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카와 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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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카와 큐지 (藤川球児, Kyuji Fujikawa)
생년월일
1980년 7월 21일 (43세)
국적
[image] 일본
출신지
고치현 고치 시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98년 고교생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 (1999~2012)'''
시카고 컵스 (2013~2014)
텍사스 레인저스 (2015)
고치 파이팅 독스 (2015)
'''한신 타이거스 (2016~2020)'''
1. 개요
3.1. 2013 시즌
3.2. 2014 시즌
3.3. 2015 시즌
4. 일본프로야구 복귀 후
4.1. 2016 시즌
4.2. 2017 시즌
4.3. 2018 시즌
4.4. 2019 시즌
4.5. 2020 시즌
5. 피칭 스타일
6. 단기전 징크스
7. 이모저모
8.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일본야구선수. 우투좌타. 포지션은 투수.
일본의 대표적인 마무리 투수였으며 150km/h 초중반대를 찍는 강력한 스터프가 특징이던 투수. 한국에도 야구소년이라는 애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름의 한자[1] 때문인데, 저런 이름을 지은 이유는 아버지가 아마 야구팀 투수인데 그가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다음날 태어나서 아무 생각 없이 붙였다고 한다(...). 지금 와서는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 되었다.

2. 일본프로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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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드래프트 1위로 한신 타이거스 입단. 이른바 마쓰자카 다이스케 세대로, 원래는 선발투수 자원으로 입단하였고 애초부터 체격이 좋은 편이라 구단에서도 그렇게 기대를 한 모양이지만, 초기의 후지카와는 기대에 대단히 못 미치는 평범한 신인이였다. 입단 당시 최고 구속도 145km/h 사실 신인이 저정도 던지면 대단한거긴 하지만 지금 모습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는 평범한 구속이다.
본격적으로 1군에 정착한건 대략 2002년. 그러나 이때부터 2004년까지는 성적이 매우 저조했다.
2004년 초반까지는 1, 2군을 왔다갔다 했는데 성적도 성적이지만 이 시절 2군 코치인 야마구치 타카시[2] 에게 본격적인 투구폼 개조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한큐 브레이브스 황금기를 이끌던 속구파 투수였던 야마구치는 후지카와의 폼에 쓸데 없는 부분이 많고 릴리스 포인트가 너무 뒤인 것을 발견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한 것.[3][4] 원래부터 컨트롤은 좋은 편이였고 구속만 따라온다면 완벽하다고 본 그는 원래 선발자원인 후지카와를 중간계투로 전향시키고 1~2이닝 특화형 투수로 길러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지금 후지카와가 던지는 최고속도 156km/h의 강속구이다. 2004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중계진의 한축을 담당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개화한 후지카와는 2005년 대폭발. 한신의 필승조 JFK(한신)[5]의 일원으로서 7승 1패 1세이브 46홀드 방어율 1.36의 후덜덜한 성적을 찍으며 일약 일본 최고의 중계투수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무려 '''80시합 등판'''으로 일본 투수 등판수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최우수 중계투수 타이틀까지 덤으로 거머쥔다.
2006년에는 원래 마무리 투수였던 쿠보타 토모유키의 부상시기에 마무리 투수 땜빵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한신의 마무리 투수가 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해 기록한 스탯은 무려 7승 무패 17세이브 30홀드 방어율 0.68 거기다 79이닝동안 탈삼진 122개의 미쳤다고 밖에 할말이 없는 맛간 스탯을 찍어주셨다.
그리고 2008년 마무리 투수로 전향한지 3년만에 통산 100세이브를 기록하여 명실공히 일본을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로 성장하였다. 이 당시 주니치 드래곤즈에 있던 이병규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은 것이 유일한 패배.
2010 시즌엔 세이브 28개로 세이브 부분 4위 방어율 2.01으로 무난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지만, 요미우리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2차전 경기에서 8회초 1점차 상황에 등판해 아웃카운트 2개를 잘 잡아놓고 다음타자인 가메이에게 볼넷, 오가사와라에게 2루타, 라미레스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으면서 퐈이야!(...) 덕분에 한신은 가을야구를 광탈하게 되었다. 마무리가 블론세이브 하는 거야 피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8월 이후로 페이스가 떨어지며, 제구에 문제가 생긴 듯하다.
2011 시즌엔 통산 100홀드를 기록해 사상 최초로 100홀드-100세이브라는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으며 4년만에 40세이브 고지에 올라 최종 41세이브로 통산 2번째 세이브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해 FA자격을 취득했지만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한신에 잔류했다.
2012 시즌엔 48경기에 나와 24세이브 47.2이닝 58탈삼진을 기록했으며 해외 FA자격을 취득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을 선언했다.

3.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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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시즌 종료 후, FA자격을 얻어 일찌감치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으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케빈 타워스 단장과 면담을 가지는 등, 여러 팀과 접촉했다.
그리고 시카고 컵스와의 2년 $9.5M 규모의 계약을 맺었다. 3년차에 컵스가 $5.5M의 클럽옵션을 가지고 있으며 옵션을 실행하지 않을 경우 $500K의 바이아웃을 지불한다.

3.1. 2013 시즌


4월 1일(현지시각), 피츠버그와의 원정경기에서 3:1로 리드중이던 9회말 2사 주자 1,2루 위기상황에 등판하여 공 2개로 마지막 타자를 외야플라이 처리하며 첫경기에서 첫 세이브를 기록하는 좋은 출발을 보였다.
그리고 기존 마무리 투수였던 카를로스 마몰이 부진하자 개막 일주일만에 마무리 자리를 따냈지만 후지카와 본인도 막장투를 선보였고, 15일자 DL에 올랐다. 하락한 패스트볼 구위론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제압하기 힘든 모양새. 신시내티 레즈전에서는 추신수와 풀카운트 승부 끝에 팔꿈치에다 패스트볼을 작렬하며 일부 팬들에게 제구 막장이면 볼넷이나 줄 것이지 왜 애꿎은 추신수를 때리냐(...)며 비난받기도 했다.[6] 그리고 5월 말 토미 존 서저리를 요하는 부상을 당했음이 알려졌다. 컵스와 일본인 선수의 악연은 계속 이어지는 듯.

3.2. 2014 시즌


토미 존 서저리를 받은지 약 1년만인 8월 6일 콜로라도 로키스전에서 복귀, 1이닝을 몸에 맞는 공 하나를 내주고 무실점으로 막았다.
시즌이 끝나고 5.5M의 클럽옵션 사용이 거부되어 50만불의 바이아웃을 받고 FA로 풀리게 되었다.
이후 텍사스 레인저스와 1년 1M의 계약을 체결했다. 다르빗슈 유와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서로 같은 팀에서 만나게 돼서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는듯 하다.
시즌 이후 논텐더로 풀렸을때 발과 허리에 잦은 통증으로 은퇴를 생각했었다고 한다.

3.3.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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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경기에서 컵스와의 경기에서 5실점을 하는등 부진하였으며 사타구니 통증으로 시즌초에 재활을 하였다.
2015년 5월 15일(한국시간) 캔자스시티와의 홈경기에서 3-6으로 뒤진 8회에 등판하여 1이닝을 퍼펙트로 막았다. 하지만 그 다음 클리블랜드전에서는 5회 2사 후 구원등판해 0⅔이닝 동안 3실점했다. 2경기 평균자책점은 16.20
5월 18일(한국시간) 40인 로스터에서 제외되며 지명할당되었다. 친정팀인 한신과 라쿠텐이 영입을 계획하고 있는 걸로 알려졌다.
6월 1일 친정 한신 타이거즈도 다른 일본프로야구팀도 아닌 독립리그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의 고치 파이팅 독스 라는 팀에 입단하였다. 일단은 고치현 출신인만큼 고향팀에서 뛴다는 의미를 두는 듯.#
11월 14일 결국 한신에 복귀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등번호는 예전 번호인 22번이 아닌, 야부 케이이치 등 선발 투수들이 달았던 18번.
현재 가네모토 도모아키 감독은 선발 투수로 기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4. 일본프로야구 복귀 후



4.1. 2016 시즌


2016년부터 선발 투수로 전향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몸 상태가 연투는 힘든 모양.
시범경기에서는 3월 6일 요미우리전에 첫 등판을 마쳤으며 그 이후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며 정규시즌 3월 27일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NPB복귀 이후 첫 공식경기 등판. 하지만 5이닝 4실점으로 경기내용은 좋지 못했다.
4월 3일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와의 경기에서 6이닝 무실점으로 2003년 이후 4580일 만의 선발승을 기록하며 시즌 첫 선발승을 따냈다.
4월 10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14년만의 고시엔 구장 선발등판에서 4.1이닝 7실점으로 부진했다. 후지카와의 14년만의 선발등판겸 2012년 이후 4년만의 등판을 보기 위해 4만여명의 관중이 모였으나 직구의 구속이 140Km 초반대에 머무르며 투구수가 조금 많아지더니 4회부터 눈에 띄게 볼이 높아졌고 5회에는 연속 5안타를 맞으며 결국 강판당하고 말았다.
4월 14일 2군에 내려가지 않고 1군에서 컨디션 조절을 하며 몸 상태를 끌어올리는 것을 조건으로 1군 선수등록에서 빠지게 되었다. 무너진 투구 밸런스와 잃어버린 직구의 구위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듯 하다.
5월까지의 성적이 5경기 출장 1승 2패 방어율 6.12로 매우 좋지 않은 편 이다. 컨디션 조절을 위해 2군 경기에도 출장했었지만 선발로서는 힘들다고 판단하여 5월 말 부터 구원투수로 다시 전향하여 마운드에 오를 것 같다.
시즌 종료후 등번호를 예전에 쓰던 22번으로 다시 변경했다.

4.2. 2017 시즌


필승계투조에 쿠와하라 켄타로-마르코스 마테오-라파엘 도리스의 트리오가 완전히 자리잡아 한때 붙박이이던 승리조 계투로서의 기회는 다소 제한되었으나, 그래도 일본프로야구 복귀 2년만에 50경기 등판을 넘기고 좋은 성적을 보여주었다. 왕년의 미친 구위로 엽기적인 탈삼진율을 기록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52경기 56.2이닝을 던져 3승 6홀드 ERA 2.22 71탈삼진 24볼넷의 성적으로 37세의 중간계투로서는 흠잡을 데 없는 성적을 기록했다.

4.3. 2018 시즌


53경기에 등판해 54.1이닝 5승 3패 21홀드(26홀드포인트) 방어율 2.32 67탈삼진 37볼넷의 훌륭한 성적을 기록했다.

4.4. 2019 시즌


7월 25일 기준 35경기 4승 1패 22홀드(26홀드포인트) 53탈삼진, 방어율 1.54를 기록하며 한신의 필승조로 활약하며 노익장을 발휘하였다. 올스타전 출장은 덤. 7월 하순부터는 원 마무리였던 용병 도리스가 부상과 부진에 빠지며 마무리로 출장했다.
9월 29일 주니치전에서 조정차 올라왔는데, 2홈런을 맞으며 3실점하여 통산 방어율이 2점대가 되었다.
시즌 최종 성적은 56경기 56이닝 4승 1패 16세이브 23홀드(27홀드포인트) 83탈삼진, 방어율 1.77. 이게 만 39세 투수의 기록이다. 압권인 것은 탈삼진율로 '''9이닝당 13.34'''를 기록하여 전성기 때의 탈삼진율과 거의 비슷한 기록을 찍었다. 이럴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아직 직구 구위가 살아있다는 점이다. 구속은 141~145 정도로 내려왔는데, 아직도 회전수는 2500rpm이 찍힌다...

4.5. 2020 시즌


작년의 강력했던 불펜진이 존슨과 도리스의 재계약불발, 가르시아의 선발재전향, 모리야의 가정폭력 추문으로 인한 1군 말소 등으로 1년만에 와해되어서 나이 40살에 클로저 자리에 복귀하게 되었다. 40대 이토이 후쿠도메가 클린업을 치고 40대 노우미가 필승조를 하고 마찬가지로 40대 후지카와가 마무리를 하는 NPB, 아니 전세계 최고 노인정 팀의 현실을 상징하는 기용.
그것과는 별개로 2019년까지 미일 통산 세이브 243개로, 명구회 가입까지 세이브 7개가 남았는데 클로저로 시즌을 출발하며 별일 없으면 올해 명구회 가입이 확실시되었다.
근데 팀이 개막시리즈 피스윕부터 시작해 이기질 못하는데다, 본인도 6월 25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끝내기 스리런을 얻어맞으며 불을 질렀다. 7경기째 요코하마전에서 드디어 시즌 첫 세이브를 올렸으나, 이때도 만루까지 몰리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7월 9일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세이브 상황에 등판하였으나 이번에도 주자를 쌓더니 결국 카메이 요시유키에게 적시타를 맞으며 또 실점을 했다. 이 안타가 카메이의 통산 1000번째 안타인건 덤. 이후에 추가실점을 하진 않으면서 간신히 시즌 2번째 세이브를 올렸다.
그러나 이틀 뒤 요코하마전에선 세이브 상황에 올라왔지만 수비의 도움을 받지못하며 허무하게 실점을 허용했다.[7] 이후 네프탈리 소토에게 역전 2점홈런을 얻어맞으며 결국 패전투수가 되었고 경기 다음날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대체 마무리는 수아레즈.
10일 쉬고 1군에 다시 등록되었는데 강등되어 추격, 패전조로 쓰이고 있다. 일단 추격조로는 4경기 연속 무실점으로 괜찮은 모습을 보이는 중.
하지만 끝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고 판단했는지 8월 30일자로 시즌 종료 후 은퇴를 표명했다. 현재까지 미일 통산 245세이브를 기록중인데 과연 한신이 명구회 입성 기준인 250세이브를 달성시켜주느냐에 관심이 집중 될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지금 한신은 수아레즈가 성공적으로 클로저 역할을 수행중이기도 하고 선두 요미우리와 승차가 좀 벌어지긴 했으나 아직 시즌 중반이라 우승경쟁이 완전히 끝난것도 아니기 때문에 개인 기록을 챙겨줄만큼 여유있는 상황은 아니라 큐지에게 5세이브를 챙겨주고 떠나보낸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다.
타니모토 본부장의 말에 따르면 이미 큐지의 몸 상태는 심하게 망가져서 어깨, 팔꿈치, 허리, 다리 등 성한 곳이 없다고 한다. 은퇴를 표명한 사유도 몸 상태 때문이었고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할 단계라고까지 말한것을 보면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보인다. 그간 좋지 않은 몸으로 던져온 것이 쌓이고 쌓여서 올시즌에 터진 모양. 또한 큐지는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표명했으나 구단이 은퇴를 만류해서 올해까지 뛰는 거라고 한다.해당 기사
후지카와마저 250세이브를 채우지 못하고 은퇴하면 소위 마쓰자카 다이스케 세대로 불리우는 선수들 중에서 명구회에 들어가는 선수는 한 명도 없게 되는 것이 유력해졌다. 마쓰자카를 필두로 스기우치 토시야, 와다 츠요시, 나가카와 카츠히로, 타자로는 무라타 슈이치 등 대선수들이 여럿 배출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이후 코로나 집단감염 사태로 인해 10월중순 급하게 콜업되었다. 일단은 패전조로 던지고 있는데, 1이닝도 버거운지 0.1이닝, 0.2이닝 정도로 끊은 등판이 많지만 그래도 실점은 하지 않고 잘 막고는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교진이 시즌 1달여를 남기고 우승을 거의 확정지어 개인 기록을 챙겨줄 여유가 생겼다. 올해는 세리그는 플레이오프도 없어서, 과연 후지카와의 남은 5세이브를 챙겨줄 수 있을지가 잔여시합의 그나마 볼거리.
하지만 더 이상의 세이브를 거두지 못하고, 2020년 11월 10일 요미우리와의 홈경기에서 은퇴경기를 맞게 되었다. 이날 경기는 무조건 9회 등판이 예정되어 있었고, 0-4로 뒤지던 9회초 마운드에 올라와 직구만 12개를 던지며 1이닝을 막아냈다. 245세이브로 긴 야구인생을 정리하고, 한신 타이거즈의 레전드 투수로 남게 되었다.

5. 피칭 스타일


후지카와의 투구 스타일은 비율상 70%정도를 직구로 채우고 여기에 완급조절 떡밥용인 포크볼과 커브를 섞어준다. 다만 투구폼의 변화 및 구위가 떨어진 2011시즌 이후에는 포크볼 구사율이 30%로 늘어나며 직구와 포크볼의 투피치 피쳐로 변모하였다.
아무튼 과거 전성기 시절의 이러한 직구에 편중된 피칭이 잘 먹혔던 이유는 2010시즌 기준 최고 156km/h, 평속 150km/h의 빠른 구속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이 가진 노하우와 원래부터 뛰어난 컨트롤을 살린 투구법에 있다. 일본 방송쪽에서 후지카와의 직구를 연구한 프로그램에 따르면 우선 후지카와의 직구는 홈플레이트 부근에서 다른 투수들에 비해 살짝 위로 솟아오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는 후지카와의 공이 일반 투수 평균의 1.3배가 넘는 다회전구이며 [8] 회전축의 각도도 매우 적기 때문에 볼의 궤적이 중력에 의해 떨어지지 않고 거의 직선으로 날아가기 때문이었다.[9]. 때문에 실제 상대해보면 더 빨라보이고 보통 투수의 직구보다 훨씬 위에서 날아온다고 한다. 이 부분은 '''후지카와 큐지 - 직구라는 이름의 마구'''라는 일본 다큐멘터리에서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
거창한 설명이 싫다면 '''한마디로 직구 구위가 킹왕짱이라 그렇다.''' 오승환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2009~2012시즌 중 후지카와의 직구 비율 최대치는 2010시즌의 74.8%였고, 2014시즌 오승환의 직구 비율은 70.79%였다.
하지만 2010년 후반부터 종종 과거의 투구폼으로 회귀가 시작되더니 2011년 이후로는 전성기 시절과 하체부분에서 아마추어가 봐도 많은 차이가 날 정도로 투구폼이 변화하면서[10] 직구의 구위가 상당히 줄어들어버렸다. 전성기시절의 후지카와가 공을 놓는 포인트와 지금의 포인트를 비교해보면 위아래로는 5.5피트가량에서 형성이 되는 것은 비슷하지만 좌우의 변화가 1~1.5피트정도의 포인트에서 릴리즈되던 볼이 2피트정도로 약 한발가량 멀어진 모습이 관찰이 된다. 이로 인하여 스핀앵글도 자연스레 바뀌었는데 과거 4~7도 가량의 차이를 보이며 약 184~7가량으로 형성이 되던 스핀앵글이 현재는 약 195~205도 사이에서 형성이 된다. 약 10~20도가량 차이가 나게 되었다라는 이야기인데, 후지카와의 솟아오르는 듯한 직구는 다회전의 영향도 있었지만 스핀앵글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 했다.[11] 앵글이 멀어진 만큼 대신에 호리젠탈 무브먼트는 -1에서 -4정도로 약간 늘긴 했지만 대신에 거의 직선에 가깝다라고 여겨지던 버티컬 무브먼트가 약 4인치가량 상당히 감소하게 되었고 평속도 140초중반대로 떨어졌으며 여전히 2300이라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보기 드문 더러운 회전속도를 자랑하고는 있지만 과거만큼의 회전속도는 아니기에 예전만큼의 위력적인 직구는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대신 낙폭이나 좌우변화는 역시나 크지 않지만 후지카와가 던지는 직구에 비하여 약 9인치정도 떨어지는 포크볼로 쏠쏠하게 재미를 보는 중. 이 포크볼에 의한 헛스윙율이 상당히 높은데다가 좌우변화가 직구와 거의 차이가 없기에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고 알려져 있다. 게다가 직구와 속도도 약 15km 정도 차이나기에 타이밍 빼앗는데도 요긴하게 쓰이는 것 같다.
그리고 제구력이 상당히 뛰어난 편이다. 보통 후지카와의 경우 대체로 '직구의 구위'쪽에 주목을 많이 하는 편 이지만, 투구추적을 해 보면 커브의 딜리버리는 조금 불안정한 감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릴리즈포인트가 거의 일정하다라고 할 정도로 딜리버리 컨트롤이 매우 뛰어난 투수. 보통 투수들의 경우 늦게 배운 구종 혹은 자신이 잘 던지지 않은 서드피치같은 경우 조금씩은 차이가 나기 마련이지만 후지카와의 경우 잘 던지지 않는 커브조차도 릴리즈포인트가 위아래 그리고 양 옆 으로 1피트 이내에 위치하고 있다. 그만큼 투구폼이 상당히 안정되어있다.[12] 게다가 직구로 유명한 투수답게 변화구의 경우 스핀앵글이 약간 불안정하지만 직구의 경우 스핀앵글이 거의 차이가 없는 모습으로 직구에 한정한다면 일본내에서 후지카와보다 안정적으로 던지는 투수도 드물정도라고 한다.

6. 단기전 징크스


이와세 히토키G.G.사토, 아베 신노스케의 고마워요 시리즈에 묻혀 잘 언급되지는 않는데, 은근히 국제대회에서 한국의 수호신 노릇을 톡톡히 했다.(...) '''2006 WBC 대회 8강 리그에서는 이종범에게 2타점 결승타'''를 얻어맞았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에서는 세번째 투수로 한국전에 등판. '''이대호, 고영민, 이진영이 간단하게 공략해서 동점타를 뽑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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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대회
WBC 2회 대회 때 준결승, 결승에서 마무리 투수가 올라가야 할 상황에서 하라 타츠노리 감독이 정작 마무리로 데려간 후지카와는 캐무시하고 선발 투수로 데려갔던 다르빗슈 유를 올렸다. 이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차후 국가대표로 나오지 않겠다고 발언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후지카와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그런 보도를 완전 부정했다.
국내에서도 정규시즌에서는 리그를 씹어먹다 포스트시즌만 가면 얻어터지는 일이 잦았는데,
1. 2005년 시즌 방어율은 1.36, 허나 '''일본시리즈 방어율은 9.00'''[13]
2. 2008년 시즌 방어율은 0.67. 거기에 시즌 1패는 이병규에게 얻어맞은 끝내기 홈런 밖에 '''없었지만[14],''' '''클라이맥스 시리즈 방어율이 6.00에 타이론 우즈에게 결승 2점홈런을 허용해 팀의 광탈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3. 2010년 시즌 방어율은 2.01, '''그러나 클라이맥스 시리즈 방어율은 9.00!''' 역시나 탈락에 공헌(...) 다만 이 문제는 시즌 후반부터 체력 문제로 연일 불질을[15] 일삼았던 터라 어느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결국 시즌 성적은 낮은데 통산 클라이맥스 시리즈 방어율이 7.88이란 엽기적인 기록을 남겼다. 참고로 동일기간인 2005 - 2010시즌까지의 통합방어율은 1.26이다. 시즌에는 끝판왕 포스가 철철 넘치는데 이상할 정도로 클라이막스 시리즈와 국제전에서만 두드려 맞는 것을 보면 단기전에 대한 울렁증이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시즌에서의 나쁜 성적은 정규시즌 중의 혹사로 인해 체력이 떨어져서 생긴 문제라는 견해가 있다.
한신 타이거스에서 13년간 활약한 포수 야노 아키히로의 은퇴식이 예정된 경기에서 9회 2아웃을 잡아놓으면 대기명단에 있던 야노 선수가 포수마스크를 쓰고 등장할 예정이었으나 팀의 3:1 리드상황을 지키지 못하는 3점 홈런을 맞고 본의 아니게 대선배의 은퇴식을 망쳐버린 일도 있었다.[16][17] 공교롭게도, 본인의 은퇴식때 야노가 감독으로 재직하는 상황이 되었다. 노린건지는 모르겠지만 야노가 홈플레이트에서 마지막 공을 잡아주며 10년만에 이 공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백넘버 후임인 오승환은 단기전에 매우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2014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숙적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업셋시키면서 클라이맥스 시리즈 MVP를 먹었다.[18]

7. 이모저모


  • 오승환의 아시아 최다 세이브 타이틀에 도전하는 것이 본인의 목표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실제로 2007년 46세이브를 기록하며 기록의 턱밑까지 쫓아왔다.
[image]
  • 히로스에 료코와는 중학교 동창인데 후지카와에게 못생겼다고 엄청 갈궜다고 한다..(..) 그래도 한신에 입단할 때 격려편지를 보내는 등 나름의 친분은 있었는 듯. 지명된 직후 토크쇼에서 큐지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 NPB시절 테마송으로는 LINDBERG의 every little thing every precious thing를 사용했다.[19] 부인과의 추억이 담긴 곡이라고 한다.

  • 테마송과 함께 등장신. 화면에 나온 여성은 그냥 팬이 아니라 이 테마곡을 부른 LINDBERG의 보컬 와타세 마키로, 자신의 노래를 테마송으로 써주는것에 대해 후지카와에게 감사하다고 개인적으로 싱글 CD를 전달한다던가 코시엔에 시합을 보러 가기도 했다고 한다..
  • 2007년 9월 경기때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이던 이승엽의 타석때 첫구를 백네트로 던지면서 고의성 논란이 있었던 적이 있었고 이때 이승엽도 상당히 벙쪘었던듯. 그래서인지 그후 방한잠실야구장에서 만나서 대담을 나눴을때 후지카와가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냐고 하자 이승엽이 "백네트에 공을 던진 선수로 기억하지^^" 라고 화답해줬다. 예상대로 그건 고의가 맞기는 했는데 이승엽한테 화가 난것이 아닌 당시 타임을 받아준 심판때문에 투구동작을 멈추다가 부상 당할뻔 해서 재차 초구를 던질때 그렇게 했다고 한다.(...)
  • 2010년 같은 성의 후지카와 슌스케가 입단하면서 한동안 이름이 후지카와 큐(藤川球)까지 쓰였다가[20] 계약시 본인의 강한 요구에 따라 큐지가 후지카와(藤川)로 슌스케가 후지카와 슌(藤川俊)까지 표기되는 것 으로 일단락되는 듯 하였으나 스포츠기사에서는 오히려 큐지가 후지카와 큐(藤川球) 혹은 큐지(球児)로 표기가 되었고 슌스케가 후지카와(藤川)로 표기가 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다행이 2011시즌부터 슌스케가 등록명을 슌스케(俊介)로 바꾸면서 일단락 된 듯.
  • 한신의 등번호 22번은 원래 '미스터 타이거스' 타부치 코이치를 필두로 포수들이 착용했던 번호였지만, 후지카와의 맹활약으로 현대 한신 팬들에게는 마무리 투수의 등번호로 주로 인식되고 있다. 그 등번호를 이어받은 게 오승환이었고, 후지카와가 쌓은 등번호의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 유튜브 Q&A에서 거인팬이라고 밝혔다

8. 연도별 주요 성적


년도
소속팀
경기수




HP[21]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이닝
2000
한신 타이거스
19
0
0
0
-
-
4.76
25
21
25
22⅔
2002
12
1
5
0
-
-
3.71
56
30
64
68
2003
17
1
1
0
-
-
3.38
28
13
19
29⅓
2004
26
2
0
0
-
-
2.61
26
11
35
31
2005
80
7
1
1
46
53
1.36
57
21
136
92⅓
2006
63
5
0
17
30
35
0.68
46
24
122
79⅓
2007
71
5
5
46
6
11
1.63
50
22
115
83
2008
63
8
1
38
5
13
0.67
34
16
90
67⅔
2009
49
5
3
25
3
8
1.25
32
17
86
57⅔
2010
58
3
4
28
5
8
2.01
47
22
81
62⅔
2011
56
3
3
41
5
8
1.24
25
14
50
51
2012
48
2
2
24
2
4
1.32
34
16
58
47⅔
년도
소속팀
경기수




HP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이닝
2013
시카고 컵스
12
1
1
2
1
-
5.25
11
2
14
12
2014
15
0
0
0
0
-
4.85
18
8
17
13
통산
27
1
1
2
1
-
5.04
29
10
31
25
년도
소속팀
경기수




HP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이닝
2016
한신 타이거스
43
5
6
3
10
14
4.60
58
33
70
62⅔
2017
52
3
0
0
6
9
2.22
41
29
71
56⅔
2018
53
5
3
2
21
26
2.32
29
38
67
54⅓
2019
56
4
1
16
23
27
1.77
29
32
83
56
통산
766
59
35
243
162
216
2.02
617
361
1205
922
[1] 공 구(球)자에 아이 아(児)자[2] 일본프로야구 최다안타(3,085개) 기록 보유자인 장훈에게 3,000안타가 되는 홈런을 허용했다. [3] 유투브에 후지카와의 수정 전/후 투구폼이 나오는데, 공 릴리스 시 오른 쪽 다리가 일찍 구부려져 낮은 점을 발견하여 다리를 펴게 해 릴리스 포인트를 높이게 한 것이 적중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잘 안 알려졌으나 이 이후에도 2010년 후반기등 종종 이 시절의 폼으로 회귀하는 일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구위가 여지없이 하락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4] 같은 케이스는 아니지만 비슷한 일로 인해 구위를 잃어버렸던 키쿠치 유세이의 경우도 비슷한 교정으로 구위를 되찾았다.[5] 제프 윌리엄스-후지카와 큐지-쿠보타 토모유키.[6] 웃긴건 2년뒤에 한솥밥을 먹었다는거다.[7] 쿠와하라의 안타타구를 중견수 우에다가 뒤로 흘려버리는 바람에 1루주자 카지타니가 득점.[8] 일반적인 아시아 선수들의 공 회전속도는 1900대에서 형성이 되는 반면에 후지카와의 전성기시절 회전속도는 거의 평균 2400~2500에 가까웠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미친 회전수로 꼽히는 우에하라 코지가 평균 약 2300~2400대에서 형성이 되며 메이저리그 최고속으로 꼽히는 아롤디스 채프먼정도 되어야 회전속도가 2400~2500대에서 형성이 된다. 회전속도만 놓고 보면 세계최고수준이였다는 이야기다.[9] 이것은 과거의 오승환의 직구가 위력적인 이유와도 완벽하게 일치한다. 오승환의 직구 또한 엄청난 회전수와 적은 회전축 각도가 구위의 원인으로 꼽힌다. 이것은 2012년에 스포츠 운동화라는 프로그램에서 나왔다.[10] 일본 내 피칭 인스트럭터 및 코치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과거처럼 하체가 주저앉으면서 무게중심이 오른쪽으로 많이 쏠리는 모습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나이가 나이인지라 투수의 경우 나이를 먹으면 팔 각도가 내려오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노화현상 혹은 혹사로 인한 영향 보는 측면도 없지않아 있다.[11] 일반적으로 직구의 경우 손가락으로 찍어누르는 방향으로 휘어지게 되어있다. 과거의 후지카와의 경우 수평을 180도라고 봤을때 약 4~7도 사이이내에서 아래로 찍어 눌렀기에 좌우의 변화는 적었지만 위로 솟아오르려는 힘이 강한 구질을 보유하고 있었다. 즉 따라서 후지카와의 솟아오르는 직구는 스핀앵글의 영향이 상당히 강했던 것, 하지만 지금은 수평에서 20도정도 벗어난 위치에서 누르기 떄문에 공도 자연스럽게 20도 정도 대각선으로 휘어지려고 하게 된다.[12] 흔히 투구폼 겹쳐놓기 움짤로 유명한 다르빗슈 유가 위아래로 1피트 그리고 양 옆으로 2피트 이내로 딜리버리 컨트롤을 하는 투수라는 걸 떠올려보면 굉장히 딜리버리 컨트롤이 뛰어난 선수라는 이야기다.[13] 수정 전 플레이오프 성적이라 기록되어 있었으나 클라이맥스 시리즈세리그에 도입된 건 2007년부터다. 따라서 2007년 전까지 센트럴리그가을야구일본시리즈뿐이었다.[14] 거대한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게 라뱅쓰리런의 시초가 되었으니까... 고마워요 후지카와?[15] 시즌 중반까지 1.30이던 방어율이 시즌 종료때는 2.01까지 수직상승했다.[16] 경기 영상. 상대는 당시 최약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홈런을 친 선수는 무라타 슈이치였다. 경기 해설자가 홈런 허용 순간 '''"(외야 펜스를 넘어) 가지마! 가지마! 날아가지마!"''' 를 외치는 장면이 압권.[17] 다만 이 사건에 관해서 유튜브 영상 댓글 등을 보면 무라타는 별다른 비난을 받지 않고 오히려 '''"대선배의 은퇴경기라고 대충 플레이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라며 칭찬하는 의견이 많이 나오는 반면, 해설자에 관해선 '''"돈받고 일하면서 그딴 편파적인 해설을 하냐"''' 란 식의 비난이 엄청 많다. 그도 그럴 게, 유튜브에서 야노의 은퇴경기 영상을 찾아보면 해설자가 무라타의 타석 때 '''"뭐 분위기 읽을 줄 알면 여긴 헛스윙으로 삼진 당했으면 좋겠네요ㅋㅋㅋ 분위기 읽고 연출 좀ㅋㅋㅋ"''' 이런 식의 수준 낮은 소리를 해대질 않나, 무라타가 파울을 날리자 '''"분위기 읽을 줄 아는구만유ㅋㅋㅋ"''' 하질 않나, 그리고 결정적인 게 바로 위의 저 발언. 이런 수준 낮은 편파해설을 해대니 비난을 안 받는 게 이상하다. 당장 위의 의견도 한신 팬들 사이에서 꽤 나온 것. 다만 변론을 하자면 해당 방송중계는 전국방송이 아니라 선 텔레비전 중계로 '''간사이 지역을 대상으로 한신 경기를 전속으로 중계하는 방송사이다.''' 일본프로야구(+메이저리그) 중계는 온갖 지역방송들의 각축장이라 한국처럼 전 경기가 전국단위 채널로 방송을 타는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 한신 팬의 입장에 기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정작 무라타도 '''"가지마! 위험해! 위험해!"'''라고 생각한건 덤.[18] 오승환의 한일통산 300세이브 허용구단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다. 하라보살이 괜히 오승환을 탐냈던게 아니다.[19] 노래가 나오면 한신팬들은 메가폰을 들고 좌우로 박자를 맞춰 떼창을 불렀는데 보통 마무리투수들이 빠른 템포의 노래를 사용하는 것 과는 다르게 조금 독특한 풍경. 덕분에 2007년에 후지카와의 사진을 재킷에 담아서 야구소년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재발매 되었었다.[20] 형제가 고시엔에 배터리로 출전했을 당시 형제 구분을 위해서 쓰던 등록명[21] 홀드포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