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석(1933)

 

'''박경석
朴慶錫 | Park Kyung S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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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 '''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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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월 26일[1] (91세)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본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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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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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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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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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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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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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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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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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고등학교 (31회 / 졸업)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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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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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박영석, 배우자 김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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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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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랑(韓史郞)[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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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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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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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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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석 서재'''(본인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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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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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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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생도2기 /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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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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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 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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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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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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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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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월 제1진 맹호부대 제1연대 초대 在求大隊長(재구대대장)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장
제6보병사단 작전부사단장
제3군사령부 인사처장
육군본부 기획처장
제1군단 참모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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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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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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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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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베트남전쟁
1. 개요
2. 생애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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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군인, 시인, 소설가이다. 육군사관학교 생도2기 출신으로 입교 직후 6.25 전쟁 참전했고, 베트남전쟁에 초대 재구대대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2. 생애


1933년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본정(현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원리 88번지)에서 출생 하였다. 이후 대전고등학교 31회로 졸업하고, 17세의 나이에 청운의 꿈을 꾸며, 첫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이때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17세라는 나이로 인해 자격 미달이 되었지만, 같은 나이의 당시 헌병사령관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얻은 원용덕 장군의 자제 원창희 씨의 육사 입교 압력이 육사 심사위원들에게 들어오자, 똑같이 나이제한으로 불합격한 박경석 생도도 원창희 생도와의 형평성 문제로 합격되었다. 국방일보 박정인 장군 회고록에서 발췌한 원창희, 박경석 생도 합격 비화
입교 보름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고, 노도와 같은 북한군의 남하를 막고자 박경석 생도를 포함한 생도 2기생들은 채병덕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어이없는 명으로 윗 기수인 육사 1기생과 함께 생도대대로 편성되어 포천 방면으로 이동, 내촌-태릉 전투를 치룬다. 그런데 졸업 및 임관이 머지않은 육사 1기와 달리 박경석 생도를 포함한 육사 2기는 입교한 지 보름째로 기껏 소총 영점을 맞춘 수준이라 당장 실전에 투입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당장 북한군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채병덕 장군의 오판으로 전투에 투입되어 애꿎은 생도 절반이 전사했고, 낙오된 일부는 불암산 자락에서 게릴라 활동을 펼쳤다.
이후 박경석 생도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끊어진 한강 다리를 구사일생으로 넘어 후퇴, 임시 수도인 대전 원동 국민학교에서 1기 선배인 육사 10기생들의 철모에 일명 반창고 소위 계급장을 붙여 주며 눈물의 소위 임관식을 치러 주었다.육사 10기생의 눈물겨운 반창고 임관식과 비운의 육사 생도 2기생의 비화.동아일보1993년 軍 어제와 오늘 편
이후, 전장에서 더 많은 위관장교 자원을 필요로 하자 정부는 이들을 신설된 육군종합학교[4]에 입교시켜 단기 교육 후 소위로 임관시켰다. 박경석 소위도 이 때 임관된 초임장교 중 하나였다. 이들은 생도 2기 출신 1명을 제외하고, 전부 새로 신설된 제9사단[5]의 소대장으로 갔다. 그 1명은 당시 권력자였던,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의 아들 원창희 소위였다. 원창희 소위는 임관과 동시 후방의 부산역 파견 헌병대장으로 배속받았다.[6]
새로 신설된 9사단의 30연대 3대대 10중대 3소대장 보직을 받은 박경석 소위는 여러 전투에서 생사를 넘나들었으며, 평창전투에서 수류탄으로 인한 피폭으로 부상당하여 부대에서 낙오, 한 번은 북한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다. 박경석 소위가 포로로 잡힌 북한군 내에서는 박경석 소위를 비롯한 많은 한국군 장교포로들을 해방군관이라는 이름으로 전향시키려 했지만, 많은 이들이 이러한 북한군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으며, 포로 생활도 도망가든 말든 자유로웠다고 한다. 박경석 장군은 포로 시절을 회고하며, 포로로 잡힌 북한군 사단의 사단장[7]이 적이었지만, 그의 리더쉽에 감명 받았다고 한다. 부대에 식량이 떨어지면 사단장도 부하들과 함께 굶는 등의 리더쉽에 영향을 받아 뒷날 한국군내 정치군인이 판을 칠때도 그들의 회유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참군인으로써 군인의 본분과 사명을 다하는데 계기가 되었다.
한편 그가 포로 생활할 즈음 국군에서는 박경석 중위가 전사한 줄 알고 가족에게 전사통지서 전달과 함께 전후, 현충원에 박경석 중위의 가묘를 설치해 기렸다. 물론 어찌어찌 생환해 나중에 자신의 묘지가 안장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파묘하지 않고 불의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자신의 가묘를 찾아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의 생애가 다해 현충원에 안장되는 날 파묘하겠다고 한다.서울 현충원 안장자 검색에 9사단 소속 강원도 정선에서 사망한 이가 바로 박경석 장군 자신이다.

1951년쯤, 전쟁이 교착 상태가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초기 육사 생도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려, 미 8군의 도움으로 육사를 재건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중위 신분이던 육사 생도 2기생들은 육사 생도 복귀를 놓고 논쟁하다가 결국은 새로운 모집 공고에 의한 육군사관학교 재건으로 전두환, 노태우등이 판을 치던 그 육사 11기생들이 첫 정규 4년제 육사 생도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 후반부터 위관, 영관급 등 연간 100명의 장교들이 미국 포트 베닝 보병학교에 군사학 유학을 떠나는데, 여기서 배운 자유진영의 선진 군사학은 귀국 후, 전술 교관으로서 후배 장교들의 군사 지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한국군의 현대화에 있어 양적 팽창에 이어 질적 성장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후에 월남전에 대대장으로 참전하면서 전승 행진을 하는데 있어 많은 도움을 주었다.[8]
1965년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청과 월남의 파병 요청 형식으로 조문환 장군을 단장으로 하는 주월 한국군 군사원조단 비전투부대 비둘기부대가 파병되었고, 뒤이어 미국의 대 한국 군사원조 약조인 브라운 각서 체결과 야당의 반대 등 진통 끝에 전투병력의 파병이 결정되었다. [9] 이에 수도사단 내에 전 군의 고급 인력들을 모아 월남에 파병하기 위한 1진인 맹호부대가 창설됐고, 이에 박경석 중령도 1연대 재구대대[10]대대장으로 부임해#[11] 강원 홍천에서 월남에 투입되기 위한 준비훈련을 시작한다.
하지만 강재구 대위의 10중대가 훈련 도중 이등병 하나가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은 뒤 이를 놓치는 일이 벌어졌고,[12] 부임 전 부사관학교에서 수류탄 교관으로 있었던 그는 주저없이 수류탄을 덮쳐 일대의 중대원들을 살리고 현장에서 순직했다. 그 뒤 박경석 대대장은 채명신 사단장에게 강재구 사건은 사고가 아니라 '살신성인'이라고 강하게 주장했고, 이에 채명신 사단장도 역시 재구상 재정에, 아예 부대 이름을 재구대대로 개명시키며 그를 기렸다.[13] 그리고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재구대대는 월남전에서 용감무쌍하게 싸워 세계 만방에 자랑스러운 한국군의 용맹을 빛내었다.
이후 월남에서 귀국 후, 1970년 8월 육군 제 1사단 12연대의 연대장으로 부임해 1사단 내 DMZGOP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당시 휴전선 부근을 담당하던 미국 2보병사단 예하 4보병여단의 근무 지역을 인수 받았다. 이는 그동안 휴전선 지역을 관할하고 수비하던 미군의 임무를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계기와 선례가 되었다. DMG내 미군 관할 지역을 인수받은 육군 1사단 12연대와 연대장 박경석 대령이 말하는 비화
1972년 10월,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대령과장으로 있던 박경석 대령에게 당시 실세 중에 실세 육군 수경사령관 윤필용 사령관의 참모장 손영길 대령이 찾아왔다. 육사 12, 13기 출신의 신참 대령들의 연대장 가용 청탁 쪽지였는데, 박경석 대령은 이 쪽지의 명단의 인물들을 대차게 거절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참혹했다. 한달 뒤, 박경석 대령은 거의 확실시 되던 준장 진급에서, 진급에서 한참 밀리던 윤필용 사령관의 직속인 김성배 대령으로 준장 진급자 명단이 바뀌었다. 그후 2번이나 연거푸 준장 진급 누락 끝에 진급이 된 박경석 준장의 첫 보직은 6사단 부사단장DMZ 내에서 발견된 땅꿀 특수개척팀장이었다. 박경석 장군의 준장 진급 비화[14]

3. 기타


2020년 들어 논란이 되고 있는 백선엽(육군 예비역 대장)의 사후 현충원 안장과 관련된 논란에 대하여, "현행법이 그러니 현충원에 안장되는 건 어쩔 수 없겠으나, 후과가 클 것이다"고 경고했다.#(링크기사: 오마이뉴스 취재) 그리고 자신이 후손이라면 극구 만류할 것이라며 차라리 가족묘에 묻히는 게 낫지 않냐는 인터뷰를 남겼다.
그러면서 원희룡 제주도지사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에 대해 "미친 X들"이라는 표현을 쓰기까지 하면서 "무식하다"고 일갈했는데, 그는 "어떻게 대한민국 독립을 막으려던 사람(링크된 기사의 내용상 백선엽 장군으로 보임)을 이순신과 홍범도와 비교할 수 있나. 기가 막히다. 우파든 좌파든, 명백한 진실을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다른 기사에서는 '나는 청춘을 야전에서 바친 군인으로서 스스로 보수라 자처하지만 나쁜 것까지 가지고 가는 보수는 참된 보수가 아니다. 가짜와 거짓은 털고 가야지, 속이고 갈 순 없다.'란 말을 덧붙였다.#
또한 "6.25 전쟁 당시의 공적을 인정하더라도, 프랑스에서는 백선엽 장군의 간도특설대 복무 전적이라는 행동은 극형감이다"라며 "아무리 후사에 공적을 세웠더라고 조국을 배반한 행동이 하나라도 있다면 프랑스에서는 극형(사형)에 처해진다"[15]고 밝혔다. 물론 그도 "일본군 출신이라 해서 다 친일파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최소한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잡으러 다닌 사람'''을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는 없지 않겠나."라고 끝맺었다.[16]

'''박경석 장군 "'백선엽이 전쟁영웅?' 실체를 폭로한다"''', 2020.10.27
[1] 음력 1933년 1월 1일.[2]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원리 88번지[3] 등단시 및 육군 현역장교 시절(1959~1981) 사용, 전역 후 본명 사용[4] 12.12사건 당시 육본 측에 있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동 사건 당시 육본 측에 있었고 갑종 전우회 대부였던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전두환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낸 오자복 예비역 대장, 노무현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낸 조영길 예비역 대장, 박정희 정부에서 경호실장을 지낸 차지철 예비역 중령 등이 육군 종합학교 출신이다.[5] 사단장 장도영, 사단 참모장은 박정희 [6] 원용덕 장군도 최종 보직이 헌병 총사령부 사령관이었고, 아들 원창희 장군도 전방의 부사단장 보직을 마지막으로 육군 준장으로 전역하였다.[7] 당시 인민군 10사단장이었던 '전문섭'으로 알려져 있다.[8] 한국군 위관, 영관 장교들의 미국 군사 유학은 한국군의 현대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 전쟁 전후, 전쟁으로 인한 양적으로 급성장한 한국군은 1950년대 장교들의 미국 군사 유학으로, 질적 성장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영향도 있었지만, 미국의 선진 교육문화를 배워 온 일부 장교들의 엘리트심 발동으로 5.16이라는 쿠데타를 잉태하기도 하였다. 또한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 '사선을 넘어' 박정인 장군의 회고록 '풍운의 별'에서 1950년대 한국군 장교들의 미국 군사 유학 도미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9] 야당과 여당의 일부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월남 파병에 있어 한국군의 처우에 대해 많은 불만을 나타내었다. 특히나 집권 여당 공화당의 초대 당 의장을 지낸 정구영변호사는 "이 장관 엄밀히 따지면 호지명의 월맹은 민족주의 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왜 우리가 그들과 총칼을 맞대야 하는거요. 내가 보기엔 그간 프랑스는 자신의 식민지 정책의 일로 싸웠고, 지금 미국은 제국주의 위세를 떨치려 월남에서 군사적 시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도와주어야할 이유가 없지 않소. 물론 이 장관 말대로 우리는 가난하오. 월남전 파병으로 우리 경제를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소. 그러나 더러운 전쟁에다가 피를 뿌리며 돈을 벌기보다는 궁핍하지만 깨끗하게 사는것이 옳다는 생각이오."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의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에서 발췌. (대한 군사 원조의 약속인 브라운 각서)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를 포함한 경제적 원조와 월남이라는 특수 시장 개척에 한국 기업을 포함한다는 파병의 조건으로 협상하였다.[10] 초대 대대장 박경석 중령에 이어 정치군인 노태우, 박희도 등이 줄줄이 이 자리에 앉앗다.[11] 사실 재구대대를 포함, 월남에 파병된 한국군의 활약상은 파병부대를 지휘한 장군들의 각종 수기에 나와 있지만 박경석 장군의 재구대대장 시절의 회고부분은 월남전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12] 사실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에서도 이를 언급하는데, 해당 훈련장은 굴곡이 심해서 사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고 한다.[13] 여담으로 훗날 27사단에서 차성도 중위 역시 이렇게 순직했는데, 문제는 (전인범 후임 사단장이 총대를 메고 재발굴할 때까지) 사고사로 은폐돼 (같은 살신성인이라도) 윗선의 개념에 따라 그 처우가 달라진다는 씁쓸함을 자아냈다.[14] 여기에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면 창군 및 초창기 한국군의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 였던 진급 문제에 관해서다. 물론 후자에 기술하겠지만, 이 고질적인 진급 문제는 5.1612.12가 일어났던 원인이기도 했다. 창군과 한국전쟁으로 군은 양적 성장에 힘입어 장교들의 진급이 빠른 편이었다. 소위 달고 몇 개월 후에 대위, 소령, 더구나 전쟁으로 인해 단숨에 영관급에서 장성으로 진급하는 일이 많았는데, 전쟁이 끝나자 이러한 초고속 진급은 멈춰졌으며, 특히나 군사영어학교 출신 70여명 대부분이 장성으로 진급했고,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자리를 계속하여 번갈아가며 앉는 사태가 생겼다. 특히나 이런 경향은 1970년대 이후 정규 육사 출신들과 단기 육사 및 비육사 출신간의 진급문제가 두드러졌다. 박경석 장군 같은 경우에도 1950넌에 소위 임관후 전쟁이 끝나자 대위로 있었는데. 1955년 갓 소위 임관한 정규 육사 11기생들이 1970년 후반 영관급 대 장성급으로 진급이 역전되었다. 이 같은 내용은 이등병에서 장군까지 지낸 최갑석 장군의 증언과 그의 회고록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15] 그렇게 나치 부역자들이 극형에 처해지고, 조국을 위해 임시정부군 및 레지스탕스로 싸웠다는 사람들이 베트남과 알제리에서 독립을 원하던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들 뿐만아니라 양민들에게까지 나치 게슈타포, 친위대들 못지않은 잔인한 고문과 학살을 저질렀고 아직도 진정한 사죄를 하지 않고 있다.[16] 물론 이견은 있다. 우선 백선엽은 일선에서 활약한 것이 아니라 화기부대에서 화력 지원 업무를 담당했고 당시 만주에 남아있던 한인들이 포함된 조직들은 독립군이라고 하기에 많이 어려운 공산주의 계열 빨치산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일반부대도 아니고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창설된 일본의 수족같은 특설대에서 복무한 경력은 백선엽이 두고두고 지고갈 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