 마지막에는 유비가 161년에 태어났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유비의 나이가 161년생인지 162년생인지 불분명한 까닭에 작품이 계속되면서 설정충돌이 일어나고 있다.[76] 게다가 해당 작가가 연의를 따라간다고 얘기했는데 공교롭게도 연의에서 유비가 의병을 활동할 당시 나이는 28세로 등장한다.
- 위에서 언급된 들쑥날쑥한 나이의 지적과 비슷한데 1화에서는 유비가 15세에 대학까지 다녔으나 벼슬을 얻지 못했다고 설명했다가 17화에 와서는 16세에 노식의 특강을 들은 것처럼 말이 바뀌었다.
3.4. 26화
- 손견의 나이가 28세로 나오는데 156년생이면 29세여야 한다. ~
3.5. 28화
- 손책(9세가 아닌 10세)과 손권(2세가 아닌 3세)의 나이도 틀리게 계산했다.
3.6. 40화
- 소제(유변): 16세 → 14세 또는 17세(173 또는 176년생)
3.7. 43화
- '원소가 조조보다 나이가 많다.'라 설명해놨는데 원소의 생년이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일반적으로 추측하기로는 원소가 조조와 동년배이거나 조조보다 나이가 약간 더 많다고 여길 뿐이다.
3.8. 55화
- 황자 유협(헌제): 8살 → 9살
3.9. 58화
- 제갈근(174년생): 15세(중2) → 16세(중3)
- 제갈량(181년생): 8살 → 9살
3.10. 62화
- 황자 유협( → 9)
3.11. 63화
- 장료: 169(20세)~171(18세)년생 → 각각 21세, 19세
3.12.
- 손책, 주유(69화-10세, 71화-15세): 놀랍게도 드디어 나이가 제대로 계산되어 표기되었다. 다만, 연대가 언제인지 명확하게 나와있지 않았는데, 69화의 시간적 배경이 184년, 71화의 시간적 배경이 189년이었을 때 옳은 표기가 된다.
3.13. 82화
- 조인(22세 → 23세): 168년생이므로 190년에는 23세가 맞다.
[1] 사진 출처는 무적핑크가 애용하는 포토리아로 보인다. 해당 사진의 출처.[2] 해외에서는 여름 궁전(Summer Palace)으로 불린다.[3] 특히 장안에 있는 전한 시대의 궁인 미앙궁(未央宮)의 경우는 완전한 복원도까지 제작이 된 상태다.[4] 이러한 문제점은 '세트 돌려쓰기'라는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 해당 문제를 비판한 오마이뉴스 기사[5] 군인에 비유하자면 대통령 취임식 같은 큰 행사에 참여한 영관급 내지는 장성급 군인들이 전투모도 없이 나타난 것과 똑같다.[6] 삼국지톡에서는 이 암살 모의 사건이 누락되었다.[7] "황제는 어리석고 약해서 종묘를 받들고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소!(皇帝闇弱, 不可以奉宗廟, 為天下主!)" - 후한서 동탁열전[8] 탁류는 지방에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고 유학을 내세워 성장한 청류와는 뿌리부터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반목하면서도 한편으론 협력하며 관계를 유지했다. 후한은 환관과 외척이 모두 무너졌을 때 등장한 동탁에 의해 멸망을 맞는다.[9] 연의에서는 하진의 기세가 등등하자 십상시들이 하태후를 찾아가 말 그대로 데꿀멍을 하고, 하태후가 이들을 불쌍히 여겨 오빠에게 용서해달라고 하고 하진이 그렇게 하자 원소가 답답해 죽는다.[10] 관청의 문서나 기록을 담당하는 직분이다.[11] 벽소(辟召)라는 말은 '임금이나 상관 등이 불러 벼슬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12] 그냥 심하게 제압한 걸로 보일 수도 있으나 분명히 병사들이 "한대만 때리면 우리 다 살아!" 라고 외치는 장면으로 보아 여포를 막지 못하면 죽어야 하는 혹독한 방식으로 보인다.[13] 말타고 활쏘기를 말한다.[14] 즉위한 해인 189년의 연호는 소제 시절의 연호인 광희(光熹), 소녕(昭寧)과 헌제 시절 첫 연호인 영한(永漢)이었는데 다음해인 190년에 모두 폐지했다.[15] 단양군은 후한의 양주(揚州) 지역에 있었다.[16] 단 184년의 사면에서 당고의 금으로 인해 갇힌 자들은 제외되었고 이후 사면에서 황건적의 난의 주모자인 장각만은 유일하게 제외되었다.[17] 후한의 광화 원년, 즉 178년의 일이다.[18] 양주(凉州)의 주천군을 말한다. 치소는 복록(福祿)에 있었다.[19] 오늘날의 하남성의 몐츠 현. 낙양과 상당히 가까운 홍농(弘農)에 속한 곳이었다.[20] 태위를 보좌하는 속관.[21] 이전에 가후는 효렴으로 낭(郎) 직을 담당했으나 병이 나서 물러나 있었다.[22] 대사면령이라는 용어만 해도 18번이나 등장한다.[23] 다만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장각은 사면되지 않았다.[24] 정원이 하진의 명을 받아 맹진을 불태운 일 자체가 연의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25] 동태후의 고향이다.[26] 동태후의 공식적인 명칭이다.[27] 영제의 아버지 유장(劉萇)은 해독정후(解瀆亭侯)였다. 전 황제인 환제가 자식이 없이 죽은 탓에 유굉이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동태후는 번비의 입장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들이 황제인 덕에 장락궁에서 살 수 있었고 이 때문에 하진 역시 동태후를 지칭할 때 장락태후(長樂太后)라는 표현을 사용했다.[28] 위서에는, 조조가 하진과 원소의 계획을 듣고 '환관은 예나 지금이나 있었고 군주의 과도한 총애와 내려준 권력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것이다. 그들을 벌하려면 옥리를 시켜 원흉만 주살해도 되는데 어째서 바깥의 장수들을 부르는가? 환관을 모두 주살하려고 든다면 계획이 드러날테니 실패할 게 뻔하다' 면서 웃었다는 기록이 있다.[29] 시랑은 공경들의 사무를 돕는 상시조(常侍曹) 소속되어 있는데 문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는 인물이다. 물론 이들이 작성하는 문서의 초안은 기자들이 정부로부터 제공 받는 보도자료와는 전혀 다르지만 대충 끼워맞추면 얼추 들어맞게 된다.[30] 둘 다 진림의 관직을 주부라고 제대로 기록하고 있다.[31] 조조가 형주를 공격하면서 신야를 불태우고 달아나던 시기. 장판파에서 조운과 장비가 활약하기도 했다.[32] 조조 묘사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 조조는 삼국지톡에서 묘사한 냉철한 인텔리가 아니라 조씨네 날건달, 파락호에 가까웠다. 어렸을 때부터 신부 보쌈 시도 등 싹수가 아주 노랬다.[33]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를 북부도위로 기용한 사람은 사마의의 아버지 사마방이다.[34] 조등열전에 따르면 1억전을 들여 태위직을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남의 자리를 돈으로 강탈한 것.[35] 공교롭게도 최열 역시, 전 태위였던 장온(張溫)이 파직된 이후 태위직을 맡았다는 점이 동일하다. 게다가 이 사람도 사도직의 매관매직에 연루된 적이 있다.[36] 살이 다 다져질 정도였으면 사람 하나의 힘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37] 세(世)는 대(代)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38] 어사중승, 상서령, 사예교위를 일컫는 말.[39] 권한을 나타내는 신표 등을 의미한다.[40] 후한서 하진열전에 하묘의 발언에서 등장하는 부분이다.[41] 물론 주목제가 부활하면서 사예교위 또한 행정과 군사 모두를 통솔하는 게 가능했다.[42] 황실 인원들을 헬기로 태우는 장면은 없는데 정작 수색에 헬기를 사용하는 황당한 장면이 등장한다. 시대상이 현대에 가까운 데에서 기인한 어색한 장면.[43] 이렇게 될 경우 황제와 진류왕을 구출해 보호하고 있던 하남중부연(河南中部掾)인 민공(閔貢)의 등장이 누락되거나 노식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민공은 연의와 정사 모두에서 등장하는 인물이며 노식과 함께 십상시의 난에서 공을 세웠다.[44] 차설(且說)이라는 말은 '각설' 이라는 의미다.[45] 상당히 중요한 지역인지라 영제가 중평 원년(184년)에 8관에 도위(都尉)를 설치하기도 했다.[46] 코에이 삼국지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낙양팔관이며 장안에서 낙양으로 진입할 때 반드시 넘어야 하는 구간이다.[47] 함곡과 비슷한 포지션으로서 서쪽에 위치한 함곡과는 달리 동쪽에서 낙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48] 하진이 원소의 계획대로 정원을 보내 불을 질러 하태후를 협박했던 그 곳 맞다.[49] 보통 북망산은 무덤이 많거나 죽은 이들이 많은 곳 등의 불길한 의미를 담고 있다.[50] 일단 저 나이 계산도 틀렸다(...). [51] 당시 예주에 속해 있었으며 공자의 고향이기도 하다.[52] 아마 이 부분은 영제의 기록을 담은 '효영제기'에 담긴 내용이기 때문에 영제의 연호를 맞춘 것으로 보인다.[53] 공교롭게도 위키백과에서도 한국어 십상시의 난 항목에서 이러한 계산법을 채택하고 있다.[54] 고대 중국이나 한국, 베트남 등에서는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모두 고려한 '태음태양력'을 사용했다.[55] 이는 양력이 중국의 화북지방에 맞춰진 탓이 크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이 시기에 무진장 덥지만 중국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56] 옥새를 담당하던 관원.[57] 중국 북서부의 양주(凉州), 즉 서량에는 한양군(훗날의 천수군)에 서현(西縣)이 하나 있지만 한자가 다르다.[58] 즉, 손견이 동탁을 처음 만난 게 이 시점이며, 동탁이 장온의 통제를 따르지 않자 죽여야 한다고 직언을 올리기까지 했다.[59] 오서 주유노숙여몽전.[60] 절반은 진심이었다. 원소가 군벌을 불러들여 십상시를 때려잡자는 계획을 내 이 모양이 됐기 때문.[61] 삼톡에선 이 부분이 백성들이 "프린스 원소"를 응원하는 걸 보고 동탁이 민심을 얻기 위해 원소 죽이는 걸 포기한 것으로 나왔는데, 보다 정사 기록에 맞게 묘사하려면 오히려 당대 명사들이 일제히 동탁을 압박하고 동탁은 자신의 권력이 아직 불안정한 걸 느끼는게 더 현실적이었을 듯.[62] 조언(造焉)은 보통 넷상에서 지명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사실 조언이라는 말은 배방(拜訪), 즉 '예를 갖춰 방문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진서 49권 완적(阮籍)에 관한 열전에서도 조언이라는 말은 방문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63] 당시 손견 일가가 머무르던 곳을 수춘으로 직접 언급하진 않고 '손견군 주둔지'라고만 표현하긴 한다.[64] 영제의 무덤이다. 하태후는 여기에 합장 되었는데 동탁은 그 와중에 보물을 꺼내간 것이다(...). [65] 연의에도 인용될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다.[66] 진시황은 과거 구리로 거대한 동상을 만든 적이 있었다. 동탁은 반대로 구리로 만든 상들을 수거해 파괴했기 때문에 비록 서로 다른 행위를 하지만 같은 부류로 본 것이다.[67] 그래서 도망다니는 조조를 따르기 위해 현령직을 단숨에 버리고 간 연의 속 진궁의 행위가 돋보이는 것이다.[68] 아마도 어릴 때부터 거짓말에 능했던 조조가 그 주특기(...)를 살려 목숨을 건진 것이라는 의미로 넣은 것으로 보인다.[69] 아(阿)는 보통 언덕이라는 의미가 있으나 '알랑거리다' 라는 의미가 있으며 만(瞞)의 경우는 '속이다'라는 의미로서 자주 사용된다.[70] 정사인 위지 무제기에서 조만전을 인용하였다.[71] 뒷날 조위의 중신이 되는 위진의 아버지다. 본인도 조조를 따라 반동탁연합군에 참여하나 얼마 가지 않아 전사한다.[72] 물론 자신을 태위로 삼았다는것에 빡쳤을수도 있지만, 조조가 대장군직을 자신에게 넘기며 일단은 넘어가는걸 보면 그쪽에도 불만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73] 대장군도 굉장히 높지만 승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당장 승상의 권한이 커서 승상을 없애고 그 권한을 삼공과 대장군으로 나눈것이다.[74] 정사에선 손견이 곧바로 원술에게 옥새를 주고 연의에선 손책이 군사를 빌리는 담보로 원술에게 옥새를 준다. 하지만 삼톡에선 임팩트있는 장면을 그리기 위해선진 모르겠지만 손책이 손견이 죽자 바로 원술에게 투항을 조건으로 전국옥새를 주는 애매한 시점으로 전개되었다.[75] (나이)=(기준연도)-(출생연도)'''+1'''로 계산한다. 태어날 때 1살로 계산하기 때문이다.[76] 1화에서 184년의 유비는 23살이고(162년생), 15살에 대학에 들어갔고(176년) 6년 전 대학을 중퇴한 것으로(178년) 나온다. 그런데 17화에서 유비는 175년에 대학에 입학했다고 나온다. 184년에 23살인 유비가 175년에 대학에 입학했다면 14살에 입학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유비가 184년으로부터 7년 전인 177년에 16살이었다고 언급함으로써 175년의 유비는 14살이라고 못을 박는다. 유비가 161년생이라면, 대학에 들어간 175년에 15살이었던 게 맞다. 이 경우 유비는 177년에 16살이 될 수 없다. 유비가 162년생이라면, 대학에 들어간 175년에 14살이 된다. 이 경우 유비는 15살에 대학에 들어갔다는 설명과 어긋난다. 해당 관련 설정오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화에서 유비는 178년에 대학을 중퇴했다고 나온다. 그런데 17화에서는 유비가 2년만에 자퇴했다고 나오므로 유비는 176년에 입학한 셈이다. 이 경우 175년에 입학했다는 설명과 또 충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