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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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은퇴한 축구선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토평동 출신으로 서귀포초등학교와 조천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축구 입문 계기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체육선생님의 권유로 시작하였다고 한다. 조천중학교 시절에는 벨기에로 축구 유학을 시도하였으나 성과가 좋지 않았다.
2. 선수 경력
2.1. FC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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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유학이 실패하고 국내로 돌아온 오장은은 서귀포고 시절 연습 도중 당시 수원의 코치였던 윤성효 코치 눈에 띄어 서귀포고를 중퇴하고 수원 2군에서 훈련하였다. 그러는 도중 2001 8월에 FC 도쿄의 입단테스트에 참가했고 연습생의 조건이지만 FC 도쿄의 유니폼을 입게되었다. 2002년에는 아마추어 계약을 체결했고, 2004년에 비로소 정식 프로계약을 맺었다.
입단할 당시에는 센터 포워드, 즉 공격수였지만 포지션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변경했다.
2004년에 프로계약을 맺었으나 2002년 연습생 신분으로 2002년 4월 13일 J리그 감바 오사카와의 경기에서 J리그 최연소 출전 기록을 세웠다.[2] 하지만 외국인 용병 제한으로 3시즌간 13경기에 출장하였으나 2003년 레알 마드리드 CF와의 친선전에서 데이비드 베컴을 꽁꽁 묶어 많은 스포트라이트 받고 U-19 대표팀에 승전하는 등 당시 최고 유망주라는 찬사를 받았다.
2.2. 대구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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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2부 리그로의 임대를 추진했고, 실제로 입단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하지만 J2리그로 가야하냐는 생각이 들었었고, 이 때 노상래와 오주포의 은퇴로 중원이 약하된 대구가 오장은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고, 결국 대구 FC로 2005년 김근철과 함께 이적한다.
입단 초기에는 U-20 월드컵 멤버로 뽑혀 많은 활약을 못하였다. 이후, 전지훈련을 가서는 오른쪽 윙백으로 뛰었는데, U-20 당시 포지션을 보고 스태프들이 윙백으로 알았던 듯 하다. 결국엔 돌고 돌아 중앙 미드필더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대회가 끝나고 2005 시즌 25경기 3골 2도움을 올린 오장은은 박종환의 지도 아래서 잠시나마 대구가 리그 1위에 오르는 이변에 주인공이 되었다.
이 당시는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활약했다. 몇몇 언론에서는 포스트 김남일이라는 설레발을 치기도 했지만, 선수 본인은 오장은 스타일이라는 말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10월 19일 FC 서울전에서 2대1 승리에 기여했다. 전반 28분 동점골을 넣어 그 당시 3무 3패로 침체된 서울의 분위기 반전에 제대로 고추가루를 끼얹는데 일조했다.
2005년 23경기 출전해 3골 2도움을 기록해, 다음 시즌을 기약했다.
2006 시즌에는 36경기 4골 기록하게 된다. 이 때 대구의 순위가 리그표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자, K리그 팬들의 반응은 충공깽 자체였다.
9월 24일에는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경기에서 생애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물오른 기량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활약에 핌 베어벡 감독의 눈에 띄어 국가대표에 발탁되기도 하였다.
이 당시에는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올라왔는데 공격형 미드필더인 홍순학이 수원 삼성으로 이적한 빈자리를 메꾸기 위함이었다. 오장은의 자리에는 박종진이 뛰었다.
이 시절의 별명이 '''대장은'''이었다.
2.3. 울산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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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대구와의 계약 만료로 FA로 풀린 오장은은 여러팀에게 구애를 받았는데, 이에 적극적이게 구애한 울산 현대로 입단하였다. 이 때 당시 울산은 김정우의 대체자를 찾고 있었고, 대구는 '''28억 원'''이라는 이적료를 받았다.[3] 당시 울산 감독이었던 김정남 감독은 오장은을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오장은도 이에 보답하듯이 27경기 1골을 기록하여 울산의 리그 컵 우승과 플레이오프 진출에 기여하였다. 2008년에도 36경기에 출전하여 팀의 불박이 주전이 되어 플레이오프로 이끌었고, 2009년에는 32경기 6골을 기록하여 자신의 커리어 사상 최다골을 기록하였다. 2010년에는 35경기 3골로 울산 현대의 미드필더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국가대표 발탁도 되었다.
2.4. 수원 삼성 블루윙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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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서 좋은 활약을 이어보내자 수원의 신임 감독이었던 윤성효 감독의 구애로 수원으로 이적하였다. 개막전에서 FC 서울경기에서 데뷔골을 터트린 오장은은 이후 수원의 주전으로 도약하였다. 팀사정에 따라 다른 포지션으로 활약하는 등 멀티플레이어로 활약하고 있다. 심지어 2014 시즌에는 라이트백까지 보게 될 정도. 2014년 5월 갑상선 항진증 판정으로 거의 1년을 결장했고, 2015년에는 4월 8일에 있었던 AFC 챔피언스 리그 브리즈번 로어와의 홈 경기에서 후반 교체 투입되어 무난한 모습을 보였으나 이 경기를 끝으로 무릎 부상으로 또다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이후 5월, 부상 부위 악화로 인한 무릎 수술을 결정하면서 사실상 시즌 아웃 판정을 받았다. 어느 시즌보다 숨막히는 일정을 소화하는 수원으로서는 큰 타격을 입은 셈.
2016년 1월 14일, 높은 주급에 비해서 꾸준하지 못한 출전시간으로 수원을 떠난다는 기사까지 나왔었지만 2월 말에 '''재계약이 확정'''되었다. 풍문으로는 주급을 상당히 깎았고, 다른 팀으로 가고 싶다면 바로 보내주는 계약조건이었다고 한다.
4월 10일 제주 유나이티드전에서 702일만에 선발 출전하였고, 4월 16일, 인천 원정전에서는 948일만에 득점을 기록하였다.
이렇게 득점까지 기록하며 부활을 알리나 싶었지만 이후 계속되는 컨디션 저하로 R리그 단골 손님이 되며 정규 리그 7경기 출장에 그쳤다.
2.5. 성남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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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해가 바뀐 2017년, 성남 FC로의 이적이 공식 발표되었다. 부상으로 경력을 끝낸 상태로 묻히기는 싫었다며, 성남을 다시 K리그 클래식으로 복귀시켜 팬들의 가슴 속에 불꽃남자로 기억되고 싶다는 각오를 밝혔다. #
하지만 시즌 초에 출전한 경기에서 그다지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이후부터는 부상 등의 이유로 시즌 초 몇번 나온 것 이외에는 전혀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하였으며, 1년간 리그 단 4경기 출장에 그쳤다.
2.6. 대전 시티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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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시즌을 앞두고 동남아시아 무대로 떠날 것이라고 예상되었으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팀동료 안재준과 함께 대전 시티즌으로 이적하였다.
하지만 노쇠화 됐을 뿐더러 2017시즌 성남에서 부상으로 거의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오장은 역시 김진규처럼 되는 것이 아니냐며 우려의 목소리가 컸지만, 어찌됐든 커리어가 화려한 오장은 영입은 팬들의 기대를 모으기도 하였다.[4]
한편 은퇴한 김진규의 후임으로 대전의 새로운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3월 3일 부천 FC와의 리그 개막전에서 안상현과 대전의 중원을 지켰지만,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상대에게 잘 뚫리는 모습을 보이며 아쉬움을 남겼으며, 전체적으로 노쇠화되고 체력이 안되는 탓에 중원에서 상대를 잘 압박해주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후에도 상당히 노쇠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기대만큼의 큰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하며 아쉬움을 남겼으며, 4월 1일 광주 FC전 이후부터는 부상 등을 이유로 경기에 거의 출전하지 못하면서 2017년의 김진규처럼 돼버렸으며, 2018년 한해 6경기 출장에 그쳤다.
2018시즌을 끝으로 대전과의 계약이 만료되었는데, 대전 구단이 이미 시의회를 통해 선수단 규모를 기존의 59명에서 35명 규모로 축소함에 따라 계약 만료 선수를 전원 내보낼 것임을 밝히면서 대전 구단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독일에 5부리그 클럽에서 유소년 지도 연수를 받으면서 운동을 지속해왔지만 끝내 7월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3.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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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이후 J리그 FC 도쿄 사커스쿨코치로 계약하며, 기회가된다면 도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위한 축구 프로그램을 기획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 할 계획이라고 한다.#
2021년부터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2군 코치로 활동한다. 기사
4.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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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원생 때 외할아버지댁에 갔다가 벽이 무너져 왼발의 집게와 엄지발가락이 으깨져서 잘라내는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어찌 보면 인간 승리자.[5]
- 2012년 수원 삼성과의 FA컵 16강전에서 김진규가 파울을 범하면서 둘이 크게 충돌한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이 둘은 2017년과 2018년 나란히 대전 시티즌의 주장이 되었고, 대전에서 은퇴했다.
- FC 도쿄 시절 재일 교포인 이충성과 친하게 지냈으며, 2004년 청소년 대표팀 테스트에서 이충성을 소개시켜주었다. 그러나 이충성이 청소년 대표팀 테스트에서 탈락하고 이후 다큐멘터리에서 테스트 탈락과 일본으로 귀화 이유가 청소년 대표팀 선수들의 차별이라 말했는데, 이에 오장은은 매우 섭섭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 K리그 경기중에 어깨가 탈골된 적이 있다.
- 대구FC에 입단하고 가진 전지훈련에서는 윙백으로 출전했으나 미드필더에서 뛰란 말에 곧바로 준수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박종환이 "올ㅋ 제법인데?"라고 하자 "원래 제 포지션인데요ㅋ"이라고 답했었다.
- 골 세레머니로 두 팔을 펼치고 나는 듯이 달린다. 자기 생각으로는 이 것이 최고의 표시인것 같다고 한다.
- 대구 FC 시절 2006 시즌 팬미팅 때 하대성과 함께 꼭지점 댄스를 춘 적이 있다.
- KFA 홈페이지 선수 정보 표기에 따르면, 영문 이름이 OH Beom-Seok이라고 한다 (...).
5. 관련 문서
6. 둘러보기
[1] 인근의 상예동, 서호동, 호근동, 서홍동, 동홍동, 상효동, 신효동, 하효동과 함께 군위 오씨 집성촌이다.[2] 종전에 가지고 있던 아베 유키의 16세 333일을 100여일 앞당긴 기록이다.[3] 하지만 이로 인해 당시 K리그 몸값 거품 논란을 불러일으킨 대표주자 중 한 명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4] 김진규는 2017년 대전에 입단해 주장으로 선임되며 많은 축구팬들로부터 큰 기대를 모았으나 시즌 중반 접어들면서 노쇠화라는 한계와 더불어 극심한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 못한채 부진했고, 1년만에 은퇴했다.[5] 이로 인해 군 면제처리된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