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천국 불신지옥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예. 그 와중에 4개국어(...)로 써놨다.[1]

1. 개요
2. 의미
3. 비판
3.1. 발전형
3.2. 타협형
4. 개신교 측의 주요 입장 정리
5. 왜 이 말을 하는가
6. 세계
7. 가톨릭의 입장
7.1. 공의회의 선언
7.1.1. 해설
7.1.2. 가톨릭의 구원과 세례성사 문제
7.1.3. 기타
8. 정교회의 입장
9. 결론
9.1. 자유주의, 진보적 개신교의 주장
9.2. 보수 개신교, 보편교회[2]의 주장
10. 여담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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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신교의 교리 해석 중 하나로써,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주장하는 교리이다.
복음주의 기독교와 개신교 소속의 간판만 걸고 설치는 광신도들이 맹목적으로 외치는 가장 주된 교리이며, 이 교리를 모토로 하는 '전도 활동' 을 가리키는 일종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권유가 아닌 강요로 교리전파를 하는 사람들은, 설사 정상적인 교단이다 하더라도 나중에 이단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성경을 정확한 교단 내에서 공부하여 내 감정과 내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부활의 예수'만을 믿고 '십자가의 예수'는 외면하는데서 오는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부활천국을 자신의 죽음으로 예정할 때에, 이 부활과 천국은 예수 스스로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비극을 통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즉, 자신의 삶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그 삶의 비극 앞에서 자신의 십자가를 담담히 짊어지는 희생을 할 때에야, 그 희생에 대한 '희망'으로써 부활과 천국의 의미가 찾아지는 것이다. '천국'은 '희생'이라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증명되는 것인데, 이 희생은 '네 이웃을 조건없이 사랑할 때' 생겨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교리는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감화시켜서 전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남이 싫어하는 것을 하는 것이 '사랑'이 될 수 없듯이, 이웃들을 질리게 하는 강요의 교리 전도를 두고서 '희생'이라고 말해선 안된다. 따라서 '부활과 천국의 예수'를 말할 때에는, '사랑의 예수'와 '십자가의 예수'도 같이 보여줘야만 온전한 믿음으로써 천국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천국을 보장해준다'는 믿음은 또다른 면죄부일 따름이며, 천국은 자신의 삶이라는 비극 속에서 스스로의 십자가를 걺어질 수 있을 때 희망으로써 반짝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심지어 마가복음의 경우, 그 16장 9절부터 20절은 현재 거센 진위성 논란에 휩싸여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맹목적으로 인용해서 기독교에 먹칠을 하니 더 큰 문제가 된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부활한 뒤에 제자들의 부족한 믿음을 책망하며) 믿고 세례를 받는 이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가복음 16:15-16


2. 의미



위 영상은 명동의 예수천국 불신지옥 전도단에 대한 내용이다. (유튜브)
비신자(非信者)와 불신자(不信者)를 혼동하므로 오는 말장난이다. 믿는다는 것도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하다. 단순히 그의 존재를 믿는 것 외에도 그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불신자는 예수를 거부하는 자를 뜻한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예수가 불신자를 처단했다는 내용은 없다.
참된 신앙은 예수를 믿고 그의 가르침, 계명대로 사는 것이다. 신자한테 악다구니 쓰고 강요하는 것은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모르는 시대에 태어났건 접한 적이 없다면 그 행위로 판단할 수도 있다고 조심스레 주장하거나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부분에 대해서는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천국 불신지옥" 표어가 과격하긴 해도 개신교의 성향을 가장 화끈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구의 장점이라면 다른 종교의 표어보다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나 '나무묘호렌게쿄' 같은 말이 뭔 뜻인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또한 외부에는 대놓고 말을 잘 하지 않지만 교파를 가리지 않은 전 세계 개신교인의 거의 대다수가 실제로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
조금 더 상세 설명을 하자면 기독교계에서는 모든 인간은 죄를 가지고 태어나며 살아가면서도 끊임없이 죄를 짓는데 지옥에 가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안 믿어서가 아니라 원죄 때문에 가고, 예수를 믿으면 모든 죄가 사해진 깨끗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마르틴 루터 이래 'sola scriptura(오직 성서)', 'sola fide(오직 믿음)'의 기치를 내건 개신교 계열에선 이걸 부정하면 그냥 이단 된다.
한국의 개신교 교파 중 이걸 부정하는 교파는 아무도 없으며,[3] 또한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고 믿지 않는 자는 지옥 가고 영혼을 구하는 전도 행위는 종말 때최후의 심판이 닥치면 예수 그리스도 재림으로 타락한 세상이 멸망하고 불신자가 모조리 심판받기 전, 승천한 예수가 내린 신자들이 따라야할 지상과제로 따르고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외침은 개신교 내부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교리 중 하나이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복음을 회피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신지옥은 역사적으로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규정해왔고 지금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말이나 겉치레로만 믿는 척 하는 '거짓 믿음' 역시 지옥행으로 본다.
가톨릭 등지에서는 이렇게 완전하게 사는 사람은 소수이기에 소소한 죄를 짓거나 보속[4]을 충실히 하지 않는 신자들은 일단 구원이 예정된 연옥을 통해 정화되는 연옥 교리를 가르친다. 물론 이 연옥 교리도 성경에 근거가 있지만, 개신교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구약 부분에 포함된 내용이라 차이가 난다. 자세한 것은 연옥 문서 참조.

3. 비판


내 생각으로는 그리스도의 도덕적 성격에는 한가지 심각한 결함이 있는데, 다름아닌 지옥을 믿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자비롭다면 영원한 형벌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There is one very serious defect to my mind in Christ’s moral character, and that is that He believed in hell. I do not myself feel that any person who is really profoundly humane can believe in everlasting punishment.
버트런드 러셀, 나는 왜 기독교 신자가 아닌가 中
하다못해 근본적인 논리적 반박에 갈 것도 없이 그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성경만 들여다봐도 저 사상은 전적으로 반박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않는 자라도 싫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남에게 믿음을 강요하는 자는 싫어한다. 자연히 타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 그리고 다른 계파의 그리스도교인들[5]에게 욕을 먹는 교리. 저 말을 해석하면 "한평생 남을 위해 헌신해서 죄를 안짓고 선하게 살아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며, 반대로 한평생 남을 헐뜯고 죄를 지어서 악하게 살아도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희대의 흑백논리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인간애를 바탕으로 사람을 이끌어야 할 종교가 저렇게 믿지 않으면 너 지옥이라는 병맛 멘트를 날리는 게 얼마나 웃긴 일인가.[6] 철모르는 어린이들이라도 종종 이런 교리에 반발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어린 시절 남들 따라 교회 다녔다가 이런 과격한 교리에 반발을 품고 스스로 교회에 발을 끊은 이들도 있다. 이것도 얼마나 모순적이고 웃긴 상황이냐면,

마태복음 18장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라고 예수의 가르침이 분명하게 나와 있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7대 죄악 중 최악의 죄가 교만임을 생각하면 이건 분명히 벌을 받아야 하고, 어린 아이가 하나님 곁을 떠나게 한 죄는 더더욱 큰데, 이런 아무 잘못 없는 어린이들마저도 과연 예수 불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옥행이라는 것인가?
헌데 개신교 위주의 성경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른다면 로마서의 내용에 정말로 개신교를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은 죽고 나서 심판대에 올라 일정한 잣대에 의해 천국과 지옥행이 결정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7]
이 외에도 '기독교를 알게 되었는데 믿지 않으면 무조건 지옥행인가?'라는 의문, 즉 알면 지옥에 가는 개념 인가?라는 의문도 충분히 제기할 수 있기 때문.
쉽게 말해 이 문제에 대한 근본주의 개신교와 다른 기독교 종파들의 차이는 '믿음이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냐? 아니면 곧이곧대로 해석한 결과인가?'의 문제다. 이러한 차이점은 근처의 개신교 목사와 가톨릭 사제 등에게 물어보면 차이가 있는데, 목사의 경우에는 '믿음이 없으면 결국 구원받을 수가 없다'이고, 사제의 경우에는 '그 사람이 믿음이 없었다고 해서 무조건 지옥행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라는 답을 해준다.
개신교에서 말하는 교리는 따지고 보면 예수와 야훼에 대한 믿음을 제외하면 다 '하면 좋은 것'이라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참으로 믿는다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 개신교를 꿰뚫는 진리이기 때문에 안 해도 믿음만 참이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어떻게 보면 위험한 해석도 존재한다. 이에 대해 개신교 신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정말 하나님과 예수를 믿는 자라면 그는 선한 자이기 때문에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위의 보편교회 해석과 같다.) 이렇게 놓고 보면 가톨릭과의 차이점은 단순히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밖에 없어진다(…). 사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꽤나 복잡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단순화한 것이라고 봐도 좋다. 어쨌든 이 때문에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들은 이 표어를 무식하다고 깐다.
일반적인 가치관과 개인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들은 일반적인 개인의 권리와 자유보다 개인신앙을 우위에 놓는 해당 표어 같은 개신교의 교리 때문에 개신교인들이 비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행각을 벌이는 것에 대해 무신경해지게 되었다고 여긴다.
종교에 관심이 없는 행인을 붙잡고 지옥 갈 거라고 저주를 퍼붓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일 수야 없다. 더더군다나 지나가는 초등학생 아이를 붙잡고 불교 신자 할머니가 임종을 맞고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해괴하고 불쾌한 녹음본을 들려주는 등, 그 과정에서 다소 타인의 감정을 해치는 일이 잦다.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봐도 이들이 내뱉는 말이 교리적으로 맞는 말이라도 그들의 동기가 과연 순전히 복음전도인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는 행동이다. 복음을 전한다 하더라도 그 동기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알리고 구원을 얻게 해주려는 선한 마음이 아니라 사람들을 말과 행동으로 공격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서 만족감을 얻기 위함이라면 그 자체가 교만이고 죄이기 때문이다. 내용만 복음이지 사실상 길거리 사람 붙잡고 괴롭히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어쩌면 후에 심판대 앞에 섰을때 본인은 예수를 위해 열정적으로 살아왔다고 당당히 자랑하겠지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오용하여 죄를 지어왔으니 결과는 뻔하다.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는 개신교 목회자들의 행각이 뉴스 언론 매체를 통해 지겹도록 나오는 현실에서, "착하게 사는 '세상 사람들' 은 지옥 가는 반면, 아무리 망나니짓을 해도 믿음만 있으면 천국 간다"는 논리가 분노를 사게 만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
서울특별시에서는 종로나 명동, 남대문 쪽의 번화한 거리에 이 표어를 단 깃발을 들고 흰 헬멧을 쓰고 라디오로 전도 테이프를 틀면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다. 여러 교회에서 나온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전도하라는 소명을 주셔서 활동하고 있다'고 자신들의 전도 동기를 소개한다. 문제는 이 사람들의 전도 멘트. 차라리 확성기로 외치는 것은 그냥 지나치면 그만이지만, 접근하면서 전단지를 돌리는 경우 '예수님 안 믿으면 지옥갑니다', 심한 경우는 '안 믿고 세 발자국만 걸어가면 벼락 맞아 죽어서 지옥갑니다' 라고 하기까지 한다. 과연 이런 방식이 그들이 노리는 전도의 효과와 얼마나 부합되는지 의문.
물론 개인의 신앙 차원에서 개신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비개신교인들을 보면 안타까워서 저렇게 열정을 쏟는 것으로 좋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행인들에게 민폐 그 자체가 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 전도의 목적이 한 사람이라도 더 개신교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 표어는 차라리 안 쓰느니만 못한 역효과를 내는 문구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외치는 분들을 만나면 친히 만나서 사도 바울이 했던 말을 논해보거나 누가복음에 나와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야기를 해도 좋을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아래의 누가복음 10장에 잘 나와 있다.
율법학자: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 율법서엔 어떻게 적혀 있더냐?
율법학자: 하나님을 받들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럼 그대로 하면 된다.
율법학자: 그럼 누가 제 이웃입니까?
예수: 누군가가 길가에서 강도에게 습격당해 중태에 놓여있었는데 사제가 이를 보고 지나쳤고 레위인[8]들도 그를 보고 지나쳤다. 그러나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 이를 보고 위태로운 사람을 데려가 치료해주고 돌보아주었다. 누가 상해를 입은 자의 이웃이었느냐?
율법학자: 선의를 행한 자입니다.
예수: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삼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마리아인처럼 행하란 이야기다. 이웃이 될 수 있는 이방인, 즉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했지만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란 문구와 그들의 행위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앞서 말했듯이 민폐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내한하는 외국의 유명 목사들의 일반적인 인터뷰로 정리한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을 강조하셨다.

비록 다른 종교라 할지라도 그들을 끌어 안아야[9]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지옥과 같은 말을 퍼붓는 자[10]

는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단이다.

 
물론 개신교 내에서의 신앙 입문담[11]을 보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처음에는 미쳤다고 비웃었지만 '얼마나 대단하길래 저런 조롱과 욕을 견디면서 외쳐대는가. 한 번 교회에 나가볼까' 하는 경우도 상당수 있긴 하다. 과거 이러한 입문담들[12]은 보수적 개신교회가 이러한 막무가내식 전도방식을 고수하게 만드는 힘이 되어왔다. 따라서 현 개신교계에서는 이러한 극렬 전도자들에 대해 '개인의 신앙 문제일 뿐' 이라고 하면서 주변에 끼치는 누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오히려 이런 노방전도를 못하거나 말리는 요즘 개신교인들은 열정이 죽은 껍데기라고 표현하며 노방전도자들을 물질적으로 적극 지원하고 옹호하는 것이 보편적 상황.
문제는 그렇게 여기는 행태가 전혀 바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신자가 줄어들수록 더더욱 이래야 늘어난다고 여기는 이들도 많다. 해외 나가서도 저러는 이들이 많은데 일본과 미국에서 한국어와 영어 및 일본어로 저러고 다니는 이들도 사진이나 목격담으로 인터넷에 올라오곤 한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외국어를 몰라도 가능하다. 한인 밀집지역인 '신오쿠보' 는 한인민박이 많다 보니 한국 여행자들이 꽤 많이 가는 곳인데 전철역에서 나오면 '한국에서 오셨어요?' 또는 '얼마나 있다 가세요?' 등 동료 여행자처럼 접근해서는 '계시는 동안 우리 교회 나와보세요' 식으로 나오는 일본 유학생들이 있다. 실제 개신교인이라도 돈 들여 간 데서 그럴지는 의문이며 기껏 혈세 뽑아서 유학 보내줬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백주대낮에 그 짓거리를 하고 있다. 알제리아르메니아 같은 나라에선 한국인은 선교 요주인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다.
반면 진보적인 목사들은 이들을 '대형교회와 보수주의의 상징' 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많은 종교 전문가들 역시 이들의 열정은 인정하지만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데 의견을 함께한다. 인터넷에선 "XXX(흉악범 이름)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나요?" 하는 반박이 종종 있으며 한 기사에서는 "이 세상의 온갖 죄는 다 지었으면서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천당에 간다면 그런 사람들 모이는 천당에는 가지 않겠다" 하고 통렬하게 비판한 경우도 있다. 사회는 여럿이 함께 살아가는 곳임을 고려할 때 뭔가 문제가 있는 행위임을 부정할 수 없다.
흉악범이 구원받은 것을 성경에서 굳이 찾아보자면, 2가지의 사례가 있다. 역대기의 왕 므낫세와 예수의 오른편에서 같이 십자가형을 받은 회개한 죄수[13]를 들 수 있다. 보통 이론상 죽기전 참회하면 가능하지만... 실제론 아주 드물다고 본다. 개신교 교리에 따르면 회개한 사람은 죄를 지속적으로 멀리 하고자 해야 하기 때문.
개신교 입장에서도 절대 막무가내로 꺼내선 안 될 말이다. 일단 비신자들의 입장에서는 기독교의 예수를 단지 자기를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가 없다 한들 지옥에 보내버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존재로 인식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때문에 성경과 역사 속의 복음 전파자들도 사랑과 함께하지 않는 복음전도는 무가치하다고 비판한 것이다.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골로새서 4:3)"과 일맥상통한다. 이미 초대교회부터 경거망동으로 비난을 사지 않도록(호크마주석 참조) 행하라고 하고있다. 잘못된 행동으로 비난을 사게되면 당연히 상대가 복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더더욱 많은 시간, 아니 아예 기회가 더는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참고로 극단적인 이신칭의 교리, 믿음만이면 어떤 죄를 저질러도 괜찮다! 는 식의 삐뚤어진 교리이해를 좀 더 심화 발전시키면 구원파가 된다. 실제로 외국 자유주의 성향 교단에서는 한국의 몇몇 근본주의교단의 가르침이나 구원파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보기도 한다. 뭔 짓을 해도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나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깨닫기만 하면 되는 것이나 그게 그거니까.

3.1. 발전형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개신교를 믿지 않는 타인들에게 적용되는 법칙이라면 개신교인들에게 적용되는 발전형 논리도 존재한다.
  1.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2. 그런데 어떤 개신교인이 전도를 하지 않고 개신교를 열심히 믿었고 또한 선행도 충실히 쌓았다.
  3. 그 사람이 죽어서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근데 그 개신교인은 지옥행.
  4. 그가 지옥에 간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
  5. 왜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가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있는데 머리로 지식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
개신교입장에서 구원이 선행이라고 주장하면 이단 취급받는다. 구원을 선행으로 판단하지 않기때문. 특히 예정설을 받아들이는 장로교인들은 발전형에 대해 행위구원이라며 이단취급한다. 구원에 내 공로는 아무것도, 절대로 없는 0%라고 보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경우는 예수의 지상 대명령(마태오 복음서 28장 19절) - "너희는 모든 민족들에게 세례를 주고 제자로 삼아라"라는 구절을 불성실하게 이행했으므로 죄라는 논리인데, 교리적으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선행과는 달리,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2번 항목의 선행의 목록에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헌신적인 복음 전파의 의무가 들어가기 때문. 사도와 초대교회 지도자들도 박해받으면서 열심히 복음 전파하는 것을 전 신자들이 당연히 해야만 할 의무로 가르쳤다. 물론 전도에 소홀히 했다고 해서 그 교인이 지옥에 간다는 식으로 아전인수 해석하지는 않는다.
야훼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선행을 한다거나 뭔가 인간이 스스로 이룬다고 해서 구원받는다로 정리되지는 않는다. 다만 천주교의 경우 '믿음은 선행과 병행되어야 한다' '구원의 영역은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 하느님이 알아서 판단하실 것'이라며 유보 입장을 보이고 있고, 근본주의 개신교의 경우에는 '그런 거 없이 모두 지옥'이라는 차이가 있다. 선행의 열매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 그렇다고 그 행함의 열매가 매 순간 마다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며 부족한 자이기 때문. 여전히 악한 습관이 나올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선한 일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를 다니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마음 가운데 실제로 믿어지는 믿음이 들어와있는가이다.

3.2. 타협형


일부 개신교인들은 위의 문제들을 인식했는지 몇 가지 한정 조건을 걸었다. 무엇보다 말도 안 되는 것은 예수라는 이야기도 접해보지 않은 일부 인물들까지 몽땅 지옥에 간다는 논리를 수정한 것이다. 즉, 예수라는 이름을 접하지 않은 상태의 사람만이 예수를 믿지 않아도 지옥을 가지 않는다는 논리. 이런 타협형은 예수라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이 세계에 많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러한 복음이 모두 전파되는 순간 기독교의 말세가 찾아온다고 생각한다.[14]
다시 말하면 성경 복음을 한번이라도 들은 인간은 자기 의지로 믿지 않으면 지옥이라는 것이 되는데, 이것 또한 비신자 입장에서는 심히 이해가 안 되는 논리이다. 그러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아무도 지옥을 안 갈텐데 왜 알려주는가?.
오죽하면 이런 일화가 전해질 정도.
이누이트 족: 내가 하나님이나 죄악에 대해 몰랐다면, 난 지옥에 가야 되는 거요?
성직자: 아뇨. 모르셨다면야 지옥에 가진 않죠.
이누이트 족: 그럼 왜 나한테 그걸 알려준 거요?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예수를 한 번도 접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도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아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개신교 내에서도 "아마 그의 행적을 보고 하나님께서 구원을 결정하실 것이다"라는 사람도 있고, "모조리 지옥행"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지옥에 간다고 주장하는 얼간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게 문제. 여기에 대한 주요 견해는 아래 결론에 설명하지만, 유대인은 율법으로 이방인은 양심으로 판단한다고 본다.

4. 개신교 측의 주요 입장 정리


일단 개신교도로서 예수를 믿는다면 저 말을 부정할 수가 없으며 오히려 이게 그르다고 한다면 모든 개신교도들은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어찌 보면 부모 욕보다 더 심한 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구원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가지게 되는 근본 교리이기 때문이다.[15][16]
개신교의 기본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모든 형태의 죄악은 징벌 받아 마땅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친히 죄의 값은 죽음이라고 선언하셨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일생동안 말과 행동, 생각으로 죄를 지으며, 따라서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사 죄인들이 받을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아 죽으셨다. 그리고 이 구원사역을 마친 3일 후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돌아가셨다. 이제,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과 구세주로 모시는 사람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살아간다[17]" 이런 교리 하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난 죄 지은 적 없다, 따라서 예수가 내 죗값을 치뤄줄 이유도 없다" 하는 입장이 되고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죄의 대가로 지옥에 가게 된다는 과정으로 이어진다.[18]
이러한 인과관계에 따라 예수에 의해 죄가 대납되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 기존의 빚은 그대로 남고 그 위에 인간의 노력으로 아무리 선행을 쌓는다고 해도 죄값을 지옥으로 치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교리로 이어진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로움' 은 개인의 선악이 아닌 이러한 인정과정, 다른 말로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는 여기에서 나온다. 물론 이 믿음 이후에 행동의 선악이 어떤 영향이 있느냐는 해석의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성경 안에서 해석하는 한 예수를 이미 알고도 부정한 사람이 지옥을 피할 방법은 없다.
물론 아예 예수를 모르고 죽은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는 논쟁도 가능하지만 진짜로 신이 존재한다면 그런 사람들도 모든 이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판단기준으로 처리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된다.[19] 적어도 이 문서를 볼 정도의 사람이라면 그런 쪽으로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안녕하세요. 언젠가 죽을 여러분" 과 마찬가지로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표어인 데다 무리를 해서라도 교세를 확장할 필요가 있는 일부 사이비 종교에서 남발했기 때문에 지금은 이토록 까이는 8글자가 된 것이 아닐까.
결론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표현의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근본 교리는 과격한 광신도나 평범한 개신교도나 기본 교리는 다른 것이 없다. 다만 차이라면 저걸 타인에게 무작정 강요하는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믿기만 하고 잘 드러내지 않는지에 대한 것이다. 즉 흔히 말하는 예수쟁이와 정상적 기독교인의 차이.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죽지 않고서야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창조물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믿지 않았다고 지옥에 보낸다는 논지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현세 기준으로는 각자 알아서 판단해야 할 듯.

5. 왜 이 말을 하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개역개정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복음 3장 36절, 개역개정판)

서두에도 말했지만, 국내 개신교 교단 중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부정하면 이단이다.[20] 그리고 세계적으로 봐도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부정하는 종파는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결국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교리인 고로 노상전도하는 이들을 막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수쟁이들도 교회 출석하는 교인이다.
실제로, 명동에 자주 출현하는 노상 전도 무리는 인근의 영락교회 소속 신자가 섞여 있고, 영등포 인근에 출현하는 무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신자와 대다수 한국교회에서 이단으로 분류한 성락교회 소속 신자가 혼재되어 있는 실정이다.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6. 세계


전 세계적으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근본주의 교단들이 개발도상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약간의 왜곡이 들어가 있다. 단순히 교조적으로 불신지옥을 외치는 교단들보다는 신유은사방언 터짐 등 기적을 강조하여 기복신앙을 자극하는 교단들이 개도국에서 성장 추세인 것이다.
반대로 선진국의 자유주의 성향 교단들은 신자들의 참여율 저조와 신앙의 타협화로 인해 갈수록 세력이 약해지고 있으며, 이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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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갑시다. 안 그러면 악마가 잡아가요!

미국바이블벨트 등의 지역에 가면 이런 식의 포스터를 자주 볼 수 있다. 실제로도 미국에서 개신교인들 중 3천만 명이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고 믿는다는 통계가 나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한국에 1년 동안 머물다가 간 터키 사진작가 아리프 아쉬츠는, 신촌에서 이런 예수쟁이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터키에서 무슬림이 저렇게 "알라천국 불신지옥"이라며 설치다간, 정말로 탈레반 이상 가는 미친 광신도로 취급당한다.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조차도 대낮에 길거리에서 저러면, 종교 경찰 무트와에게 잡혀가서 1급 테러범 용의자로 취급되어 온몸으로 처맞고 수용소에 갇혔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기독교 탈레반이 이렇게 설치는 걸 보고, 무섭게 느꼈다.

미국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번역한 'JESUS=HEAVEN, NO JESUS=HELL' 이 적힌 피켓을 들고 거리 행진을 벌여 국제적 망신을 샀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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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 팻말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관중석에도 등장해 국제망신 시즌 2를 찍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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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지만 일본(...)에서도 볼 수 있다. 주로 검은 바탕에 흰색, 노란색 글씨로 사후 심판받으리(死後さばきにあう), 하나님과 화해하라(神と和解せよ)등의 문구가 새겨진 간판을 볼 수 있는데, 속칭 '그리스도 간판'(キリスト看板)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나님과 화해하라(神と和解せよ)를 ネコと和解せよ(고양이와 화해하라)로 수정한 것도 있다. 神라는 한자를 ネコ로 한것이다.

7. 가톨릭의 입장


아마도 여러분은 각자 자기 자신에게 "나는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을 거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 믿음에 선행이 뒤따른다면 이 말은 사실일 것입니다. 말로 고백한 것을 행동으로 부정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 바오로는 그릇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그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는 하느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티토서 1,16)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성 요한도 역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레고리오 1세 교황, M. F. Toal, 위대한 교부들의 주일 강론 모음집 중에서

가톨릭의 성경 해석에서는 믿음에 뒤따르는 행동이야말로 구원의 가장 큰 핵심요소라고 해석한다. 믿음만 가지고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 하느님을 알고있다고 할수 없다는 것. 물론 진실된 믿음이 구원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임에는 틀림없으나, 그것이 절대적인 것으로서 여겨지는것은 아니다. 가톨릭에서도 물론 불신은 좋지 않은것으로 여겨지지만, 단순히 불신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해석은 하지 않는다.

7.1. 공의회의 선언


지극히 거룩한 로마 교회는 다음과 같이 굳게 믿고 고백하고 선포한다. 곧 이교도나 유다인이나 이단자나 이교자(離敎者) 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 밖에 있는 자는 누구나, 죽기 전에 가톨릭 교회에 편입되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고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마태 25,41]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또한 교회의 몸과 일치하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교회의 성사들은 교회 안에 머무는 이들에게만 구원이 되고, 단식과 자선과 그 밖의 신심 행위들과 그리스도교 전쟁의 복무 수행들이 영원한 보상을 가져온다. "아무리 많은 자선을 베풀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린다 할지라도, 가톨릭 교회의 품과 그 일치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피렌체 공의회 DS 1351)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16장

분명히 자유 의사로 자기 마음에서 하느님을 몰아내고 종교 문제를 회피하여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 양심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이므로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신앙인들 자신도 어느 정도 여기에 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 무신론이란 전체적으로 보아 원초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가지 원인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그 원인들 가운데에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 반동, 어떤 지역에서는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발이 보태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이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거나 교리를 잘못 제시하거나 종교, 윤리, 사회생활에서 결점을 드러내어 하느님과 종교의 참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 버린다면, 신앙인들은 이 무신론의 발생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19장

이것(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그 마음에서 은총이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도 들어맞는 말이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또 인간의 궁극 소명도 참으로 하나 곧 신적인 소명이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22장

일단 예수천국 불신지옥 교리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이해하기 전에, 네 가지를 분명히 알고 들어가야 한다.
1. 가톨릭에서의 세계 보편 공의회의 확정적 결정 사안은 교황무류성과 마찬가지로 신앙적인 무오류성이 있다는 것.[21][22]
2.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기존의 가톨릭 교리를 바꾼 것이 아니라는 것[23]
3. 가톨릭 교회의 구원관(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은 명백히 무종교주의나 종교다원주의[24]를 부정하고, 가톨릭에 대한 고의적 불신을 지옥벌로 단죄하는 것.
4.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가톨릭 구원관 교리는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유물이 아닌, 역사상의 가톨릭 신학의 의견을 충실히 반영한 내용이라는 것.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짧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구원 계획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을 모두 포함한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를 비롯해서 정교회 신자와 개신교 신자는 물론이고, 특히 유대교인과 무슬림도 포함한다.[25]
2. 자기 탓 없이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에서 배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말해서, 자기 탓으로=즉 가톨릭 교리를 제대로 알면서도, 또는 알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게을리하여 신앙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구원받지 못한다
3. 복음을 전해 듣고도 고의로 믿지 않는 경우에는 응당 그에 따른 책임이 있지만, 여기에는 그 사람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26]
그러나 공의회의 결정 사항 역시 가톨릭 교리 내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가톨릭 신앙을 더욱 명확하게 밝혀주는 것임은 가톨릭 교리 이해의 상식이다. 따라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과 기존 가톨릭 교리를 유리해서 따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기존 가톨릭 교리의 입장에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7.1.1. 해설


말했듯이, 공의회는 그 자체나 자체 문장 몇개만으로 '이것이 가톨릭 구원관 가르침의 전부다' 라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며, 기존 가톨릭의 교리에 입각해서 이해되고 다뤄져야 한다. 이를테면 공의회에는 '탓 없는' 착한 비신자에 대한 구원은 말하고 있지만, '탓이 있는' 비신자[27]에 대한 구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데, 가톨릭 교리에서는 탓이 있는 비신자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삶을 마감하는 이상 '지옥행'이 확실하다고 본다. 공의회 참석 주교와 성직자들도 모두 가톨릭 신학에 박식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를 모두 알고 있었고, 때문에 언급을 안한 것이다. 또한 무신론자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무신론자들이 지옥가면 그렇게 만든 그리스도인도 지옥감. 그러니 니들은 불신자들한테 복음에 대해선 입도 뻥끗 하지마라"는 식의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 신자가 복음을 전할 때는 모범적인 행실로 본을 보임과 동시에 충실한 교리지식과 함께 선교하라"는, 가톨릭의 전통적인 선교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일단 전체적인 추세로는, 비신자의 구원 문제에 대해 개신교에 비해 조건부 한정으로 너그럽게 보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라 정리될 수 있긴 하다. 개신교 주요 교파들과는 달리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직접적으로 내세우며 비신앙인들에게 강조하지는 않고 있다. 또한 공의회에서 확실히 밝혀두듯이, 기독교 신앙을 자기 탓 없이 받아들이지 못했을 경우에는[28]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지 못한 채 하느님이 은총으로 주신 자연적인 선행과 양심을 따르는 선한 삶을 살았던 경우에는) 구원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점.
그렇다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가톨릭 교회의 오래된 가르침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가톨릭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846 교부들이 자주 반복했던 이 단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적극적으로 이해할 때, 이 말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이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공의회성경과 성전에 의지하여 이 순례하는 교회가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개자요 구원의 길이시며,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신앙과 세례의 필요성을 분명한 말씀으로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교회의 필요성도 확인하셨다. 사람들은 마치 문과 같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847 이 단언은 자신의 잘못 없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848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만 아시는 길로, 자기의 탓 없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끄실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다.) 그러나 교회는 복음화의 필요성과 동시에 그 거룩한 권리를 가진다.”

가톨릭 교리서 846~848항

여기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과 '복음을 모르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말을 잘 이해하기 힘든 위키러들도 있을 텐데, 구원 문제에 대한 정확한 가톨릭 교리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다음 해설 내용의 출처는 20세기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정평있는 교리해설서로 꼽히던 천주교 서울대교구 윤형중 마태오 신부의 <상해천주교요리> 상권 254p ~ 258p의 내용을 다수 참고하였다.[29]
1. 가톨릭 신학에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방법상의 필요(Necessitas medii)이고, 다른 하나는 '명령상의 필요(Necessitas praecepti)이다. 방법상의 필요는 그것이 없다면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며, 명령상의 필요는 해당 사항을 알고도 일부러(고의적으로) 게을리하면 죄가 되고 구원받을 수 없게 되나, 불가항력적(도저히 자기 탓으로가 아닌) 무지나 불가능으로 인하여 실행하지 못할 때에는 그것만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건 아닌 요소를 의미한다.
2. 전자인 방법상의 필요의 예시를 들자면, 구원에 필요한 주님의 '은총'을 들 수 있고, 명령상의 필요의 예시를 들자면 영성체, 미사 참례 같은 것을 예로 들수 있다.
3. 그리고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은 물리적으로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 있고, 마음으로도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 이를 흔히 육신적 교회, 영적 교회라고도 구분하는데, 육신적 교회(물리적으로 소속된 교회)란 교황과 가톨릭 주교들의 지도를 따르는 가톨릭 신자들의 외견적이고 외적인 집합체를 의미한다. 영적 교회(마음으로 소속된 교회)란 신앙과 하느님의 은총을 가지고 있는, 즉 대죄가 없는 영혼들의 비가시적이고(눈에 보이지 않고) 내적인 집합체를 의미한다.
4. 구원을 위하여 가톨릭교회의 일원으로 '물리적으로' 소속되는 것은 명령상 필요에 들어가고, '마음으로 가톨릭교회에 소속'되는 것은 원칙적으로 방법상 필요에 들어간다. 따라서 불가항력적 무지의 상태에서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가톨릭교회의 일원에 물리적으로 소속되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외적으로 가톨릭 신자로 살아가고 가톨릭의 계명을 지키지만, 속으로 불신에 가득 차 있거나 특정 교리를 거부하거나, 마음속 죄나 몰래 짓는 죄에 빠져있다면, 마음으로 가톨릭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못하므로 겉으로 가톨릭 신자라도 구원받을 수 없다.
5. 불가항력적 무지 상태에 빠져있는 사람의 경우, 첫째 수단인 물리적인 가톨릭교회의 소속을 할 수 없으니 가톨릭교회에 적어도 '마음으로라도' 속하는 것이 방법상 필요하다. 여기서 마음으로라도 속한다는 의미는, 어떤 것이 진정한 종교인지, 또는 진정한 기독교 종파인지 모르지만, 모든 일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종교를 알기만 하면 곧 거기에 입교할 만한 정신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마음으로라도' 속한 사람들에 들어간다.
6. 그러나,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흔히 무시하곤 하는 대단히 중요한 점이 있다. 불가항력적 무지는 절대로[30] "고의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해도 구원 가능"하다는 식의 교리가 아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가톨릭 교리를 잘 모른다는 식으로 흔히 표현되는 신앙적 무지가 가항력적인지, 불가항력적인지의 범위는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야지, 개개인의 기준대로, 자기 멋대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6-1. 교회에서 가르치는 불가항력적인 무지의 대표적 예시는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있다.[31]
- 가톨릭교회의 존재도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
- 가톨릭교회의 존재는 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
- 부지런히 세례성사 준비를 하다가(예비신자) 갑자기 죽게 되는 사람들[32]
- 해당 설명과 별도로, 본인이 열정적으로 가톨릭을 믿고 세례받고 싶었는데 외적 장애로 인하여 못 믿은 사람은 화세(열망의 세례, 하단참조)로 구원받을 수 있다.
7. 또한 이 불가항력적 무지는 '선의'의 불가항력적 무지여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6번 항목에서 이미 말했지만 정말로 진실되게 몰라서 믿지 않은 것이여야 되고, 알면서도 영적 진리 탐구를 게을리 하거나 고의적으로 무지의 상태를 자처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위키러들에게 익숙한 대표적인 예시로, 천주교와 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단히 해박하고 종교 전반에 관해 알 것도 다 알면서 천주교를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자유사상가, 무신론자, 불가지론자들이나, 천주교를 비난하는 데 앞장서는 개신교인이나 타종교인 등은 명백히 악의적 무지의 상태에 있기에,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
7-1. 설령 선의의 불가항력적 무지로 구원받을 수 있다 하여도, 이 구원은 절대로 해당 사람이 믿는 타종교/또는 무종교적 상태가 해당 사람을 구원한게 아니라, 오직 그 개인의 선의 때문이다. 이는 마치, 바다를 건널 만큼 튼튼한 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은 배를 타고 항해하다가 파선될지라도 몇몇 사람들은 헤엄쳐 살아날 수 있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일에 흔히 비유된다. 또한 비가톨릭 신자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가톨릭 신학적 기준의 대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이 대죄의 기준은 '이 행위가 대죄임을 고의적으로 알고 있으며, 자기 의지로 지어야 하는 죄악'이다. 비신자 상당수는 천주교 기준의 대죄에 대해 지식이 없을 것이기에 상당수가 불가항력적 무지로 감면은 되긴 하겠으나, 대죄에는 교리적 의무가 아닌 비신자에게도 익숙한 일반적 도덕률 상당수도 범주에 들어간다. 예를 들어 모든 기독교파들의 대표적 윤리관으로 비신자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혼전순결, 성적 정숙이나 혹은 동성애행위, 간통하지 말 것, 폭행이나 절도, 살인하지 말 것, 각종 국법상 범죄를 짓지 말 것 등이다. 이를 어기고 회개하지 않았다면 가톨릭 기준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 이 점은 신자나 비신자나 평등하며, 대죄 하나라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
8. 또한 가시적으로, 물리적으로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었다 가톨릭 교회를 고의적으로 떠난 배교자들은 회개하지 않는 한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태어나면서부터 가톨릭교회 밖의 종파(예를 들면 지금의 개신교, 정교회)에 있는 사람들을 이단자라고 부르지 않으며, 고의적으로 가톨릭교회를 버린 사람들이 이단자라고 불린다고 하였다. 이는 다시 말하면, 고의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버린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
9. 마지막으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마찬가지로 가톨릭의 무오류한 세계 공의회 중 하나인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특정 신자가 과학적, 합리적 근거가 부족해보인다는 이유만으로 합리적 근거를 바라면서 가톨릭 신앙 가지기를 미루거나 등한시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33] 따라서 신앙을 가질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 만으로 가톨릭을 거부하는 것[34]은 선의의 무지에 들어갈 수 없다(=악의의 무지이므로 구원받을 수 없다).
말하자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된다'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배우자이며, 인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우선적으로 비신자를 배제함을 원칙으로 하나, 그것이 어떤 상황이든 어느 시대든 모든 비신자를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 비신자들의 상태, 조건을 고려한다는 것이다.
또 7-1에서도 서술되었지만, 가톨릭 교회에서 믿는 예수 그리스도제우스오딘의 경쟁자가 아니라 온 세상의 유일신, 유일한 절대자이며, 그리스도교는 불교도교의 경쟁 종교가 아니라 '유일한 참 신앙'이기 때문에 즉 불교 신자이든 힌두교 신자이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해주실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즉 힌두교나 불교 등 비아브라함계 종교 그 자체에 구원의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주장을 한다면 종교다원주의 사상에 빠진 것이므로 가톨릭의 가르침과 즉각 어긋나게 된다) 단지 개개인 단위에서는 '불가항력적 무지와 개인의 영혼구원을 향한 의지를 전제로' 구원의 가능성까진 배제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역사적으로 고성소라는 신학적 개념도 있었다. 가톨릭교회에서 제시된 고성소는 2가지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이 전해지기 이전(그러니까 복음을 접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이들)의 의로운 사람들이 편하게 머무는 구약의 고성소, 그리고 세례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나 영아들이 가는 유아 림보가 있었다. 고성소 자체는 교리는 아니었지만, 거의 교리에 준할 정도로 신학자나 가톨릭 대중에게 익숙한 생각이었다. 이중 유아 림보설은 현재는 세례받지 못한 아기가 불상사로 죽더라도 결국 그건 자기 탓이 아니므로 당연히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단, 고성소설을 말할 때 유의할 점은, 단테 알리기에리신곡같이 가톨릭 세계관을 다룬 창작물에서의 고성소에는 선량하게 살았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불신자들도 머물고 있다는 식으로 나와있기도 한데, 이런 식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상상력이 가미된 창작일 뿐 중세에도 현재도 가톨릭 교리가 아니다. 2016년 기준으로, 가톨릭 교리에서 고성소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 의인들만을 대상으로 기능했고,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 부활과 승천 이후 비어 있는 고성소뿐이다.
신학자들과 사제들 사이에서는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이러한 의견들 역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공의회라는 틀 내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교리 외적으로는, 일단 가톨릭이 견지하는 기본적인 기치는 각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대체로 존중하고 잘 활용하는 편이며, 온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서로 다른 신앙, 믿음체계, 사고방식 등을 어떻게 기독교 신앙에 맞춰 풀이하여 개종자를 낼 것인가를 2천년 이상 고민해온 양반들이라 최근 몇 세기 동안 본진인 서구권에서는 교세가 크게 축소되었다고는 하지만[35] 아무래도 개신교보다 수백 년 앞서 온 세계에 선교를 해온 전문가들이다.
이러다 보니, 가톨릭의 사제들이 전교의 과정에서 깨달은 최초의 난점이자 딜레마가 바로 앞서 거론된, 그럼 우리 조상님들은 기독교라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자신이 전혀 접해보지도 못했고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것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다 지옥에 떨어졌다는 말이냐?며 극도의 불쾌감을 드러내는 전교지역의 주민들과 마주친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상 세상 모든 일을 주관하고 세상 모든 것을 스스로의 이치에 따라 행하시는 분이 하느님인데, 그렇다면 서양에서 멀리 떨어진 동양이나, 다른 오지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모두 하느님의 뜻으로 각자 사명을 띄고 세상에 태어난 것인데, 기독교와 복음이 전해질래야 전해질 수 없는 상황에서 수백, 수천년 동안을 태어나 살다 죽었다면, 하느님은 별 이유도, 잘못도 없이 처음부터 지옥에 떨어질 운명을 지고 태어난 사람들을 대량으로 만들었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이전 시대 사람들을 한정으로 고성소 개념을 유지해오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문화가 서양과는 어떠한 접점도 없이 완전히 다른 곳에서 전도는 심각한 거부감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19세기에 들어와 전 세계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슬슬 자유주의의 바람이 불면서 여러가지로 획기적인 새로운 시각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단, 여기서 오해하면 안되는 중대한 사실이 있는데, 자유주의 신학 자체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명백한 이단 사상으로 단죄되었다. 또한 이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는 시대 변화에 따라 교리를 바꾸려는 주장을 파문으로 단죄한다고 규정했으며, 지금도 공식적으로 자유주의를 부정한다. 마치 가톨릭 교회가 시대 변화, 혹은 비신자들의 불만에 따라 교리를 변경했다는 뉘앙스의 서술은 오류이므로 주의해야 한다.[36]
가톨릭 교회의 경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는 불변했으나, 각종 헌장, 교서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등장한 과거 교황들의 견해들, 세계공의회의 문헌들에는 해당 교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놀랍도록 합리적인 이야기가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까지도 종교와 믿음, 구원에 대하여 많은 가톨릭 교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요한 23세가 시작하고 바오로 6세가 마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내용이 발표되었을 때, 일부 신자들은 바오로 6세를 "빨갱이 교황"이라며 반발할 정도로 거부감을 드러냈는데, 그만큼 공의회의 내용은 일부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이다.[37] 우선 바오로 6세이슬람에서 늘 주장해온 바 "우리들이 모시는 알라는 너희 기독교들의 하느님과 같은 분이다"라는 주장을 인정했다. 둘째로, 여러가지 상황에 따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던 사람이라고 해도 그 스스로의 선행과 바른 삶이 곧 복음을 일부 반영할 수 있음을 인정하였고, 상기한 조건에 따라 조건부로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그 마음에서 은총이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도 들어맞는 말이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또 인간의 궁극 소명도 참으로 하나 곧 신적인 소명이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

<사목헌장> 22장에서의 이 선언 역시 상당히 놀라운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의 이치가 기독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공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이 발언이 무게는 기존의 교리상 "오로지 예수를 통한 구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명백한 오해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부정하는 주장은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단죄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의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그리스도와 교회는 일치하여 있기 때문에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교회와 결합하여야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다(교회헌장 14).

② 그리스도께서 가톨릭 교회를 세우신 것을 알면서 이 교회에 들어오지 않거나 거기서 나가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 따라서 교회는 모든 종교적 무관심주의를 용인할 수 없다(교회 헌장 14).

③ “교회 안에 완전히 결합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교회제도와 교회 안에 마련된 구원의 수단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보이는 교회조직 안에서 교황과 주교들을 통하여 교회를 다스리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는 사람들이니, 즉 신앙고백과 성사와 교계제도와의 통교(通交)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교회헌장 14).

④ “그러나 교회에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사랑에 항구하지 못하여 교회의 품 안에 몸으로만 머물러 있고 마음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 사람은 구원될 수 없다”(교회헌장 14).

⑤ 자기 탓없이 교회에 완전히 결합하지 못한 자 중에 예비신자들은 그 신앙고백과 소망으로써 이미 교회의 자녀이다(교회헌장 14). 그러므로 완전하게 교회에 일치한 자만이 구원된다는 피니의 주장은 배척되어야 한다(검사성성 훈령).

⑥ 불가피한 무지에 의하여 동일한 신앙고백, 동일한 성사 동일한 교계 종속의 3조건 중 그 어느 하나나 두 가지를 갖추지 못한 그리스도 교도들은 갈라진 형제라고 보며 그들에게도 불가피한 무지를 전제로 하여 구원이 가능하다(교회헌장 15).

⑦ 불가피한 무지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여도 참 하느님을 예배하는 유태교인이나 회교도도 교회에 관련되어 있으므로 구원이 가능하다(교회헌장 16).

⑧ 불가피한 무지에 의하여 참으로 참 하느님을 모르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양심적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도 구원은 가능하다(교회헌장 10). 

물론 이 경우에도 하느님의 은총의 부여를 전제로 하고 가능한 것이다. 이상의 조항들은 성서의 가르침으로 뒷받침된다. 성서는 단순한 무지를 책하지 않고 고의적인 거부를 단죄한다. “나를 배척하고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따로 있다”(요한 12:48).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25:41, 야고 2:14).

신부들 역시도 구체적 뉘앙스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위의 설명과는 대체로 일치하는 이야기를 한다.[38]

1260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또 인간의 궁극 소명도 참으로 하나 곧 신적인 소명이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른다고 해도, 진리를 찾고 자신이 아는 대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세례의 필요성을 알았더라면 분명히 세례를 받고자 했을 것이다.

1261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의 경우, 그들을 위한 장례 예식에서 하듯이 교회는 그들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기를 원하시는”(1티모 2,4)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마르 10,14) 하신 예수님의 어린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우리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이 거룩한 세례의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께로 오는 것을 막지 말라는 교회의 호소는 더욱 절실한 것이다.

가톨릭 교리서 1260, 1261항

위의 교리문답은 보수적 성향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절 나온 것이다. 이 경우에는교리서의 이 말 역시도, 공의회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으며, 일부 근본주의자들보다는 당연히 훨씬 유연하고 합리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누누히 강조했으나, 구원에 대한 이런 조건부 구원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교리는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로 계승되어 온 로마 교회의 교인들로서, 교회 바깥의 구원은 없다는 신앙을 지켜야 한다.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교회뿐이며, 교회로 들어오지 않는 자는 절망 속에서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참된 신앙에 대해 가망 없이 무지한 자들 또한 주의 눈에는 죄인들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 개개인의 성품, 인종, 국가, 지식, 그러한 차이들로 인해 어느 정도의 무지함까지가 용납될 수 있는지를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권리가 도대체 누구에게 있다는 말인가?

교황 비오 9세, 대중연설, 1854. 12. 9.

우리의 성스러운 신앙에 대해 가망이 없을 정도로 무지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의 법칙을 조신하게 지키며, 모든 인간에게 하느님이 내려주신 양심에 따라 살고, 하느님을 따를 기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올바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성령에 인도되어 구원에 도달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보시며, 사람의 마음 속을 살피시며, 그의 생각, 태도, 의도를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위대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선하신 하느님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죄를 저지르게 된 어느 누구도 영원히 단죄받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교황 비오 9세, 이탈리아 주교들을 향한 연설, 1863. 8. 10.

다만, 앞에서도 계속 설명한 것처럼 여기서의 참된 신앙에 대해 '가망 없이 무지한 자'들의 범주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가톨릭 신앙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경우, 특정 행위가 가톨릭의 대죄임을 알면서도 이를 계속 범하는 경우, 그리고 가톨릭과 종교적 진리에 대한 탐구의 노력을 등한시하고 게을리하는 경우는 들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
또 비오 9세는 일찍이 1847년 12월17일 추기경 담화에서 자신의 해당 교리해설이나/가톨릭 교리를 악용하여 고의적인 비가톨릭 신자(고의적 무신론자, 불신자, 이교도)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식으로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극도로 분노를 표시하였다.

"우리 시대에 가톨릭 신앙의 원수들은 그들의 모든 극악 무도한 의견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동일 선상에 놓아 그 둘을 혼동시키려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점점 더 종교무관심주의라는 불경한 사고방식을 퍼뜨리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그에 대해 말하려니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 자들은 우리도 그들처럼(가톨릭 교회 밖의 고의적 불신자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주장) 말했다고 우리를 중상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것은) (가톨릭)교회가 모든 인류에게 너무나 자애로운 나머지 교회의 자녀들만이 아니라 아무리 교회의 일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라 할지라도 동일하게 구원의 길을 걷고 있으며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사악한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아연실색하여 우리에게 저질러진 이 전례없는 잔학한 불의에 대해 혐오(염오)를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1847.12.17 교황 비오 9세.

가톨릭 교리해설에서도 이를 반드시 짚고 넘어간다.

(성경은) 그러나 자기 탓 없이의 범주에 고의적으로 단순한 무지를 책하지 않고 (가톨릭 신앙에 대한) 고의적인 거부를 단죄한다. “나를 배척하고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따로 있다”(요한 12:48).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25:41, 야고 2:14).[39]

[40]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교황이 등장함에 따라 (가톨릭의 근본적인 교리는 바꿀 권한은 당연히 없지만) 사목적 태도에 있어서 가톨릭의 방향은 수시로 변화하기 마련이고, 지역별, 국가별, 문화별로 서로 처한 상황이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신토미즘(신 토마스 아퀴나스주의)의 발달 등 자체적 역사전개를 거치며 가톨릭의 수장은 확실한 공식적인 언사를 통해 여러 차례 위와 같은 해석을 공포하였으며, 이 덕분에 오늘날 확실하게 개신교보다는 넓은 가능성의 영역을 열어놓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41] 영상들에서 보듯이 분명 가톨릭 신학자들과 사제들, 그리고 신자들은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상들과 강론들을 보면, 모두 하나같이 공의회라는 '교의적 고백'에서는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간혹 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차 바티칸 공의회를 부정적으로 보네 어쩌네 하는 카더라가 돌지만, 전 교황은 공의회의 정신에 대한 오해를 경계할 뿐, 공의회 자체의 의견에 태클을 건 적은 없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의가 바뀌었다고 잘못 알려지면서 선교 열정을 감소시켰다는 인터뷰[42][43] 역시도 공의회 선언 자체에 대한 태클은 그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우왕. 공의회의 선언이 있으니, 성당 안 나와도 아무 문제 없겠네"라는 오해들을 바로잡는 인터뷰에 가깝다.

7.1.2. 가톨릭의 구원과 세례성사 문제


여기서 또 흔히 오해받는 교리를 하나 더 설명하자면, 가톨릭과 세례성사의 관계를 들 수 있는데,

만일 누가 세례는 자유로운 것으로서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 사안이 있고, 이는 지금도 가톨릭의 고유한 믿을 교리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 세례는 가시적인 세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좁은 의미에서 세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세례(수세, 水洗)를 뜻한다. 위의 유아세례 논쟁 등에 나온 의미의 세례도 당연히 이것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화세(火洗, baptismus desiderii)를 포함한다. 화세는 물로 하는 세례(baptisma aquae)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풀이하자면 '불로 하는 세례'라는 의미이다. 가톨릭 교회의 믿음에 의하면, 수세(세례성사)를 받지는 않았더라도 창조주를 사랑한다면 세례를 받을 가능성이 열려있다. 이 세례를 화세라고 한다.(참조)

세례의 종류와 구원 문제

세례에는 물의 세례(수세·水洗)만이 아니라, '피의 세례'(혈세·血洗)와 '열망의 세례'(화세·火洗)도 있다. 피의 세례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받는다. 열망의 세례(화세)의 범위는 넓다. 세례받기를 분명하게 원하였으나 그 바람이 이행되기 전에 죽은 사람[44]

은 열망의 세례(화세)를 꼭 받는다. 명확하게 혹은 묵시적으로 세례를 열망하였으나, 어떠한 사정으로 세례성사를 받지 못한 사람[45]도 분명히 열망의 세례를 받는다. 자신의 과오없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알지 못한 사람들도 선한 생활을 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만인에게 충분히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교회헌장 16)에 대한 반응이었다면 그들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칠 수 있다. 그들은 묵시적이지만 세례를 원하므로, 그것을 열망의 세례라 한다.

링크된 가톨릭 교리서 《생명의 길》중 화세에 대한 설명.

즉 가톨릭에서 보는 세례받았다고 보는 사람은, 단지 명시적인 의미에서 신앙고백을 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가톨릭 신앙을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서 본인이 실천할 수 있었던 한에서 선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까지 포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과오가 없는 조건에서 말이다. '과오'란 상기 문단에서 설명한, 참 종교(가톨릭)를 본인의 능력 아래 최대한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 참된 종교를 발견할 시 이에 따르려는 마음가짐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 가톨릭 신앙을 알게 되어도 가톨릭 교리를 믿기를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과오가 있는 비신자들이라면, 그들이 예비신자이거나, 천주교 신앙에 관심만 가지고 만 사람이거나, 아예 타종교인이나 비종교인들이거나 모두 '자기 탓'있는 비가톨릭 교인이 되기 때문에 구원 가능성이 없다.
예를 들면, 가톨릭 신앙을 아예 모르고 듣지도 못했지만, 종교적 진리를 열심히 탐구하는 지나가는 동네 무당이나 불가지론자가 사람들 기준에서는 비가톨릭 신자이나 하느님 기준에서는 '세례(화세)를 받은 사람'일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 _물론 가톨릭 교리를 자기 탓 없이 모르는 상황에서만 말이다._ 가톨릭 교리를 충분히 듣고, 선교 등을 통해 알고 나서도 가톨릭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무당은 더이상 세례(화세)를 받았을 가능성이 없으며, 지옥에 떨어질 운명의 고의적 불신자가 된다.
정리하자면, 세례에 대한 교리는 다음과 같다.
1. 구원은 오직 세례 받은 사람에게만 허용된다.
2. 그러나 수세(흔히 말하는 세례성사)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에서 배제되지는 않는다.(화세, 그리고 순교자들에게 해당되는 혈세가 있다)
3. 왜냐하면 수세를 받지 않은 사람이, 교리를 자기 탓으로 모르는 사람이라는 조건 + 끊임없이 영적인 진리를 탐구하려는 자세를 갖추었다는 조건 하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는 방식으로 화세를 받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46]
4. 그러나 이 가능성만을 믿고 아무것도 안해서는 절대 안되며, 사력을 다해 그리스도와 가톨릭의 복음을 비신자들에게 전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 비신자들의 구원을 위하는 길이다.

7.1.3. 기타


가톨릭을 대상으로도, 개신교와 비슷하게, "그럼 왜 굳이 복음을 전해서 구원을 더욱 불확실하게 만드냐?" 는 식으로 비아냥대며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가톨릭 교리를 수박 겉핥기로만 알고 실상 잘 모르기 때문이다. 상기 문단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했듯이, 비신자 상태에서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하거나 영적으로 게을러지지 않기란 정말로 힘들다. 오히려 신자로서의 길을 걸어야 7성사, 기도, 각종 은총의 힘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비교못할 정도로 늘어난다. 때문에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선교 정신을 절대로 잊지 말 것을 누누히 강조하였다. 이 점을 모르고 선교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하하며 비신자의 구원 가능성에만 매달리는 것[47]은 교리적으로 매우 어리석은 행위이다.
만약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이, 가톨릭 신앙을 온전히 알고도 고의적으로 불신한 사람들은 모조리 지옥간다는 의미라면 이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나가는 무신론자라고 할지라도, '가톨릭 신앙에 대해 자기 탓 없이 모른다는 전제 하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화세를 받아 가톨릭 교회와 온전히 결합되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48] 따라서 가톨릭의 구원관은 "성당에 오지 않으면 모두 '무조건' 지옥 갑니다"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비신자 당신은 지옥 갈 가능성이 대단히 높으나, 당신도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계획 아래 있기에 조건부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참 종교를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되며, 가톨릭 신앙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면 반드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서술에는 공의회의 고백에서는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다고 선언하고 있으나, 동시에 공의회는 구원의 대상이 매일매일 주일미사에 사람에게만 한정된다는 주장을 강력히 배격한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었는데, 이는 말하려는 의도는 알겠으나, 가톨릭 교리상으로 명백히 틀린 말이다. 가톨릭 신앙은 중대한 십계명 중 단 하나만 어기는(=대죄) 죄를 지어도 회개 없이는 구원받지 못하며, 주일미사 불참은 명백한 대죄다. 그리고 죄의 위반 역시 불신과 마찬가지로 불가항력적 무지에 의해서만 면제된다. 즉 주일미사같은 일상의 문제라도 중대한 계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상황에서 이를 고의적으로 어기는 것은 신자라도 지옥에 가게 할 수 있다.
과거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경우, 생전에 도올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신앙을 가지거나 신앙이 없더라도 인간으로서 참되게 살면 하느님께서 구원을 배제하지 않으신다"라는 견해를 밝혔던 적이 있는데,[49] 이는 결론만 말하면 거짓말은 하지 않으나 자세한 설명이 없었기에 아쉬운 대목이다. 하느님은 모두의 구원을 원하시므로 다른 신앙인이나 비신자도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는 어디까지나 비신자 본인의 고의적/비고의적 상태에 따라 갈리는 대목이고, 그렇기에 더욱 (가톨릭 기준의) 비진리를 극복하기 위해 선교를 해야 한다는 점을 어필해야 온전한 관련 교리해설이라 할 수 있다.
몇번이나 강조했지만, 이러한 비신자의 구원 가능성에 대한 선언들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50] 구원 가능성을 동일하게 해석하는 것이 절대 아니며, 유다인과 무슬림의 구원 가능성을 가톨릭 그리스도인의 구원 가능성과 동일하게 해석한다고 언급한 바도 없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종교다원주의 공의회가 아니며, 가톨릭의 구원관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8. 정교회의 입장


정교회 신학은 구원이 성화의 과정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때의 성화란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삼아 하느님의 모습을 닮기 위해 성장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은총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으며 믿음을 그 연료로 삼아 지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즉 은총에 의해, 그리고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이 정교회의 교리이다.

9. 결론



사후 세계와 구원관에 대한 논쟁은, 과연 무엇이 사실인지 알 수 없는 추상적인 문제이니 각자 알아서 생각하는것 외에는 답이 없는 문제이다. 다만, 특정 종교의 구원관을 타인에게 강조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는 옳지 않으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되도록 이 논쟁을 피하고 각자 알아서 생각하며 자기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것이다.[51]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해당 교리 자체가 타종교인들과 무종교인들 입장에서는 거부감과 모욕감을 느끼게 만드는 동시에 '넌 죽으면 지옥간다'는 협박으로 들리는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탓 없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인지했음에도 믿지 않은 사람들은 전혀 구원받지 못한다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태국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그리스도교 자체는 인지하고 있었으나 별로 관심이 없었고 태국 정서상 불교를 믿어왔는데[52] '자기 탓 없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 기준에 의하면 그 태국 사람도 포함되니만큼, 그 사람은 사후에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9.1. 자유주의, 진보적 개신교의 주장


다른 나라에서만 해도 당장 국제 망신에 다른 선교사들까지 추방시키니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너희 모두 예수를 믿지 않으니, 지옥에 갈 것"이라는 말은 교리상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지가 예수도 아닌데 남을 함부로 정죄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기독교 기준에서 위선자의 틀에 들어가게 되는 거다. 당장 성경에서도 "모두의 죄는 믿는 자건 안 믿는 자건 똑같고, 남들을 니 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오만"이라고 했다.
그것이 과연 올바른 종교인의 모습인지는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장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그 뜻대로 제대로 사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인지, 그리고 같은 죄인인 입장에서 다른 사람에게 "너 지옥 간다."라고 공격적으로 정죄하는 것이 그 가르침에 맞는 것인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당장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장면을 보더라도 '남의 눈의 티를 보기 이전에 자기 눈의 들보(기둥)을 빼어 버리라' 는 얘기가 나온다. 쉽게 말해서 다른 사람에게 비판을 가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살피라는 의미이다.[53]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이러한 주장은 과격한 근본주의에 가깝고, 성경 구절 하나하나에 과도하게 맹신하고 곧이곧대로 해석한 결과물이 지금의 공격적인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봐야 한다.[54]
무엇보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지만 무조건 예수 믿는다고 해도 구원받는 건 아니라고 예수 스스로 말했던 것을 기억하자.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7장 21~23절.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복음서 14장 6절.

율법을 모르고 죄지은 자들은 누구나 율법과 관계없이 멸망하고, 율법을 알고 죄지은 자들은 누구나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본성에 따라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을 실천하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이 자신들에게는 율법이 됩니다.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고 그들의 엇갈리는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행위가 자기들의 마음에 쓰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사실은 내가 전하는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의 숨은 행실들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 드러날 것입니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2장 12~16절.

여기서 말하는 율법(모세오경) 있는 자는 유대인들, 율법 없는 이방인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저 구절을 잘 살펴보자. 물론 이것은 예수의 복음을 접한것을 고의로 거부한것에 대한 답이 아니다. 이 구절은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한 이들과, 예수가 태어나기 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사람들의 구원여부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성서비평학적으로 바라보면 이 복음전도를 하라고 하는 성서의 내용은 예수가 직접 언급한 것이 아니라 성서의 편집과정에서 후대에 가필되거나 추가된 부분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성서학자들의 견해이다. 예수가 직접 명령했으니까 이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개소리라는 것. 물론 가필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구절이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건 아니며, 애초에 개신교도들의 주장과는 달리 교회 전통 속에서 전해진 예수 전승을 가지고 성경이 첨삭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비록 저자와 편집자의 개성이 성경에 반영되었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안에 내제되어있는 초월적인 구원의 논리와 성령의 영감을 생각하며 읽으면 그만이다. 즉 저자가 원래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 문자 하나하나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28장이 복음주의 진영의 가장 전초적인 선교 대 명령어로 자주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늘의 권세를 가졌으니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 세례를 주고...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명백하게 예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건 나중에 세례가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 실천됐던 아주 후기의 발전이 예수님 말씀처럼 덧붙여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봐라, 성경에 있지 않냐.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성서 근본주의자)은 성서가 어떤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서 기록되고, 편집되고, 그리고 전승됐는지,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성서는 오랜 역사를 거쳐서 기록되고, 전승되고, 또 편집되는 과정에서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이 된 겁니다."

한신대 신학과 교수

"마가복음(마르코 복음서)은 16장까지 있는데, 8절까지가 원래 마가복음에 있는 거고, 이 뒷부분은 나중에 덧붙여진 부분으로 보거든요. 문체도 다르고. 근데, 이게 누가 말했는지는 중요치 않고 성서에 있다는 게 중요한 거에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소장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이게 무슨 뜻이냐 이게 엄청난 말씀이에요. 윤리적인 잣대까지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는 선인도 악인도 없다는 거에요. 뭐, 천국 가고 지옥 가고 이런 거는 없다는 거에요. 하나님은 조건 없이 그냥 품어준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는 하나님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류상태 전 목사

참고로 과거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해당 내용으로 다루었는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한신대학교 계열 신학교수와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소장, 류상태 전직 목사 등과 인터뷰를 했다. 이들의 공통적인 주장은 "성경에 나온 모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9.2. 보수 개신교, 보편교회[55]의 주장


성경에서 추후에 가필된 부분이나 첨삭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은 성경의 100% 문자적인 무오류성을 논할 때는 지적사항이 될 수 있으나,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의 '영적 무오류성'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성경이 나중에 완성되었건 바로 완성되었건 모두 성령의 인도 아래 완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글자 그대로가 아니더라도 성경의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전제 하에서 지옥벌을 설명하는 부분 역시 구원 여부의 중요성, 회개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얼마든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 정교회와 더불어 성서무오설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의외로 한국의 다수 보수주의 개신교단에서도 이러한 유기적 영감설 성서해석(영적인 성서무오)견해를 유지한다. 이는 분명히 100% 문자적 무오류를 주장하는 성서무오설과는 다르다.
또한 성경 해석이 교부 시대 이래로 교도권, 또는 총대주교 등의 권위에 의해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 가톨릭정교회에서는 위 문단의 "성경에서 가필된 부분은 따를 필요 없고 무시해라"는 식의 말을 하거나, 성경의 특정 부분만 가지고 교리 전체를 정통 해석과 다르게 적용하려는 시도[56]와, 자유주의적 성경해석은 명백한 이단으로 단죄된다. 가톨릭은 트리엔트 공의회 때부터 교황청 교도권의 성경해석을 이탈하면 파문이라는 확고한 원칙을 유지해왔다. 이미 19세기에 예수의 가르침과 성경 해석을 교황청과 달리 해석하여 위 문단과 비슷한 주장을 펼쳤던 자유주의 신학자 알프레드 르와지 등이 이단으로 단죄되었으며, 현재도 한스 큉 등의 자유주의 성향 신학자들이 교황청에서 재제와 경고를 받는 등 가톨릭은 이런 무분별한 성서비평학 도입이나 몇몇 목사나 신학자 개인의 자의적인 성경해석으로 _교리를 비트는 수준_의 성경자유해석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단죄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정교회도 동일하다.

"그 밖에도 공의회는 경박한 자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그 누구도 그리스도교의 교리 체계를 구성하는 신앙과 행실에 대한 사안에서 자신의 판단에 의존함으로써 성경을 개인적인 이해에 따라, 성경의 참된 의미와 해석을 결정할 권한을 지닌 자모이신 성 교회(가톨릭)가 굳게 지켜온 의미와는 반대되게 왜곡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비록 그 해석을 출판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할지라도 교부들의 일치된 의견을 거슬러 성경을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결정하는 바이다.

가톨릭 트리엔트 공의회 제 4차 회기 둘째 교령 중.

"만일 누가 거룩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열거한 성경 전체[57]

와 그 모든 부분들을 거룩한 것으로, 그리고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58]임을 부인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법' 중 계시 규정 4번.

그리고 그 교도권의 공식 교리와 성경해석은 현재까지 '예수천국'뿐만 아니라 고의로 믿지 않는 비신자의 '불신지옥'도 인정한다.[59] 애초에 초대교회의 주요 교부들 역시 성경해석에서 고의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불신자들에 대한 불신지옥을 배제하지 않았다.[60]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자에 대한 범위의 차이는 교파마다 다르긴 하지만, 길거리에서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사실과 별개로 예수에 대한 고의적 믿음 거부에 대하여 지옥을 면한다고 보는 기독교 주류 교파들은 이단 취급받는 신학자 몇몇을 제외하면 과거에도 거의 없었고, 지금도 거의 없다. 신학을 제대로 한번만 공부해봐도 예수나 사도들, 교부들이 믿지 않는 것의 죄악과 지옥을 강조한 문구, 발언이 한두번이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
아울러, 자유주의 신학이나 진보 신학에서의 주장은 성경을 취사선택한다는 비판이 있다. 성경에서는 이웃에 대한 봉사나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부분도 많고, 믿음과 회개, 죄악에서의 탈피를 강조하는 부분도 마찬가지로 매우 많다. 이들 중 믿지 않는 자에 대한 불신을 단죄하는 문구는 비신자들을 불쾌하게 하는 문구라 하여 강조하지 않거나 무시해버리면서, 사회정의나 진보적인 사회참여만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앙인지 다시한번 성찰해볼 필요성이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둘 다를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 보수 개신교와 가톨릭, 정교회의 입장이다.
결론적으로, 민폐를 끼치는 과도한 전도행위는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와는 별개로 사회적 반감에 의한 실질적 역효과가 주로 일어나게 되므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교 자체를 포기하라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하는 것은 과도한 자유주의적, 반종교주의적 사고의 발로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사고방식은 절대 옳지 않다고 보는 입장을 취한다.

10. 여담


  • 대부분의 개신교학교에서는 이렇게까지는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강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채플과 성서과목을 필수교양과목으로 정해버리는 것이 바로 그것. 시간을 엄청 잡아먹게 하는 강의는 아니지만, 분명 엄연한 돈낭비이자 시간낭비이며, 특히나 성서과목의 경우에는 듣기만 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수업을 제대로 듣고 과제도 해오고 해야 학점유지가 가능하다. 아무리 개신교학교에 입학했다지만 개신교라서 대학교에 들어가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열에 아홉은 그냥 자기가 가고싶은 과가 있고 성적 맞춰서 가는 것일 뿐이지 개신교 믿으려고 간 것이 아닐 것이며, 이런식으로 강요하는 것 역시 올바르지 못한 종교행위다.
  • 최근에는 '예수천국' 문구가 빠진 업그레이드판 \'불신영원지옥'도 서울 시내에 나타나고 있다.
  • 불교에도 비슷한 문구(?)가 있다. 일본 불교 교파인 정토진종은 센코쿠 시대에 '잇코잇키'라고 하는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때 "나아가는 자는 극락에 살고, 물러나는 자는 무간지옥에"라고 쓴 깃발을 사용하였다.
  • 찜질방의 불가마에 갔다와서는 '지옥 갔다왔다'고 드립을 치는 경우도 있다. 이왕 지옥 가려면 불가마로 가야 하고, 여긴 한국인들에겐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라고.
  • 코로나19로 개신교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지자 예수지옥 불신천국이라는 말이 많이 공감되고 있는 실정이다.

11. 관련 문서



[1] 사진에서 근거로 든 '요14:6(요한복음 14장 6절)' 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내용이며 '행4:12(사도행전 4장 12절)' 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하는 내용이다. 여담으로 영어, 중국어, 일어, 한국어 순으로 작성되어 있다.[2] 가톨릭, 정교회.[3] 불신지옥에서 이견이 갈리는거지, 예수천국은 개신교, 정교는 물론이요 교황까지 인정했으니 천주교까지 전체 기독교 교파가 인정하는 교리이다.[4] 죄로 끼친 피해를 반성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갚아가고 열심한 신앙생활이나 고통으로 대신하는 것[5] 정교회, 가톨릭 등, 개신교인들도 본인이 이 교리에 동의하여도 남들에게 이걸 억지로 강요하는 행위를 보면 창피해서 고개를 돌려버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6] 거기다가 이 불신지옥이 때로는 후욕패설로 쓰이기도 한다.[7] 성경의 해석 문제는 옛날부터 논쟁거리였다. 다만 과거에는 이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성향이 강했으나 지금은 예수가 강론을 할 때 비유적으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서 역시 비유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견해가 늘어나고 있다.[8] 레위인은 대제사장의 가문을 포함한다. 굳이 제사장 집안이 아니더라도 일단 이들은 성직자나 해당 관계자의 일을 하였고 유대 민족들 중에서도 가장 큰 위치에 놓였다. 참고로 현재 유태계 사람들중에 Levy, Levi, Levine의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 레위인들의 후손이다. 다만 레위인은 시체에 닿으면 밥줄이 끊기기 때문에 약간의 쉴드 여지가 있긴 하다.[9] 단 '끌어 안는다는' 말이 기독교 복음전파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복음전도는 성향을 가리지 않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다.[10] 사회 개혁이나 타인에 대한 사랑과 관계없는 주장을 강요하는 것.[11] 성경을 비판하려고 연구하던 과학자들이 도리어 은총을 받아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어느 스님이 모든 것을 버리고 평생을 자기 수련에 마치고 죽기 직전에 한 유언이 자기 죄가 아직도 "수미산보다 크구나" 하고 말했다는 이야기 등등 여러 버전이 난무한다. 당연히 대부분은 뻔한 거짓말.[12] 어디까지나 과거 이야기이다. 1970년대, 80년대 초만 해도 지방에선 수십만 명의 공동 개신교 집회가 여러번 벌어졌을 정도다. 참고로 광복 이후 전국의 개신교도가 채 100만도 안 되었던 것이 겨우 50년 사이에 무려 10배가 넘는 1,000만 명(1995년 통계청 조사)에 달했을 정도로 한국은 단기간에 개신교도 수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폭발적이었기에 이런 입문담이 꽤 많았다. 그러나 이후로 갈수록 개신교도 수가 줄어들면서 2005년 통계에선 900만 이하로 내려갔다. [13] 성 디스마. 축일은 3월 25일. 왼편의 회개하지 않은 죄수의 이름은 제스따스.[14]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어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될 터인데, 그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24장 13절, 가톨릭 성경)[15] 천주교에서는 과거부터 '고성소' 라는 개념을 통해 불신자나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자들에 대한 사후세계 장치를 설정했었고, 현대에 들어서는' 자기 탓 없이' 믿음이 없다고 구원이 불가하지는 않다고 가르친다. 이건 개신교 측에서 말하는 대로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다는 단순한 행위구원론이 아니라, 좀 더 복잡한 측면으로 접근해야 할 신학적인 내용이다. 쉽게 말하자면 "구원은 하느님의 영역이니 그 분께서 잘 판단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다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지 않고 단순히 자력으로 천상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행동과 믿음을 병행하여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가르친다.[16] 다만 이건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맞는 얘기인데 자유주의 개신교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17]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3장 23~26절, 개역개정판)[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일서 1장 8절·10절, 개역개정판)[19]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로마서 2장 14~15절, 개역개정판) [20] 개신교의 근본 교리는 '구원의 척도는 오직 믿음뿐이다'이기 때문.[21] 물론 무류적으로 확정하여 선언한 것은 아닐지언정,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에게 이러한 엄청난 권한이 주워진 것들만 보더라도, 공의회가 가톨릭 교회에서 단지 '좀 큰 회의' 정도로 이해되지 아니함은 분명하다. 까고 말해서, '구체적인 해석'이 아니라 공의회의 이 선언 자체에 가톨릭 신자는 순명해야 한다. 반대를 한다면,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이단적인' 의견이 된다. 사적으로 반대하는 것까지는 교회가 크게 터치하지 않지만, 공적으로 주장하면서 교회의 권고까지 무시하면 파문 당할 수 있다.[22] 다만, 교황의 경우에는 공의회 위에 교황이 있기 때문에 공의회에서 제정된 법령이라도 자의적으로 이를 무효화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교황의 권환(수위권)은 예수 그리스도-사도 베드로에서 직접 이어져있기 때문.[23] 해당 사항에 대한 교황청 신앙교리성 발표 http://www.cbck.or.kr/book/book_list6.asp?p_code=k5160&seq=401741.[24] 종교를 안믿거나, 어느 종교를 믿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상.[25] 그러나 여기서 정말로 유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구원 계획이지 구원 확정이 아니다. 애초에 가톨릭 교리에서 하느님은 모든 이들의 구원을 바라기 때문에 구원 계획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라고 보는것이 맞다. 그러나 실상 이교도들과 불신자 본인 쪽에서 복음을 거부하기에 지옥에 간다는 것이 교리이기 때문에 공의회에서 정교회, 개신교, 유대교, 이슬람신자라고 해서 이들도 자동구원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절대로 아님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중요 교리를 가지지 못한 경우가 절대다수이며, 가톨릭을 믿을 수 있는 상황과 입장에 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거부했다면 다른 비신자나 마찬가지로 구원받지 못한다. 대표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이나 가톨릭 교리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데 앞장서는 이슬람 극단주의 신학자, 개신교 목회자 등을 들 수 있겠다.[26] 여기에 대해 공의회 문헌은 신앙 교육의 소홀, 교리의 잘못된 전파, 신자 자신의 그릇된 행실 등을 대표적 예시로 들고 있다.[27] 대표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알고 있어도 믿지 않는 자와 가톨릭에서 타 종교/교파(개신교 포함)로 개종한 배교자.[28] 이 교리는 개신교의 해석인 복음을 듣지 못한 경우, 로마서에 나오는 이방인은 양심으로 판단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 탓 없이 복음을 듣지 못한 부류의 예로 천주교 전래 이전의 한반도 사람을 들 수 있다.[29] 여담으로, 이 교리서는 윤형중 신부 본인이 20세기 초 신학생 시절에 배운 교리내용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인 1956년~1959년에 걸쳐 집필/출판된 서적이다. 이는 가톨릭의 구원관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변경된게 아니라는 것을 잘 드러내준다.[30] 예를 들어, "아 그래? 그럼 난 불가항력적 무지 상태니까 그럼 천주교 안 믿어도 구원받지?" 식의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렇게 말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상태부터가 이미 불가항력적인 무지가 아니다(…) 천주교를 믿을 생각이 안 든다면, 5번에서 말했듯 끊임없이 기도(혹은 그에 준하는 마음의 준비)를 계속하면서 은총을 청하고 이미 알려진 천주교의 교리를 지속적으로 힘껏 연구할 의무가 있다. 이를 게을리한다면 구원받을 가능성조차도 받을 수 없다.[31] 동 저서, 255p.[32] 현행 가톨릭 교회법에서도 예비신자가 죽으면 사실상의 신자로 간주하여 장례 미사를 치뤄준다. 예비신자야말로 후술할 '화세'를 받았을 개연성이 가장 높은 부류이기 때문.[33]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신앙에 대한 법령> 제 6조. "만일 누가 신앙인들이 처한 조건과 아직 유일한 참신앙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처한 조건이 동일해서, 가톨릭 신자들은 자기들의 신앙의 신빙성과 진실성에 대한 과학적 입증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자기들의 동의를 중지시킨 채 (가톨릭)교회의 교도권을 통해 받아들인 신앙을 의심할 정당할 이유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34] 어린 시절 기독교인이었다 성년이 되어서 반기독교인이 된 케이스이자, 수학자, 철학자였던 버트런드 러셀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엄밀히는 러셀은 가톨릭은 아니었지만) 그는 생전에 자신이 죽고 난 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만난다면 어떻게 말하겠냐는 질문에 "하느님, 당신을 믿기엔 근거가 없었다고요!"라고 변명할 것이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35] 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36]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주도한 바오로 6세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구든지 (제 2차 바티칸)공의회가..(중략).. 상대적인 세속적 사고방식에 대해 관대하게 양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던지, 이전보다 더 쉽고 덜 철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형태를 포용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1965년 발언).[37] 사실 이런 의견들 자체는, 절대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의 태도라 할 수 없다. 비록 신앙과 도덕에 관한 공의회의 무류성이 공식적으로 선언된건 2차 바티칸 공의회 들어서이지만,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도 세계공의회는 결코 '좀 큰 회의' 정도로 취급되지 않았다. 공의회에 대한 폄하는 명백하게 비전통적이고, 비정통적이고, 비가톨릭적인 의견이다. 세속 국가에 비유하자면, '자칭 보수'라는 사람들이 헌법을 부정한다고 생각해보자.[38] 간혹 "우리 본당 신부님은 안 그러시던데?"라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으나, 질문을 정확하게 하면 대체로 공의회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내의 틀에서 답변하려고 한다.[39] 출처 : 마리아사랑넷, 가톨릭사전,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항목[40] 참고로 이 구절은 개신교의 이신칭의 교리를 비판하는 성경적 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41] 해당 신부는 천주교 원주교구 태장동본당 주임사제인 박용식(시몬) 신부인데, 해당 영상이 나가고 난 뒤에 보수적인 신자들의 비판이 많았다. 분명히 가톨릭 교리에서는 비신자의 구원에 대해 비교적 엄격한 조건을 달고 있고, 본인도 신학교에서 이를 배웠음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비신자도 구원안하는 하느님은 하느님도 아니라는, 무신론자나 할 법한 오해를 살 발언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명심하자. 가톨릭 사제는 가톨릭의 교리를 따라야 한다.[42] 기사 출처는 LIFESITE NEWS.[43] 가톨릭에 비해 교리가 많이 유연한 성공회조차도 (종교)다원주의적 가치관은 단언코 경계한다.[44] 상기한 예비신자의 사망을 그 예로 들 수 있다.[45] 이 경우에도 어쨌든 신자가 되는 걸 막은 외적/타의적 장애와는 별개로 마음으로 확고히 가톨릭 신자가 되려는 마음을 품고 신자가 되기를(세례성사를) 열망하였기에 화세의 적용대상이다.[46] 유아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아기이든, 무신론자이든, 무속인이든 말이다.[47] 의외로 가톨릭 신자들 중에서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많다. 개신교 목사 출신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가톨릭계의 유명인물이자 저명한 평신도 신학자인 스콧 한 박사는 본인의 개종 수기인《영원토록 당신사랑 노래하리다》에서 이런 에피소드를 밝혔는데, 오랜 고심과 결단 끝에 지역 본당신부에게 가톨릭으로 입교하겠다고 밝혔더니, 본당신부가 크게 불쾌해하면서(?!)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타종교도 다 구원받고 인정하니 가톨릭으로 올 필요 없다"(...)는 소리를 하면서 성당에서 나가라는 말을 들었던 충격적인 실제 경험담이 있다. 이런 식의 다원주의적 태도는 신앙교리성에서 경고를 받거나 면직되어도 할 말 없는 명백한 교리 위반이다.[48]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교회'라는 말은, 단지 '신자 공동체'로 이해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배우자이자, 그리스도의 몸이자, 인류의 어머니라는 신비적 의미로 이해할 때 그 뉘앙스에 가까워진다.[49] 참고로 동영상에는 "불교를 믿든지 다른 종교를 믿든지 인간으로서 참되게 사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다 구원해 주신다"라는 가톨릭 역사상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던 말을 단 해괴한 자막이 달렸으니 주의.[50] 여기서 말하는 비그리스도인은 화세까지 포함한 세례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명시적으로 흠숭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다.[51]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영역의 추상적 주제이기 때문에, 일평생 논쟁을 해봤자 결론이 나오지도 않으며 감정 싸움만 일어나기 때문이다.[52] 태국은 전 인구의 95%가 불교를 믿는 불교 국가이다.[53] 자신이 의인인 양 구는 것도 일종의 교만죄라는 대죄에 속한다.[54] 공관복음서에도 나와 있듯이 예수는 강론을 할 때 항상 비유적인 표현으로 말했고, 예수 스스로가 자신이 비유적으로 강론한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그 이유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다. 이것으로 유추했을 때 성서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건 중세 교회만도 못한 해석 방식이다. 중세에는 적어도 성경이 유기적 영감으로 쓰여졌다는 신학적 노선도 존재했고, 초기 기독교 교부로 가톨릭의 성인인 히포의 아우구스티노(354~430)도 그렇게 주장했다. 당장 예수의 강론을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상당히 위험한 내용들이 많다.[55] 가톨릭, 정교회.[56] 대표적으로 위 문단의 목사가 주장하는 현세의 공평한 대우에 대한 특정 구절만 가지고 같은 성경에 마찬가지로 규정된 사후의 악인/불신자의 지옥벌을 부정하는 식의 자의적 해석이라던지.[57] 가톨릭 성경 73권.[58] 즉 일부 구절이 해당 성경의 형성 및 집필 과정에서 후대에 첨삭/가필되었더라도, 이 역시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최종적으로 완성된 거룩한 성경구절이라는 것이다. 사실, 성경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근현대에나 이런 가필/첨삭이 일종의 결함취급받는 것이지, 성경이 형성되던 기원전이나 1~2세기의 고중세에는 이러한 관행은 아무도 문제시하지 않는, 당연한 것이었다. 각종 가톨릭의 해설에서도 성경의 형성 과정의 가필 가능성은 인정하면서도, 이를 성경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어 나가는 과정으로 본다. 사실, 4세기 말의 카르타고 공의회와 이후의 여러 공의회에서 정경목록이 수립되기 이전에는 비공식적인 정경목록은 있었으나 전체적이고 통일된 '정경'의 개념이 전체 교회에 확고하게 자리잡히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앞서말한 고중세 서적의 형성 과정들을 감안하면 성경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59] 복음서의 지옥 언급뿐만 아니라, 예수를 만나고도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코라진, 벳사이다)에 대한 예수의 세상 마지막 심판의 날에 당할 징벌 언급, 사도행전에 언급된, 복음을 거부하려 하는 유대인들에게 사도들이 전한 심판의 경고 등 성경의 소위 맥락적 내용도 결코 고의적 불신자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다.[60] 성 이레네오, 아우구스티누스, 치프리아누스(사이프리안) 등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 모두에서 교회의 아버지(교부)들로 존경받는 주요 신학자들 거의 전부가 고의적으로 그리스도교를 거부하는 불신자들과 이단자들은 불신지옥을 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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