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만 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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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까지 쓰던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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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로고. 과거의 'K'자 로고 모습으로 회귀하였으며 영미권에서 특이하게 세로쓰기를 적용한 로고이다. 그리고 전부 대문자로 되어있다.
Eastman Kodak CompanyShare Moment, Share Life
공식 웹사이트
1. 개요
1888년, 미국에서 창립된 다국적 기업으로 카메라와 같은 영상 제품 및 관련 서비스를 제공한다. '''필름과 아날로그 카메라를 상징하는 기업이다.''' 카메라의 역사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설립자 조지 이스트만이 뉴욕 로체스터에서 지냈기 때문에 본사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디지털 카메라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2012년 1월 19일 끝내 파산보호 신청을 했다. 대한민국에는 1970년에 두산그룹 계열의 두산상사[1] 를 통해 들어왔으며 이후에는 한국코닥으로 독립하여 현재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현재는 인쇄 제판쪽 비즈니스만 운영하며 카메라, 필름, 포토프린터, 스캐너 등 B2C 제품들에 대한 비즈니스는 진행하지 않는다.
한때 필름 생산을 위한 소재를 공급하기 위해 설립했던 이스트만 화학(Eastman Chemical)을 자회사로 가지고 있었으나 1994년에 완전히 분사하였다.[2] 이 쪽은 수많은 화학 특허로[3] 사업 호조를 보이면서 포춘500 기업 목록에 등재될 정도니 계속 자회사로 있었다면 코닥의 파산은 없었을지도...
2. 역사
2.1. 설립
1878년만 해도 사진기는 크기와 무게가 CRT 모니터와 비슷했다. 거기에 화공약품과 유리판같은 별도의 촬영 장비까지 옮기려면 사람 두 셋이 들고 가야 했다. 그 무렵, 뉴욕에 있던 로체스터 은행 서기였던 조지 이스트만은 사진을 찍으려고 하다가 이런 무거운 장비가 필요하다는 걸 듣고 좀 더 간편하게 사진을 찍을 수 없나 하여 손수 사진기술을 배우고 여러 실험을 직접 하면서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1882년에 필름의 초기 형태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걸 대량으로 만들자면 엄청난 돈이 들기에 여러 사업가들을 만나 설득과 시범을 보이면서 드디어 사업가 헨리 스트롱의 투자를 얻어냈고, 1883년 감광필름을 만들어내면서 상용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걸 대량으로 만들면서 자신의 성인 이스트만이 여러 언어에서 발음하기가 어렵다는 걸 생각하여 여러 논의 끝에 '코닥'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덕분에 설립자 이름이 이스트만 코닥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2.2. 셔터만 누르세요. 그 다음은 저희가 책임집니다!
1887년 세계 최초 휴대형 사진기를 개발하여 이듬해 판매에 들어가는데 좀 더 편하게, 가볍게, 누구라도 마음껏 찍는다는 걸 강조하면서 본격적인 카메라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카메라가 대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코닥이 개발한 카메라와 필름은 전문가에게서나 호응을 얻었지 대중적으로는 큰 관심을 얻지 못하였다. 때문에 코닥은 당시 이벤트로만 기획된 광고에 고정적인 투자를 결정함으로써 잠재 시장을 빠르게 넓혀갔다. 무엇보다 전문가와 극지에서 활동하는 모험가들의 리뷰를 광고매체에 포함하여 과거 방식으로 사진을 찍던 전문 사진기사들의 이목을 휘어잡는 데 성공하고, 또한 파란 스트립의 원피스를 입은 '코닥 여성'[4] 을 광고에 기용함으로써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잠재 시장을 개척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카메라의 대중화를 이끌면서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 코닥은 이스트만의 꿈이었던 싸고 사진 찍기 편리한 카메라를 판매함으로써 더욱더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단순무식한 상자 모양의 코닥 사진기는 당시 일회용 컨셉으로 판매되었는데, 사용자는 카메라를 사서 사진만 줄창 찍고, 필름을 다 쓰면 통째로 코닥으로 보내서 현상과 인화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코닥의 경영 방식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당시의 코닥이라는 단어는 현재 미국에서 iPod이 MP3 플레이어 전체 시장을 대표하듯이, 카메라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곤 했었다. 하지만 당시에 많은 이들은 빠른 성장 속에서 독과점의 형태를 이루어낸 코닥과 카메라 시장을 어둡게 생각했는데,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 코닥이 독과점을 이용하여 수익을 올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메라 사업을 카메라에 대한 호기심, 흥미로부터 시작한 이스트만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기계 대량 생산으로 자신의 꿈에 그리던 1달러 카메라, 그리고 이후에 브라우니(Brownie)[5] 를 시장에 선보임으로써 카메라 업계에서 다른 회사가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가 된다.
코닥이 일회용 카메라나 염가형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게 매출액 대부분이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초기의 주름관이 달린 일안/이안 뷰 카메라 중에는 화질이나 성능에서 쓸만한 것들이 많다. 렌즈도 일회용의 플라스틱 렌즈가 아닌 독일 슈나이더-제나 렌즈를 쓴 것도 있었고. 영화용 카메라도 직접 만들었다. 무엇보다 코닥 사는 무거운 유리 건판이었던 것을 유연한 플라스틱에 젤라틴 감광제를 칠한 필름을 최초로 양산하였고 여러 규격의 표준을 만들어내어 영화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그로 인해 아카데미 상도 여러번 탄 회사이다. #
2.3. 특허와 코닥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성공적인 경영으로 빠르게 성장한 코닥이었지만, 당시 코닥이 고용한 과학자의 수는 고작 10명도 채 안되었다. 1911년 이스트만은 독일의 한 화학 공장을 견학하게 되는데, 이 독일 화학 회사는 700여명의 독일인 엔지니어와 화학자를 고용하고 있음을 확인한 코닥은 크게 충격을 받게 된다. 시장에서 선두를 점하고 있던 코닥이었지만, 코닥의 성공이 상품 개발과 혁신으로부터 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스트만은 이를 계기로 연구소를 설립하고 지속적인 투자로 상품 개발에 착수한다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6] , 당시 연구소장에게 2가지의 임무를 부여하는데, 첫째는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연구해봐라.'였고 둘째는 '당신의 임무는 사진술의 미래다.'였다. 또한 이스트만은 평생동안 MIT에 기부를 하였는데 1912년 150만 달러어치의 기부를 시작으로, 죽기 직전까지 MIT에만 총 45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7] 이런 이스트만의 기부와 투자는 코닥을 단순한 카메라 필름 회사가 아닌 수많은 특허를 갖춘 견실한 기업으로 만드는 현명한 선택이었고, 코닥은 1세기 동안 특허를 통해서 가장 큰 이익을 남기는 회사 중 하나로 남게 된다.
2.4. 코닥의 황금기
한때는 필름을 코닥이라고 부를 정도로 필름의 대명사가 되었던 만큼, 이스트만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독신자였던 그는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보다 사회에 막대한 기부를 하였고, 회사 직원들에 대한 풍요로운 노동조건[8] , 복지에 신경쓰면서 코닥 직원들에게서뿐만이 아닌 사회에서도 대단한 존경을 받는 사업가가 된다.
1932년 코닥의 발전을 이룬 천재 사업가이자 카메라 연구자였던 이스트만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지만, 이는 코닥의 사업에서는 전혀 지장이 되지 않았다. 1930년대 후반에는 더욱 더 진보된 필름을 개발함으로써 또다시 시장을 개척하는 데 성공하는 등 코닥은 계속적으로 발전해나갔다. 비록 1950년대에 이르러서 코닥이라는 카메라 하나가 지배하던 카메라 시장이 카메라 바디, 렌즈, 필름으로 세분화됨에 따라 독일의 콘탁스, 라이카, 일본의 니콘, 펜탁스, 캐논이 등장하게 되면서 카메라 시장에서의 코닥의 입지는 줄어들었지만, 이스트만의 카메라 철학이었던 '값싸고 편리한 카메라'를 모토로 개발된 인스터매틱 카메라로 시장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코닥은 가장 많은 이익을 올리던 필름 사업에서 착실하게 수입을 올리고 있었고[9] , 과거 이스트만의 과감한 투자로 인해 특허 부분에서의 코닥의 독보적인 위치는 모두가 코닥의 앞날을 밝게 예측하는 원인이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 코닥은 1억 대가 넘는 일회용 카메라를 판매하고, 각종 특허와 디지털 기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함에 따라 대내외적으로도 큰 성장을 이루고 미국 25대 기업이 될 정도로 모든 사업가들의 귀감이 되는 기업이 되기까지에 이른다. 이스트만의 도전 정신을 이어받은 코닥은 지속적인 기술에 대한 투자와 각종 기부로 미국 사회에서 가장 선망을 받는 기업이었고 미국 공학도들이 가장 취직하고 싶어하는 꿈의 직장이기도 하였다.
심지어 코닥의 광고문구에서 나온 '''Kodak moment'''라는 말이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순간'이라는 의미의 일반적인 숙어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올림픽 대회의 공식지정필름 제조업체가 되기도 했었다. 단 1984년 LA올림픽은 후지필름이 가져갔다.
2.5. 디지털과 코닥
필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코닥이지만, 사실 '''최초로 1975년에 디지털 카메라를 만든 것 역시 코닥'''[10] 이었다. 문제는 이를 상용화하지 않았다는 것. 1981년에 내부 보고서를 통해 디지털 카메라가 필름 시장을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상용화를 사양했고, 그 결과로 동년에 일본의 소니가 마비카 계열을 공개하며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상용화시킨다. 이렇게 코닥이 디지털 카메라를 상용화하지 않은 것은 결국 독이 되었고 그래서 언젠가는 도래할 디지털 카메라 시대가 다가오자 선두주자였던 코닥은 후발주자가 되어 고전하게 되었다. 기사
2.6. 코닥의 파산
2004년부터 매년 파산설이 흘러나오다가, 2012년 1월 19일 끝내 파산 보호 신청을 했다. 참고기사
필름 그 자체를 상징하는 전설적인 회사가 파산했다는 점에서, 이로써 카메라의 시대는 완전히 디지털로 넘어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디지털 카메라를 발명하고도 상용화하지 않는 중대한 실수 덕분에, 시대의 변화를 과소평가하다가 실패한 사례로써도 남게 되었다.
다만 미국의 파산은 종류가 몇 가지 있는데, 코닥이 신청한 Chapter 11은 한국에서 생각하는 파산 신청과는 거리가 있고 오히려 회생 절차에 가깝다. 따라서 기업 자체가 망한 건 절대 아니고[11] , 정확히는 일반 필름과 디지털 카메라 시장[12] 에서 발을 뺐을 뿐 인쇄 출판 업계에서는 계속 거대 기업으로 군림하고 있다. 또한 엄청나게 많은 양의 특허[13] 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애플과 구글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도 코닥은 파산보호 이후 5억 2500만 달러 어치의 특허를 마이크로소프트, 삼성전자, 구글, 아마존, 애플 등이 출자한 특허 전문 기업에 팔아치웠다. 또한 코닥은 OLED에 관한 특허도 다수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분야는 LG전자가 인수해 갔다.
디지털 시대의 코닥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코닥 센서 특유의 결과물이나, 코닥 브랜드 자체가 어떻게 쓰일 것인지이다. 코닥의 센서 사업부는 트루센스라는 명칭으로 독립했으며, JK 이미징이라는 회사[14] 는 코닥 브랜드로 컴팩트 카메라와 마이크로 포서드 카메라를 제조하고 있다.
2.6.1. 파산의 원인과 이유
코닥이 파산을 하게 된 이유로 '''필름에 고수한 나머지 디지털 사업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밝혀왔던 것으로 인해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해 뒤쳐졌다'''는 원인이 결정적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계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하였지만 필름 시장의 고수를 위해 상용화하지 않았던 점이 있는데 이것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였던 코닥의 실패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만일 코닥이 디지털카메라를 일찍이 상용화를 했다면 필름 시장이 더 빨리 잠식되었을지언정 파산까지 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코닥은 디지털 카메라를 상용화하면 전통적인 필름 시장이 위협받을 것을 우려하여 이를 사양하였는데 그것은 창업자인 조지 이스트만의 창업정신과도 연관이 있었고 이스트만이 바로 세계 최초로 필름을 개발하였던 선구자라는 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코닥이 필름 시장을 고수하였던 이유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코닥의 이러한 필름 고수는 빗나가게 되었고 대세는 점차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가게 되면서 필름 시장을 고수하던 코닥에게는 퇴물적이고 보수적인 이미지라는 오명을 쓰게 만들었다. 실제로 일부에서는 디지털 시대를 거부한 코닥을 퇴물에 수구적인 사상을 가진 뒤쳐진 기업이라는 비판도 했을 정도였다.
결국 이를 통해서 시대의 변화와 역동을 읽히지 못하거나 무시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쓰라린 교훈과 대가를 얻게 되었던 계기이기도 하다. 기업이라는 존재는 소비자를 만족하기 위해 미래를 내다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쓰라린 대가와 시대의 흐름에 보수적인 색채의 오명을 쓴 코닥은 이를 후회하며 뒤늦게 디지털 시장을 인정하며 본격적인 스마트폰 시장에 참여를 하게 된다.
2.6.2. 미래를 부정한 대가가 결국은 오명으로
코닥의 디지털 상용화 거부는 코닥의 역사에 있어서도 큰 실수이자 미래를 부정하게 된 대가가 오명을 불렀다는 일설도 있다. 만약 코닥이 디지털로 넘어갔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코닥은 필름에 이은 새로운 혁신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코닥은 창업자인 조지 이스트만의 필름에 대한 창업정신에 지나치게 매달리게 되면서 점차 디지털을 거부하고 필름을 고수하며 결국은 일부에서부터 '''시대를 역행하는 기업'''이라는 오명을 받게된다. 그리고 디지털로의 변화를 추구하는 소비자의 트렌드도 창업정신에 매달리는 바람에 철저히 외면하였다. 사실 세계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발명한 곳이 바로 코닥이었다. 코닥의 필름에 대한 고수는 조지 이스트만의 창업정신을 고수하려는 방침도 있는데 이스트만이 세계 최초로 필름 카메라를 발명한 선구자이니만큼 디지털로 상용화하면 그의 업적이 지워질 것을 우려하여서 필름 사진을 고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코닥의 기업입장에서는 창업주의 정신을 고수하는데는 충실했으나 지나치게 그것에 집착하고 자존심에만 매달린 나머지 결국은 세상과 소비자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디지털을 외면해버린 시대착오적인 기업으로 전락하면서 이것이 결국은 필름 사진의 선구자인 코닥을 나락으로 몰아버리고 말았다.
2.7. 재기를 노리는 코닥
뒤늦게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들어 영국의 Bullitt 그룹과 합작해 데뷔작인 IM5를 2015년 1분기에 출시했다. 5인치 터치스크린에 LED플래시, 1300만 화소의 카메라를 갖춘 보급형 사양이다. 사진과 연관이 많은 기업답게 기본 카메라 어플에 WIFI를 이용하여 바로 인쇄할 수 있는 기능이 들어가 있으며 얇은 외관에 iOS처럼 최소한의 간편한 UI로 중·장년층을 타깃으로 잡았다. 그러나 반응은 영 시원치 않은 듯하다.(...) 자세한 정보는 IM5 문서 참조.
이후 카메라 특화 스마트폰 '엑트라(Ektra)'를 발표하였다. # 대부분의 반응은 '카메라에 스마트폰 기능을 넣은 것 같다'는 평. 센서는 1/2.4인치인데 주변부 링은 왜 그리 크게 만들었는지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2016년에 슈퍼 8 필름과 그 필름을 사용하는 아날로그 시네마 카메라의 출시 소식을 밝혔다. 단, 디지털 시대에 맞게 USB 포트, Mini HDMI, LCD 모니터 등을 지원하고, 음성 파일을 저장하기 위한 SD 카드 슬롯도 있다. 더욱이 옛날에 했던 그 서비스, "셔터만 누르세요. 그 다음은 저희가 책임집니다!"를 시행한다.[15] 렌즈는 C 마운트 렌즈를 사용한다. 작동 모습 하지만 2019년이 끝나가는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어쩌면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해 흐지부지되었을 수도 있다.
2017년 1월 미국의 가전쇼 CES에 참가하여 엑타크롬 필름의 재생산을 알렸다. 35mm 규격의 사진용과 슈퍼 8 카메라용 양쪽으로 모두 출시된다고 한다. 여러모로 필름 시장을 되살리기 위해 애쓰고는 있으나 이젠 매니아들의 물건으로 전락한 필름의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을진 불확실해으나, 2020년 E100 엑타크롬 필름이 대박을 친다.
2018년 CES에서는 뜻밖에도 '''암호화폐''' 발행 계획과 채굴기 사업 진출(...)을 알렸다. 이로 인해 하루만에 주가가 125% 급등하기도 했지만, 전문가들과 여러 투자자들은 많은 우려를 표했다.
국내 업체의 라이센스 생산을 통해 패션 업계에도 진출하였다. 단, 내셔널 지오그래픽, 디스커버리 채널의 의류 브랜드처럼 상표만 빌려준 것이지 정식으로 패션 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3. 현재 생산 제품
3.1. 컬러 네거티브 필름
3.1.1. 컬러플러스 200
동네 사진관에 가면 후지의 C200 과 함께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는 필름이 이것이다. 가장 저렴한 만큼 입자감이나 선예도에서 다소 떨어지지만 가격으로 커버.
현재 2020년 코로나 여파로 매물을 구하기 힘들다. 가격이 2배로 뛰는등 품귀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3.1.2. 골드 200
과거 필름사진 시대, 코닥의 주력 보급형 필름이었다. 감도 100짜리도 있었으나 단종되고 현재는 200만 존재. 컬러플러스 200보다 약간 개선된 입자감을 보여 주..지만 큰 차이는 없다.
3.1.3. 프로이미지 100
컬러플러스 및 골드와 큰 차이 없는 저렴한 가격에 보다 좋은 발색으로 인물사진에 주로 사용된다. 그레인이 다소 거칠지만 코닥 특유의 노란색과 투명함을 잘 표현해 준다.
3.1.4. 울트라맥스 400
감도 400의 범용 컬러네거티브 필름. 코닥스러운 느낌(다소 거친 그레인, 옐로우 발색)을 잘 보여주면서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기 편리하다. 다만 물빠진 색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과거에는 800짜리도 존재했다.
3.1.5. 포트라 160, 400, 800
전통의 고급 네가필름 포트라. 과거 필름 시대 VC와 NC로 나누어져 있던 라인을 개편하며 통합한 필름이다. 3가지 감도가 있다. 이름에서 말하듯(Portra = Portrait) 인물사진에 훌륭하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엑타와도 차이 없는 가격(;;)이 가장 큰 문제점.
3.1.6. 엑타 100
영화 촬영용 필름인 비전 시리즈를 기반으로 사진가들이 선호하는 색감에 맞게 개발된 최고급 컬러 네거티브 필름. 울트라컬러 100UC의 후속 제품으로 디지털 카메라와 경쟁하기 위하여 코닥에서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제품이다. 현존하는 전세계의 네거티브 필름 중 최상의 입자감과 색재현성을 보여 준다. 또한, 디지털 센서에서 촬영한 느낌이 들 정도로 뉴트럴해진 색감과 개선된 선예도가 특징이다. 물론 그만큼 가격도 흉악하다.[16]
디지털 카메라가 대세인 현재 상황에서 비전2, 비전3와 함께 필름 매니아층의 꾸준한 수요를 누리고 있다.
3.1.7. 비전2, 비전3
영화 촬영용 네거티브 필름이다. 영화 촬영이 디지털 시네마 카메라로 대체되고 있는 와중에도 필름 색감을 선호하는 일부 촬영 감독들에 의해서 아직도 쓰이고 있다. 2010년대 이후로 필름 색감과 동시에 영화적인 느낌을 추구하고자 하는 매니아 층에서 많이 찾고 있다.
3.2. 흑백 네거티브 필름
- T-MAX 100, 400, 3200
- Tri-X 400{400TX, 320TXP(시트필름)}
3.3. 슬라이드 필름
- 엑타크롬 E100
단종 6년만에 재생산되는 E-6 컬러 슬라이드 필름. 재판이 결정되면서 E100VS, E100G 등으로 나뉘었던 기존의 라인을 E100이라는 범용 슬라이드 하나로 개편하였다. 슬라이드 필름 자체가 거의 멸종되어 버린 현재로써는 후지의 벨비아 50, 100과 프로비아 100F, 로모그래피 200 등과 함께 얼마 안 되는 컬러 슬라이드이다. 디지털 시대 후보정 작업을 고려하여 뉴트럴한 결과물을 보여 주는데, '과도하게 디지털스럽다' 는 이유로 다소 호불호가 갈린다.
4. 단종 제품
- 수프라 시리즈 (100, 200, 400, 800)
- 포트라 VC/NC 시리즈(160VC, 160NC, 400VC, 400NC)
- 울트라 컬러 시리즈(100UC, 400UC)
- 엑타크롬 시리즈(E100VS, E100G, E200)
- 엘리트크롬 시리즈(EB100, EB200, EB400)
- 코다크롬 시리즈
5. 기타
가수 폴 매카트니의 부인이었던 린다 매카트니가 조지 이스트만의 딸이나 손녀였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린다의 처녀 시절 성(姓)이 이스트만이기 때문인데, 그녀는 코닥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애당초 린다의 아버지는 원래 성이 엡스타인이었고 (유대인이었다) 나중에 이스트만으로 성을 바꾼 사람이다. 이런 소문이 나돈 게 린다가 사진 작가로 명성을 떨쳤기 때문.
폴 사이먼은 1973년 'Kodachrome'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35mm 필름에서 유래된 제목이라고. 처음 발표됐을 때는 인기를 끌지 못했던 노래지만, 코닥이 1990년에 이 노래를 광고 배경음악으로 쓰기도 했고, 간간히 영화 OST로 쓰기도 했다.
2012년 후지필름이 영화 필름 생산을 중단하면서, 코닥은 현존하는 유일한 영화용 필름 제조사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사실 코닥도 다른 업체들처럼 필름 사업을 중단하려고 했으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비롯한 영화 제작자들이 매년 일정한 양의 코닥 필름을 소비해준다는 합의를 하여 간신히 유지에 성공한 바 있다. 현재 할리우드에서는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라라랜드, 덩케르크와 같은 일부 상업영화들이 35mm, 65mm 등의 필름으로 촬영되고 있다.
1991년에 코닥에서 '포토 CD'라는 규격과 이를 탑재한 하드웨어가 발표되었다. # 물론 이 규격은 오래 못가 망했다.
5.1. 코닥이 관여한 필름 포맷
5.2. 참고 항목
[1] 1998년에 OB맥주와 합병되어 현재는 (주)두산으로 존속.[2] 90년대에는 필름 카메라 사업도 절호조였고 자회사는 자회사대로 각종 합성수지 사업을 늘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각자의 전문분야에 집중하기 위한 분사는 당시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이후 이스트만 케미컬과 여기서 다시 분사한 회사들이 전세계 PET수지 생산량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3] 이스트만 화학의 제품 중 친숙한 물건으로는 트라이탄 소재가 있다.[4] 젊음과 자유를 나타내었던 이 코닥 여인은 해외에서 코닥여사, 파란 옷의 여인으로 불리며 일대의 센세이션을 일으킨다.[5] 간편한 조작성, 단순하고 멋진 디자인의 카메라로 1년만에 25만 개가 판매될 정도로 성공적인 제품이었다. 이 카메라는 이스트만이 고용한 화학자 브라우넬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6] 이스트만이 세운 연구소는 미국에서 설립된 최초의 상업 연구 단지 중 하나였다.[7] 이스트만은 다른 미국 대학에도 막대한 기부를 하였지만, MIT가 기부 금액이 가장 컸던건 이스트만이 개인적으로 존경했던 대학이였기 때문.[8] 코닥은 '''종신고용'''의 대명사로 유명한 기업이었다. 초창기에 이스트만이 주식 사업으로 번 수입을 일개 노동자에게 나눠준 일화는 유명한 일화. 그러나 1970-80년대의 미국 경제의 불황과 후지필름이라는 라이벌 기업의 등장으로 고전하던 코닥은 결국 종신고용을 포기했다.[9] 필름은 카메라 바디와 렌즈와는 다르게 지속적으로 소비할 수밖에 없던 제품이었다. 비록 필름 한개의 값은 싸지만, 소비자는 이를 계속 구입할 수밖에 없었던데다가 인화비용에 대한 지출 역시 컸었던 점을 생각하자.[10] CCD센서[11] 점유율과 수익성에서 고전할 뿐이지 특허는 여전히 괴물급으로 갖고 있는 회사이기에 특허만 정리해도 엄청난 현금이 나온다.[12] 산업용 필름, 영화 필름 및 종이는 여전히 팔린다.[13] 그 유명한 이미지 미리보기가 코닥의 특허였다.[14] 중국계로 알려졌으나 본사는 미국에 존재. 과거 GE 브랜드의 디지털 카메라를 제조한 회사이다.[15] 촬영한 필름을 코닥으로 보내면 현상과 4K 스캔을 하여 클라우드에 디지털 영상 파일로 올려준다고 한다. 이때 SD 카드를 동봉하면 녹음된 사운드와 싱크를 맞춰 준다.[16] 그러나 컬러 네가 제조사들이 저가 라인업의 생산물량을 조절하고 가격을 인상시켜 감에 따라, 소비자들도 5000원 주고 C200 살 바에야 9천 몇백 원 그대로에 엑타를 산다는 판단을 하는 경우가 늘었다. 이런 현상은 저가 라인업이 불안정할 때마다 계속 나올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