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원

 




'''김계원 부장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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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金桂元 | Kim Kye-won
'''
<colbgcolor=#012060><colcolor=#ffffff> '''출생'''
1923년 6월 28일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동부2동
(現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동부2리)#
'''사망'''
2016년 12월 3일 (향년 93세)
'''본관'''
나주 김씨
'''호'''
안산(安山)
'''재임기간'''
제18대 육군참모총장
1966년 9월 2일 ~ 1969년 8월 31일
제5대 중앙정보부장
1969년 10월 21일 ~ 1970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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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2060><colcolor=#ffffff> '''형제자매'''
남동생 김계일, 김계삼, 김계정
'''배우자'''
서봉선
'''자녀'''
아들 김병덕, 김병민
김혜령
'''학력'''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연희전문학교 (졸업)
'''종교'''
개신교
'''경력'''
민주공화당 당무위원
제5대 중앙정보부장
제7대 주 중화민국 대사
제5대 대통령비서실장
원효실업 회장
원효실업 명예회장
'''군사 경력'''
'''임관'''
군사영어학교 (1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45 ~ 1945년 8월
대한민국 육군
1946 ~ 1969년
'''최종 계급'''
대장
'''최종 보직'''
육군 참모총장
'''주요 보직'''
육군대학 총장
육군 제1야전군사령관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4.1. 드라마
4.2.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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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군인, 정치인, 외교관.

2. 생애


1923년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동부2동에서 개신교 집안의 4남 1녀 중 장남이자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배재고등학교 졸업 후 1942년 경성부 연희전문학교(現 연세대학교) 상학과에 입학했다가 일제가 학병제를 실시하면서 강제 징집되어 일본 육군에서 견습 사관으로 복무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일본군 소위로 임관과 함께[1] 소집 해제가 되어 서울특별시로 돌아왔다. 국군준비대의 이혁기[2]와는 교회 친구였다. 당시 서북청년회와 건군준비대의 갈등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 이혁기는 그가 개신교인이라 공산당 계열이 많은 건군준비대보다는 미군정이 장교단 인원을 만드는 쪽에 가담하는 것을 추천했다. 당시 일본군 출신들은 이응준이 주로 이끌었고 김계원은 이응준의 아들과 아는 사이였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 1기로 대한민국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1960년 육군대학 총장이 되었다가 육군대장이 되었고 이후 1966년부터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69년 육군참모총장으로 대장 예편 이후 '남산 멧돼지' 김형욱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다. 임명 당시의 에피소드가 흥미로운데 김계원은 대장 전역 후 부인 서봉선과 함께 고향 쪽으로 기차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영주역에서 기차가 멈춰서더니 수십 분간 움직이지 않았고 영주역장이 객석을 일일이 누비며 '김계원 장군님'을 찾아다녔다고 하는데 청와대에서 급히 호출했다는 것. 결국 김계원은 기차에서 내려 인근 군부대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청와대로 직행하여 중앙정보부장 임명 언질을 받았다.[3] 아래 문단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중앙정보부장으로서는 유능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신임이 대단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 김계원은 전임인 김형욱과는 달리 상식적인 사고를 하는 신사같은 인물이라 김계원 본인은 이 영전을 곤혹스러워했고 내가 어떻게 그런 중책을 할 수 있겠냐고 강력하게 고사했지만 박정희는 '김형욱이처럼 사람 막 안 패도 돼. 임자가 맡아!'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한다.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김형욱과 비교하면 나름대로는 할 수 있는 한 양심을 지키고 불필요한 폭력도 최대한 자제한 편으로 당시 야당 사람들은 칭찬 반 놀림 반으로 그를 '남산골 샌님'으로 부르기도 할 정도였다.[4] 그래서였는지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대비에 미흡하다는 이유로 1970년 12월 중앙정보부장직에서 경질되는데 중앙정보부장 중에서는 재임 기간이 짧은 편이다.[5] 후임 중앙정보부장에는 주일대사였던 "제갈조조" 이후락이 취임하였다.
1971년 1월 주 대만 대사에 임명되었으며 1978년 12월에는 주일대사로 가게 된 김정렴의 후임으로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는데 이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천거에 의한 것이다. 이 때도 김계원은 일차 비서실장 임명을 거부했으나 노년의 정권 말기 박정희는 "실장일은 안 해도 되니 와서 말벗이나 하라"면서 결국 비서실장에 임명했다.[6] 김정렴이 영전한 이후 외롭던 박정희가 정말 친밀한 인물을 비서실장으로 들인 것. 세간의 오해와는 다르게 박정희는 차지철과는 다소 거리를 두는 사이였다고 한다. 1979년 10월 26일 10.26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의 신분으로 궁정동 만찬에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과 함께 참석했다. 만찬 직전에 김재규에게서 차지철을 죽일 거란 말을 들었으나[7]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고 만찬에 참석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김재규의 "차지철을 해치워 버리겠다"는 말이 국가 고위직 인사 사이에서 말 그대로 암살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8] 만찬장에서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을 쏘고 김재규의 부하(궁정동 안가 직원)들이 청와대 경호원들을 거의 다 죽여버릴 동안 이를 막지 못했다. 물론 김계원 비서실장은 에 취해 있던 상황이었고 무기를 휴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를 쓸 수는 없었다.
김재규가 궁정동을 떠나자마자 박정희의 시체를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싣고 갔다. 박정희의 죽음을 확인한 후에는 청와대로 들어와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으며 최규하와 함께 육군본부로 가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만나 거듭 범인은 김재규라고 말했다. 직후 정승화가 김재규를 체포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으며 김재규는 아마도 김계원을 믿었던 것 같은데 공포심에 의한 것이었든 어쨌든 결과적으로 김계원은 김재규의 뒷통수를 친 셈이었다.[9] 그러나 이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만찬 전에 김재규로부터 박정희 암살을 암시하는 말을 듣고도 이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박정희 암살을 방조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1980년 재판에서 김재규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고 1988년 특별 사면으로 복권되면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2016년 12월 3일 향년 93세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한국 헌정 사상 최대 규모의 촛불 집회가 열린 날이었다. 유족들의 주장에 따르면 생전에 최순실 게이트 소식을 듣고 박근혜를 매우 걱정했단다. 사실 김계원도 대통령비서실장으로서 박근혜와 최씨 일가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3. 여담


  • 육군참모총장 시절에는 육군의 병력 처우 개선 및 예비군 무기 도입과 관련해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주임원사[10] 제도를 도입하며 부사관 및 병사들의 권익을 개선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훗날 TV 자서전에 출연하면서 자신이 군인으로 있으면서 이룬 업적들 중 주임원사 제도 도입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예비군의 창설로 개인화기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자 마침 제식 소총 교체를 계획 중이던 미군으로부터 구형 M1 카빈 소총 100만 정을 인수받아서 예비군의 주력 화기로 쓰게 하였다.[11]
  • 국군(당시 조선경비대) 최초의 군악대장이다. 군사영어학교 수료 후 임관할 때 군악대장으로 보직되었다. 배재고등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연주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군악대를 창설했으며 곧 전투 병과로 옮겨 갔지만 육군참모총장 시절 국악대 창설을 지시하는 등 군악대 발전에도 기여했다.
  • 10.26 사건 직후 다음 날 새벽 2시에 박근혜에게 소식을 전하자 박근혜가 "전방은요?"라고 되물었다고 한다.[12]

4. 대중매체에서



4.1. 드라마



4.2. 영화


[1] 일본 군부는 패전 직후 군인들이 후생성의 군인연금 및 공제비를 더 받을 수 있도록 패전 당시 진급을 앞두고 있었던 장병들을 대상으로 임관과 진급을 대대적으로 시켜줬는데 이를 포츠담 진급이라고 한다. 김계원의 경우에는 복무 기간이 짧을뿐더러 조선인은 패전 이후에는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후생성의 군인연금 대상자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었다.[2] 후에 월북하여 6.25 전쟁 전에 사망.[3] 출처: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제1권, 동아일보사.[4] 강원용 목사의 자서전에서도 이런 면모는 두드러지는데 호통과 협박으로 일관했던 전임 중앙정보부 인사들과는 달리 김계원은 강원용 목사에 대해 수집한 자료를 늘어놓으면서 진심으로 한숨을 쉬며 '목사님이 자꾸 이러시면 우리도 어찌하는 수가 없지 않냐'고 인간적으로 하소연할 정도였다.[5] 중앙정보부부터 국가정보원까지 역대 수장 중 김계원은 12.12 반란 세력을 빼면 단기 재임 3위에 해당하는데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보다 짧을 정도. 김계원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던 시절에 요원들이 샌님처럼 행동해서 힘이 없어 보였다는 박정희의 압박이 있었단다.[6] 박정희, 김계원, 김재규 3인방은 군 시절부터 매우 친했다고 하는데 박정희와 김재규는 동향과 같은 교사 경력이 있었고 박정희와 김계원은 누가 더 키가 크냐며 아웅다웅하며 장난칠 정도였다고 하며 김계원은 김재규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을뻔한 것을 구해줬다고 한다.[7] "형님, 그 놈을 해치워버릴까요"라고 말해서 차지철만을 얘기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설도 있다.[8] 이 견해는 다름아닌 10.26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대법원 1980. 5. 20., 선고, 80도306)에서 양병호, 임항준, 김윤행 대법관 등이 제기한 소수 의견에 나타나 있다. 양병호 당시 대법관의 소수 의견을 그대로 인용한다. "(김재규의) 해치워 버린다"는 말이 깡패 사회도 아닌 피고인들과 같은 국가 고위직 인사 사이에서 죽여없앤다는 뜻의 말로는 도저히 새겨들어지지 아니한다 할 것이고 피고인(김계원)이 위 T(차지철)를 암살하겠다는 것인 점을 인식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자료는 보여지지 아니한다."[9] 보통 무기력한 방관자 정도의 이미지지만 사건 전에 김재규의 발언을 그대로 듣고 있었던 식으로 전후 여러 미심쩍은 움직임이 있어 암묵적인 방조자 내지 기회주의적 배신자로 보는 입장도 있다.[10] 당시에는 원사 계급이 없었고 주임상사라 불렸다.[11] 예비군들 입장에서는 이런 낡은 총을 아직도 쓰게 하느냐고 불만을 가질 수도 있지만 1960~1970년대라면 카빈도 2선급 화기로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당시 베트남전쟁에 파병나간 미군도 후방 부대 장교들 중에는 M1 카빈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정도. 문제는 수십 년이 지난 21세기 현재까지도 계속 M1 카빈을 쓴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예비군 부대는 박근혜 정부 시절 모조리 M16으로 바뀌었다.[12] 이 말은 박근혜 본인의 회고록이 각색된 듯하다. 회고록 본문을 발췌한 것으로 보이는 기사를 인용하면 “간밤에 일어난 일을 김계원 비서실장이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 무의식 중에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삼팔선은 안전한가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틈타 북한이 무력 침공을 감행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