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치스차코프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차코프'''[1]
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
Ivan Mikhailovich Chistyakov

<colbgcolor=#860000> '''출생'''
1900년 9월 27일
오트루브네보
'''사망'''
1979년 3월 7일 (78세)
모스크바
'''복무'''
소련군 (1925-1968)
'''최종 계급'''
육군 상장
'''주요 보직'''
북조선 군정 사령관
'''주요 참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만주 작전
'''주요 서훈'''
소비에트연방영웅 1회
레닌훈장 2회
1. 개요
2. 행적
3.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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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군인. 트베리 주 오트루브네보(Отрубнево)출신.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소련 극동 군관구 25군 사령관에서 소련 군정의 장관이 되었다.

2. 행적


전간기1930년대까지 치스차코프는 카프카스 등 소련 하의 중앙아시아 보병 사단에 소속된 군인이었다. 1936년 처음으로 극동 92보병사단의 참모장이 되었고, 이후 1941년까지 동북아시아에 머무른다.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그라드 전투,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에 참전해 1944년 소비에트연방영웅 훈장을 수훈받는다.
1945년, 소련이 일본 제국선전포고를 하고 남진할 때 치스차코프는 25군 사령관이었다. 치스차코프는 38선을 미국과 갈라먹기 위해 25군의 10개 부대를 이끌고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 8월 12일웅기를 점령한다. 일본이 항복한 8월 15일 치스차코프는 조선 인민이 해방되었다는 <치스차코프 포고문>을 발표하고 남진을 계속해 소련군은 24일까지 원산, 평양으로 내려온다. 상관인 키릴 메레츠코프는 치스차코프를 북조선 군정 사령관에 임명한다.
소련군정의 군정장관으로 북한 지역의 실상에 큰 관심이 없다는 듯 부하들의 행패도 모르는 척 했다. 사실 전문장교인 치스차코프는 정치문제에 직접 개입을 안했고, 실질적인 군정행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시티코프 상장이 했다. 시티코프는 정치인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식인범죄단속 기동타격대를 지휘했다. 소련군정은 북한의 공산화에 반하는 행동은 철저히 막아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한 조만식을 가택 연금시키고 반공 운동을 탄압했다. 심지어 소련군의 약탈에 항의해 봉기가 일어나면 한국인의 반을 교수형으로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정책이나 행정력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남한을 통치한 존 하지보다는 훨씬 나았다. 군인 출신인 존 하지와 비교해보았을 때 정치인 출신인 시티코프는 행정 관리 측면에서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그 덕택에 남한보다 더욱 빠르게 민정이양에 성공할 수 있었다.
우선 지주계층을 때려잡아서 진행하기는 했지만 토지개혁을 재빨리 진행시켜 민생을 어느정도 안정시켰고, 당시 남한에서 진행된 초인플레이션 현상과 다르게 소련식 통제정책으로 물가상승을 억제했다. 그래서 해방 이후로 한동안 북한 경제가 우위였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정치적인 혼란을 재빨리 잠재우고 경제정책도 합리적으로 진행했다는 점이다. 물론 인프라가 어느정도 갖춰져있고, 지하자원도 풍부해서 경제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기도 했지만 단지 인프라가 있다고 해서 경제가 무조건 안정화되는 것은 아니다.
치스차코프는 이후 김일성북조선인민위원회 설립을 돕고 물자를 그대로 둔 채 1947년 3월 벨라루스 28군 사령관이 되어 떠났고,[2] 1968년 은퇴, 1979년모스크바에서 사망한다.

3. 바깥 고리


치스차코프 포고문

[1]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치스탸코프'가 맞다. 다만 실제로는 구개음화와 모음약화로 인하여 '치스찌꼬프'에 가깝게 발음된다.[2] 러시아 위키백과에 따르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