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기독교)
1. 개요
'''원죄'''('''原罪''')는 서방의 기독교, 즉 가톨릭과 거기에 영향을 받은 종파들[1] 의 교리로, 성경에 등장하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이 금한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으면서 발생하였다는 죄이다. 영어로는 original sin(때때로 Sin이라고도 한다), 라틴어로는 peccatum originale이라고 한다. 정교회 쪽에서는 '조상의 죄' 라는 비슷한 개념이 있다 (ancestral sin / προπατορικό αμάρτημα).
2. 성서적 근거
교파를 불문하고 일단 '''뱀의 유혹으로 인한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섭취'''가 그 첫 번째 시발점이다. 어지간한 신학자들이 관련 내용을 전개할 때에는 창세기 이야기가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그 외에 신약성서의 구절들도 종종 언급된다.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데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무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거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 16-19절 개역한글
1 여러분도 전에는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여러분이 죄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고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의 두목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으며 오늘날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조종하는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습니다.
3 실상 우리도 다 그들과 같아서 전에는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서 육정에 끌려 살았던 사람들로서 본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에페소서 2장 1~3절 공동번역
심지어 다음과 같은 구절을 예로 들면서 아주 극단적인 의미로의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까지 빠지기도 한다.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장 12절 개역한글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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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서 16, 15-17a (마가복음 16장 9~20절은 진위성 논란이 학계에서 현재진행형이기에 주의해야 한다)
3. 신학적 배경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의해 선악과를 먹었고, 그러한 '벌'로 인해 쟁기로 밭을 갈아야 하고, 출산은 몇 배로 힘들어졌으며, 사망/요절은 물론이요, 심지어 쟁기로 밭을 가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가부장제 문제까지 나타나고 있다.
2세기 경의 이레네오는 최초의 인류는 미숙했으며, 이러한 '악'은 요나가 고래의 뱃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듯이 일련의 성장과정이며, 우리는 대대로 그 '결과/여파'에 시달릴 지언정 '''아담이 저주를 받은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5세기 무렵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등장해서는 '아담은 '''자발적으로''' 교만에 빠져서 그런 것이며, '''아담과 마찬가지로 그 후손들도 글러먹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리스어와는 달리 라틴어 'peccatum originale'는 두 단어 모두가 매우 중의적인 단어들인[2] 것도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킨다. 성경/논란/윤리적 문제 문서에도 원죄 관련 내용이 서술되어 있으니 병행해서 참조하면 좋다.[3]
삼위일체와 함께 비신자들은 물론 신자들마저 흔히들 잘못 생각하는 개념. '원죄'란 말을 쓰기는 했지만 원죄는 '죄'가 아니다. 전통적인 표현으로는 '''지은 죄가 아니라 남은 죄이며 짊어진 죄'''라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죄를 지을 때 온전하게 자기 판단만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내면적인 미망, 콤플렉스, 압박 등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도 이런저런 이유로 죄를 선택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간사한 동물이라 그러한 상태가 당연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노는 다르게 생각했다. 인간은 원래 그렇지 않았는데,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 때문에 '''인간 본성이 타격을 받아 결함을 지니게 됐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의 인간관은 성선설도, 성악설도 아닌 결함설이라고 이름 지을 만하다.[4] 이런 원죄로 말미암아 누구든 인간이라면 본성적으로 결함을 지니게 되어, 하느님과 멀어지고 죄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띄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히 정의롭고 선한 인간은 없다. 누구든지 원죄로 인한 내면적인 한계, 결함을 안고 산다는 것이 원죄의 본 의미라고 한다. 이 때문에 기독교 교리에서는 원죄라는 말은 사실 '''죄를 지으려는 경향성'''을[5]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6]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서방 교회를 뿌리로 두고 있으므로 원죄를 긍정하지만, 인간의 타락에 있어서는 상이한 주장을 한다. 칼뱅과 아르미니우스, 웨슬리는 각각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분적 타락을 주장했지만, 가톨릭 교회는 인간에게 원죄는 있지만 처음부터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의'에 관련돼서도 상이한 해석을 하는 것이다. 루터의 이신칭의는 인간은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인데 하느님의 은혜로 의롭다 칭함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주장인 반면 가톨릭의 의화 교리는 인간은 하느님에 은총에 의해 진짜로 의로워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칭의와 의화는 둘 다 영어로는 'justification'이라고 하지만 종파별로 가르치는 내용은 매우 다르다.[7] 물론 가톨릭도 원죄에 따른 원죄 이후 인간의 타락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바로 그 아우구스티누스가 먼저 들고 나온 개념이 인간의 타락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악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고 주장했고, 루터와 칼뱅이 그것을 더 심화해서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악에 물들어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의 인간관은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내재적인 의로움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관에 완전히 위배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상반되는 개념이 '''본죄''', 다른 명칭으로는 '''자범죄'''가 있다. 아담과 이브로 인해 생긴 '상태이상'이 원죄라면 자유의지로 지은 죄가 본죄이다. 빚으로 비유하자면 원죄는 '조상이 낸 빚을 물려받아 내가 채무자가 된 것'이라면 본죄(자범죄)는 '내가 직접 대출 받아 생긴 빚'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의미를 더 확장해서 어떤 인물, 조직 등이 과거에 도저히 씻기 힘든 죄를 저질러서 매우 오랫동안 속죄하고 그 대가를 치뤄야 할 때 원죄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정교회를 비롯한 동방 교회의 경우, 서방 교회와의 근본적인 신학적 차이 중 하나로 원죄에 대한 해석을 꼽을 정도로 관점이 매우 다르다. 후술할 '정교회의 입장' 부분을 보자.
4. 논란
성경/논란/윤리적 문제 란에도 원죄 이야기가 있으니 같이 참고하면 좋다.
원죄가 가지는 성격에 대해서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 두 사람 때문에, 그들의 후손인 모든 인간들은 자연히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죄인일 수밖에 없는 몸'''이라는 부분에서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전반적으로 서방 교회의 영향력, 즉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이 강한 편이다. 'peccatum originale'가 가지는 중의성을 어떻게든 해명한 가톨릭의 경우에도 중간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기 십상인데, 장로회는 그 시조인 칼뱅[8] 부터가 저걸 꽤 극단적으로 가져간 편인데다가, 심지어 한국의 근본주의 종파들은 '''원죄를 가지고 예수에 대한 '믿음'을 무슨 형이상학적 십볼렛으로 만들어버렸다. 심지어 사리사욕을 위해 그 의미를 아주 교묘하게 비트는 짓도 서슴치 않는다.'''
이렇게 왜곡을 거치면 거칠수록 당연히 비기독교인 입장에서는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된다. 삼위일체니 뭐니 하는 것은 "아... 그런가 보네요" 하고 넘어가고 이웃을 사랑하라느니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느니 하는 것들은 인류 보편적인 도덕 원리로 만인에게 두루 통용되어 큰 거부감이 없지만, 갑자기 쌩뚱맞게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 둘이 몇천 년 전에(실제로 있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지은 일을 가지고 "님도 이제 아담과 하와의 죄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님은 지옥행이에요.''' 근데 예수님을 믿으면 지옥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한들 ''''뭔 개소리야?''' 하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따라서 원죄에 대한 개념에 더하여 선악과와 에덴의 뱀의 이야기를 더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연히 이 경우에도 보통은 '''내가 얼굴도 본 적 없는 조상의 죄를 똑같이 짊어져야 한다는 게 무슨 정신나간 헛소리냐'''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에덴의 뱀에게 속아 넘어간 것도 선악과 따먹고 죄 지은 것도 전부 하와와 아담인데, 왜 그 후손(?)인 나까지 그 죄를 연대책임으로 짊어져야 하냐고. [9] 혹은 위와 같이 원죄 교리를 비틀어서 전달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전도하면서 원죄 개념을 빼놓고 말하기도 한다. 다만 이럴 경우 나중에 그 신도가 다른 종교 서적에서 이를 찾고 자신을 전교한 전도사나 자신이 다니는 교구 혹은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반문을 표하는 경우엔...
전도하는 쪽에선 어떻게든 원죄 개념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억지를 쓰고, 피전도자 쪽에선 짓지도 않은 죄 가지고 지옥까지 끌고 간다는 원죄에 대한 합당한 설명을 요구할 수 밖에 없기에 고대부터 현대까지 두 집단의 끝없는 논쟁이 벌어지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특히 "넌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지었으니 지옥에 간다. 지옥은 참 살기 힘든 곳이라더라. 너 혹시 이런 지옥엘 가고 싶니?" 또는 "내가 너 이런 지옥에 안 떨어지게 하려고 이렇게 전도하는 건데 말 좀 들어라. 왜 내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니?" 등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연좌제 주장은 피전도자 측의 인내심을 상실케 하는 대표적인 케이스에 해당된다.[10] 그도 그럴게 고대부터 전근대까지는 연좌제가 당연하게 행해졌고 현대에도 연좌제가 공식적으로 남아있거나 비공식적으로 이뤄지는 국가도 존재한다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연좌제는 도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맞지 않다고 줄어드는 형국인데다가 그 고대에서조차 연좌제 한다고 무슨 까마득히 먼 조상까지 파헤치는 짓은 안 했다. 왕가 같다면야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렇다고 전국가적으로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전인류적으로 기독교가 일어났을 때를 기준으로 해도 수천년 전 조상의 일로 현대까지 벌을 받아야 한다? 게다가 그것도 고대 기준이고 지금은 까마득한 조상은 커녕 내 부모, 형제,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처벌을 받아도 연좌제 하냐며 게거품 물 시대에 그런 얘기를 한다면 어이없어 할 일이다. 무슨 군사독재, 북한도 아니고...
다만 여기에 대해선 원죄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그리스도인들의 미흡한 설명도 한 몫한다. 일단 가톨릭에 의하면 원죄는 '''유비적(類比的, analogous)''' 의미에서의 죄이지 '''일의적(一義的, univocal)''' 의미에서의 죄가 아니다. 물론 '''다의적(多義的, equivocal)''' 의미에서의 죄도 아니다.[15] 원죄가 유비적 의미에서 죄라고 불리기에, 본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원죄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죄와 원죄를 일의적으로 파악하는 것 역시도 신학적으로 오류라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가톨릭의 경우) 그리스도교가 주장한 적도 없는 것을 신자가 방어하고, 주장한 적도 없는 것을 비신자가 공격하는 그런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피하려면, 우선 신자 스스로가 원죄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원죄와 본죄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정확하게 공부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How did the sin of Adam become the sin of all his descendants? The whole human race is in Adam "as one body of one man".[11]
By this "unity of the human race" all men are implicated in Adam's sin, as all are implicated in Christ's justice. Still, the transmission of original sin is a mystery that we cannot fully understand. But we do know by Revelation that Adam had received original holiness and justice not for himself alone, but for all human nature. By yielding to the tempter, Adam and Eve committed a personal sin, but this sin affected the human nature that they would then transmit in a fallen state.[12] It is a sin which will be transmitted by propagation to all mankind, that is, by the transmission of a human nature deprived of original holiness and justice. And that is why original sin is called "sin" only in an analogical sense: it is a sin "contracted" and not "committed" - a state and not an act.
어떻게 아담의 죄가 그 후손들의 죄가 될 수 있는가? 모든 인류는 “마치 한 사람의 한 몸과 같이”[13]
아담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류의 단일성’으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연관되듯이 아담의 죄와 연관된다. 그러나 원죄의 전달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이다. 아담이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을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받은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하여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계시를 통하여 알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유혹자에게 굴복함으로써 지은 죄는 개인의 죄이지만, 그 죄가 타락한 상태로 전달될 인간 본성에 영향을 미쳤다.[14] 이 죄는 인간 번식을 통하여, 곧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상실한 인간 본성의 전달을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전해질 것이다. 이 때문에 원죄를 유비적으로 ‘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죄는 ‘범한’ 죄가 아니라 ‘짊어진’ 죄이며,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다.
-가톨릭 교리서 404
원죄 교리에 대해서 일부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엔 죄(선악)에 대한 개념이 없었으니 선악과를 따먹은것이 죄라는것은 죄의 개념에 속하고, 죄의 개념이 없으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도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니 죄의 개념이 없었다는 것과 충돌되니 모순 아닌가"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기독교적인 죄와 선악의 개념을 잘 몰라서 생기는 오해이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시대를 초월하여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므로 그분 안에 존재할 때 선이 되고 그분을 떠나 존재할 때 악이 된다. 또한 예레미야서 2장 13절에서는 죄와 악에 대해 "나의 백성은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생수가 솟는 샘인 나를 버리고 갈라져 새기만하여 물이 괴지 않는 웅덩이를 팠다."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죄가 들어왔다'는 표현은, 이전에는 죄라는 관념 자체가 없었는데 선악과 사건 이후에 생겨났다는 뜻이 아니라, '''죄라는 관념은 있었으나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지 않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원죄개념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주장과는 별개로, 기독교의 교리를 정립하는 데 있어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도 알아두는 것이 좋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개념을 강하게 주장하게 된 배경에는 죄의 본성에 대한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이 한몫을 하고 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죄없이 태어났다고 주장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신학적 문제점을 들어 거기에 반대했다. [16] 외부인의 입장에서는 이상한 주장이지만 기독교계 내부에서는 원죄를 인정하지 않을 때 여러 문제가 생겨나기는 한다.
5. 원죄에 대한 여러 신학자의 견해
5.1. 이레네오의 견해
최초의 인류는 미숙했으며, 이러한 '악'은 요나가 고래의 뱃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듯이 일련의 성장과정이며, 우리는 대대로 그 '결과/여파'에 시달릴 지언정 '''아담이 저주를 받은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5.2.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의 원죄의 유전설의 개념을 체계화시켰다. '''아담은 스스로의 교만에 눈이 멀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며, 그런 식으로 처음부터 인류의 본성에 결함이 생긴 결과 우리는 모두 아담처럼 글러먹었다.''' 인류를 아담 안에서 유기적 통일체로 보고 죄의 전가를 말한다. 그는 단순히 아담이 단 한 번의 범죄로 죄스러운 자들을 낳았다고 말한다.
5.3. 루터와 칼뱅의 견해
이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그것을 가져와서 '자유의지'의 비중을 훨씬 더 낮췄다. 그러므로 인간의 책임성보다는 신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한다고 볼 수 있다.
5.4. 웨슬리의 견해
웨슬리는 원죄에서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자유의지와 책임 또한 강조한다. 아담이 자유의지로 불순종하여 죄인이 되었다고 보며 그러므로 인간의 책임이 수반된다. 대표성을 띄고 죄인이된 아담과 그 이후로 죄인된 인간의 죄의 속성 때문에 인간은 구원 받아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필연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다시 말해서 육적인 유전이 아닌 영적 유전의 관계로써 원죄를 얘기했다. 이 개념은 죄의 보편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연대성으로 이해 할수 있다.
5.5. 칼 바르트의 견해
바르트는 원죄설을 전적으로 조상의 죄가 유전되어 후세 인간의 죄가 된다고 보는 어떤 관념과도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 하고자 했다. 에덴 동산에서의 범죄를 총체적 관계에서 이야기 하므로 아담은 한 인간이라기 보다 전 인류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아담을 세계속의 대표적인 위법자로 명하고 단한번의 실수를 용납치 않아 이 최초의 인간이 인간 본질의 최초의 죄인이라고 여긴다. 위법자 인간 아담이 자신의 죄를 깨달을수 있는 때는 예수를 깨달을 때이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원죄의 개념을 유전적인 측면으로 다루지 않고 인간의 '실존'에서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이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돌이켜 볼때 실존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입장에서 아담은 인간 실존을 행사하지 않은 것 자체를 '죄' 로 본다.
5.6. 폴 틸리히의 견해
틸리히는 죄를 인간이 그의 창조주인 신으로 부터 떠나있는 상태 즉, '소외'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본질에서 실존의 떨어짐의 보편적인 상황을 타락이라 할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는 법이나 명령 자체의 불순종 이라기 보다 하나님으로 부터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부터의 궁극적인 소외라고 할수 있다.
5.7. 부르너의 견해
부르너의 죄의 유전에 대한 개념은 죄의 보편성에서 기인한다. 그는 죄의 보편성과 연대성을 유전성 보다 더욱 강조한다.즉 죄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행위' 이고,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숙명인 '영속적 혁명'이다. 그러므로 유전적이어서 책임을 질수 없는 죄의 개념 보다는 죄를 하나의 전적 행위로 보며 연대성의 개념에서 설명한다. 따라서 죄된 상태를 유전적으로 보지 않고 보편성과 연대성의 입장에서 본다.
즉, 현대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담이 지은 죄는 모든 인간들의 본래적 일치성의 표현으로서의 '아담'에게 있는것이지, 역사상의, 혹은 선사시대의 첫인간으로서의 아담에게 있는것이 아니다. 따라서 원죄란 '''신과 단절된 인간의 연대적인 책임이며 개개인의 육체적 유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과의 수직적인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결국 원죄란 신과 인간의 단절상태를 의미한다.
6. 정교회의 입장
정교회를 비롯한 동방 교회의 경우, 서방교회와의 근본적인 신학적 차이 중 하나로 원죄에 대한 해석을 꼽을 정도로 관점이 매우 다르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로는 원죄에 대한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서방교회와는 달리, 동방 교회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은 다양한 해석 중 하나 정도로 받아들여졌으며 큰 신학적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죽을 사람은 죄를 지은 장본인이다. '''아들이 아비의 죄를 받거나 아비가 아들의 죄를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 바로 살면 바로 산 보수를 받고, 못된 행실을 하면 못된 행실의 보수를 받는다.
깊게 말하면, 당시 혼란에 빠져 있던 서로마에선 "네가 겪는 고통은 전부 조상의 죄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기독교를 믿어라!"는 방식이 통했으나, 한창 체제가 잘 닦이고 기독교도 잘나가던 동로마에선 이런 극단적인 방법으로 선교할 필요가 없었다.
먼저 단어를 살펴보자면 라틴어 peccatum originale 에서 orignale는 근원이라는 의미도 가질 수 있고, 최초라는 의미도 가질 수 있는데, 서방 교회에서는 이를 근원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 표현이 한국어로 번역될 때도 이런 서방 교회 전통에 따라서 근원적인 죄라는 의미에 충실한 원죄(原罪)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최초라는 의미는 상실되었다. 반면 동방 교회에서는 이를 최초로 지은 죄라는 의미로 해석을 한다. 사실 애초에 그리스어로는 원죄보다는 '''조상의 죄'''(ancestral sin / προπατορικό αμάρτημα)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최초의 죄로 인해서 인간 본성에 결함이 생기고 세상에 고통과 죽음이 나타났고, 그 후손인 인류가 최초의 죄에서 발생한 이러한 '결과'를 공유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견해가 일치한다. 하지만 서방 교회에서 인류 전체가 원죄의 '결과' 뿐 아니라 '원죄' 그 자체도 물려받는 것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동방 교회에서는 최초의 죄는 아담과 하와가 자유의지로 지은 개인적인 죄이며 인류는 그 죄를 물려받지 않는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의 상황을 매우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과 하와가 온전한 성인으로서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통해 악의적으로 죄를 선택했다고 이해했다. 반면 리옹의 성 이레네오는 아담과 하와가 온전한 성인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점차 완성을 향해 자라나갈 아이와 같은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미숙함 또는 취약함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보았다. 이렇듯 판이한 두 관점은 최초의 죄가 가지는 죄질, 그리고 인류의 본질과 현 상태에 대한 상반된 이해로 귀결되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역할, 구원의 의미, 은총의 의미 등 다른 신학적 영역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마찬가지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같은 현상에 대한 판이한 해석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아우구스티누스(아우구스티노)적 관점에서는 삶의 고통은 아담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볼 수 있다면, 이레네오적 관점에서는 하느님이 본래 의도했던 대로 인류가 자신의 완성된 모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고 볼 수 있다.[18]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여기를 보자.
7. 다른 종교들의 관점
원죄와 삼위일체는 같은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교, 이슬람교 등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만이 가지는 특징이자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원죄를 부정한다. 신은 '''매우 자비롭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를 먹은 잘못' 정도는 용서했다는게 이슬람교의 설명. 즉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인류가 선악과를 먹고 낙원에서 추방된 죄를 저지른 것은 같지만, 그게 '원죄'로 이어진 기독교와는 달리 이슬람교에서는 자비로운 신이 이미 인류의 죄를 용서한지 오래라는 것이다. 이슬람교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 누구나 원죄 같은 것 없이 깨끗하게 태어나며, 죄가 있고 없고는 그 사람의 선행으로만 판단할 수 있다고 본다. 심지어 한 이슬람 학자는 신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지 않았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신의 무한한 자비를 부정하는 것',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라고 평할 정도. 단 이슬람도 기독교와 공통적으로 죄를 짓고 거기에 대한 일말의 뉘우침도 없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것은 같으며, 심지어 무신론자를 '반체제 인사'로 간주하고 공격하는 것을 보면 극과 극은 통한다.
유대교의 경우에는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한 죄 자체는 인정하지만 정교회와 비슷한 인식을 하고 있기에[19] , 그 죄가 후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원죄 사상은 없다. 아담과 하와는 각자 노동과 출산으로서 그들이 선악과를 먹은 죄값을 갚기도 했지만, 사람이 홀로 살아가지 않고 많은 자식과 함께 이 땅에 널리 퍼진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낙원에서 추방되었다고 해서 그게 원죄급으로 깊은 낙인이 찍힌게 아니라 그저 인간이 저지르는 수많은 불순종의 죄들 가운데 하나와 같은 식으로만 인식하며, 따라서 노동·해산의 고통이나 죽음과 같은 실낙원의 저주스런 결과들은 남아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지만[20] 그 이후에도 하느님의 뜻을 선악과를 먹기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이루게 되었다고 본다.[21]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서는 인간이 아담의 원죄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죄로 형벌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