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도

 



'''개경 나성 건설자
왕가도
'''
'''시호'''
'''영숙공(英肅公)'''
'''작위'''
개성현 개국백(開城縣 開國伯)
'''본관'''
청주 이씨 → 왕씨
'''이름'''
자림(子琳) → 가도(可道)
'''생몰연도'''
? ~ 1034.05
1. 개요
2. 상세
2.1. 성종 ~ 목종 치세
2.1.1. 서경의 하급관리
2.2. 현종 치세
2.2.1. 김훈, 최질 척살
2.2.2. 현화사비에서 등장
2.2.3. 개경 나성 건축
2.3. 덕종 치세
2.3.1. 거란 침공 건의
3.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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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왕조 현종 원문대왕 대의 문신. 본명은 이자림으로 원 청주[1] 이씨지만 사성정책으로 국성을 하사받았다. 성종, 목종, 현종, 덕종 4대 임금을 섬겼으며 현종 대에 큰 활약을 하여 현종의 배향공신이 되었다.

2. 상세



2.1. 성종 ~ 목종 치세


'''성종 시기 관작'''
'''직위'''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
문서 관리를 담당한 하급 직위.

2.1.1. 서경의 하급관리


본명은 이자림으로 청주 이씨 호족 출신이다. 성종 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커리어를 시작했고, 서경(西京) 장서기(掌書記)가 되어 서경에서 관직을 시작한다. 즉 과거로 들어온 신흥 문관 출신이며 제 2수도인 서경파 소속.
장서기 이후엔 한동안 기록이 없다. 대신 나중에 김훈 - 최질의 난에서의 모습을 보면 상당한 인망을 얻어 어느정도 승진하여 중견급 관리가 됐을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강조의 정변이 터진 뒤에 별 영향을 안받은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북방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 강조와 같은 서경파라 피해가 없었을 수도 있다.

2.2. 현종 치세


'''현종 시기 관작'''
'''직위'''
화주 방어사(和州 防禦使)
북방 방비 관직 중 하나.
권서경유수판관(權西京留守判官)
서경 분사 조정의 최고위 직위.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事)
고려 양대 정부기관인 중추원의 차관.
참지정사(叅知政事)
고려 양대 정부기관인 중서문하성의 서열 3위 직위.

2.2.1. 김훈, 최질 척살


제대로 두각을 드러내던 때는 현종 원문대왕이 즉위하고 난 후다. 무관 김훈과 최질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고, 현종에게서 권력을 탈취한다. 이자림은 이 때 매우 분노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승진하여 화주[2] 방어사가 되었고 화주에서 임기를 마친 뒤, 개경으로 온 상태였다.
이자림은 은근슬쩍 현종에게 '한고제가 운몽에서 놀이한 고사를 아십니까?' 하고[3] 자신의 뜻을 전했는데, 이자림이 장서기 시절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현종은 이자림을 권서경유수판관 직에 임명하고 그가 잘 알고 있는 서경으로 보냈다.
현종은 이자림의 배후에서 조용히 계획을 세웠고 자림은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현종은 김훈, 최질 등 당시 권신들을 데리고 서경의 장락궁에 가 연회를 열었다. 이자림은 그들이 취하자 19명을 죽였고, 그들의 가족을 체포, 귀향보냈다. 이로 인해 이자림은 현종의 눈에 들었고, 고위직으로 승진하기 시작한다.

2.2.2. 현화사비에서 등장


현종이 최사위에게 맡겨 추진한 현화사의 비석인 현화사비에 등장하는데 여기선 이가도(李可道)로 등장한다. 중서문하성과 더불어 가장 높은 정부기관인 중추원의 차관으로 등장하며 경상도 지방에 나타난 사리를 회수하러 다녀온다.

2.2.3. 개경 나성 건축


이후 이자림은 조정에서 상당한 발언력을 가지게 된다. 누차 승진하여 고려 최고 정부기관 중서문하성의 3인자급인 참지정사(叅知政事)에 임명된다. 참지정사가 된 이자림은 천수현 후작 강감찬의 제안으로 시작된 개경 수비성 건설의 책임자가 된다. 서눌, 황보유의, 황주량 등 당대의 중신은 모두 참여한 거대 프로젝트였으며 이자림은 21년에 거쳐 23km의 장성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이 공으로 창궐공신호를 받고 백작위에 봉해졌으며, 봉지로 개성현을 받았다. 부인 김씨 또한 개성현부인에 봉해졌다. 공식적으로 왕씨(王氏) 성을 받으니 그가 이자림이 아닌 왕가도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된다.
왕가도의 딸[4]이 현종과 결혼하며 왕가도는 현종의 장인도 되며 당대의 중신이 된다.

2.3. 덕종 치세



2.3.1. 거란 침공 건의


왕가도는 자신의 딸[5]을 덕종에게 시집보내며 또 국왕의 장인이 된다. 이에 문하시랑동중서평장사에 임명되니, 이 관직은 중서문하성의 2인자급 직위였다.
덕종은 거란과의 관계에 있어 매우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는데 왕가도는 임금의 외교방향에 크게 동의했다. 거란이 고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사신 파견을 중지하고 연호 갱신을 거부하자고 주장하였다. 많은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덕종은 이를 채택하여 고려와 거란 간의 외교는 단절된다.
덕종의 배향공신 유소가 의주 침공을 건의하자 왕가도는 적극 찬성했고, 덕종에게 출정을 강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또 다시 많은 중신들이 반대했고, 덕종은 이번만큼은 왕가도의 제안을 거부, 출정은 취소된다. 나이도 많아지고 자신의 레임덕이 시작됐다는 것을 느낀 왕가도는 결국 사퇴를 결심하고 청주로 돌아간다.
결국 1034년 5월 정축일에 사택에서 죽었다. 정부에서 장례식을 치뤄주었으며 천자의 스승인 태사에 추증되었고, 명예직 중서령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현종의 묘정에 배향된다. 일개 서경 말단 관리에서 정부의 2인자까지 올라간 걸출한 인물이었다.

3. 가계


청주 이씨 가문이지만 현종에게 국성을 하사받았다. 아들로 왕무숭, 딸로 원질귀비, 경목현비, 상당현군이 있다. 상당현군 왕씨는 이정의 아내로 이자연의 며느리가 된다.
[1]충청도 청주시.[2]고구려의 박평군이며 현 함경도 영흥군이다.[3] 한고제가 한신을 체포할때의 고사.[4] 시호는 원질귀비(元質貴妃). 왕후 시호를 받지 못했다.[5] 시호는 경목현비(敬穆賢妃). 생전 받은 작위는 현비(賢妃)이며 사후 시호 경목(敬穆)을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