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바 테츠야

 

''' 치바 테츠야 '''
'''ちばてつや|Tetsuya Chiba'''
'''본명'''
치바 테츠야 (千葉徹彌(ちばてつや)
'''국적'''
일본 [image]
'''출생'''
1939년 1월 11일 (85세)
일본 제국 도쿄부[1]
'''직업'''
만화가, 교수
'''수훈'''
자수포장 (2002년)
욱일소수장 (2012년)
문화공로자[2] (2014년)
'''서명'''
[image][3]
'''링크'''
[4]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학력'''
일본대학제1고등학교 (졸업)
'''데뷔'''
복수의 꼽추 (1956년)
'''활동 기간'''
1956년 – 현재
'''장르'''
소년만화
청년만화
순정만화
'''거주지'''
도쿄도 네리마구[25]
'''배우자'''
치바 유키코[26]
'''역임 직위'''
일본만화가협회 상임이사 (1998~2012. 07.)
분세이예술대학 만화전공 교수 (2005~)
일본만화가협회 이사장 (2012. 07.~2018. 06.)
일본만화가협회 회장 (2018. 06~)
분세이예술대학 학장 (2019. 04.~)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커리어
2.3. 주간 연재 중단 이후
3. 특징
4. 연재작 목록
5. 수상 및 서훈 경력
6. 여담
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일본만화가. 일본 만화계의 전설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내일의 죠'''[5]'가 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939년 1월 11일 도쿄 주오구에서 태어났으며, 네 남매의 장남이다. 2살 때 만주국에서 인쇄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봉천으로 이동해 살다가 패전 1년 후 가족들과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귀향했다.[6] 이후 길거리에 떨어진 만화를 보고 충격을 받아 만화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7]가 되었지만, 자신의 집이 엄격히 만화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친구 집에서 몰래 읽는 행동을 하였었다고 한다. 이후 고등학교 재학 중에 어느 신문의 만화가 모집 광고를 보고 한 서점에 응모해 집필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때(1956년) 만들어낸 '復讐のせむし男'으로 데뷔하였고 이후 2년간 대본소 만화 집필을 이어나갔다.

2.2. 커리어


첫 잡지 연재 만화는 1958년 소녀북에 실린 'オデット城のにじ'다.[8] 이 시기 ママのバイオリン을 연재할 때 기분 전환을 할겸 동생 아키오와 같이 담당자에게 전기 안마를 하다가(...) 이를 못참은 담당자가 그를 걷어차 유리창 쪽으로 돌진했고, 유리가 깨지면서 팔의 힘줄을 끊어 한동안 만화를 그리지 못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이때 편집자 카베무라 타이조가 펑크난 원고를 그려줄 사람을 찾아 토키와 장에 찾아가서 아카츠카 후지오가 그려줬고 이 작품은 그의 인생 첫 월간지 연재작이 되었다. 테츠야는 고등학생 시절 이시노모리 쇼타로가 조직한 아마추어 만화가 지망생 모임 '동일본 만화 연구회'의 회원으로 아카츠카 후지오도 회원이었고 두 사람과는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다.
이후 소녀취향 만화를 그리다가 1961년 'ちかいの魔球'를 주간소년매거진에 연재하며 활동영역을 넓혔다. 1963년 소녀클럽에 연재한 '1・2・3と4・5・ロク'(1971-1972년, 한국의 아동잡지 새소년에 ‘오똑이 대행진’이란 이름으로 윤동원이 표절한 것이 연재되었고, 종료후 클로버문고로 발간)는 큰 인기를 끌어 70년대와 80년대 두번 TV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이후 소년지와 소녀지에 계속 작품을 그리며 애니화도 되었고, 1968년 훗날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으로 남은 복싱 만화 '''내일의 죠'''(あしたのジョー)를 연재한다. 이 시기는 치바 테츠야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데, 내일의 죠를 이어 1973년부터 검도 만화 '''열풍 검도불패'''(おれは鉄兵)와 스모 만화 'のたり松太郎' 두 작품을 장기연재했다.[9]
[image]
검도불패. 이것도 애니화되었으며 해적판으로 한국에 나온 바 있다. 애니판은 93년에 서울미디어에서 비디오더빙 출시. 제목은 <태풍소년 티피티피>.
이 그림만 보면 모르겠지만 근처에 만화카페라도 있으면 찾아보자. 1권 시점만 해도 명백히 야부키 죠를 닮은 주인공과 카를로스 리베이라를 닮은 조연을 볼수 있다. 열풍 검도불패를 연재하던 초중반에 "내 인생에 미형 주인공은 야부키 죠가 마지막"이라는 결심이라도 했는지[10] 주인공인 우에스기 텟페이가 <내일의 죠> 후반부 야부키 죠에서 일자 눈썹에 완전 들창코인 유쾌한 성격의 꼬맹이로 변해가며, 이후 작품에선 이 얼굴이 치바 테츠야의 "주인공 얼굴"이 된다. 그밖에도 여러 지면에서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는데, 1981년 또 다른 필생의 대표작인 골프 만화 '''그린의 정복자'''(あした天気になあれ)를 연재했다.
[image]
'''챠-슈-멘'''
간혹 일본 만화를 보다 보면 골프를 치면서[11] 음식 이름을 중얼거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이 작품에 대한 오마쥬이며 이 오마쥬는 크레용 신짱에서 대표적으로 나온다. 주인공 타이요가 스윙 리듬을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주문처럼 외우는데, 이게 워낙 임팩트가 강해서 그린의 정복자 하면 으레 차-슈-멘 구호를 떠올릴 정도.

2.3. 주간 연재 중단 이후


이후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는데, 1992년부터 다시 장편 '''소년이여 라켓을 잡아라'''(少年よラケットを抱け)를 연재 도중 심장질환과 망막박리에 걸려 수술을 받게 된다. 작품은 1994년 12권으로 완결했으며 이후 몸에 부담이 되는 장기 주간 연재는 사양하고 단편 위주로 간간히 활동하고 있다.
1998년에는 야나세 타카시의 후임으로 사단법인 일본만화가협회의 상임이사로 취임했으며 2021년 현재는 회장이다. 또한 2002년에 요코하마시에서 개최된 『제5회 아시아 MANGA 서밋』 실행위원장으로 취임하여 만화문화의 담당자로서 활약하는 한편, 2005년부터는 분세이 예술대학에서 만화전공 교수를 맡아 후학 육성에 주력하고 있다.
2003년에는 자수포장 수상, 2012년에는 욱일소수장에 추서, 2014년에는 일본 문화공로자로 선정되며 만화계에서의 업적을 인정받았다. 그야말로 영예로운 말년을 보내는 중이다. 치바는 "전 세계인을 즐겁게 하는 문화 중 하나로 인정받았나 싶어요. 60여 년에 이르는 만화가 인생의 원점은 어머니가 만화를 못 읽게 한 것입니다. 숨어서 읽거나 그리다가 사로잡혔죠. 그래서 지금 엄마한테 어때서? 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웃으며 문화공로자 수상 소감을 밝혔다.

3. 특징


'''"치바 선생님의 만화는 시간이 지나도 약해지지 않아요. 어릴 때 읽었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역시 대단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점이 작가로서 치바 선생님의 대단한 점이고, 아주 존경하고 있습니다."'''

타카하시 루미코[12]

#

데뷔 초기에는 순정만화거장으로 꼽혔고 소년만화로 인기를 얻은 후에는 이쪽을 주력하게 되고 이후에 청년만화로 독자층을 넓혔다. 상당한 스펙트럼을 가진 만화가. 그 중에서도 내일의 죠는 1960년대~1970년대상징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만화 역사의 이름을 새긴 대표작이 되었다. 내일의 죠 이후에는 골프, 테니스, 검도, 스모 등을 소재로 한 왕도적인 스포츠 만화를 그렸다.
1970년대 말 데즈카 오사무는 "자신이 스토리 만화를 시작한 이후, 정말로 새로운 것을 더한 것은 치바 테츠야뿐이라고 생각한다.[13]"라고 평한 바 있으며 만화가 쿠스노키 다카하루는 "치바씨는 데즈카 오사무씨에게 가장 영향을 받지 않은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다."라고 평했다. 이런 평을 받을 정도로 본인만의 길을 개척해 오리지널리티를 인정받은 만화가이며 그의 작품은 휴먼드라마 느낌이 강하며 특유의 화풍으로 심리 묘사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만화평론가 이시카와 쥰은 그의 만화평론서에서 '같은 원작임에도 거인의 별은 지금에 와선 패러디 거리로 여겨질 뿐이지만 내일의 죠는 여전히 내일의 죠다.'라 말하기도 했다.
내일의 죠의 원작자 카지와라 잇키는 말년에 "내일의 죠는 치바 테츠야의 작품이며, 사회 현상도 그의 덕분이다.(あしたのジョーはちばてつやの作品であり、社会現象も彼のおかげだ)''라고 말하기도 했다.[14] 사실상 치바 테츠야가 카지와라의 원작의 대부분의 내용들을 수정해서 각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성된 만화는 카지와라 원작의 형태를 거의 간직하고 있지 않을 정도다. 치바 테츠야의 훌륭한 각색력, 연출력, 구성력을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오토모 카츠히로는 만화가로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인물로 치바 테츠야를 거론했다. 오토모는 치바 테츠야가 데즈카 오사무이시노모리 쇼타로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도뮤를 그릴 때 즈음, 저는 만화의 '문법'을 알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라고 오토모는 말했다. "어느 날 키치조지의 한 소바 가게에서 빅 코믹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치바 데쓰야 노타리 마쓰타로 씨를 만났어요. 그리고 나는 '내가 찾았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 페이스가 내가 추구하는 스타일과 꼭 같은 느낌이 들었죠. 나는 감탄하여 그의 작품을 꽤 많이 공부했어요. 무엇보다도 치바의 만화는 구성이 뛰어납니다. 배경과 등장인물 모두 근거가 있다고 느낍니다. 그들이 그리는 방식에서 얼마나 가시적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만화를 보면 등장인물들이 무엇을 하는지, 어디서 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림이 멋있어 보일 수도 있지만, 캐릭터들과 너무 가까이 다가가고,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은 없습니다. 치바 씨는 독자들을 꼭 끌어냅니다. 당신이 공평하게 이야기를 제시하면, 그것은 그것의 범위를 더하고, 그것은 사물을 더 흥미롭게 만듭니다."#
한국 만화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며 후술하겠지만 그의 그림을 표절한 인물들도 엄청 많았다.

4. 연재작 목록


  • 오데트 성 무지개 (1958년 6월 - 8월) - 첫 연재 작품.
  • 엄마의 바이올린 (1958년 7월 - 19591년 5월)
  • 유카를 부르는 바다 (1959년 6월 - 1960년 8월)
  • 리나 (1960년 9월 - 1961년 12월)
  • 지하실의 마구[15] (1961년 1월 - 1962년 12월)
  • 1 · 2 · 3 과 4 · 5 · 록[16] (1962년 1월 - 12월)
  • 벌입니다 장군 (1963년 1월 - 5월)
  • 자전 나누기 매 (1963년 7월 - 1965년 1월)
  • 아빠의 신부 (1964 년 1 호 - 9 호, 주간 마가렛 슈에이 샤)
  • 새의 자식 (1964년 3월 - 1965년 6월)
  • 소년 자이언츠 (1964년 11월 - 1966년 11월)
  • 해리스의 선풍[17] (1965년 4 월 - 1967년 11월)
  • 아린코의 노래 (1965년 9월 - 1966년 7월)
  • 미소앙금[18] (1966년 8월 - 1967년 8월)
  • 점보 리코 (1967년 39호 - 48호)
  • 내일의 죠[19] (1968년 1월 - 1973년 6월) - 그의 최고 걸작이자 대표작.
  • 텔레비전 천사 (1968년 7호 - 50호)
  • 젊음과 곤 (1968 년 6월 15일 - 1971년 8월 26일)
  • 모사 (1969년 20호 - 1970년 2 · 3 호)
  • 아귀 (1970 년 6호 - 36호)
  • 열풍! 검도불패[20] (1973년 8월 - 1980년 4월) - 검도 만화. 또 다른 대표작.
  • 난봉꾼 마츠타로[21] (1973년 8월 - 1993년 6월, 1995년 10월 - 1998년 5월) - 스모 만화. 최장기 연재작.
  • 나는 이가오군 (1975년 3월 23일 - 12월 21일)
  • 네리의 족제비 (1980년 7월 - 10 월)
  • 그린의 정복자[22] (1981년 1월 - 1991년 5월) - 일본 대중들에게 골프의 인지도를 끌어올린 만화 중 하나다.[23]
  • 남자들 (1982년 1월 - 1983년 7월)
  • 라켓을 잡아라 (1992년 5월 - 1994년 6월)
  • 날개 두께 (1998년 4호 - 1999년 13호)
  • 하루 종일 또는 일기 (2016년 1호 - 부정기 연재중)

5. 수상 및 서훈 경력


''' 2014년 문화공로자 수상 당시 치바 테츠야 '''

'''연도'''
'''수상'''
'''1962년'''
제3회 코단샤 만화상 아동 만화상 '1 · 2 · 3과 4 · 5 · 록', '생선 가게 챔피언'
'''1976년'''
제13회 코단샤 출판문화상 '열풍! 검도불패'
'''1977년'''
제23회 쇼가쿠칸 만화상 청년 일반 부문 '난봉꾼 마츠타로'
제6회 일본 만화가 협회상 특별상 '난봉꾼 마츠타로'
'''2001년'''
'''문부과학대신상'''
'''2002년'''
'''자수포장'''
'''2007년'''
제4회 부천만화대상 해외작가상
'''2009년'''
제33회 코단샤 만화상 코단샤 창업 100주년 기념 특별상
'''2012년'''
'''욱일소수장'''
'''2014년'''
'''문화공로자'''
'''2017년'''
네리마구 명예 구민
'''2018년'''
제22회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특별상

6. 여담


  • 그의 작업실 벽에는 그가 그린 커다란 야부키 죠의 그림이 있다.
  •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은 친한파로 한국을 몇차례 방문했다. 앤솔로지 해협 저편으로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일러스트 한 장뿐이어서 아쉽다. 일러스트는 한국과 일본의 전통복장을 한 소년들이 악수를 하는 장면. 작품 제목은 '바람을 담아'.
  •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평화롭게 끝났다는 것을 보고 "오늘은 북쪽과 남쪽이 악수했네요. 저는 그게 너무 좋더라고요. 전쟁이나 비극을 피할 수 있었구나 라고."라고 기쁜 듯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제에도 관심이 높고, 검열에 반대한다. 도쿄도 청소년의 건전한 육성에 관한 조례 개정 문제에 관해서도 몇번이나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있어, 특히 당시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가 진행하는 "비실재 청소년" 규제에도 부정적이었다.
  • 더 화이팅의 작가 모리카와 죠지는 치바 테츠야에 대해 "어제도 만났지만, 계속 쫓아 온 동경의 존재네요. 만화가중에서는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 소년 점프를 싫어한다. 동생 치바 아키오가 연재하다가 견디지 못해 자살했기 때문.(조울증이 약간 있었다고 한다.) 치바 아키오는 주간 소년 점프에 플레이 볼을 연재했고, 월간 소년 점프에 캡틴을 연재했는데, 그 중 캡틴소년 점프 계열 만화로는 최초로 쇼가쿠칸 만화상을 탄 명작이다. 이 2개 다 애니화가 되었다.(플레이볼은 사후 애니화)
  • 한국 만화사의 흑역사인데, 치바 테츠야의 리즈시절에 그의 작품을 무단으로 표절했다. 사실 이건 당대에 저작권 인식이 시궁창이었던 영향이 컸는데 그래서 이때 몇몇 작가가 치바 테츠야 작품을 표절했다.
  • 대표적으로 치바 테츠야를 배낀 작가로 학습만화로 유명한 이원복이 독일에 유학가서 유럽 만화 그림체로 만화를 그리기 이전에는(그 과정에서 아스테릭스의 영향을 많이 받음)하기 전에[24] 그린 만화 그림체가 치바 테츠야 표절이었다. 단순히 그림체만 베낀것만 아니라 등장인물 중 일부도 치바 테츠야 작가의 것을 베껴왔다. 1, 2, 3과 4, 5, 6(오뚝이 대행진)의 서브 캐릭터 3명을 차용하여 자기 키보다 큰 옷을 입는 이시관, 그의 친구 김병호, 여친 뚱순이가 대표적인 케이스로 이들은 1973년 소년한국일보에 연재된 ‘미니바람 꽃구름’(클로버문고로 발간), 외전인 ‘수나의 일기’, 1975-1981년 새소년 연재작이자, 먼나라 이웃나라의 원전이 되는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에 출연시켰다. 이후로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유럽만화 그림체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뒤로는 치바 테츠야의 그림체로 그린 만화책은 사랑의 학교를 빼고 전부 폐기시켰다.
  • 2014년 4월 난봉꾼 마츠타로가 TVA화되었다.
  •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그리는 것 이외에는 여러가지 재능이나 능력이 없어서 일본에 돌아온 이후 여러가지 일을 했지만 곧바로 해고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 어렸을 때 너무 배고파서 비누를 먹은 적이 있는 데 다행히도 부모님이 그걸 발견해서 비누를 토해내서 별 문제는 없었지만 본인 왈,배고파서 그런지 몰라도 맛있었다고 한다.
  • 전쟁으로부터 제법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에 대한 기억이 흐트러지는 것을 안타깝게 느껴서 자신의 경험을 만화화할 것을 결의하고 2016년부터 소학관의 빅코믹에서 ひねもすのたり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기고했으며 2018년부터는 단행본화했다.


7. 관련 문서


[1] 현재의 도쿄도 주오구.[2] 만화,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이 칭호를 받은 인물은 현재까지 요코야마 류이치(1994년), 미즈키 시게루(2010년), 미야자키 하야오(2012년), 치바 테츠야(2014년), 하기오 모토(2019년) 단 5명뿐이다.[3] 야부키 죠 밑에 있는 것이 서명이다.[4] 블로그[5] 원작 카지와라 잇키, 치바 테츠야는 작화 담당. 하지만 작화만 담당한게 아니라 치바 테츠야도 스토리에 많은 영향을 줘 두 사람에 공동 창작물이라고 본다.[6] 대피 과정에서 6명의 가족들은 행렬에서 돌연 이탈되어 길을 잃었는 데 운 좋게도 같이 일하던 중국인이 이들을 발견해서 곧바로 다른 중국인들의 눈을 피해서 해당 중국인이 소유하던 나무집에서 거의 반년 이상을 지냈다고 한다.참고로 이들을 도와준 중국인은 그들을 숨겨주고 주기적으로 음식 등을 제공해주었다고 한다.[7] 하지만 본인이 NHK의 한 방송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만주국에서 도망칠 때 4명의 동생들을 위해서 책과 펜을 챙겼고 중국에서 반년 이상 조용히 숨어지낼 때 동생들에게 그림을 그려서 설명해주기도 했다고 한다.[8] 첫 잡지 데뷔 만화는 같은해 슈에이샤에 실린 舞踏会の少女로, 동시에 그린 단편 리카보다 먼저 출간된 작품이다.[9] 전자는 8년 31권 완결, 후자는 23년 36권 미완.[10] 치바 테츠야의 작품을 연도순으로 놓고 보면 딱 이작품에서 메인 주인공의 디자인이 변한다. 내일의 죠까지만 해도 극화풍으로 디테일해졌을 뿐 초기작의 소위 "야부키 죠 머리"를 한 개구장이 꼬맹이라는 디자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11] 사실 꼭 골프 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 만화에서도 꽤나 나온다.[12] 치바 테츠야의 만화를 아주 어릴 때부터 거의 전부 다 읽었고 정말 좋아한다고 말했다. 내일의 죠에서 스타일이 확 바뀌었을 때는 놀랐다고.[13] 自分がストーリー漫画を始めて以降、ほんとに新しいものを加えたのはちばてつやだけだと思っている[14] 이에 대해 치바는 "내일의 죠는 독자들의 것이다."라고 말했다.[15] 원작 : 후쿠모토 카즈야[16] 1972 년 및 1988 년 - 1989 년 에 2 번 드라마화 되었다.[17] 치바 테츠야에게 권투에 대해 관심을 불러 일으킨 작품. 두 차례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화[18] '아카네 짱 '으로 애니메이션화.[19] 원작: 타카모리 아사오[20] 애니메이션화[21] 미완성작. 애니메이션화[22] 애니메이션화[23] 후지코 후지오 A의 골프 만화인 '프로 골퍼 원숭이'와 골프 만화 투탑을 달린다.[24] 극 초창기에는 미국만화 스타일로 만화를 그렸지만(이것도 습작인 수준이다.) 내공이 쌓이면서 일본만화 그림체로 만화를 그렸다. 그러다가 귀국 후인 1980년대에 먼나라 이웃나라를 소년 한국일보에 연재하면서부터 유럽 만화 스타일로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