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타 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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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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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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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한일 레전드 매치에서의 역동적 투구.
이름
무라타 쵸지 (村田 兆治)
생년월일
1949년 11월 27일
국적
일본
출신지
히로시마토요타혼고[1]
학력
후쿠야마 전파 공업 고등학교[2]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67년 드래프트 1위
소속팀
도쿄/롯데 오리온즈(1968~1990)
지도자 경력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투수코치(1995~1997)
<color=#373a3c> '''1975~1976년 퍼시픽리그 최우수 방어율'''
1974년
사토 미치오
(난카이 호크스)
1.91

'''무라타 쵸지'''
'''(롯데 오리온즈)'''
'''2.20(1975년)
1.82(1976년)'''

1977년
야마다 히사시
(한큐 브레이브스)
2.28
<color=#373a3c> '''1989년 퍼시픽리그 최우수 방어율'''
1988년
코우노 히로후미
(닛폰햄 파이터즈)
2.38

'''무라타 쵸지'''
'''(롯데 오리온즈)'''
'''2.50'''

1990년
노모 히데오
(킨테츠 버팔로즈)
2.91
<color=#373a3c> '''1975년 퍼시픽리그 최다 세이브 투수'''
1974년
사토 미치오
(난카이 호크스)
13세이브

'''무라타 쵸지'''
'''(롯데 오리온즈)'''
'''13세이브'''

1976년
사토 미치오
(난카이 호크스)
16세이브
<color=#373a3c> '''1981년 퍼시픽리그 최다 승리'''
1980년
키다 이사무
(닛폰햄 파이터즈)
22승

'''무라타 쵸지'''
'''(롯데 오리온즈)'''
이마이 유타로
(한큐 브레이브스)
'''19승'''

1982년
쿠도 미키오
(닛폰햄 파이터즈)
20승
1. 소개
2. 현역 시절
3. 은퇴 이후 - 제 2의 전성기(!?)


1. 소개


'''"인생 선발 완투"'''
'''전설의 도끼(マサカリ)'''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 강속구와 폭포수 포크볼을 무기로 롯데 오리온즈의 프랜차이즈 투수로 활약했으며, 프로 선수로서 은퇴한 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꾸준한 트레이닝으로 현역 못지 않게 역동적인 투구를 보여주는 노익장으로서도 유명하다.

2. 현역 시절



전성기 때의 모습.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친선경기에서.[3]

올스타전에 출장한 말년의 모습.[4]
히로시마 출신으로 후쿠야마 전파공업고를 졸업하고 1967년 드래프트 1위 지명으로 도쿄 오리온즈에 입단했다. 이후 팀명이 롯데 오리온즈로 바뀌는 동안에도 한 팀에서만 22년을 뛰고 은퇴한 오리온즈 시대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강철의 어깨를 가진 사나이. 선수시절 동안 팀 성적이 안습이라 상복은 많지 않았지만 1981년 다승왕을 차지하고 1975, 1976, 1989년도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으며 1975년에는 구원왕 홀더였다. 또한 1976, 1977, 1979년, 1981년 최다 탈삼진 1위를 기록할 정도로[5] 탈삼진 능력도 대단했다. 그리고 롯데 오리온즈 시대의 유일한 '''1974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주역이기도 했다.
프로입문 초기 마작에 빠져 훈련을 소홀히 하기도 했지만 팀 선배인 고야마 마사아키 에게 '''"네놈의 재능을 썩히지 말라"'''는 충언을 들은 후 정신차리고 야구에만 몰두하여 정상급 투수로 거듭났다고 한다.
선발 & 중간 & 마무리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등판하며 세이브 1위에 오른 1975년에 11완투를 해냈을 정도로 철완을 자랑했다. 가네다 마사이치 같은 전형적인 약팀의 슈퍼 에이스 였던 셈. 실제로 전반기에 그가 활약하던 시기는 가네다 마사이치가 롯데의 감독으로 재직하던 시기로, 가네다 자신 역시 현역 시절 강완의 투수였던 만큼 무라타에게 훈련 방식 등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무라타 쵸지의 전매특허라 할수 있는 마사카리 투구, 즉 '''도끼투구법'''[6] 에서 나오는 강력한 직구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포크볼이 일품이었는데 타이밍을 잡기 어렵게 만드는 투구폼에서 나오는 이 무기는 탈삼진능력의 원천이기도 했다.[7] 그래서 22년간의 긴 선수생활 동안 은퇴하는 그날까지 1군 라인업에서 빠지지 않고 주축투수로 활약했다.
물론 타고난 강골인 무라타도 부상이 전혀 없었던건 아니어서, 1972년 시즌 부상으로 40이닝 투구에 그쳤고 1982년 에는 팔꿈치 인대파열로 인하여 수술 아니곤 선수생활 연장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선수생명을 걸고 미국에 가서 프랭크 조브 박사의 집도로 토미 존 서저리를 받으면서 3년 가까이 재활에 매진한 끝에 1985년 36세의 나이로 17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부활의 날개를 펼쳤다.[8] 2000년대에 들어와 토미 존 서저리는 거의 강속구 투수의 통과 의례처럼 생각된만큼 보편적인 수술로 인식되고 있지만, 이 당시 메이저리그에서도 팔꿈치 인대 이식수술은 선수생활을 걸고 최후에야 수술을 시도해 볼 정도로 선수들도 꺼려하고, 시술 사례도 많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에서는 팔꿈치 부상으로 인대를 교체한다는 개념은 만화에나 등장할 비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30대 중반의 나이에 미국까지 가서 위험한 수술을 결심한 무라타에게 격려하고 응원하는 여론이 엄청나긴 했으나, 현실적으로 재기가 불가능하니 동정하는 차원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당시 불가능으로 여겨지던 팔꿈치 인대 이식을 통해 기적처럼 재기에 성공한 무라타에게 팬들이 받은 감동과 성원은 폭발적이었으며, 무라타의 복귀 등판을 지켜본 경기장의 관중들은 물론, TV와 뉴스를 통해 접한 사람들까지 감격에 겨워 눈물바다가 될 정도로 사회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이 시기 부상 회복 때문에 선발등판 횟수를 대폭 줄이는 대신에 한 번 등판하면 전력으로 투구하는 방법으로 주로 일요일에 선발등판을 했다. 이 때 생긴 별명이 ''''일요일의 남자'''' 혹은 ''''일요일의 쵸지''''.
은퇴 전 해인 1989년에 무려 22시합에 출장해(그것도 '''전부 선발로''') 16번의 완투를 기록하며 7승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9] 그 해 방어율 2.50으로 최우수방어율 타이틀까지 얻었다. 그리고 다음해이자 현역 마지막 해인 1990년 시즌에도 100이닝 이상을 던지는 괴력을 뽐냄과 동시에 시즌 10승을 기록하는 위엄을 보이며[10] 유종의 미를 거두고 41세의 나이로 유니폼을 벗었다.[11][12]
특이한 면모가 하나 더 있다면, 포수에게 사인을 보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크게 휘두르며 21권에서 언급되었다. 덕분에 포수는 노사인으로 들어오는 강속구와 폭포수 포크를 맨몸으로 막아내느라 죽도록 고생했다고 한다.
주요 통산 기록은 다음과 같다.
  • 604 등판, 433 선발 등판(15위),
  • 215승(17위), 177패(14위)
  • 통산 평균자책점 3.24
  • 3331.1 이닝(17위)
  • 184 완투(16위), 36 완봉승
  • 2363 탈삼진(10위), 1144 볼넷(8위), 124 몸에 맞는 공(8위)
  • 148폭투(1위)
기록에서 알 수 있듯 뛰어난 이닝 소화력과 탈삼진 능력을 갖췄지만 그만큼 많은 사사구를 내줬으며, 특히 '''통산 폭투 148개'''로 '''NPB 통산 폭투 1위''' 기록을 가지고 있다. 현역으로 지낼 동안 시즌 최다 폭투를 기록한 게 무려 '''12번'''이며 특히 1976년~1979년에 '''4년 연속으로 최다 폭투'''를 기록했다. 다만 폭투가 많은 건 그만큼 이닝 소화도 많았기 때문이며, 이닝당 폭투 허용은 22.5이닝당 1폭투 꼴로, 폭투 수 2위 이시이 가즈히사(18.7이닝당 1폭투), 3위 아라카키 나기사(10.7이닝당 1폭투), 4위 마에다 유키나가(18.8이닝당 1폭투) 등에 비하면 적다. 단순히 불명예스럽기만 한 기록은 아니며 오히려 꾸준히 등판해 뛰어난 이닝 소화력을 보여 줬다는 방증이 될 수 있다.

3. 은퇴 이후 - 제 2의 전성기(!?)


현역때의 화려함과는 달리 지도자로서의 커리어는 초라한 편으로, 1995~1997년 3시즌 동안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투수코치로 재임한 것이 전부였다.그러나 당시의 다이에는 2000년대와 같은 강팀이 아니라 오사카 시절인 1978부터 20년간 비밀번호만 찍던 개막장 팀이었는지라...[13] 거기다 코치 재직 중에 심근경색까지 걸리는 바람에 1997년을 끝으로 코치직을 사임했다.
그런데 이 분... 지도자보다는 마운드가 더 좋았는지 은퇴한 지 한참이 지나 손주를 봐도 이상하지 않을 '''50대 중반에'''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에 출장, 무려 '''141km'''의 광속구(?)를 뿌리며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다. 그 나이에도 평균 136 ~ 138km 정도는 우습게 뿌리면서 현역시절 리그를 평정했던 강타자들을 모두 데꿀멍 시켰다(...) 은퇴한지 얼마 되지않은 시점의 하라 타츠노리 마저도 삼진으로 돌려세웠을 정도. 그리고 현역때 전매특허였던 포크볼은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60에 가까운 무라타의 마스터스 리그 양민학살을 볼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은퇴 선수들과는 달리 무라타는 타고난 강골과 유연한 몸, 그리고 한 번의 토미 존 서저리 이외에는 큰 부상으로 현역 생활이 중단된 일이 없었을 정도로 철저한 자기관리를 지닌 선수였고, 은퇴 후에도 현역 선수 못지않게 관리를 하고 훈련을 한 결과 여전히 최소 사회인 리그 레벨에서도 통할 구위를 보유하고 있었던것. 물론 나이가 나이라 연투나 완투는 힘들겠지만... 어찌보면 만년 약체팀에서 고생하던 현역때보다 은퇴한 후 더 유명해진 케이스라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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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0일 KBO 올스타전 사전행사로 펼쳐진 한일 레전드 매치에서 5회말에 등판, 6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멋진 투구를 보여주었다. 초반에는 거의 130km에 육박하는 구속(평균 124km 정도)과 구위, 그리고 주무기였던 포크볼을 멋지게 선보이며 감탄사를 자아냈다. 주자 만루 상황에서 당시 포수였던 두산 베어스의 코치 이토 쓰토무가 마운드로 올라갔지만 이 이닝을 마무리짓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며 결국 1이닝을 마무리 짓고 간지 미소를 보여주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물론 1이닝 2실점하긴 했지만 이건 수비들의 실책 때문이고 2사 만루의 야구만화같은 위기 상황을 이기고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38투구 4K 최고구속 126km'''. 이 이닝에 상대했던 한국의 타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무라타가 선수생활을 시작할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선수들이었다. 그만큼 큰 나이차가 있었음에도 이종범, 양준혁같은 은퇴한지 얼마 되지 않은 선수들의 진땀을 빼게했다. 이닝을 마친 후 온 몸이 땀에 젖어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해맑게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에 많은 야구팬들이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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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드에서 구속을 겨루는 스피드킹 타임에서도 두번째 선수로 씩씩하게 등판. 8분 35초부터 12분 15초까지. 즉석에서 농군패션으로 옷을 가다듬고 승부욕을 보여주더니 장내 아나운서를 손쉽게 요리하는 쇼맨쉽으로 슬슬 지루해져가는 분위기를 환기시켰으며, 박정태이종범같은 비교적 젊은 선수와의 대결에서도 뒤지지 않는 구속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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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km을 외쳤는데 125밖에(...) 나오지 않아 땅을 치며 김동엽류의 대통곡을 시전하는 쇼맨십 등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 스피드킹 타임때 가장 큰 환호를 받은 건 쵸지 옹이었으니...
이런 멋진 노익장의 모습에 한국 팬들의 반응도 감탄의 연속이었다. SNS를 비롯한 인터넷 여기저기서 '한일전에서 일본팀을 응원하긴 처음' '열정이 부럽다' 등의 찬사가 이어졌고 일본 야수진을 깠다(...) 또 '데니 바티스타보다 무라타 옹이 잘 틀어막을 거 같음', '무라타 쵸지 한화 이글스 용병영입', '류딸이나 윤석개는 이제 우는소리 하지말라 무라타옹을 보고 반성해라' 등의 포풍질타(...)가 넘처흘렀다. 그 언어생활 지저분하다는 야갤에서도 '진정한 MVP', '할베라', 노르빗슈 등이라 칭하며 찬사를 보냈다. 무라타 옹의 나이를 잊은 야구혼에 국적을 초월해서 대동단결하는 훈훈한 분위기.
역시 135Km/h를 못찍으신게 한이 되신건지... 140km/h를 목표로 매일 팔굽혀펴기 500회, 윗몸 일으키기 1000회 (...)의 트레이닝과 트레이닝을 거듭하여 2013년의 시구식에서는 결국 135Km/h를 찍어주시기도 하였다. (...)
2015년 현재에도 사회인 경기에 꾸준히 출장하고 있다. 대신 나이가 나이인 만큼 몇 해 전까지 보여주던 역동적인 투구폼을 조금은 지양하고 다소 간결해진 투구폼으로 여전히 '''양민학살 중이시다'''...
2016년 1월 14일 거의 버라이어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야구광팬의 프로듀서의 삼고초려에 못이겨 아웃=디럭스 라는 토크 프로에 출연하였다. 66세의 나이에도 어마어마한 악력과 유연성, 복근의 근력 을 자랑하셨다. 그래도 앞서의 어마어마한 트레이닝은 더 이상은 안한다고 한다. 상기의 동영상도 버라이어티 출연을 기념해 일본 팬이 만든 동영상이다.
6월 30일 시구를 했는데 최고구속 131키로… #
8월초 마스터즈리그에 참가하여 여전한 구속을 자랑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2020년 8월 22일 경기에 시구를 했다. 이날 1974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기념하며 이때의 유니폼을 배부하는 등 나름 행사를 치렀으나 팀은 3:2로 졌다.

[1]히로시마미하라[2] 現 킨키 대학 부속 히로시마 고등학교[3] 영상에 두번째로 등장해 2루땅볼로 물러나는 왼손타자가 캔자스시티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 조지 브렛. 구장은 고라쿠엔 구장이다.[4] 주니치 드래곤즈로 적을 옮긴 롯데 후배 오치아이 히로미츠와 대결한다.[5] 다만 이 당시엔 연맹 표창이 없었다. 1989년부터 제정.[6] 1971년 시즌을 앞두고 가네다 마사이치의 조언을 받고 고안했다고 한다.[7] 물론 이 포크볼도 노력의 산물이다. 무라타의 포크볼은 입단 초엔 실전에서 도저히 못 써먹을 수준이었다. 그래서 당시 감독이었던 노닌 와타루가 연습을 금지시켰는데도 불구하고(같은 히로시마 출신이라서 아낀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속구의 위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포크볼 연습만큼은 금지시키고 있었다.) 노닌의 눈을 피해서 포크볼 연습을 계속하였다. 또한 당시 포크볼의 명수였던 무라야마 미노루에게 가르침을 부탁했을때 ‘24시간 동안 공을 쥐고 있어라’ 는 조언을 받아 이를 손가락에 공을 끼운 상태에서 줄로 동여매고 자는 것으로 실천해 포크볼 잡는 법을 몸에 익히려 했으나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잠을 잘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결국 한 번 시도만 해보고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포크볼 잡는 것을 깊게 하려한 나머지 '''집게 손가락과 중지 사이를 나이프로 짼 적도 있다(!!!)''' 포크볼을 멋지게 연마한 후에도 오른손 중지와 집게 손가락 사이에 우유병이나 주문 제작한 강철로 만든 공 사이에 끼워넣기도 하고 문을 열 때 손잡이를 중지와 집게 손가락 사이에 끼워 여는 등 매일 같이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인에 의하면 무라타가 중지와 집게 손가락으로 맥주병을 잡았을 때 부인이 떼내려고 해도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8] 이 일화는 도덕 교과서에까지 실릴 정도였다.[9] 다만 9패를 기록해서 승리보다 패배가 더 많았다.[10] 한신 타이거스와카바야시 타다시 이래 2번째로 '''40대인 투수가 시즌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한 것이었다.[11] 은퇴경기에서 선발투수로 출장해 그날 경기에서 5이닝 무실점으로(참고로 이날 강우콜드로 5회에 경기가 종료되었다. 즉 강우콜드 빨이긴 하지만 완봉승.) 승리투수가 되어 10승을 거두었다.[12] 여담으로, 무라타가 은퇴하면서 NPB에서 60년대에 데뷔한 프로야구 선수들은 모두 현역 명단에서 사라졌다.[13]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무라타가 떠난 이듬해인 1998년 호크스는 20년간의 비밀번호 생성을 그치고 리그 상위권을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