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릴 메레츠코프

 


'''키릴 아파나시예비치 메레츠코프 '''
'''Кирилл Афанасьевич Мерецков '''

'''이름'''
러시아어:Кирилл Афанасьевич Мерецков
영어: Kirill Afanasievich Meretskov
한국어: 키릴 아파나시예비치 메레츠코프
'''출생'''
1897년 6월 7일, 러시아 제국 라잔
'''사망'''
1968년 12월 30일,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복무'''
러시아 제국군(1916-1918)
소련군(1918-1964)
'''최종 계급'''
육군 원수
'''주요 보직'''
소련 국방장관
'''주요 참전'''
겨울전쟁
레닌그라드 공방전
만주 작전
'''주요 서훈'''
소비에트연방영웅 1회
레닌훈장 7회
1. 개요
2. 생애
2.1. 성장
2.4. 종전 후 및 사후
3. 평가
4.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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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활약한 소련군의 육군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소련이 일본 제국선전포고를 한 후에는 극동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만주 작전에서 일본 관동군을 격파하고 한반도 북부에도 진주했던 적이 있다.

2. 생애



2.1. 성장


메레츠코프는 모스크바 남동쪽 라잔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 6월에 러시아 제국군에 자원입대하여 정비병으로 복무했으나, 1917년 8월에 볼셰비키 당원이 되었다. 이듬해인 1918년에 붉은 군대에 입대했고, 붉은 군대의 전신인 적위대에서 참모장이 되었다. 내전 중에 군사학교에 입학했으나 여러 차례 전투에 투입되어 졸업하는 데 시간이 걸려 1921년에 졸업했다.
1924년부터 1931년까지 모스크바 군관구에서 근무했으며,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1년여 간 군사 고문관으로 공화파를 지원했다. 1937년에 귀국한 메레츠코프는 1939년에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소련군은 대숙청의 홍역을 치렀고 메레츠코프 역시 음해를 당한적 있었다. 메레츠코프가 벨로루시 군관구 참모장일때 사령관은 우보레비치였다. 스탈린의 측근이라 요직에 앉은 우보레비치는 지역에서 영주나 마찬가지로 행세하며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나중에는 모스크바 중앙으로 오라는 스탈린의 보직 변경 명령에 와병 핑계로 저항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봐줬지만 우보레비치의 항명이 계속되자 숙청했다.[1] 우보레비치가 인민의 적이니 메레츠코프도 인민의 적이란 논리의 익명투서가 붉은군대 총정치국에 날아들어 총정치국과 NKVD의 2달 동안 고강도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로 결론났다.
당시 소련에선 공직기강 확립 시류에 편승해 하급 관리들이 상급자들을 일단 찌르고보는 부작용이 일어났다. 상급자가 잡혀가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승진할걸 노린 것이다. 수사당국인 NKVD 역시 진짜 범인이던 고문을 해서 허위자백을 받던 일단 잡아넣으면 실적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졌다. 메레츠코프 역시 한동안 우울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책임될 일을 안하려하고 항상 NKVD 눈치를 보며 해명하려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

2.2. 겨울전쟁


소련은 그 해 12월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사령관으로 하여 핀란드와 겨울전쟁을 시작했다. 핀란드의 접경 지대인 레닌그라드 군관구를 맡고 있던 메레츠코프도 이 전쟁에 참전한다. 그러나 전쟁은 12월 중순에 이르러 모티 전술과 같은 효율적인 전투 방식을 개발한 핀란드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었다. 손실에 대한 비난에서 야전군 지휘관인 메레츠코프도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 책임은 메레츠코프의 탓으로만 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이 무렵 소련군은 전략적 지침도 존재했고, 당시 서방과 다른 군사 전략을 수립하고 있었지만, 대숙청의 여파로 경험 부족의 장군 및 장교들이 지휘하는 사단급 및 그 이하 제대의 전술 수행 능력과 전투 능력 자체에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실패로 인해 44사단의 지휘관들은 곧바로 총살당하고 여러 고위 지위관들이 대체됐고, 메레츠코프는 군관구 사령관에서 해임된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대신 메레츠코프를 다시 7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새로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이 된 세묜 티모셴코의 지휘를 받게 한다. 1940년 2월, 소련군은 재차 공세를 가했고, 이번에는 크게 승리했다. 메레츠코프는 이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으며 샤포스니코프를 대신해 총참모장이 되었고, 국방위원회 위원직에도 올랐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문제는 겨울전쟁과 스페인 내전의 전훈을 분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1940년 12월에 열린 회의 막바지에 열린 워게임이었는데, 메레츠코프의 홍군(소련군)이 주코프의 청군(가상 적군)에게 패배하고 만 것이다. 스탈린은 이 워게임에 참여한 장군들을 크렘린으로 소환해 워게임에서 패배한 경위에 대해 캐물었고 당황한 메레츠코프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스탈린은 즉시 메레츠코프를 해임하고 워게임에서 승리한 주코프를 총참모장으로 임명했다.

2.3. 독소전쟁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메레츠코프는 소련군 최고사령부인 스타프카(STAVKA)의 구성원이 되었고 나치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노력을 계속 경주했다. 그러나 1941년 9월 NKVD 수장인 라브렌티 베리야가 그를 반역자로 체포했다. 체포된 메레츠코프는 10월까지 구금되었고,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유능한 장군이 부족했던 스탈린은 그를 석방시켰고, 12월에 북쪽의 볼호프(Volkhov)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944년 2월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볼호프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메레츠코프는 북쪽 방면의 독일군 북부집단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레닌그라드가 완전히 포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레닌그라드는 라도가 호수를 통해 소량의 보급품을 어느 정도 공급받을 수 있었다). 메레츠코프와 볼호프 전선군은 레오니트 고보로프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협동으로 독일군의 포위망을 깨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1943년 2월, 두 전선군은 시냐비노(Siniavino)에서 서로 연결되었다. 이후 두 전선군은 독일군을 서쪽으로 몰아내고 레닌그라드 포위망을 깨기 위한 일련의 공세를 개시했다. 이 시도들은 1944년 2월에 마무리되었다.
1944년 2월, 메레츠코프는 볼호프 전선군을 떠나 더 북쪽의 카렐리야 전선군으로 부임했다. 여기서는 그는 핀란드를 공격하려는 고보로프의 레닌그라드 전선군을 지원했다. 10월, 메레츠코프는 핀란드 북부를 통해 노르웨이로 철수하는 독일군을 추격했다. 10월, 메레츠코프는 핀란드 북부의 페차모를 쓸어 버리라는 명령을 받아 그가 가진 극지전에 관한 지식을 활용하여 페차모-키르케네스 작전(Petsamo-Kirkenes Operation)을 실시했다. 이 작전으로 독일군은 완전히 밀려났으며, 이 공로로 메레츠코프는 소련 원수로 최종 진급했다.
소련은 노르웨이까지 독일군을 추격할 심산이었으나, 전후 처리 문제에서 소련이 노르웨이를 장악하는 것을 영국이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스탈린은 노르웨이-핀란드 국경에서 진격을 중지시켰다. 이후 종전 때까지 이 전선은 큰 전투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메레츠코프에게는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메레츠코프의 다음 부임지는 만주였다.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메레츠코프는 제1극동전선군을 이끌고 만주 작전에 참가해 손쉽게 관동군을 격파했다. 이 무렵의 소련군은 독일과 4년 간 격전을 치르면서 단련된 데다가 걸작 T-34-85로 대표되는 기갑 전력 또한 일본군을 충분히 압도했다. 메레츠코프는 만주를 거쳐 한반도 북부에도 진주했다. 평양에 입성한 이반 치스차코프 지휘의 25군도 메레츠코프의 휘하였다. 이후 메레츠코프는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극동군관구 사령관으로 재임하며 치스차코프를 북조선 군정사령관에 임명해 한반도 북부의 공산화 작업에 참여하도록 했다.

2.4. 종전 후 및 사후


전쟁 후 메레츠코프는 극동군관구 사령관직을 수행한 후 여러 군관계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968년 12월 30일에 사망했다. 그의 시체는 화장되어 크렘린 벽 묘지에 묻혔다.

3. 평가


메레츠코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유능한 장군들 중 한 명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하며 , 소련 국가 영웅 호칭을 비롯하여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이다. 러시아군 전차학교는 현재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고, 모스크바, 노브고로드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존재한다.

4. 매체


처음에 메레츠코프는 흥분해 날뛰었지만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마오쩌둥은 예전에 알란이 자신의 부인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듣고 반가워했고, 김일성은 알란이 자신을 헤칠 의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와 화해하고, 메레츠코프도 알란 역시 라브렌티 베리야에게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다는 걸 알고 는 화해한다.[2] 그 후 마오쩌둥과 김일성, 그리고 메레츠코프는 알란과 헤르베르트를 살기 좋은 장소로 보내기로 결정하였고 발리 섬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자 알란과 헤르베르트는 [3]마오쩌둥에게서 돈을 받아 그 곳으로 간다.[4]

[1] 대숙청기의 많은 장교와 마찬가지로 예로님 우보레비치도 개인적인 능력은 매우 뛰어났고 코네프, 주코프, 말리놉스키와 메레츠코프의 스승으로 존경받았으며 투하쳅스키의 칭찬을 받은 군인이었다. 그러나 부패했고 군사모험주의적이었의며 정치에 과도하게 간섭했다.[2] 다만 거기 있던 김정일은 어린 나이에 받은 충격이 컸는지 울부짖으며 알란과 해르베르트를 죽이라 고래고래 소리치다가 아버지에게 뺨을 맞는다(...).[3] 이 소설에서 쑹메이링이 마오에게 붙인 별명(...).[4] 여담으로 마오쩌둥이 발리를 거론하기 전에 갈 곳의 후보로 쿠바(...)가 있었는데 이유가 '제일 공산주의적이지 않은 장소 중 하나'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