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우(축구인)

 


'''김정우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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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이동국
FW
데닐손
MF
최태욱
MF
기성용
MF
'''김정우'''
MF
에닝요
DF
김상식
DF
김형일
DF
황재원
DF
최효진
GK
신화용

[image]
'''인천유나이티드 U18팀'''
'''김정우
金正友 | Kim Jung-Woo
'''
'''출생'''
1982년 5월 9일 (41세)
인천광역시
'''국적'''
[image] 대한민국
'''직업'''
축구선수 (미드필더/은퇴)
축구감독
'''신체'''
184cm, 체중 74kg
'''등번호'''
6[1], 7[2], 8[3], 10[4], 14[5], 15[6], 16[7], 17[8], 18[9], 88[10]
'''소속'''
'''선수'''
울산 현대 호랑이 (2003~2005)
나고야 그램퍼스 (2006~2007)
'''성남 일화 (2008~2011)'''
광주 상무/상주 상무 피닉스 (2010~2011.9/군복무)
전북 현대 (2012~2013)
알 샤르자 SC (2013~2014/임대)
바니야스 SC (2014~2015)
BEC 테로 사사나 (2016)
'''감독'''
인천대건고[11] (2019~)
'''국가대표'''
'''71경기 6골(대한민국/2003~2012)'''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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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 '''가족'''
1남 1녀 중 둘째, 부인
'''학력'''
부평동중 - 부평고 - 고려대
'''종교'''
천주교(세례명 : 헤르마)

1. 소개
2.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지도자 경력
6. 기타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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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이자 현 지도자. 별명은 뼈.[12] 주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이지만 상주 상무 시절 공격형 미드필더스트라이커로 뛰기도 했다. 전북 현대 있을 때도 스트라이커로 뛰곤 했다.

2. 경력



2.1. 울산 현대


부평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 차두리, 이천수 등 이미 각급 대표팀을 들락날락 거리던 슈퍼스타들과 호흡을 맞추다가, 2003년 고려대학교를 중퇴하고 2003년에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했다. 입단 초기부터 김정우는 팀의 주축 미드필더로 평가되었고, 특히 2005 시즌에는 이호와 짝을 이뤄 울산의 중원을 이끌며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2.2. 해외 진출과 성남 일화 천마


[image]
울산의 우승을 이끌었던 김정우는 시즌 종료 후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로 이적하게 된다. 나고야에서는 과거보다 공격적인 역할을 주문받으면서 이전까지 김정우가 보여주던 플레이 외에도 다양한 것이 가능한 선수임을 증명했다. 2008 시즌 종료 이후 김정우는 FA로 풀려 위건 애슬레틱으로 이적을 시도하나 실패해 최종적으로는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했다. 이때 울산 현대와 위약금 논쟁이 일었지만 울산이 위약금을 포기하면서 소동이 가라앉았고, 결국 2009 시즌 내내 마우리시오 몰리나와 함께 성남을 먹여살리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 포항전을 승리로 이끌고 광주 상무에 입대했다.[13]

2.2.1. 광주 상무 / 상주 상무


광주 상무 입대 이후에도 활약을 이어갔고, 월드컵에도 출전하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미드필더로의 활약을 이어가던 김정우는 2011 시즌 상무가 광주에서 상주로 이전하고 이수철 감독이 새로 취임하면서 포지션을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옮겼다. 초등학교 이후 처음 맡은 스트라이커 역할이었으나, 놀라운 재능을 보이면서 리그 15골(득점순위 3위), 컵대회 포함 18골을 기록했고, 명실상부 상주의 에이스로 꼽혔다. 승부조작 사태로 상주의 분위기가 겉잡을 수 없이 추락하면서 김정우의 활약도 같이 감소했으나, 이 시즌 그의 활약은 주목할 만했다. 2011년 9월 21일 부로 전역해서 성남으로 복귀했지만, 복귀전인 전남 드래곤즈와의 홈경기에서 후반전 교체된 지 20분 만에 부상당해 시즌을 조용히 마감했다.

2.3. 전북 현대 모터스


2011년 시즌을 마치고 전북 현대 모터스로 이적했으며 연봉 15억 가량으로 K리그 최고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김정우의 전성기는 이 해가 마지막이었다. 2012 시즌에는 잔부상에 시달리며 5골 2도움에 그쳤고 특히 팀이 상위스플릿에 진출한 리그 후반기에는 완전히 침묵하여 최강희 감독이 국가대표팀 임시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공백이었던 팀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김정우가 평범한 미드필더였다면 5골 2도움이 나쁜 성적은 아니겠지만 김정우에 대한 기대치는 국가대표와 상주에서 공격수로 뛰며 보여준 활약으로 인해 월등히 높아졌고, 그 기대치에는 못 미친 것이 사실이었다. 2013년에는 부상에 심리적 압박감까지 겹쳐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심지어는 중간에 임유환과 더불어 무단이탈설이 돌기도 했다.


2.4. 말년


최강희 감독 복귀 후 팀 리빌딩 과정에서 알 샤르자로 임대되었다. 전북 측에서는 아예 이적시키길 원했으나 워낙 연봉이 높아서 실패했다. 중동 이적후에는 어느 정도 폼을 회복하여 팀의 리그 최소 실점을 기록하는 데 이바지하며 13~14시즌 UAE 리그 베스트 11에 뽑혔다. 시즌 종료 후 아부다비를 연고로 하는 구단인 바니야스로 이적했다. 2015년 2월 부상으로 소속팀과 계약을 해지하였고, 태국의 BEC 테로 사사나로 이적하였다. 기사 그러나 이적 직후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며 선수 생활에서 은퇴하였다. 2019년 3월 22일 볼리비아전 하프타임 때 은퇴식이 열렸다.

3. 국가대표 경력


[image]
'''허정무호의 숨은 주역'''으로[14] 김남일의 뒤를 이어 대표팀 중원을 책임졌던 살림꾼.
2003년, 울산 현대 입단 이후 당시 올림픽 대표팀의 주전 미드필더로 올라서면서 가치가 올라가기 시작했으며, 2004 아테네 올림픽때는 멕시코전에서 통쾌한 중거리슛 득점으로 대한민국의 8강 진출에 도움을 주었다. 국가대표팀 데뷔는 2003년 10월의 오만과의 2004 아시안컵 예선에서 첫 출장하였다. 이후 김남일, 이호, 백지훈 등과 중앙 미드필더 주전 경쟁을 벌였지만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는 예비 명단에만 포함되었고, 최종 명단에서는 탈락하였다.
이후 절치부심하여 월드컵 이후 핌 베어벡 체제에서 중용받으면서 경험치를 쌓은 끝에 2007년 AFC 아시안컵에 출전하였다.[15]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인도네시아전에서 엄청난 빈공으로 답답한 축구 끝에 간신히 결승골을 넣으면서 8강 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2007년 아시안컵 이후로 대표팀 주축 선수로 부상한 이래 안티가 꽤 많았었다. 그전까지 붙박이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김남일 팬들이나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 변경에 성공해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까지 진출했던 조원희 팬들에게 특히 욕을 많이 먹었다. 결정적인 찬스 상황을 내주기 전에 끊어버리는 역할도 하기에 카드 수집도 많은 편이고, 대표팀에서 쓰는 '''홀딩을 쓰지 않는 시스템'''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 많아 더욱 까인다.
사실 허정무호 시기 김정우 이상의 선수는 없었다. 김남일은 30줄에 접어든 나이, 수원과의 갈등과 해외진출로 부침을 겪는 와중에 폼이 하락했고, 조원희는 EPL에서 벤치만 달구며 폼이 급격히 하락했고 결국 잊혀진 선수가 되었다. 게다가 김남일, 김정우와 달리 공격 전개능력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김두현은 애초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라 수비 능력을 기대할 수 없었고 당시 기대주로 떠올르던 신형민, 김재성은 실력이나 경험이 아직 일천했다. 2006년 대표팀에서 주목받던 이호와 백지훈 등은 전술이나 폼의 문제로 국가대표에 발탁되지 않았다. 일례로 2010년 2월 14일 열린 동아시안컵 일본전을 보면 김정우가 퇴장당하자마자 한국의 중원은 피지컬에서 열세인 일본 상대로도 줄곧 밀렸다. 당시 구자철과 김재성, 신형민은 김정우의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16]
이러한 이유 때문에 허정무호에서 중원의 중심이었다. 2010 월드컵 대회 당시 4경기 다 선발은 김정우, 기성용이었으나 김정우는 4경기 풀타임을 다 뛰었던 반면 기성용은 매경기 교체아웃이 된 것만 봐도 둘 사이 비중의 차이는 명확했다. 기성용의 수비력은 국가대표 생활 내내 안 좋았지만 신인이었던 이 시기는 더욱 안 좋았고 셀틱 이적하고 나서 폼도 좀 떨어졌던 시기여서 공격의 다변화를 꾀하는 카드였다. 따라서 김정우에게 주어진 부담이 굉장히 컸다.[17] 김정우-기성용 라인은 김정우가 전천후로 뛰어다니면서 수비, 압박, 연결에 힘을 쓰는 가운데 기성용이 조용형-이정수등의 국가대표 센터백을 보좌해 가며 특유의 시야와 짧고 길고를 가리지 않는 정확한 패스능력으로 공격루트의 다변화를 꾀하는 식이었다.
2009년 11월 열린 덴마크 국가대표와의 평가전에서 '''덴마크의 미친개''' 크리스티안 폴센[18] 상대해서 발라버리는 기염을 토했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몇 주 앞두고 벌어진 몇차례 평가전에서 그를 저평가 해온 팬들도 눈치챌 만큼 기량이 급상승한 모습을 보여주며 국가대표팀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다. '''스페인, 아르헨티나'''등 강팀과 상대하면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았으며, 상대 미드필더들을 씹어먹으며 중원을 장악하여 폼이 처참하게 떨어진 기성용의 구멍을 훌륭히 메꾸었다. 단점으로 지적받던 카드수집도 태클실력이 늘어났는지 상당히 줄었다. 아르헨티나전에서도 그 '''메시'''를 태클하며 공을 종종 뺏는 대활약을 했다. 남아공 월드컵 본선에서도 박지성과 함께 중원의 핵심 역할을 책임졌다. 남아공 월드컵 당시 광주 상무 소속으로 계급은 일병이었다.[19]
그러나 2012년 전북 이적 이후부터 점점 하향세를 그리면서 더 이상 국대에서는 볼 수 없는 선수가 되었다. 이후 2013년에는 중동으로 진출하여 당시 중앙 미드필더 경쟁에서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지난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기억하던 팬들은 82년생으로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까진 충분히 폼을 유지할 수 있을거라 생각되었기에 급격한 몰락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어지간해선 눈에 잘 안 띄는 수비형 미드필더의 숙명에다 대표팀에서의 전성기가 3년여에 불과해 최초의 원정 16강에 지대한 공을 세웠음에도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국 대표팀은 김남일과 김정우의 뒤를 이을 수비형 미드필더감을 찾지 못해 한동안 고심하다 2015년 AFC 아시안컵에서는 풀백이었던 박주호가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면서 잠시 한숨을 돌렸다. 이후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경쟁은 지난 월드컵에서 기성용을 보좌한 한국영과 정우영 등 여러 미드필더들의 무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남아공 월드컵 때의 김정우만큼의 위력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20][21]

4. 플레이 스타일


본래 공격형 미드필더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나, 도어 락 축구의 달인인 김정남 감독 밑에서 수비적인 롤을 많이 맡으면서 균형잡힌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성장했다. 큰 키에 비해선 몹시 마른 체형이지만, 몸싸움 잘하고 터프하며 시야 또한 넓었다. 특히 패스커트의 달인수준인데 상대의 패스길목을 파악하고 미리 위치를 차지하고 뛰어드는 타이밍이 일품으로 태클로 볼을 뺐는 것이 아니라 커트로 수많은 공격권을 가져왔다. 또한 괜찮은 중거리 슛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애당초 공미 출신이라 당시 한국수미 중 몇없는 볼간수가 가능한 미드필더였다. 다만 큰 키에 비해 헤딩경합이 우수한 편은 아니었다. 많은 활동량과 투지 그리고 영리한 축구지능으로 중앙 개싸움에 능하고 특히 커팅능력이 우수하면서 3선에서는 볼간수가 가능한 딥 라잉 미드필더 또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라고 볼 수 있다.
중앙 미드필더로 우승을 경험한 이후 팀을 옮겨다니며 여러 룰을 전전하게 되는데 나고야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고, 성남에선 공격형 미드필더와 중앙 미드필더를 오갔으며, 베어백호에선 공격형 미드필더, 2008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김동진과 함께 와일드카드로 참가)에서는 다시 중앙 미드필더, 허정무호에서는 전천후 중앙 미드필더 역할,[22] 상무에선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뛰었다. 초기에는 다소 거친 플레이스타일 탓에 카드캡터 소리를 들었으나 경험이 쌓인 이후에는 개선되었다. 유사시 공미 역할도 해줄 수 있는 패싱력[23]과 깡마른 몸과 전혀 상이한 뛰어난 경합 능력으로 감독들의 사랑을 받았다.

5. 지도자 경력


2019년 3월 전재호 감독을 대신해 인천 유나이티드의 U-18 팀인 인천대건고등학교 축구부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첫 시즌부터 K리그 주니어 전기리그와 후기리그에서 모두 3위를 차지했으며 전국체전에서 우승도 차지하는 등 좋은 성과를 냈다.

6. 기타


  • 샤다라빠는 김정우에게 골레처[24]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 풋볼 매니저 2011 11.21 패치에서 EPL 중상위권에서 주전 먹을 능력치를 가지는 공미로 등장해서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상무에 있어서 2년 후에 온다. 첫시즌 기준으로 2년 후면 나이 서른…. FM 2012에서도 탈 K리그 급의 능력치를 이어갔다. 대략 FM 2014까지는 한국 국대에서도 주전 급의 능력치를 보유했으나, 이 후 폼이 떨어지면서 FM에서도 자연스럽게 능력치가 하향되었다. 시리즈가 17까지 나온 현 시점에서는 예전에 비하면 많이 하락했다.
  • 탤런트이자 영화배우인 이연두와의 열애 사실이 알려지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2012년 7월 초 결별했다. 그러다가 한혜경이라는 배우와 2014년 2월 8일에 결혼하였다. 기사
  • 2018년 11월 29일, 유튜브 꽁병지tv에 출연, 근황을 전해왔다. 선수 시절에 가정에 소홀했다고 생각했기때문에 은퇴 후 온전히 육아에 힘을 쏟고 있다고. 풀버젼
  • A매치에서 71경기[25]를 뛰었기 때문에 최근에 대표팀 은퇴식을 치뤄주겠다는 제안을 받았고, 자식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한다. 2019년 3월22일 볼리비아전에서 은퇴식을 치루기로 결정났다.

7. 관련 문서



[1] 알 샤르자 SC, 바니야스 SC[2] 울산 현대 호랑이 2004시즌, 2005시즌[3] 나고야 그램퍼스, 2010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2010 남아공 월드컵[4] 상주 상무 피닉스[5] 2004 아테네 올림픽, 성남 일화 천마 2009시즌, 광주 상무, 전북 현대 모터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6] 2005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7] 울산 현대 호랑이 2003시즌[8] 2007 AFC 아시안컵 아세안[9] 성남 일화 천마 2008시즌[10] 성남 일화 천마 2011시즌[11] 인천 유나이티드 U-18 팀[12] 본인은 정작 '뼈'가 들어가는 별명은 좋아하지 않는 편.[13] 이해 아챔과 컵대회 우승을 차지했던 포항을 물리치고 성남이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는데 크게 기여했지만, 성남은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북에게 패하고 말았다. 재미있게도 전북을 먹여살린 수비형 미드필더는 성남의 리빌딩 과정에서 쫓겨난 김상식이었다.[14] 사실 축구적으로 보면 대놓고 주역이었는데 스타성에서 많이 밀렸기 때문에 숨은 주역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축구팬들 역시 해외축구를 본다고 거들먹거리기나 했지 축구를 잘 볼 줄 몰랐다.[15] 당시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안정환, 김남일 등 기존 유럽파 및 국가대표 주전급 선수들 모두 부상 및 부진으로 인해 명단에서 제외되면서 2000년대 이후 역대 최악의 전력으로 대회를 꾸려가게 되었다.[16] 순간적인 역습 기회를 살린 김재성의 쐐기골이 없었다면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17] 기성용이 그때는 수비를 어떡해 해야할지 몰라서 형들 따라서 뛰었다고 밝힌 인터뷰가 있다. 사실 기성용의 발전한 수비력이라는 것도 그냥 최대한 뒤로 물러나면서 공간과 각을 지키면서 아군 선수를 기다리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다 아군 선수가 상대방과 다투다가 흘러나온 볼을 채는 걸로 인터셉트 스탯을 채우는 식이다.[18] 당시를 직접 보지 않은 팬들은 누군지 잘 실감이 안 나겠지만 샬케, 세비야, 유벤투스, 리버풀을 거쳐갔던 이력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세계적으로도 상당한 입지를 가진 선수였다.[19] 당시 그의 경기를 보던 모부대에서는 국가연주가 나올적에 그가 거수경례자세로 서있자 괴성을 지르면서 그를 응원하였다.[20]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중원 조합도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선수들 조합이나 전술도 안 좋았다. 어쨌건 김정우가 사라진 이후 기성용을 중심으로 한 조합이 아시아 2차예선 정도는 아예 가둬놓고 팰 정도로 탈탈 털 힘이 있었지만, 월드컵 본선은커녕 아시아 최종예선에서조차 큰 힘을 쓰지 못했으니. 클럽팀에서 보여준 기성용의 전성기 기량도 뛰어났지만 국가대표에 있어서 김정우는 기성용 보좌역이라고 말하기에는 넘치는 활약을 했다. 오히려 기성용이야말로 거의 10년간 국가대표 활동을 했지만 김정우가 2010년 월드컵에서 보여준 폼을 뛰어넘는 활약을 보여준 적이 없다.[21] 활동량, 수비력, 투쟁심이 뛰어난 선수가 한국에 적다기보다는 세계적인 전술 추세도 그렇고 국가대표에 부임하는 감독들이 그런 종류의 선수들을 잘 기용하지 않는 편이다. 사실 김정우부터도 축구지능이 가장 돋보이는 선수였다.[22] 기성용을 보좌했다는 인식이 많다. 그러나 2010년 월드컵에서 기성용이 전경기 선발출장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전경기 교체아웃되기도 하였다. 특히 아르헨티나전에서는 거의 후반전 시작하자마자 교체아웃되는 등, 전경기 풀타임을 뛰었던 김정우가 주역이면 주역이었지 기성용의 보좌역은 아니었다. 단지 기성용은 그 당시에도 어린 나이, 청소년 대표 활약, 과감한 언플과 친언론적 행보, 활발한 인터넷 활동, 큰 키, 잘생긴 얼굴, 서울팀 선수, 실책은 눈에 안 띄지만 활약은 쉽게 눈에 띄는 플레이스타일 등등의 이유로 대중적으로 스타였고 김정우는 아니었기 때문에 잘 주목받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플레이스타일 면에서는 그 포지션에선 게임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눈에 안 띄면 잘하는 것이라는 당시에 흔히 하는 말을 충실히 소화하던 김정우와는 상당히 대비점이 있었다.[23] 공미치고는 패스가 뛰어나진 않지만, 수미치고는 괜찮은 수준이다.[24] 대런 플레처+ 해골. 사실 플레처도 EPL 최상위권 팀의 주전 중미라는 위상에 비해 몸이 마른 편이다.[25] 은퇴식 기준은 70경기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