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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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박정희의 친형이자 김종필의 장인이기도 하다.
2. 생애
1920년 구미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9년, 처음으로 개교한 대구사범 제1회 입학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는 경성사범, 평양사범, 대구사범 단 3곳의 사범학교만이 존재했다. 월사금 등을 일절 받지 않는데다, 용돈조로 격려금까지 지급되고 졸업과 동시에 교사로 발령이 났다. 따라서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사범학교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무지막지한 경쟁률을 자랑했다. 경성제국대학이 있었지만 제국대학답게 식민지에선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었으며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는 사립학교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3년 뒤, 막내 동생인 박정희가 대구사범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1927년, 신간회에 참여해 활동했다. 1931년 신간회 해소 이후 박상희는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이듬해인 1935년에는 동아일보의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활동했다. 일제말기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건국동맹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수감된 상태에서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구미에서 그의 정치적 인기는 대단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인망이 높았는데, 심지어 대구경찰서장이 "'''박상희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지고 신원을 보증한다'''"고 말할 정도였다.[3] 이때문에 구미 지역 지식인, 독립운동가 그룹의 리더로 일제가 패망하자 건국준비위원회 구미 지부를 창설하고 건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듬해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았으며, 후에는 조선공산당 선산군당 총책이 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박상희는 반탁운동을 지도하였으나, 조선공산당을 이끌던 박헌영이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면서 좌익그룹이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자 당의 결정에 따랐는지 이후 침묵을 지켰다.[4] 1946년 대구 10.1 사건으로 경상북도 일대에 시위가 확산되자, 그는 선산-구미 지역 시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대구지역을 유혈진압한 뒤 선산으로 진입한 경북도경 - 경기도경 연합부대에게 총살된다.
현재 박상희는 구미시 상모사곡동에 있는 생가 인근의 가족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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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친형(11살 차), 김종필, 김용태의 장인''', 그리고 박준홍, 박영옥의 부친이다. 김종필과 박영옥의 아들, 딸인 김진과 김예리 남매에게는 외할아버지이고 박재옥,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에겐 큰아버지가 된다.[5] 박성빈에게는 셋째아들이다.
박정희와는 나이차가 많이 나서(11살) 형보다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고 하며, 단순히 형제 관계라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있었다고 한다.[6] 특히나 박정희의 아버지인 박성빈이 박정희가 어른이 되자마자 사망했기 때문에 '''박정희의 눈에는 박상희가 진짜 아버지로 보였을 것'''이다. 박상희도 박정희를 어렸을 적부터 보살폈기 때문에 박정희를 아꼈다.
하지만 박정희가 어린 시절 결혼한 김호남과 부부관계를 가지는 것을 거부하고[7] 교사일을 그만두고 출세를 위해서 만주군에 입대하자 박정희에게 단단히 실망을 했고, 이후 일제가 패망하고 처량한 신세로 돌아온 박정희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래도 형제인지라 박상희가 경찰의 손에 의해 살해당하자 박정희는 당연히 복수심을 가졌고 이런 연장선상에서 남로당에 입당하게 되었다.[8] 다만 6.25 전쟁 이후 반공이 국시처럼 된 남한에서 남로당 출신이란 점은 당연히 박정희에게 콤플렉스가 되었고[9] , 5.16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하게 된 이후부턴 형 박상희에 대해서도 별로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
사후 자녀들이 지탄 받는 남동생 박정희와 달리 자식 농사에는 비교적 성공한 편인 듯. 최악의 국정농단 사태를 일으켜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박근혜, 마약 범죄로 수차례 구속을 반복했던 박지만, 박근혜와 박지만보다는 그나마 정상적이었지만 여러 망언들과 사기죄로 논란과 비난이 오가던 박근령 등 박정희 소생의 조카 자녀들과 달리[10] 딸들인 박영옥과 박계옥은 김종필, 김용태[11] 등과 결혼한 이래 비교적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등 큰 논란은 없었다. 특히 장녀인 박영옥은 부창부수로서 남편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열심히 내조한 것으로 나름 유명하다. 다만 박정희 정권에서 토사구팽당하고 5공에도 부정축재자로 몰려 탄압받는 등 김종필 정치인생사도 마냥 편했던건 아니기에 속 태우는 나날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 박준홍은 살아생전 비리를 일으키며 매형 김종필과 누나 박영옥, 어머니 조귀분의 속을 썩였으므로 아들 농사는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박준홍은 대한축구협회 회장 시절에는 성과도 없었고 매형 김종필의 권유에 자유민주연합에 들어가 정치인이 되었지만 매번 낙선했다. 그리고 환갑을 넘어서도 제 버릇 못 주고 2010년에 국가재건친박연합이라는 군소정당을 만들어 기초의원 당선자를 내기도 했으나 공천헌금을 받은 것이 발각되어 구속되기도 했다. 다만 박준홍도 말년에는 출소 후 노환으로 죽어가는 매형 김종필, 누나 박영옥과 화해하였고, 2015년에 누나 박영옥이 사망하자 누나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상주 역을 담당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4. 기타
일제강점기부터 공산주의 활동을 하며, 같은 선산-구미 일대의 지식인으로서 박상희와 친분이 있던 황태성은 대구와 경북 일대의 시위가 진압되자 곧장 월북했다. 한국전쟁 이후 남로당 계열임에도 숙청에서 무사했으며, 남한 출신으론 드물게 북한 무역성 부상(무역담당 부처의 차관)을 역임하며 고위직을 지냈다.
한편, 황태성은 남한에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와의 친분을 내세워 김일성에게 비밀 특사로 파견을 요청했고, 그렇게 남파되었으나 박정희와 김종필은 옳다구나 하고 그를 간첩으로 처형했다. 다만 정치적 목적성이 다분한 행위였다보니 지금도 '황태성 밀사 사건'은 전후관계 등 정확한 전모가 드러나지 않아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김종필이 '소이부답'[12] 에서 관련 증언을 한 적은 있다. 다만 황태성을 신문한 중정이나 미국 측의 자료는 공개된 적이 없고, 해당 사건의 피고인들[13] 과 김종필의 발언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 무엇보다 김종필이 이전에 언론에 밝힌 것과 다른 취지의 발언을 하는 등 신뢰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어 교차검증은 앞으로도 어려워보인다.
박정희 생가는 사실 박상희 부부가 함께 살던 고택이기도 했다. 때문에 박정희 안티들 중 생가를 찾아온 사람들 중엔 "'''우리는 박정희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박상희 선생 때문에 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5. 미디어의 추측과 주장, 해석
- 박상희의 사망에 대한 그것은 알기 싫다의 해석
그것은 알기 싫다의 특집 중 하나였던 박정희 소백과사전에서는 당시 대구 경찰서장이 박상희에 관해서는 신원을 보장한다고 할 정도로 좌우익을 막론하고 존경받던 인물이었으나, 막상 경찰의 진압부대가 들이닥친 것에 위협을 느껴 탈출하여 도망쳤고 그 과정에서 추격하던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고 설명했다. 이 죽음이 박정희에게 상당한 충격이였을 것이라는 해석이 함께 이어졌다.
사실 대구 인근 지역에서는 좌익반군과 경찰과 우익 준군사세력간의 전투가 벌어졌고 당연히 상호간에 살상이 있었다. 그럼에도 박상희가 장악한 선산-구미 일대에서는 경찰서장도 무사했다. 박상희는 진압부대가 도착할 당시 우익인사들과 함께 있었고, 총성이 들리자 곧장 창문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도망치는 박상희의 뒤로, 우익인사들이 "우리가 잘 이야기해줄 건데 왜 도망가느냐"고 소리쳤지만... 결국 추격한 경찰의 총격에 숨지고 만 것.
박상희는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시위가 격화된 인근 지역에선 내전 상태가 벌어져서 상호간에 살상이 있었으니, 아무리 우익인사들이 변호한들 박상희가 격앙된 분위기 속에 무사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애초에 당시 분위기 특성상 상당수의 우익인사들이 권력자들과 가까울 뿐더러 인권에 관심이 적은 양반들이었으니 박상희의 판단 자체는 옳았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대구 인근 지역에서는 좌익반군과 경찰과 우익 준군사세력간의 전투가 벌어졌고 당연히 상호간에 살상이 있었다. 그럼에도 박상희가 장악한 선산-구미 일대에서는 경찰서장도 무사했다. 박상희는 진압부대가 도착할 당시 우익인사들과 함께 있었고, 총성이 들리자 곧장 창문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도망치는 박상희의 뒤로, 우익인사들이 "우리가 잘 이야기해줄 건데 왜 도망가느냐"고 소리쳤지만... 결국 추격한 경찰의 총격에 숨지고 만 것.
박상희는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시위가 격화된 인근 지역에선 내전 상태가 벌어져서 상호간에 살상이 있었으니, 아무리 우익인사들이 변호한들 박상희가 격앙된 분위기 속에 무사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애초에 당시 분위기 특성상 상당수의 우익인사들이 권력자들과 가까울 뿐더러 인권에 관심이 적은 양반들이었으니 박상희의 판단 자체는 옳았다고 볼 수도 있다.
박상희가 동생 박정희를 갈군 것 자체는 사실이다. 소학교 교사 시절 집안 어른들의 강요로 김호남과 결혼한 것이 내키지 않아, 아내 김호남의 방에조차 들어가지 않는 박정희에게 역정을 내며 거의 두들겨패다시피하여 방에 밀어넣었다고 한다. 이후 박정희가 만주군에서 복무하다 해방 이후 경력자 우대로 광복군 평진지대 중대장을 잠시 맡았는데, 미군정은 일체의 정치단체를 인정하지 않아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개인자격으로 입국하여 인천항에서 DDT 세례부터 맞았다. 만주군에 갓 부임했을 때는 정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고향에 왔었는데, 해방 이후로는 이 개인자격 입국 탓에 거지꼴로 돌아와 버려 "그냥 선생질이나 하면 좋았을 걸 괜히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 "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14]
- 만화 박정희
비록 자신은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나름대로 동생의 길(만주군 입대)을 지지하고 이해하였던(실제로는 당연히 몹시 화를 냈다), 그래서 나중에 죽은 뒤 박정희가 복수심에 잠시 남로당에 투신하게 만든 계기가 된 것으로 나온다.
실제 남로당 간부들이 박정희에게 '죽은 형의 복수를 해야하지 않겠느냐'면서 설득한 것은 맞다. 그리고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박정희는 결국 남로당에 비밀입당한다. 그랬던 것이 여순사건 이후 숙군 사업으로 발각되어, 군당국에 체포되어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백선엽을 비롯한 군 상층부에서, 남로당 고위층이긴 하나 적극 가담한 일이 없으며 죽이긴 아까운 인물이라는 구명운동이 벌어져 1년 만에 석방되어 불명예 제대로 그쳤다.[15]
실제 남로당 간부들이 박정희에게 '죽은 형의 복수를 해야하지 않겠느냐'면서 설득한 것은 맞다. 그리고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박정희는 결국 남로당에 비밀입당한다. 그랬던 것이 여순사건 이후 숙군 사업으로 발각되어, 군당국에 체포되어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백선엽을 비롯한 군 상층부에서, 남로당 고위층이긴 하나 적극 가담한 일이 없으며 죽이긴 아까운 인물이라는 구명운동이 벌어져 1년 만에 석방되어 불명예 제대로 그쳤다.[15]
배우는 김상중.[16] 대구 10.1 사건과 관련하여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는데, 이 소식을 누나에게 전해들은 박정희는 큰 충격에 빠진다. 회상 장면에서 자신(박상희)이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해방된 지금은 공산당 활동에 큰 뜻이 없지만 배신자가 될 수 없어 탈퇴를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17]
[1] 직강공파 29세손, 혁거세 65세손 '''◯희(熙)''', ◯인(仁), ◯하(河)항렬.[2] 창당 이전 사망.[3] 지금으로선 상상이 안되지만 대구경북지역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사회주의 계열 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심지어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였다.[4] 여담으로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오보사건은 해방 이후 한반도의 현대사를 결정지은 역사상 최악의 오보로 기록된다.[5] 그러나 이들의 경우 박재옥은 박상희가 죽기 9년전인 1937년에 태어났고,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에서 경찰의 총탄에 맞아죽었을 당시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이였다.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은 박상희가 사망한 이후인 1950년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들 박정희의 자녀 4남매들에게는 큰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다.[6] 박정희의 다른 형제자매들은 농부나 주부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기에 나름 지역사회에 명망이 있는 형을 더 존경했을 수도 있다.[7] 보다못한 박상희가 박정희를 두들겨패서 김호남과 같은 방에 집어넣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결국 박정희는 박상희가 사망한 직후에 김호남과 이혼하고 여차저차하다 육영수랑 결혼한다.[8] 당시 좌익계 인사들이 찾아와서 "형의 복수를 해야되지 않겠느냐"면서 입당을 권유했다고 한다. 사실 해방 이후 경찰과 국군의 대립 또한 심각했기에 이런 측면도 고려되었을지 모른다.[9] 1963년 대선 때도 남로당 경력으로 민주당 윤보선 측에게 크게 공격받았다. 종북몰이의 원조.(...)[10] 박정희의 자녀들 중 조용히 살았던 박재옥은 제외.[11] 가족 관계상 김종필과 김용태는 동서지간이다.[12] 중앙일보 연재.[13] 황태성만 처형당했지, 나머지는 징역 살다 풀려나왔다.[14] 황석영의 소설 강남몽에도 해당 장면이 등장한다.[15] 박정희의 구명운동에는 일본군, 만주군, 심지어 광복군 출신들도 일부 가담했다. 이는 박정희의 복잡한 이력에 기인하는데, 복무는 만주군에서 했으되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졸업하여 일본육사에 편입, 3등으로 졸업하여 일본육사 졸업생 그룹에게도 구명을 요청할 명분이 있었다. 또 상기했듯 해방 후 광복군 평진지대 중대장으로 잠시 복무하여, 이때 친분이 있던 평진지대장 김학규 장군도 구명에 나섰다.[16] 참고로 김상중은 제4공화국에서는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의 범인 문세광 역할을 맡았다.[17] 물론 역사적으로 딱히 근거가 있는 해석은 아니다. 박상희는 실제로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