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1931)

 

* 정치인/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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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東鎭
1931년 10월 9일~1997년 1월 15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1931년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법학과를 졸업 후 군문에 투신,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북도 영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육인수 후보와 무소속 이용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0년 전두환이 집권하자, 구 민주공화당 인사들 중 정치규제를 당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박유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국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정의당 박준병 후보와 민주한국당 이용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7년 한국국민당을 탈당하여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인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반(反) 김영삼 진영에 섰다. 결국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가 되자 이종찬 등과 함께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새한국당을 창당하였다.
제14대 대통령 선거 이후에는, 젊은시절 대표적인 여권 인사였음에도 DJ에게 꾸준히 안부를 물었던 친화력을 높이 평가한, 민주당으로 영입되었으며, 94년에 귀국한 DJ가 설립한 아시아태평양재단[1] 후원회장을 맡았다.
1995년 김대중의 정계 복귀 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해,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과천시-의왕시 지역구에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안상수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하지만, 1994년 박태준포항제철 회장의 모친상에 '''아태재단 명함'''을 지니고 조문하며 DJP연합의 단초를 마련한 사람으로써, DJ의 대선 행보 동반자(아태재단 후원회장 + 국민회의 경기 과천·의왕지구당 위원장)로 중용되었다.[2]
1997년 1월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1] 통일 연구 목적으로 세워졌다. 4수 도전에 실패하면 이 아태재단을 통해 여생을 통일 연구 및 정책방안 제시 활동에 매진할 계획이었다고.[2] 아태재단 후원회장으로 있을 때, 94년 ~ 97년 1월까지 50억 3,000만원의 후원금을 모아 정치를 재개한 DJ에게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90년대 중반의 50억원이면, 2010년대의 120억원에 상당하는 액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