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1936)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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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제1선거구)'''
제10대
정대철
민관식

'''제11대'''
'''이종찬'''
김판술

''선거구 개편''
이종찬[A]
이민우[A]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종로구·중구)'''
''선거구 개편''
이종찬[B]
김판술[B]

'''제12대'''
'''이종찬'''
이민우

''선거구 개편''
이종찬[C]
정대철[D]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종로구)'''
''선거구 개편''
이종찬[E]
이민우[E]

'''제13·14대
이종찬'''

제15대
이명박



'''제22대 국가정보원장
이종찬
李鍾贊 | Lee Jong-chan
'''
<colbgcolor=#002267><colcolor=#ffffff> '''출생'''
1936년 4월 29일 (87세)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
(現 중국 상하이시)
'''본관'''
경주 이씨 백사공파
'''자'''
계원(桂苑)
'''호'''
삼인(森人)
'''재임기간'''
제22대 국가안전기획부장
1998년 3월 4일 ~ 1999년 1월 21일
제22대 국가정보원장
1999년 1월 22일 ~ 1999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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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colbgcolor=#002267><colcolor=#ffffff> '''부모''' 父 이규학, 母 조계진 '''형제자매''' 형 이종원 '''배우자''' 윤장순 '''친인척''' 조부 이회영
사촌동생 이종걸 '''종교''' 개신교 (장로회) '''학력'''
서울창신초등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 석사)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11''', '''12''', '''13''', '''14'''
'''경력'''
주영국대사관 참사관
중앙정보부 기획조정실장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제11-12대 국회의원(서울 종로구·중구)
제13-14대 국회의원(서울 종로구)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
제22대 국가안전기획부장
제22개 국가정보원장
우당장학회 이사장
우당장학회 명예이사장
우당기념관 관장
한국선진화포럼 이사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학사 / 16기)
<color=#ffffff>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60년 2월 ~ 1963년 1월
'''최종계급'''
소령 (중앙정보부)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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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군인. 정치인.
제5공화국 당시 민주정의당 원내총무를 지냈으며,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안기부장, 국정원장 등을 지냈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손자[1]이자 전 국회의원변호사이종걸의 사촌 형인 것으로 유명하다.[2]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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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요인들이 환국 전 상하이 공항에서 찍은 사진. 앞줄 가운데 태극기를 든 소년이 이종찬이다. 오른쪽에 눈물을 닦고 있는 중절모 쓴 노인이 이종찬의 작은할아버지인 성재 이시영.
1936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에서 출생하였다. 이종찬의 조부는 우당 이회영이었고, 이종찬의 어머니 조계진은 흥선대원군의 외손녀이자 고종의 조카[3]였다. 흥선대원군의 둘째 딸인 이씨 부인이 조정구와 결혼해서 낳은 딸이 조계진이라고.
1945년 임정 요인들이 귀국할 때 함께 귀국하여 그 뒤부터는 서울에서 살았다. 서울 창신초등학교, 경기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4], 육군사관학교 제16기로 임관하여 장교로 복무하였다.[5]
5.16 군사정변 이후 공채 1기 선발에 수석으로 합격해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다. 1971년 소령으로 예편하였고 민간인 신분으로 계속 중정에서 근무했다. 중앙정보부에 있을 때에는 정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끌려온 이들을 나름대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김지하와 가까운 사이여서 '오적 필화 사건'으로 정권의 어그로를 잔뜩 끌었던 김지하가 1972년 '비어 필화 사건'을 일으켜 중정의 분위기가 심히 험악해지자 김지하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연락을 하였다.[6] 중정 수사관들로부터 조영래의 인품을 전해 들은 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조영래에 대한 수배가 풀리자 “인재를 살려야 한다”며 법원행정처장을 직접 찾아가 조영래를 사법연수원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1980년 5월 17일 밤에는 전두환이 5.17 쿠데타로 김대중을 잡아갈 때 중앙정보부 총무국장이었다.[7] 다만 이 자체가 신군부의 플랜이었고, 기사에서 보듯이 수사결과와는 별도로 신군부의 극본은 이미 짜여져있었다. 그 후 기획조정실장을 끝으로 중앙정보부를 떠나 국보위 활동과 민정당 창당에 적극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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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5공화국이 출범하자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새한국당-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 소속)을 지냈다. 당시 민주정의당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지냈는데, 민정당 국회의원들 가운데서는 드물게도 이미지가 좋은 편에 속했다. 심지어는 진보진영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우당 이회영의 손자라는 점에서 플러스점수를 받았던 것도 있지만, 성향 자체가 학구적이고 논리적인 데다, 정치적 뚝심과 사람됨, 업무능력 등에서도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1987년 10월 26일 사료의수집및보존등에관한법률안(국사편찬위원회의 법률상 근거를 마련한 법률. 사료의 수집·편찬 및 한국사의 보급 등에 관한 법률의 전신)을 대표발의하였으며, 이 법안은 같은 달 30일 수정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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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때에는 민주자유당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서 김영삼에게 도전하였다. 당시 박태준, 이한동 등의 지원을 받았으나, 김영삼이 대세론을 타고 있었고, 노태우도 마땅한 후계자가 없는 바에야 김영삼을 밀어주자는 생각으로 김영삼을 밀어준 바람에 좌절하고 말았다.
그 후로 김영삼의 눈밖에 나자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새한국당을 창당하였다. 1995년 새한국당이 민주당에 흡수되자 민주당으로 옮겨갔고, 같은 해에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및 동교동계 정치인들과 더불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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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때에는 국민회의 대선기획본부장을 맡아 대선 전략을 조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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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거쳐 안기부장에 임명되었고, 안기부의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하여 1999년 1월 안기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편하였다.# 그 과정에서 종로구 지역구를 반납하게 된다.[9] 이후 김대중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위한 홍보 기획을 하기도 했다. 다만, 김대중이 노벨상을 수상했을 때 수행원에 포함되지 못해 아쉬웠던 듯하다. 동아일보에 연재 중인 이종찬 회고록 중.
김대중 대통령 당시 차기 주자로서 각광을 받던 때도 있었으나, 국가정보원 언론문건 파문 당시 거짓말을 한 것이 까발려져서 국가정보원장 자리에서 경질되었다. 그 후 2000년 총선에서 종로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사실상 정치적 생명이 끝나고 말았다.[10][11] 정계 은퇴 이후 비교적 조용하고 깨끗하게 처신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현재는 종로구의 자택 1층에 할아버지이회영을 기리는 우당기념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장학사업과 대학생들의 사회활동을 후원하고 있다.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기도 한데, 최근 벌어지는 이른바 '역사전쟁'을 의식한 듯, "김구, 이승만이 화해하고, 좌우가 구분되지 않는 기념관을 건립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19대 대선때는 문재인 후보의 선대위에 고문으로 위촉되어 합류하였다. #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이 방중하여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였을 때 다른 독립운동가 후손과 함께 동행하였다. #
2020년 4월 16일에는 JTBC의 시사교양 프로그램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출연, 종로구 국회의원 출신의 원로로 이낙연과 황교안의 종로 선거구 대결에서 중요한 포인트를 복기하는 역할로 인터뷰 출연하였다.

3. 여담


  • 아내인 윤장순과는 상하이에서 막 귀국했을 당시 서울 창신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나서[12] 꾸준히 연애하다가 육사 졸업 후에 결혼하였다. 아들은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13]이다.
  • 연예인 중에서는 가수 이선희와 친분이 있다. 이선희가 1991년 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하도록 권유하였다. 기타 연예인 중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는 경기고등학교 동창인 배우 신구 등이 있다.
  • 환빠로 악명이 드높다. 하버드 대학 마크 바잉턴 교수에게 이덕일유사역사학 지지자라고 실명이 거론되어 저격을 당하는 등 학계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허성관 전 행자부 장관이나 김석동 전 금감위원장 등과 같이 묶이는 편.[14] 이덕일의 일방적 주장에 현혹되어 바잉턴 교수의 한국고대사 연구 지원을 끊어버리는데 지대한 압력을 행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페이스북 모 커뮤니티를 보면 매일 강단 사학 운운하며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이종찬 전 국정원장님이 되어야한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고...
  • 2018년 삼일절을 기념하여 태극기 집회 단체를 비판했다.[15]
  • 최근 그동안 모아온 의정활동 기록을 국회도서관에 기증했다. 총 기록은 6,500여점.이종찬 전 국회의원, 평생의 의정 기록물 6,500점 국회도서관에 기증[16]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81 - 1990
창당
정계 입문

1990 - 1992
합당[17]

1992
대선 경선 불복으로 인한 탈당

1992 - 1995
창당

1995
합당[18]

1995
새정치국민회의 합류를 위한 탈당

1995 - 2000
창당

2000 - 2005
합당[19]

2005 - 2006
탈당

2006 - 2007
입당

2007 - 2017
탈당

2017 - 2019
입당[20]

2019 -
탈당
정계 은퇴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선거구)
'''민주정의당'''
'''116,279(48.71%)'''
'''당선(1위)'''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구·중구)
'''민주정의당'''
'''84,258(32.23%)'''
'''당선(1위)'''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민주정의당'''
'''46,534(37.95%)'''
'''당선(1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민주자유당'''
'''41,208(35.47%)'''
'''당선(1위)'''

1992
제14대 대통령 선거
새한국당
-
사퇴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새정치국민회의
32,198(33.55%)
낙선(2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새천년민주당
32,368(39.96%)
낙선(2위)


[1] 우당의 둘째 아들인 이규학의 4남.[2] 다만 두 사람의 부친은 어머니가 다르다. 본처인 달성 서씨가 1907년에 사망하면서 우당이 이듬해 한산 이씨 이은숙과 재혼했기 때문. 이종걸은 우당의 다섯번째 아들인 이규동의 아들이다.[3] 누이의 자녀이므로 정확하게는 '생질(甥姪)'이라고 한다.[4] 대우그룹 회장인 김우중과 경기고 52회 동기로서 매우 친했다고 한다. 둘 다 경기고 내에서 주먹패로 날렸다고 한다. 동기생으로 신구, 고건, 이준용, 박용오, 조양래가 있다.[5] 원래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사학과에 가려고 하였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6] 이외에 김지하 본인의 주장으로는 이종찬에게 쿠데타 제의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종찬은 이 주장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다.[7] 이종찬의 부하로서 김대중을 연행한 이기동이 신동아 1999년 7월호에 기고한 "남산 지하실에서 만난 김대중·김홍일·한화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8] 김대중의 오랜 참모들은 신당 창당에 회의적이었으나 이종찬이 강력하게 주장한 덕분에 결국 신당을 창당하게 되었다고 한다.[9] 1998년 연초에 노무현에게 지역구를 물려주었다. 1996년 15대 총선 당시에 노무현이 이종찬을 '민정계와 놀아난 사람이 신분세탁했다' 식으로 비판했지만 이종찬 본인은 예전 일에 대한 악 감정을 풀고 대인배 기질을 보이며 지역구를 넘겨주었다. 대의를 위해서 과거의 악감정을 훌훌 터는 이종찬의 모습에 노무현 본인도 감사를 표했다.[10] 그 전에 1996년에도 종로구에 출마하였으나, 이명박, 노무현 등과 함께 3자 구도로 진행되어 큰 차이로 이명박에게 패했다. 2000년에는 한나라당 정인봉에게 석패하였다.[11] 아무래도 이종찬이 1981년부터 1996년까지 종로에서 내리 4선을 하면서 종로구민 사이에 이종찬에 대한 피로감이 쌓인 것이 낙선의 원인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1996년 당시 이명박이 선전했던 원인이 '낙후된 종로를 개발하겠다.' 류의 선거운동이었으니... 이런 상황속에서 안기부장(국정원장)을 맡느라 지역구 관리를 못해오던 이종찬은 당시에 지역에서 계속해서 출마하던 한나라당 후보인 정인봉 변호사에게 밀리고 말았다.[12] 그 당시 이종찬은 한국말도 잘 못하고 중국말을 섞어 쓰고 하여 '짱꼴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13] 서울법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성균관대 법대를 거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되었다. 전공은 법사회학이다.[14] 이덕일이 이회영 평전을 쓴 바 있는데, 이 덕분에 가까워져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 둘이 강연을 한 적도 있다. 참고로 사촌동생인 이종걸 역시 환빠 의혹을 받고 있는데, 그도 마찬가지로 이덕일이 이회영 평전을 쓴 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5] 독립운동가 후손 이종찬 "태극기 오염은 제발 그만", 2018년 3월 1일, 노컷뉴스 김현정 기자[16] 2018년 11월 9일, 의회신문 박성용 기자[17]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18] 민주당에 흡수 합당[19]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20] 문재인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