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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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현재 포항 스틸러스 소속이다.
2. 클럽 경력
2.1. 포항 스틸러스
포항 스틸러스 산하 유스 팀인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2003년 포항에서 프로에 데뷔하였다.
이후 라이트백, 미드필더, 센터백을 오가며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성장했고 2004 시즌 리그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2.1.1. 요코하마 FC (임대)
2007년에는 해외 진출을 강력하게 원했던 본인의 의지로 시즌 중 J리그 요코하마 FC로 임대되어 10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팀은 최하위로 강등되었다.
2.2. 크릴리야 소베토프 사마라
복귀 후에도 구단과의 마찰로 구설수에 올랐고,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소속 크릴리야 소베토프 사마라로 이적했다.
2008 시즌에는 데뷔전에서 MOM으로 선정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이며 꽤 많은 기회를 받았으나 2009 시즌에는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벤치 멤버로 전락했고, 2시즌 간 28경기에 출전했다.
2008년 인터뷰
2.3. 울산 현대
2009년 울산 현대로 이적하며 국내로 복귀했다. 이 시기 울산은 김동진과 오범석을 보유하며 국대급 풀백 조합을 완성할 수 있었고, 김동진과 함께 공수 양면에서 맹활약하며 2010 시즌 울산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2.4.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1 시즌을 앞두고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강민수와 트레이드되었다. 시즌 초반에는 주로 라이트백으로 출전하였으나, 시즌 중반 이후 중앙 수비가 붕괴하자 센터백으로 보직을 변경하여 매 경기 안정적인 수비력과 위협적인 오버래핑을 선보이며 수원 팬들의 사랑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단, 패스 타이밍과 정확도에서 불확실한 면을 많이 보이는 것이 단점이다. 2015 시즌 김은선의 부상으로 인해 4-1-4-1 포메이션에서 혼자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았을 때 이 단점이 크게 드러났다.
2015년 2월 25일, AFC 챔피언스 리그 우라와 레즈전에서 크로스가 엄청난 궤적으로 빨려 들어가며 동점골을 터뜨려 2:1 역전승에 기여했다.
리그 개막전에서 분을 참지 못해 퇴장을 당했으나 그 후 좋은 퍼포먼스로 팀의 ACL 16강 진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5월 16일 제주 유나이티드전에서 전반 4분 정영총이 기절하자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재빠른 응급 처치로 기도를 확보하며 '''한 사람의 생명을 살렸다.'''[2]
시즌 후반기에는 부상으로 폼이 급격히 저하되었으며, 원래 스피드에 강점이 있는 선수도 아니었는데 30대로 접어들다 보니 스피드가 있는 선수에게 약한 모습을 보임에 따라 파울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게다가 유망주 라이트백 신세계의 등장으로 팀 내 입지까지 잃어 가기 시작했다.
2.4.1. 안산 경찰청 (군 복무)
군 복무를 위해 2013 시즌부터 2시즌 간 뛰었다.
2.5. 항저우 뤼청
2015 시즌 종료 후 FA 신분이 되었고,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항저우 뤼청으로 이적했다.
그러나 많은 출전 기회를 받지 못했고, 1년 만에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났다.
2.6. 강원 FC
2016년 12월 11일, 강원 FC로 이적했다. 계약 기간은 2년.
강원에서는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하고 있지만 가끔씩 라이트백, 센터백으로도 나온다. 노장답게 노련한 템포 조절과 헌신적인 플레이로 팀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2018 시즌 종료 후 강원과 2년 재계약을 채결했다.
2019 시즌 8라운드 제주 유나이티드전에서 전반 6분 만에 햄스트링 부상으로 아웃되었다.
2020 시즌 주장으로 선임되었으나, 시즌 개막 후 2경기 연속 명단 제외되었다.
2020년 5월 21일, 상호 합의 하에 계약을 해지하였다.[3] 구단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영상으로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던 중 눈물을 흘리는 등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 팬들도 좋은 마음으로 보내 주었다.
2.7. 포항 스틸러스
2020년 6월 2일 포항 이적이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왔고, 얼마 후 포항에서 공식 발표가 나오면서 13년 만에 친정 팀으로 복귀하였다.
2007~2008년 당시 이적 과정에서의 마찰로 인해 올드 팬들에게는 이미지가 안 좋지만, 한편으로는 양쪽 측면의 주전 풀백 김용환, 심상민이 모두 입대한 상황인 데다 현재 포항의 약점인 풀백, 수비형 미드필더, 센터백 자원의 얇은 뎁스를 모두 커버할 수 있는 백업 자원으로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점에서 "이왕 왔으니 일단 사과부터 하고 열심히 해라"는 긍정적인 의견도 있다. 하지만 원래 포항이 노렸다고 알려진 신형민, 정재용에 비하면 확실히 부족하다는 점[4] 에서 부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다.[5]
9라운드 광주 FC전에서 레프트백으로 선발 출전하며 포항 복귀전을 치렀고, 노련한 수비로 엄원상을 지워 버리면서 팀의 무실점 승리에 기여했다.
FA컵 3라운드 경주시민축구단전에서 최영준과 함께 수비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했고, 후반 56분 오닐이 박재우와 교체 투입되면서 레프트백으로 들어갔다.
시즌이 끝난후 11월 27일 포항 스틸러스 구단은 오범석하고 1년 재계약 했다고 공식발표했다. 그리고 2021 시즌 전북으로 임대복귀한 최영준에 이어 포항 스틸러스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시즌이 끝나고 신광훈 신진호포항에서 뛰었던 선수들이 돌아오자 오범석의 역할이 더 커졌다.
3. 국가대표 경력
2005년 1월 16일, 콜롬비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고 핌 베어벡 감독 부임 후 꾸준히 차출되면서 2007년 AFC 아시안컵에서 주전 풀백으로 출전하여 공수 양면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이후 허정무 감독 체제에서도 꾸준히 차출되며 국대 레귤러 멤버로 자리 잡았다.
2009년 10월 14일, 세네갈과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 데뷔골을 넣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최종 명단에도 선발되었지만 차두리와의 경쟁에서 밀렸다. 물론 수비력은 오범석이 더 좋았지만, 월드컵에 출전하는 세계적인 공격수들을 상대하기에는 피지컬의 열세가 컸다. 때문에 수비 스킬이 떨어지고 지공에 약한 대신 피지컬이 우수한 차두리가 한 자리를 차지한 상태에서 최효진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며 백업 라이트백으로 들어갔다.[6]
조광래호에는 조광래의 철저한 외면과 아래의 인맥 논란 등 외적인 이유까지 겹치면서 단 한 번도 뽑히지 못했으나, 최강희호 출범 후 다시 뽑혔다. 카타르 원정에서는 최효진이, 레바논과의 홈 경기에서는 오범석이 각각 선발 출전했다.
2013년 3월 카타르와의 홈 경기를 마지막으로 국가대표 경력을 마무리했다.
3.1.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조별리그 2차전 아르헨티나전에서 선발 출전했다. 허정무 감독은 인터뷰에서 그리스전 차두리의 플레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오범석을 출전시켰다고 설명했지만 결과는...
앙헬 디 마리아, 리오넬 메시, 카를로스 테베즈 등에게 말 그대로 '''완벽하게 발렸다.''' 국내 언론들도 오범석 카드는 실패라며 열심히 까고 있다. 특히 디 마리아는 정말 자기 집 안방처럼 오범석 뒷공간을 휘젓고 다녔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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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전 이후 오범석은 그야말로 역적보다 더한 매국노 수준으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지만, 사실 비난하기 힘든 게 이날 패배는 대표팀이 갖고 있던 크고 작은 불안 요소들이 누적되어 있던 것이 '''월드 클래스급 팀을''' 만나자 적나라하게 문제점이 까발려진 참사라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일단 레프트백 이영표의 경우 1:1 수비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협력 수비로 상대를 사전에 옥죄는 스타일인데, 이는 필연적으로 미드필더와 연계 플레이가 필요하고 그만큼 중원에 과부하가 걸린다.
그런데,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사용한 변형 4-5-1 포메이션은 기본적으로 좌우 측면으로 볼을 전개했을 때 2선에서 침투할 때까지 볼을 간수하면서 패스를 넣어 주는 선수가 키를 쥐고 있었다. 즉, 이영표를 괴롭히면 왼쪽 윙어 염기훈까지 세트로 무력화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기성용, 김정우의 중원 조합이 테베즈마저 놓치면서 어쩔 수 없이 박지성까지 내려와야 했다. 이것은 결국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압도적인 기량 탓이었다.
반대로 오른쪽 윙어 이청용은 세 개의 폐를 가진 사나이가 아니었을 뿐더러, 이청용마저 오범석과 세트로 묶여 버리면 사실상 반코트 경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이청용은 최대한 공격적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었고[8] 오범석이 홀로 방대한 구역을 책임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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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모든 실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때문에 아르헨티나전 패배에 큰 지분을 담당한 염기훈과 함께 앞글자를 따서 한국에선 '''오염라인'''이라고 불리면서 까였다. 미국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 역시 "차두리를 빼고 오범석을 넣은 것이 패착"이라고 논평하기도 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경솔한 태도 역시 문제였는데, 보통은 월드컵같이 큰 무대에서 참패를 하게 되면 "내가 부족해서 졌다."라고 자책하는 것이 맞지만,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정말 잘하더라. 좋은 경험을 한 것 같다. 특히나 전술적으로 매우 뛰어났다. 정말 최고의 선수들이었다"라는 경솔한 망언까지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어쩔 수 없이 오범석의 말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대표팀이 한참 기세를 올릴 때도 결코 이쪽 페이스에 말리지 않으며 조용히 때를 기다리다가, 적기라고 판단한 한순간 달려들어 단숨에 오른쪽 수비를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 몰아넣는 능력은..... 과연 '''클래스'''가 있는 팀이고 선수들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4:1이라는 결과에서 눈을 돌려 경기를 시간대별로 복기하면 전반 17분 불운한 자책골이 나오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리듬이 좋았으나, 이후 경기가 급속도로 꼬이면서 전원이 삽질을 거듭하고 33분 추가 실점까지 허용한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농락당한 경기 내용에 비하면 의외로 잘 버텼으며, 심지어 전반 종료 직전 추격골까지 넣었다. 이후 후반전에 기세를 올렸지만, 58분 염기훈의 슛이 빗나가는 순간 전원이 가까스로 붙들고 있던 정신줄을 놓는다. 이 때부터는 아르헨티나 공격진의 일방적인 순회 공연이었고, 76분-80분 연속 실점으로 완전히 무너진다.
386 세대 혹은 그 이상의 장년층 팬들은 데자뷰를 느꼈을 장면인데,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에게 5:0으로 관광당할 때도 딱 저 패턴으로 당했다. 단순히 오범석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엄연한 실력 차에도 불구하고 악으로 깡으로 버티다가 한계점을 넘은 순간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또 한 가지 악재는, 이런 상황에서 감독이 허정무였다. 사실, 넷상의 악평과는 달리 실제 허정무 감독은 대한민국 역사상 둘째 가라면 서러운 전술가이다. 다만, 한 가지 심각한 단점은 임기응변이 떨어진다는 것. 그러니까 상대에 맞춰서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를 해 오는데, 상대가 예상대로 나오지 않으면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마라도나가 들고 나온 다이아몬드 4-4-2는 선수들의 기량이 우월할 경우 허정무가 들고나온 4-2-3-1을 카운터 치기 딱 좋은 포메이션이다. 거기에 초장부터 자책골로 분위기를 내준 데다, 우려했던 메시는 그럭저럭 잡았지만 마라도나가 날린 회심의 일격은 테베스였고 중원까지 마스체라노에게 무너졌다. 이렇게 이 날 중원-수비 조직력 전반에 걸쳐서 문제가 있었던 만큼 오범석만의 책임으로 몰아붙이긴기는 어렵다. 물론 못한 건 사실이지만, 1:4로 대패한 게 마치 오범석 혼자 잘못한 탓인 양 몰아 가는 것은 정신승리에 불과하다. 사실 어디를 봐도 질 만 하니까 진 경기였다.
다만 오범석이 메시를 못 막은 것에 대해서 실드를 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의견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물론 메시를 막을 수 있는 수비수는 세상에 거의 없고 오범석에게서 이영표 정도를 기대한건 아니지만 위에도 나왔다시피 오범석은 오른쪽 풀백이면서 중앙에 있는 메시만 보면서 플레이했다. 심지어 메시에게 3명가량 마킹이 붙어있어서 마킹 인원은 충분했을 때도 무리해서 마킹하러 가느라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했고 오른쪽 라인은 고속도로가 되어 버렸다. 오범석이 메시를 마킹하러 간 동안 오범석이 커버해야 했던 공간에 우리나라 선수는 한명도 없고 세 명의 아르헨티나 선수가 메시에게 공을 달라고 손을 흔들고 있었던걸 보면... 만약 오범석이 자기 자리를 지켰다면 아르헨티나에게 오른쪽을 그 정도로 유린당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4. 논란
4.1. 인맥?
오범석의 아버지 오세권은 국가대표 골키퍼 출신으로 은퇴 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 위원, 내셔널리그 사무국장, 김희태축구센터 감독 등을 지냈으며 현재 대한축구협회 공정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런 배경 탓인지, 아르헨티나전의 참패 이후 오범석이 인맥으로 뽑혔다는 음모론이 마구 돌았다. 그러나, '''오범석은 K리그 풀백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뛰어난 수비수였다.''' 실제로 오범석이 포항에서 활약했을 당시 적극 기용했던 감독이 세르지우 파리아스였다. 파리아스가 오범석을 인맥 때문에 썼을 리는 없고, 오범석의 실력과 잠재력을 보고 주전으로 쓴 것이다.
애초에 남아공 월드컵 국가대표에 오범석이 승선한 과정이 해당 위치에서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선수 2명을 뽑아 놓고 막판에 오범석을 최종적으로 뽑은 것이다. 만약, 음모론이 사실이라면 오범석이 K리그에서 쌓은 활약상과 성적은 전부 뻥카고 날조였다는 말도 안 되는 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어찌됐든 일단 K리그에서 보여 준 활약만 봤을 때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범석은 고등학교도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일부러 다른 학교로 진학했다. 오범석의 아버지 오세권은 학성고등학교 감독으로 있었는데, 오범석은 인맥 논란이 나올까 봐 일부러 포철공고로 진학을 했다. 축구 보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포철공고 같은 프로 유스 수준의 축구 명문은 전국구급으로 유명한 국대급 선수들로 난다긴다 하는 인재들이 모여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입학하는 최상위권 수준의 축구 명문 고등학교인데 과연 아무나 들어갈 수 있을까?
그리고 청소년 대표팀에 뽑혔을 때도 '''"아버지, 저 아버지 빽으로 들어간 거 아니죠?"''' 라고 물어봤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인맥설이 퍼질까봐 항상 노심초사했었다. 경기에서 부진과 미숙했던 인터뷰를 지적할 수는 있지만, 인맥 운운하는 것은 인신 공격이다.
첨언하자면,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오른쪽 풀백은 이영표였는데,[9] 당시 왼쪽 풀백에서는 김동진이 국가대표팀 감독들에게 중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영표가 오른쪽으로 밀려서 활약하였다. 그런데 이는 달리 말하자면 그만큼 오른쪽 수비 자원이 부족하다는 말도 된다. 사실 대표팀이 21세기에 들어서 4백을 채택한 이후로 오른쪽 측면 수비수 자리는 계속 부진한 모습들을 보이면서 혼돈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는 조광래호 체제가 출범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조광래 감독이 레바논 쇼크로 인해 2014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도중 경질 된 다음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인맥으로 국가대표에 뽑히는 선수가 있다. 당시 소속팀에서 그 선수의 상황과 컨디션을 봐선 도저히 국대 승선은 힘든 선수였다. 하지만 축협에선 "왜 이 선수 안 뽑냐!"고 대놓고 난리를 쳤다'''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했고 그 선수가 누군지는 언론에서 밝혀지지 않았으나...네티즌들이 "수도권 구단" "국대 뽑힐 당시의 상황" 및 기타 등등 상황을 추정해볼 때 거의 '''그 선수'''는 거의 오범석으로 굳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오범석의 실력이 국대에 못 미칠 정도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인맥이 오히려 그의 앞길과 명성에 흠집만을 남기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 하다.''' '''그런데.''' 레바논 쇼크로 말미암아 끝내 조광래 감독이 경질되면서, 작심한 듯 언론을 통해 대한축구협회를 디스했고 협회 역시 이를 해명이라고 쓰고 사실상 반박했다. 이 과정에서 오범석 논란이 다시금 점화되었다.
조광래는 "이회택이 거의 강제로 오범석을 쓰라고 했으며, 이를 거부하자 행정지원 제한 등 보복성 조치가 가해졌다."고 주장했으며, 이회택은 "조광래가 측면수비수가 없다고 하길래 오범석을 거론하면서 한 번 써보는 게 어떠냐"라고 추천한 것일뿐라고 주장했다.
일단 확인된 사실로만 놓고 보면 조광래가 변명할 거리는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여론이다. 해당 항목에서 알 수 있듯, 조광래는 리그 정상급 중미를 오른쪽 풀백으로 기용하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하면서 말로는 '오른쪽 풀백이 없다'고 언플을 한 것이다.
이 때, 기술위원회가 오범석을 추천한 것이 외압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원래 기술위원회가 이럴 때 스탯을 분석하면서 좋은 선수들을 추천하라고 만들어놓은 기관이다.''' 게다가, 오범석이 당시 조광래의 말대로 전혀 국대 승선이 힘든 상태였던 것도 아니라는 것은 K리그를 보는 축구팬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당장에 오범석 군입대를 한 이후 수원의 우측 수비가 구멍이 뻥뻥 뚫린 것만 봐도...
종합하면 조광래의 주장에 불과하며, 확실히 확인할 수 없는 보복성 조치는 차치하고 오범석 기용 논란에 대해서는 기술위원회가 소임을 다한 것이고 조광래가 불평할 거리도 못 된다.[10]
4.2. 러시아 진출 논란
2007년 파리아스 감독 아래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던 오범석에게 국내외 여러팀들이 관심을 보였고, 당시 J리그 요코하마 FC에서 6개월 임대 제의가 온다. 포항에서는 잡으려 했지만, 선수 측에서 가겠다는 의지가 강했고[11] 결국 포항은 요코하마의 제의를 수락했다.
그런데 임대 복귀 후 겨울 이적 시장 기간에 뜬금없이 언론사에서 '오범석, 러시아 사마라와 협상 중'이라는 기사가 났고, 계약기간이 남아있던 소속팀 포항에서는 금시초문이었다. 포항에서는 이전부터 팀을 떠나고 싶어하며 계속 잡음을 일으키는 오범석을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고, K리그의 대표적인 악법으로 불리는 로컬 룰[12] 을 이용해 성남과 협상을 진행하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당연히 오범석 입장에서는 이에 수긍할 수 없었고, FIFA에 제소하겠다는 등 포항과 오범석의 언플과 진흙탕 싸움이 시작되었다. 오범석 사태에 대한 정리
결국 오범석은 본인이 원하는 러시아 진출을 이루었다. 포항은 이 여파로 성남에게 거액의 위약금까지 지불해야 할 상황이 되었고, 당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던 유망주 골키퍼 정성룡을 헐값에 보내게 된다.
게다가, 이후 국내로 복귀할 때 포항의 최대 라이벌인 울산으로 이적하여 복귀전에서 골을 넣는 등 또 한 번 친정 팀에 비수를 꽂았다.
위 사건으로 인해 포항 팬들에게는 '''통수'''라며 '''금지어''' 취급을 받는다. 오범석 기사가 뜨면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일단 까고 시작한다.
2020 시즌 여름 이적 시장에서 포항 스틸러스로 돌아오게 되었다.
5. 여담
오범석의 누나 오유미는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했고, 2003년에 미스코리아 美로 뽑혔다.
2015년 5월 16일, K리그 클래식 11라운드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제주 유나이티드의 경기에서 제주의 정영총이 헤딩 경합 상황에서 같은 팀의 강수일과 충돌해 기절하는 상황이 발생했는데[13] 바로 옆에서 상황을 목격한 오범석이 신속한 응급 처치로 기도를 확보하고 의료진 투입을 요청하면서 정영총은 경기장에서 의식을 회복하고 병원으로 이송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6. 같이 보기
[1] '꾀돌이'를 뜻하는 포르투갈어.[2] 참고로 앰뷸런스는 늑장 대응으로 비판을 받았다. 여기서 듣다 보면 심판이 계속 손짓을 하는데도 안 오고 늑장 부리다가 관중석에서 빨리 오라는 소리가 들리자 겨우 들어왔다.[3] 선수 측에서 먼저 출전 부족을 이유로 계약 해지를 요청했다고 한다. #[4] 둘 다 접촉은 있었으나 신형민은 10억 정도의 연봉을 제시한 친정 팀 전북에 재입단했고, 정재용 역시 포항보다 높은 연봉을 제시한 부리람 유나이티드를 선택했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 연봉을 삭감한 오범석과 계약하게 되었다.[5] 그러나 현재는 신형민과 정재용 모두 각 소속팀에서 좋지 못한 폼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지금 보면 오히려 오범석 영입이 더 이득이라고 볼수도 있다.[6] 하지면 결과적으로는 두 선수 모두 실패였다. 출전한 경기 모두 오범석은 피지컬, 차두리는 수비력에서 문제를 드러냈다.[7] 물론 저 화려한 멤버들의 이름을 보면 오범석이 아니라 마이콘, 알베스가 와도 쉽지 않기는 하다.[8] 결국 이청용은 상대 골키퍼와 수비진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골을 넣었다.[9] 송종국의 경우에는 폼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고 토고전에서도 매우 부진했다. 토고 전 이후 좌-김동진, 우-이영표를 출전시키면서 경기에 나오지도 못했다.[10] 이를 계기로 틈만 나면 FC 코리아들이 선수 발탁을 가지고 인맥이다 뭐다 징징거리기 시작했으며, 축협의 일까지 간섭하려드는 탓에 이 사실을 아는 국대 팬들은 2020년 지금까지도 조광래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다.[11] 포항 팬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에 태업한다는 설도 도는 등 팀 분위기를 상당히 흐려 놓았다고 한다.[12] 리그 내의 타 팀이 현 소속 팀에서 주는 연봉보다 높은 연봉을 부를 경우, 구단 간 합의가 된 후에 선수는 이적을 거부할 수 없다.[13] 달려오던 강수일과 몸통, 머리가 같이 부딪치면서 중심을 완전히 잃고 머리부터 그라운드에 떨어진 아찔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