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용덕

 




'''출생'''
1908년
대한제국 한성부
'''사망'''
1968년 2월 4일 (59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복무'''
만주국군
대한민국 육군
1932년 ~ 1945년
1945년 ~ 1961년
'''재임기간'''
육군본부 헌병 총사령부 총사령관
1954년 ~ 1960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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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슬하 4남
3남 원창희 예비역 준장
'''최종 계급'''
중교(만주국군)
중장(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육군본부 헌병 총사령부 총사령관
'''주요 보직'''
연합참모본부 헌병 총사령부 총사령관
연합참모본부 고문

元容德
1908년 ~ 1968년
1. 소개
2. 생애
3. 인간관계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1. 소개


만주국, 대한민국군인. 본관은 원주(原州)#.

2. 생애


1908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1]를 졸업한 뒤에 강릉군에서 개원의를 하다가 1932년에 만주군에 입대하였다. 군의관으로 근무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최종 계급은 만주군 중교.[2] 당시 만주군 소속 조선인 중 최선임자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부교장을 지냈다. 웃긴 게 부교장이었는데 학생이기도 했다.[3] 그후 조선경비대에 입대하였고 특별임관으로 소령 계급을 받았다. 남조선국방경비대 초대사령관을 지냈고 정치인들과 자주 교류했다.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있으면서 1952년 5월 개헌에 반대하던 야당 국회의원들 50여 명이 탄 통근버스를 버스 채로 강제 연행하여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고, 이에 이승만은 1953년 3월 3군 헌병을 통합한 헌병사령부를 만들어 원용덕을 사령관으로 앉혔다. 같은 해 6월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일으켰으며, 1954년에는 야당 정치인들의 집에 북한 공산당 명의로 쓰여진 선전 문서를 집어넣는 정치공작을 벌였다.[4]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몰락한 후 원용덕도 1960년 7월 29일 헌병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고 8월 3일 김성주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구속되었다. 재판 결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63년 특사로 풀려났다. 1968년 2월 4일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만주군 복무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올랐다.

3. 인간관계


아들인 원창희(元昌熙, 1933-1984)도 육군 장교로 임관, 준장으로 전역했다. 1950년 6월 입교한 대한민국 첫 정규 4년제 육사 1기 입학생이 되었는데, 문제는 지원 및 입학 당시의 나이가 17세여서 입학 지원 조건에 되지 못했다. 그러나 당대의 실력자 원용덕 장군은 육사 심사위원들에게 원창희 장군이 육사에 입교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했고, 덕분에 같은 나이대로 탈락을 할뻔했던 박경석 장군도 생도로 입교하는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원창희, 박경석 등 정규 4년제 육사입학생들은 입교 후 25일 새벽(한국전쟁 발발)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북한군을 막으려는 채병덕의 무모한 지시로 소총훈련 한 번 제대로 못한 채 내촌-태릉 전투에 동원된다. 전쟁 동안 학우 중 3분의 1이 전사 및 실종되었으며, 첫 정규 4년제 육사 1기 졸업생은 이들이 아닌 전두환, 노태우 등이 속한 육사 11기들이다. 첫 정규 4년제 육사입학생들은 무려 46년이 지난 1996년에야 정식 육사 졸업장이 나오고, 육사 기수 대신 똑같이 전쟁터에 끌려나온 육사 10기(생도 1기)[5]의 다음 학번이란 의미로 '생도 2기'로 불리운다. 아버지와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덕분에 군사정부시절 승승장구했으나, 10.26 이후 전역을 선택했고 월남전 참전당시의 부상 후유증때문에 1984년 비교적 이른 나이인 51세로 별세했다.#
40년대 말부터 콧수염을 길러서 콧수염이 트레이드마크였다. 해방 이후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상당히 친분이 있었는데 박정희가 어느날 성씨가 다른 사람을 삼촌이라고 데려오자 "정희야, 너 상놈이구나."라며 취중에 농담을 던졌고 박정희는 그를 외삼촌이라며 둘러댔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사람이 '''남조선로동당 간부이자''' 수많은 군인을 남로당원으로 가입하도록 선동한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친구, '''이재복'''이었다.
그래도 박정희와는 굉장히 친했고 박정희가 죽게 될 위기에서 건져준 사람이 원용덕이다. 박정희가 형인 박상희 때문에 연좌제로 잡혀들어가서 사형당할 위기에 몰렸을 때 박정희를 변호해주고 박정희에게는 박상희의 잔당들을 실토하도록 설득해서 박정희를 사형에서 백의종군으로 감형시키게 해 주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원용덕 덕분에 죽을 위기를 모면하고 육군본부에서 정보국 문관으로 백의종군을 했다.
게다가 박정희가 형 문제로 연좌제에 걸리기 전에는 대위[6]였는데 이 때도 박정희는 미군들과의 사이에서 계속 싸움이 일어났는데 그때마다 그 둘을 화해시켜준 게 원용덕이었다. 미군측에서 정말 마음먹으면 박정희를 갈아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원용덕이 박정희를 보호했다.

4. 기타


사망 11일 전인 68년 1월 24일 저녁에 신당동에 있는 그의 2층 양옥집(건평 60평)이 화재로 전소된 적이 있다. 소방서 추산 당시로 1,500만원의 재산피해를 냈다. 화재 당시 원용덕 장군은 병환으로 인하여 병원에 입원중이었다. 어찌보면 일종의 복선이 아닐까 싶다.

5. 대중매체에서


1995년에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김구>에선 성우 겸 배우 김수일이 맡았다.
[1] 당시에는 연희전문이랑은 다른 학교였다. 뒤에 합쳐져 연세대 의대가 되었다. [2] 만주군은 괴뢰국이었지만 중국식 계급인 교관급 장교 표현을 썼다.[3] 김계원의 회고에 따르면 미군정에선 위관급 장교 출신 군경력자들은 몇 주씩 교육을 시켰지만 영관급 장교 출신의 군경력자들은 하루나 이틀 만에 임관시켰다고 한다.[4]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후에도 원용덕은 "그들(불온 문서를 받은 정치인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려고 그랬다"고 말했다. 용공으로 몰아 잡아넣으려고 함정을 팠음을 인정한 셈.[5] 이들도 2년 교육과정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전쟁때문에 1년 교육만 마치고 무리하게 투입되었다.[6] 이 때문에 형 문제로 연좌제에 걸려 육군본부에서 계급도 없이 정보국 문관으로 백의종군할 당시에도 김종필 중위에게 윗사람 대우를 받았다. 또한 박정희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소령으로 복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