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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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부터 1890년(혹은 1917년)까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북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과 미국 백인들과의 일련의 무력 충돌을 모두 통틀어 일컫는 말.
아메리카 중 주로 미국령에서 벌어진 전쟁들을 말한다. 캐나다나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같은 여타 미주 국가들에서도 원주민과 때론 다투고 땅을 빼앗아 쫓아내고 살해하고 억압하는 일이 있었지만 대체로 미국보다는 온건하게 접근해 원주민들을 동화/굴복시킨 반면 미국에서는 가장 격렬한 다툼과 학살이 있었다.[1]
초기의 전쟁은 영국에서 북아메리카로 이주해온 식민지 개척자들과 원주민들 사이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가 대부분이었지만 점차 식민지 개척지가 늘어나고 영토확장이 일어나면서 원주민들과의 전쟁은 점점 대규모로 치닫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백인들이 처음 왔을 때 북아메리카는 순수한 자연 그대로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태초 그대로의 신대륙이었을 것이라는 것인데, 북미의 경우 1000만명[2] 정도의 인구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중남미 같은 경우엔 아즈텍 제국이나 잉카 제국, 마야 문명 같은 대규모 문명이 발달해 있었다. 확실한 건 아시아 대륙만큼은 많진 않았단 것이다.
북아메리카 정착 초기부터 대립은 시작되었다. 물론 극초기에는 정착기술도 없이 일단 건너온 정착민들이 원주민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추수감사절 같은 모양새도 나오기도 했으나, 이건 말 그대로 극초기 이야기이다. 일단 원주민들의 도움이 없어도 정착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초기 자신들의 정착을 도왔던 바로 그 부족들을 공격했다. 인디언 전쟁의 극초기를 장식하는 피쿼트 부족도 그렇지만, 필립왕 전쟁으로 전멸하는 왐파노아그 부족이 없었던 메이플라워와 필그림의 존재는 제임스타운과 같이 역사 속에서만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착민들은 이 두 부족을 모두 절멸로 몰아넣고 뉴잉글랜드 지역을 독차지한다.
이후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원주민들이 영국의 협력을 받은 것을 계기로 백인과 원주민의 충돌은 줄어든다. 또한 영국이 전쟁 이후에는 원주민과의 쓸데없는 싸움을 막기 위해 식민지인(=미국인)들의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로의 진출을 금지한 것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미국인이 될 이 식민지인들은 영국 정부의 서부 진출 금지에 반발이 강했고, 이 금지조치를 무시한 사례가 적지 않아서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미국 독립전쟁 끝에 미국이 독립하자, 영국 식민지 시절과 달리 서부 진출 금지가 풀리고 이는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재앙이 되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 이래 미국 정부가 백인 이주자를 위해 원주민 부족들을 몰아내고 보호구역에 가두는 정책을 시행하고 골드러시와 서부개척 붐이 일어나면서 미국은 점점 서쪽으로 팽창하는 정책으로 나아갔고 이는 필연적으로 북미 서부에 사는 원주민들과 갈등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서부로 점점 유럽인들이 몰려옴에 따라 원주민들은 이에 거세게 맞섰으며 지역 민병대들, 미 연방군과 싸웠다. 미국인들과 원주민간의 전쟁은 주로 남서부 히스패닉계 주민들과 부족간의 싸움이 많았는데 이들은 수백 년간 상호간 원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셰리던[3] 이 주장한 들소떼 박멸을 통한 청야전술(…)이 큰 효과를 거두었다는 설이 있다. 결국 "인디언 보호구역"에 보호를 명목으로 한 '''감금'''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대륙의 원주민들은 동부에서 서부로 밀려드는 개척자들, 원주민과 오랜 원한 관계를 가졌던 멕시코인들의 압박에 밀려 계속 거주지가 줄어들었기에 반발할수밖에 없었고 결국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물론 전쟁의 와중에 원주민들이 승리한 경우도 있기는 했으나 그러한 승리들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1890년의 운디드니 학살사건 이후 사실상 "인디언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소규모의 전투가 가끔 벌어졌다. 미국 역사상 공식적인 최후의 교전은 1918년 1월 9일에 있었던 베어 밸리 전투지만, 이건 사실상 멕시코 원주민과 미군의 국경분쟁에 가까우므로 인디언 전쟁으로 분류하기 애매하다. 실질적인 최후의 인디언 전쟁 전투는 1898년 10월 5일 미네소타에서 벌어진 슈거포인트 전투인데 이 전투는 원주민 사상자 없이 미군만 80명 중 16명이 죽거나 다쳤고 전사자 중에는 지휘관인 M. 윌킨슨 명예소령이 포함되어 있으며, 지역 내 분쟁 해소라는 당초의 작전 목적 달성에도 실패했으므로 미군의 완패로 간주된다.(…)
북미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인구는 한때 1천만 명을 넘었다. 2천만 명이 넘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중남미에서 전파된 구대륙 전염병으로 수많은 부락과 성읍국가들이 붕괴되고 농업사회가 큰 타격을 받아 수렵채집 위주의 구석기적 사회로 후퇴했고, 직접적 침략자인 유럽인들이 도착했을 당시엔 몇백만 명 수준을 넘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 엄청난 인구가 "인디언 전쟁"이 끝났을 때 수십만 명으로 줄었다. 현재는 상당부분 회복하긴 했으나(250만 명) 아직도 그 전의 인구수를 넘지 못하고 있다. 원주민 인구 감소의 직접적인 원인은 전쟁으로 인한 사망, 식량부족으로 인한 사망보다 백인들에게 전염병이 옮은 탓이 크다. 물론 전염병에 대한 저항력은 식량 부족에 따른 건강악화나 전쟁 같은 상황에 따른 스트레스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 이들은 20세기 중엽까지만 하더라도 야만적인 족속으로 헐리우드 영화에 그려져서 두 번 죽는 비극을 겪었다.
얼핏 보면 원주민과 백인 간의 전쟁으로 이 전쟁을 단순화시킬 수도 있지만 내막을 따져보면 상당히 복잡하다. 우선 전염병이 유럽인들의 진출보다 신속하게 퍼져나갔기 때문에 정작 유럽인보다 전염병이 더 많은 인구를 줄인 것도 있다. 이는 스페인의 남아메리카 식민지화 때도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또 미국 정부에 협력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공격한다거나, 부족간 분쟁을 중재하려 파견된 미군 병력이 공격측과 싸움이 붙어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됐다든가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부족 간 갈등은 결국 개척과정에서 백인들의 침략으로 원주민들이 고유의 영토를 잃고 밀려나면서 지나치게 좁은 지역에 복수의 부족이 밀집되면서 생긴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하다.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등장하는 수족과 포니족의 갈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천연두 등의 전염병으로 숨진 병사의 담요를 모았다가 원주민에게 선물로 주는 등 바이오 테러를 통한 인종청소를 했다는 주장도 있다.
인디언 전쟁은 백인 식민지 개척자들이 원주민들을 자신들과 같은 존엄성을 지녔다고 인정하지 않은데서 출발한 전쟁이기도 했다. 사실 모든 인류가 같은 존엄성을 지녔다고 인정받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만민 평등 선언이 '''UN 출범 후'''에 나왔고, 19세기 말 미국에서는, 미성년자의 법적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면 그들에게 '''가축과 같은''' 법적 권리를 주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미성년자들에게 '''가장 호의적인''' 의견이었다. 이 시기에는 백인의 의무나 명백한 운명과 같은 담론이 줄을 잇던 시기였으니, 이 시기 미국에서 말하는 인권과 자유라는 것은 '''백인 성인 남성의 특권'''이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백인들은 분명 원주민들(더 나아가 모든 유색인종)을 인간으로 인식했다. 스페인은 일찍이 자국령 내의 원주민들을 신민으로 받아들였으며, 미국의 남북전쟁은 노예제에 대한 도덕적 회의감 역시도 분명 주요한 원인이었다. 무엇보다도 유색인종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선교사들이 세례 좀 주겠다고 온갖 개고생을 하며 오지로 달려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원칙적인 경우이고, 대다수의 당시 백인 소시민들은 원주민과 흑인들이 자신들과 동일한 존엄성을 지녔다고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게다가 종교 문제도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앙은 기독교를 믿는 이주민들에게는 개종시켜야 할 이교도일 뿐이었고,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이들은 사람 취급을 안 했는데 이런 태도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원주민들과 직접 접촉을 했던 군인들 사이에서는 원주민과의 평화 공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극소수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 목사들 사이에서는 이런 경향이 약해서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20세기 중반부터 인디언 전쟁에 대해 미국 내에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미국 의회에서도 전쟁을 일으켜 원주민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 사과하자는 결의안이 제출되기도 했다.
2010년 5월 20일에는 샘 브라운백 공화당 상원의원이 과거 미국 정부에 대항해 싸우다 숨진 많은 원주민 부족 지도자들이 묻혀있는 워싱턴 D.C.의 의회묘지에서 체로키, 촉토, 무스코지, 포니, 시스턴 와페톤 오야테족 등 5개 부족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행사에 참석, 과거 원주민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 및 폭력행위 등에 대해 포괄적으로 사과하고, 원주민들에 대한 정책상의 잘못으로 그들이 현재 보호구역내에서 빈곤과 폭력사태에 직면하고 있는데 대해서도 유감을 표시하며 그들의 권익향상과 복지증진을 위한 미 정부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낭독하기도 했다.
외계인 침공을 주제로 한 토론에서 스페인 정복자와 같이 북미 원주민 학살이 많이 언급된다. 즉 백인은 외계인, 북미 원주민은 지구인 이런식으로 자주 비유가 되곤 한다. 반대로 아바타처럼 인간에게 침략당하는 외계인을 원주민에 비유하는 영화도 있다. 아바타의 경우는 나비족 족장 에이투칸 역으로 실제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 배우인 웨스 스투디[5] 를 기용했다.
미국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에서는 입장이 역전되어 카지노로 떼돈을 번 원주민들이 사우스파크를 밀어버리고 자기네 카지노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려고 하는데 이에 반대해 시위하는 주민들을 쫓아내기 위해 담요에 사스 전염병[6] 을 묻혀 선물하는 역지사지의 만행을 저지른다.
디 브라운의 책인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인디언 전쟁 말기를 조명한 책이며 같은 시기를 다룬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1. 개요
1622년부터 1890년(혹은 1917년)까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북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과 미국 백인들과의 일련의 무력 충돌을 모두 통틀어 일컫는 말.
아메리카 중 주로 미국령에서 벌어진 전쟁들을 말한다. 캐나다나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같은 여타 미주 국가들에서도 원주민과 때론 다투고 땅을 빼앗아 쫓아내고 살해하고 억압하는 일이 있었지만 대체로 미국보다는 온건하게 접근해 원주민들을 동화/굴복시킨 반면 미국에서는 가장 격렬한 다툼과 학살이 있었다.[1]
2. 전개
2.1. 백인과 원주민의 갈등
초기의 전쟁은 영국에서 북아메리카로 이주해온 식민지 개척자들과 원주민들 사이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가 대부분이었지만 점차 식민지 개척지가 늘어나고 영토확장이 일어나면서 원주민들과의 전쟁은 점점 대규모로 치닫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백인들이 처음 왔을 때 북아메리카는 순수한 자연 그대로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태초 그대로의 신대륙이었을 것이라는 것인데, 북미의 경우 1000만명[2] 정도의 인구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중남미 같은 경우엔 아즈텍 제국이나 잉카 제국, 마야 문명 같은 대규모 문명이 발달해 있었다. 확실한 건 아시아 대륙만큼은 많진 않았단 것이다.
북아메리카 정착 초기부터 대립은 시작되었다. 물론 극초기에는 정착기술도 없이 일단 건너온 정착민들이 원주민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추수감사절 같은 모양새도 나오기도 했으나, 이건 말 그대로 극초기 이야기이다. 일단 원주민들의 도움이 없어도 정착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초기 자신들의 정착을 도왔던 바로 그 부족들을 공격했다. 인디언 전쟁의 극초기를 장식하는 피쿼트 부족도 그렇지만, 필립왕 전쟁으로 전멸하는 왐파노아그 부족이 없었던 메이플라워와 필그림의 존재는 제임스타운과 같이 역사 속에서만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착민들은 이 두 부족을 모두 절멸로 몰아넣고 뉴잉글랜드 지역을 독차지한다.
이후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원주민들이 영국의 협력을 받은 것을 계기로 백인과 원주민의 충돌은 줄어든다. 또한 영국이 전쟁 이후에는 원주민과의 쓸데없는 싸움을 막기 위해 식민지인(=미국인)들의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로의 진출을 금지한 것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미국인이 될 이 식민지인들은 영국 정부의 서부 진출 금지에 반발이 강했고, 이 금지조치를 무시한 사례가 적지 않아서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미국 독립전쟁 끝에 미국이 독립하자, 영국 식민지 시절과 달리 서부 진출 금지가 풀리고 이는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재앙이 되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 이래 미국 정부가 백인 이주자를 위해 원주민 부족들을 몰아내고 보호구역에 가두는 정책을 시행하고 골드러시와 서부개척 붐이 일어나면서 미국은 점점 서쪽으로 팽창하는 정책으로 나아갔고 이는 필연적으로 북미 서부에 사는 원주민들과 갈등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서부로 점점 유럽인들이 몰려옴에 따라 원주민들은 이에 거세게 맞섰으며 지역 민병대들, 미 연방군과 싸웠다. 미국인들과 원주민간의 전쟁은 주로 남서부 히스패닉계 주민들과 부족간의 싸움이 많았는데 이들은 수백 년간 상호간 원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셰리던[3] 이 주장한 들소떼 박멸을 통한 청야전술(…)이 큰 효과를 거두었다는 설이 있다. 결국 "인디언 보호구역"에 보호를 명목으로 한 '''감금'''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대륙의 원주민들은 동부에서 서부로 밀려드는 개척자들, 원주민과 오랜 원한 관계를 가졌던 멕시코인들의 압박에 밀려 계속 거주지가 줄어들었기에 반발할수밖에 없었고 결국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물론 전쟁의 와중에 원주민들이 승리한 경우도 있기는 했으나 그러한 승리들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1890년의 운디드니 학살사건 이후 사실상 "인디언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소규모의 전투가 가끔 벌어졌다. 미국 역사상 공식적인 최후의 교전은 1918년 1월 9일에 있었던 베어 밸리 전투지만, 이건 사실상 멕시코 원주민과 미군의 국경분쟁에 가까우므로 인디언 전쟁으로 분류하기 애매하다. 실질적인 최후의 인디언 전쟁 전투는 1898년 10월 5일 미네소타에서 벌어진 슈거포인트 전투인데 이 전투는 원주민 사상자 없이 미군만 80명 중 16명이 죽거나 다쳤고 전사자 중에는 지휘관인 M. 윌킨슨 명예소령이 포함되어 있으며, 지역 내 분쟁 해소라는 당초의 작전 목적 달성에도 실패했으므로 미군의 완패로 간주된다.(…)
북미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인구는 한때 1천만 명을 넘었다. 2천만 명이 넘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중남미에서 전파된 구대륙 전염병으로 수많은 부락과 성읍국가들이 붕괴되고 농업사회가 큰 타격을 받아 수렵채집 위주의 구석기적 사회로 후퇴했고, 직접적 침략자인 유럽인들이 도착했을 당시엔 몇백만 명 수준을 넘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 엄청난 인구가 "인디언 전쟁"이 끝났을 때 수십만 명으로 줄었다. 현재는 상당부분 회복하긴 했으나(250만 명) 아직도 그 전의 인구수를 넘지 못하고 있다. 원주민 인구 감소의 직접적인 원인은 전쟁으로 인한 사망, 식량부족으로 인한 사망보다 백인들에게 전염병이 옮은 탓이 크다. 물론 전염병에 대한 저항력은 식량 부족에 따른 건강악화나 전쟁 같은 상황에 따른 스트레스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 이들은 20세기 중엽까지만 하더라도 야만적인 족속으로 헐리우드 영화에 그려져서 두 번 죽는 비극을 겪었다.
2.2. 원주민 부족 간 갈등
얼핏 보면 원주민과 백인 간의 전쟁으로 이 전쟁을 단순화시킬 수도 있지만 내막을 따져보면 상당히 복잡하다. 우선 전염병이 유럽인들의 진출보다 신속하게 퍼져나갔기 때문에 정작 유럽인보다 전염병이 더 많은 인구를 줄인 것도 있다. 이는 스페인의 남아메리카 식민지화 때도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또 미국 정부에 협력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공격한다거나, 부족간 분쟁을 중재하려 파견된 미군 병력이 공격측과 싸움이 붙어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됐다든가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부족 간 갈등은 결국 개척과정에서 백인들의 침략으로 원주민들이 고유의 영토를 잃고 밀려나면서 지나치게 좁은 지역에 복수의 부족이 밀집되면서 생긴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하다.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등장하는 수족과 포니족의 갈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천연두 등의 전염병으로 숨진 병사의 담요를 모았다가 원주민에게 선물로 주는 등 바이오 테러를 통한 인종청소를 했다는 주장도 있다.
3. 도덕적 정당화
인디언 전쟁은 백인 식민지 개척자들이 원주민들을 자신들과 같은 존엄성을 지녔다고 인정하지 않은데서 출발한 전쟁이기도 했다. 사실 모든 인류가 같은 존엄성을 지녔다고 인정받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만민 평등 선언이 '''UN 출범 후'''에 나왔고, 19세기 말 미국에서는, 미성년자의 법적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면 그들에게 '''가축과 같은''' 법적 권리를 주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미성년자들에게 '''가장 호의적인''' 의견이었다. 이 시기에는 백인의 의무나 명백한 운명과 같은 담론이 줄을 잇던 시기였으니, 이 시기 미국에서 말하는 인권과 자유라는 것은 '''백인 성인 남성의 특권'''이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백인들은 분명 원주민들(더 나아가 모든 유색인종)을 인간으로 인식했다. 스페인은 일찍이 자국령 내의 원주민들을 신민으로 받아들였으며, 미국의 남북전쟁은 노예제에 대한 도덕적 회의감 역시도 분명 주요한 원인이었다. 무엇보다도 유색인종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선교사들이 세례 좀 주겠다고 온갖 개고생을 하며 오지로 달려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원칙적인 경우이고, 대다수의 당시 백인 소시민들은 원주민과 흑인들이 자신들과 동일한 존엄성을 지녔다고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게다가 종교 문제도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앙은 기독교를 믿는 이주민들에게는 개종시켜야 할 이교도일 뿐이었고,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이들은 사람 취급을 안 했는데 이런 태도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원주민들과 직접 접촉을 했던 군인들 사이에서는 원주민과의 평화 공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극소수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 목사들 사이에서는 이런 경향이 약해서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 에드워드 윈쿱 소령은 샤이엔 부족과 관계개선을 이루었다. 하지만 감리교 목사이기도 했던 존 밀튼 시빙턴 대령은 해당 부족이 잠을 자고 있을때 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기습하여, 133명을 학살하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인디언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남의 뜻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당시 부족에는 남자들은 대부분 사냥을 떠나고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을 중심으로 600여명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이중 30명 미만만이 성인 남자이고 나머지는 모두 여자와 어린이들이었다. 당시 머물던 부족 중에는 우호의 상징으로 성조기를 걸어놓은 천막도 있었는데, 사격이 시작되자 이 천막으로 도망간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천막에도 사격이 가해졌기 때문에 나머지는 모두 쏟아지는 총알을 피해서 도망쳤다. 이것이 샌드크리크 대학살 사건이다. 시빙턴은 부녀자와 아이들만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알을 그대로 두면 이가 되는 법이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이 사건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 사건은 시빙턴 대령의 명령을 거부하고 해당 사건을 증언했던 3명의 군인들에 의해서 비교적 조기에 밝혀졌기 때문에 운디드니 학살사건처럼 전투로 취급받아서 참여자에게 훈장이 내려지는 일은 없었는데, 대신 증언자 중 한명인 사일러스 소울 대위가 후일 시빙턴의 추종자 백인의 총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감리교회는 1996년에야 시빙턴의 만행을 참회하는 발표를 했다.
- 남북전쟁에도 북군으로 참전했던[4] 이로쿼이 부족민이 있었다. 미국식 이름 엘리 파커, 하지만 인디언 국장으로 있으면서 세네카 부족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받은 이름 도네호가와(Donehogawa, 서쪽문의 수호자)로 더 유명했던 인물이다. 도네호가와는 그랜트 대통령 때 원주민 부족의 개혁과 관계개선을 위해서 노력했으나, 기존 종교를 용인했다는 이유 때문에 탄핵되었다. 특히 지역 선교사 윌리엄 웰시는 도네호가와의 파면을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고 이것이 성과를 이루면서 다시 백인과 원주민의 관계는 다시 깨지고 말았다.
4. 과거 청산
20세기 중반부터 인디언 전쟁에 대해 미국 내에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미국 의회에서도 전쟁을 일으켜 원주민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 사과하자는 결의안이 제출되기도 했다.
2010년 5월 20일에는 샘 브라운백 공화당 상원의원이 과거 미국 정부에 대항해 싸우다 숨진 많은 원주민 부족 지도자들이 묻혀있는 워싱턴 D.C.의 의회묘지에서 체로키, 촉토, 무스코지, 포니, 시스턴 와페톤 오야테족 등 5개 부족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행사에 참석, 과거 원주민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 및 폭력행위 등에 대해 포괄적으로 사과하고, 원주민들에 대한 정책상의 잘못으로 그들이 현재 보호구역내에서 빈곤과 폭력사태에 직면하고 있는데 대해서도 유감을 표시하며 그들의 권익향상과 복지증진을 위한 미 정부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낭독하기도 했다.
5. 대중매체에서
외계인 침공을 주제로 한 토론에서 스페인 정복자와 같이 북미 원주민 학살이 많이 언급된다. 즉 백인은 외계인, 북미 원주민은 지구인 이런식으로 자주 비유가 되곤 한다. 반대로 아바타처럼 인간에게 침략당하는 외계인을 원주민에 비유하는 영화도 있다. 아바타의 경우는 나비족 족장 에이투칸 역으로 실제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 배우인 웨스 스투디[5] 를 기용했다.
미국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에서는 입장이 역전되어 카지노로 떼돈을 번 원주민들이 사우스파크를 밀어버리고 자기네 카지노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려고 하는데 이에 반대해 시위하는 주민들을 쫓아내기 위해 담요에 사스 전염병[6] 을 묻혀 선물하는 역지사지의 만행을 저지른다.
디 브라운의 책인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인디언 전쟁 말기를 조명한 책이며 같은 시기를 다룬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6. 전쟁의 개요
- 식민지 개척기의 인디언 전쟁
- 미시시피강 동부의 인디언 전쟁(1775-1842)
- 치카마우가 전쟁(1776-1794)
- 북서 인디언 전쟁(1785-1795)
- 테캄세 전쟁(1811)
- 크리크 전쟁(1813-1814)
- 제1차 세미놀 전쟁(1817-1818)
- 블랙호크 전쟁(1832)
- 제2차 세미놀 전쟁(1835-1842)
- 미시시피강 서부의 인디언 전쟁(1823-1890)
7. 관련인물
- 미국
- 아메리카 원주민
[1] 단 평화적으로 미국 영토에 편입됐던 알래스카의 틀링깃 족이나 아트나 족의 경우 대대로 살아오던 터전내에서 거주하는 것을 미국 정부가 현지 원주민의 거주권을 인정하는 등 미국 본토 지역처럼 영토 확장, 편입 과정에서 원주민 부족과 미국 정부, 백인 개척민과의 갈등과 충돌이 상대적으로 적었다.[2] 이것은 콜럼버스의 교환 이전의 인구로, 본격적으로 유럽인과 접촉하기 전에도 중남미에서 올라온 구대륙 전염병의 전파로 200만멍 밖에 안 남았다. 북미 곳곳에서 대규모 정착지의 붕괴가 백인 접촉 이전에도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수준이다.[3]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라는 말로 유명한 인물이다.[4] 로버트 리 남군 장군이 항복할 때, 그 문서를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5]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출연한 영화중에서는 스트리트 파이터(영화)의 사가트라고 하면 가장 알기 쉬울 것이다. [6] 사스에 걸린 벌거벗은 중국인들을 담요에 문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