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텍 제국

 



'''삼각동맹''' '''Ēxcān Tlahtōlōyān''' [1]
[image]
'''1248년 ~ 1521년'''
'''위치'''
멕시코 일부
'''수도'''
테노치티틀란(사실상)
'''정치 체제'''
패권 군사 연합
'''국가 원수'''
틀라토아니
'''주요 군주'''
이츠코와틀(1428~1440)
몬테수마 2세(1502~1520)
'''언어'''
고전 나와틀어
'''종교'''
아즈텍 종교[2]
'''종족'''
메시카인(나와인)
'''주요 사건'''
1248년 건국
1428년 삼각동맹 결성
1521년 멸망[3]
'''성립 이전'''
테노치티틀란 왕국
'''멸망 이후'''
누에바에스파냐
'''현재 국가'''
멕시코
1. 개요
2. 명칭
3. 기원
4. 인구
5. 문화
5.1. 교육
5.2.1. 원인
5.2.1.1. 과거의 학설:단백질 부족
5.2.1.2. 반론
5.2.1.3. 재반론
5.2.2. 의례의 과정
5.2.3. 통치 수단
5.2.4. 소멸
5.3. 가톨릭으로 개종되기까지
5.4. 꽃 전쟁
6. 경제
7. 사회 구조
7.1. 귀족 계급 / 피필틴
7.2. 평민 계급 / 마세우알틴
7.2.1. 테쿠틀리, 테칼레케, 칼풀레케
7.3. 노예 계급 / 틀라코틴, 마예케
7.4. 계급 간의 사회 이동
7.6. 기타
8. 스페인에게 정복된 이유
8.1. 전염병?
8.2. 전투 능력의 격차
8.3. 주변 부족과의 갈등
9. 이미지
10. 오늘날의 평가
11. 여담
12. 창작물에서의 등장
13. 아즈텍 제국 캐릭터

언어별 명칭
고전 나와틀어
Ēxcān Tlahtōlōyān
나와틀어
Mēxihcatlahtohcāyōtl
스페인어
Imperio azteca
영어
Aztec Empire
[clearfix]

1. 개요


라틴아메리카멕시코 중부 부근에 존재했던 아즈텍인들의 국가이다. 톨텍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즈텍 제국은 인근 부족들을 강압적으로 지배하였으며, 그러한 부족의 반란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진압할 정도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1500년대 초반에 스페인에서 온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끄는 콩키스타도르의 공격으로 인하여 쇠락하였고, 결국 불과 수년 만에 스페인 침략자들, 그리고 아즈텍 제국에 핍박받던 틀락스칼텍을 비롯한 다른 멕시코 지역 원주민 부족들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2. 명칭


'아즈텍 제국'이라는 이름은 이 국가, 특히 테노치티틀란을 세운 주된 민족이 아즈텍인들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외부에서 특정 국가를 부를 때 그냥 민족 이름을 가져다 쓰는 것은 다른 곳에서도 흔한 현상이다. 타칭 문서 참고.
스스로는 이 국가를 ''''예슈칸 틀라톨로얀'(Ēxcān Tlahtōlōyān)'''[4], 해석하면 "'''삼각동맹'''"(3개의 의장석이 놓인 재판소)이라고 불렀다. 강성해진 테노치티틀란이 다른 도시인 텍스코코, 틀라코판(혹은 타쿠바)과 군사동맹을 맺은 것을 지칭한다. 삼각동맹 체제는 주변 지역의 도시들을 모두 군사력으로 제압하고 조공을 받는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3. 기원


13세기경, 중미 지역에는 소치밀코, 찰카, 테파넥, 콜우아, 틀라우이카, 틀락스칼텍, 메시카 등의 강성한 7개 부족과 그 외 수많은 소규모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서 아즈텍 제국의 주류 민족으로 꼽히는 '''메시카''' 족은 북방의 멕시코 고원에서 온 이질적인 종교관을 지닌 유목 부족으로, 신이 점지한 땅을 찾아 살육과 파괴를 일삼던 부족이었다. 현실적인 이유로 보자면 원래 살던 땅을 버려야 할 정도로 원래 거주지의 상황이 영 좋지 않았기에 더 잘 살 수 있는 동네를 찾아 유목생활을 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던 메시카 족이 차폴테펙이라고 불리는 언덕에 정착하자, 잔혹한 이방인들에 대해 불안을 가지고 있던 소치밀코, 테파넥, 콜우아 부족의 연합 공세에 의해 절멸 직전까지 몰린다.
그러나 콜우아 족의 틀라토아니(황제)였던 콕스콕스틀리가 메시카 족의 전투력을 눈여겨보고 그들을 일종의 군신계약으로 거두어, 차폴페텍 남동부에 위치한 티자판이라는 지역을 메시카 족에게 하사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군신 관계는 약 8년 정도 지속되었는데, 그들의 신인 '''우이칠로포치틀리'''(Huitzilopochtli)의 계시를 명목으로 콜우아 족의 '''틀라토아니의 딸을 현인신으로 삼겠답시고 그녀의 살가죽을 벗겨 죽이는 만행'''을 저지름으로 인해, 분노한 콜우아 족의 공세로 멸절 직전까지 이른다.
다만 멕시카 족이 무슨 나쁜 의도가 있어서 이런 짓을 저지른 건 아니고 자기들 딴엔 정말 '''순수한 의도로''' 한 종교적 의식이었다. 그게 진짜 그들의 신의 말이었든 아니면 사제가 환상을 통해 들은 말이든 간에, 멕시카 족은 그걸 문자 그대로 따랐다. 그들은 먼저 콜우아 족의 왕에게 공주를 현인신(살아있는 신)으로 삼아줄 테니 달라고 청했다. 콜우아 족의 왕은 그걸 또 곧이곧대로 믿고 공주에게 큰 영광이 될 거라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공주를 보내줬으며 콜우아 족의 다른 사람들도 공주의 미래는 마냥 꽃길이라 생각하고 기쁘게 공주를 전송했다.
허나 멕시카 족의 땅으로 가게 된 공주는 영문도 모른 채 그들에게 붙들려 끝내 죽임당하고 가죽이 벗겨져, 그 가죽은 사제의 외투가 되는 참혹한 결말을 맞이했다. 그래놓고서 그들은 그렇게 된 공주가 현인신이 되었다고 여기며 콜우아 족의 왕을 자랑스럽게 자기네 영지로 불러들이는 실책을 저질렀다.
당연히 이 행위는 어느 정도 인신공양이 일반화되어있던 당시 기준으로도 충격 그 자체로, 콜우아 족의 왕은 그런 그들의 행각을 순수한 종교적 의식은 개뿔이고 그저 은혜를 원수로 갚은 용병 민족의 만행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지라 엄청난 분노에 휩싸였고, 그 결과 멕시카 족의 몰살을 작정하고 시전하려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후의 아즈텍 제국의 지독하기 그지없는 인신공양의 싹수가 여기서부터 보였다는 평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들은 콜우아 족이 들어가지 못하는 텍스코코 호수 근처의 늪지대까지 도망쳤고, 호수 한 가운데의 섬에 터전을 잡았는데 이 섬이 바로 '''테노치티틀란'''이었다. 이것이 1325년의 일로, 이후 196년간 중미 지역을 제패한 아즈텍 제국의 시작이었다.[5]

4. 인구


인구는 500만~600만이었다. 당시의 세계 기준으로도 상당히 많은 인구였다. 동시기 영국인구가 400~500만이었다. 구 아즈텍의 중추였던 대도시 테노치티틀란(Tenochititlan)의 인구가 약 15~30만 명인데, 이는 구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거대한 규모였다. 그 당시 런던이나 파리는 5만~10만 명이었고, 구세계의 역사적인 대도시인 콘스탄티노플, 장안, 바그다드쯤 가야 전성기 시절의 인구가 약 50만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런 규모는 물리적인 섬의 면적으로 부양하기 불가능한 인구 규모로, 아무리 치남파 형태로 섬의 면적을 늘려서 틀랄텔롤코 지역까지 하나의 섬으로 확장시켰지만 총 면적이 8~13.5km2 정도밖에 안 되어서[6](영어 위키백과 출처), 이 규모에 10만 명 이상이 산다는 것은 현대 대도시인 서울 평균 인구밀도와 비슷한 인구밀도 수준이란 말인데 말이 안 되고, 아마도 주변 위성도시와 경제권 인구수를 묶어서 통계로 낸 결과인 것 같다. 물론 10만 이상이 안 되어도 도시 규모가 컸던 것은 사실인 게 동유럽에서 상당히 큰 축에 속하는 크라쿠프의 당시 인구가 16,000명 정도였다.[7]

5. 문화



5.1. 교육


여러 사회 요소들 가운데서도 '''특히 교육을 가장 중시했고, 최초로 (노예 제외) 신분 상관 없이 남녀 모두에게 의무교육을 실행한 국가'''[8]이기도 하다. 물론 말만 제국이지 사실은 수많은 도시국가들로부터 조공만 받고 내정은 일체 간섭 안하는 도시국가들의 군집인지라 행정력이 닿는 유일한 직할지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시민들(노예는 제외했다.)에 한해서였으나, 그래도 '''모든 자유민'''에게 의무교육을 실시한 건 상당히 대단한 것이다. 교육열이 높았던 동아시아 유교권 국가들도 의무교육을 제공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시대상의 한계로 현대와 같은 의미의 교육이 아니다. 남성의 경우는 체력 단련과 군사 교육, 가상전쟁 훈련과 일부러 고통을 참아내야는 극기훈련에, 체제에 충성심을 갖게 하는 사상 교육에 해당하는 종교 교육 등등의 군대와 같은 활동이 대부분이었다. 수학이나 과학 같은 학문은 평민 학교에서는 최소한의 생활 지식과 숫자 세기 정도의 기초만 가르쳐서 사실상 징병제에 더 가깝다고 봐야 했다. 여자의 경우도 기초적인 생활 지식과 집안일, 여성으로의 몸가짐 등을 익히는 곳으로 학문을 배운다기엔 한계가 많았다.[9]

5.2. 인신공양인육


대규모의 인신공양 및 이로 인한 식인 행위가 국가적으로 자행된 대표적인 국가의 예시로 들 수 있다.[10] 사제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적군 포로의 팔다리를 구속한 상태에서, 흉부를 돌칼로 베어낸 후 심장을 꺼내어 제단에 바쳤다고 한다. 시체는 피라미드 계단에서 굴려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는 당시 포로가 되었던 스페인 병사들의 기록에 잘 묘사되어 있다.
아즈텍뿐만 아니라 중남미는 전반적으로 인신공양이 유독 많이 일어나는 지역이었다. 이는 현생인류가 정착한 시기가 다소 늦었을 뿐더러 유라시아와는 교류가 불가능한 완전히 단절된 지역이었으며, 대형 동물의 부족으로 제물로 바치기에 합당한 가치를 가진 것이 인간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기원전의 올멕 문명과 테오티우아칸부터 시작해 중남미 전반에 퍼진 이러한 행태는 남미의 치무 왕국과 유카탄 반도의 마야 문명, 아즈텍 이전의 톨텍 문명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고대부터 중남미에서는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고 심장을 적출하는 등의 잔혹한 제의가 굉장히 많았으며 아즈텍의 제의 또한 결과적으로 그 연장선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그럼에도 아즈텍이 독보적인 인신공양 제국으로 꼽히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구시대 문명은 물론이고 동시대인 후기 마야나 잉카에 비해서도 역사적 기록이나 유적이 많이 남아있고 정치적 이유로 고고학 연구가 가장 활발하기 때문이다.[11] 둘째로 톨텍 시절부터 이 지역의 제의는 굉장히 과격한 편에 속했는데 덩치가 커지면서 인신공양 횟수가 늘어나 메소아메리카에서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는 것이 이유이다. 아즈텍 제국의 인신공양과 식인 행위는 독보적으로, 아즈텍의 인신공양 규모는 전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수준이었음은 물론이고 인신공양을 기본시하는 중남미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인신공양 제사는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 제사 안식일이 일 년에 닷새에 그쳤다고 한다.
2017년 멕시코 테노치티틀란의 아즈텍 피라미드 지하에서 새로운 해골탑과 수백 개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이 해골 중에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여성과 어린아이의 두개골이 발견되어 전쟁 포로 외에도 광범위한 인신공양이 있었을 것으로 학자들이 추측하고 있다. 멕시코시티 지하 아즈텍 신전서 지름 6m 원통 해골탑 발굴, SBS, MBC. 그리고 2018년 이것이 촘판틀리로 밝혀지며 멕시코 정부가 스페인 정복자들의 과장이라 부정했던 안드레스 데 타피아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우에이촘판틀리의 해골탑 일부에서 약 670구의 인간 두개골을 발굴했는데, 심지어 이는 표면에 불과하고 실제 해골탑의 대부분은 여전히 묻혀있는 상태인데 추정치는 약 114피트(35미터)에 길이는 16피트(5미터)로, 스페인 정복자들의 기록인 13만 6천 구와 정확히 일치한다. 고고학자들은 대신전의 시대에 대한 그들의 지식에 의거하여, 테노치티틀란이 1325년 설립된 이래로 인신공양을 시행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발견한 촘판틀리의 특정한 단계는 1486년에서 1502년 사이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 #, #, #, #, #, # 다만 상당수 발견된 인골 중 75프로는 전쟁으로 잡혀온 전사들로 추정되는 성인 남성의 것이고 나머지 20프로가 여성, 5프로가 아이의 것이다.
대피라미드 인근의 죽음의 신 믹틀란테쿠틀리 신상은 아마란스 씨앗을 곱게 갈아 가루로 만든 뒤, 어린 아이의 피를 섞어 반죽한 것으로 만들어졌다. 고고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템플로 마요르에서 출토된 믹틀란테쿠틀리의 테라코타의 성분 분석에서 실제로 인간의 혈흔이 검출되었다. #
아즈텍의 틀랄록 숭배는 매우 잔인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오로지 어린 아이들만을 제물로 바쳤다.[12] 또한, 의식 과정에서 아이들은 눈물을 흘려야 했기에 아즈텍인들은 아이들을 학대하고 고문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제사가 1년에 몇 번이나 있었고, 원주민 출신 역사가 알바 익스틀릴소치틀은 '매년 전체 아이들의 5분의 1이 제물로 바쳐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아즈텍이라고 수많은 전쟁 포로들을 전부 바로 제물로 바친 건 아니고 그중 일부만 상징적으로 바치고 나머지 살아남은 포로들은 노예같은 노동력으로 돌렸다. 다시 말해 몇만명이 제물로 바쳐졌다고 해서 생으로 그 몇만명을 다 죽인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사에 참여했다"는 의미에서 그런 식으로 서술된 점도 감안해야될 것이다. 단적인 예로 테노치티틀란의 대신전 유적 발굴이 있는데 정작 대신전 쪽에서 나온 유골들 숫자는 몇십년에 걸쳐 누적된 유해들이고 대신전 외의 거주지에서는 식인이 정말로 활발했다면 발견되어야할 유골들은 발견되지 않았음은 물론, 혈흔 흔적도 대신전의 믹틀란테쿠틀리를 섬기던 제한된 부근에서만 발견되는데 그쳤기에 고고학적 발굴과 완전 일치하지 않는 부분 또한 존재한다.

5.2.1. 원인



5.2.1.1. 과거의 학설:단백질 부족

어째서 이렇게 대량으로 인신공양을 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중앙아메리카 지역에 인신 공양을 대체할 만한 가축이 존재하지 않았고, 대형 야생동물도 이미 멸종당한 탓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을 처음 체계화한 학자는 마이클 하너로, 발표 시점은 1977년이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고기로 단백질을 보충하려는데, 멕시코는 빙하기 이후로 대형 초식 동물의 멸종으로 인해 사냥할 짐승도 없고 칠면조와 개를 제외하면 가축도 없으니[13] 아즈텍인들이 동물 대신 사람 고기를 먹는 식인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인신공양을 치렀으며, 인구 20만이 넘는 대도시 테노치티틀란피라미드는 이러한 대량 학살이 있을 때마다 현대정육점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틀라카틀올리란 인육과 옥수수죽을 섞은 음식이 있었는데 말그대로 신에게 바쳐진 희생양의 인육을 먹음으로서 신을 먹는 것과 같다는, 즉 신과의 합일로 받아들이는 아즈텍만의 독특한 종교와 문화 분위기가 인신공양에 대한 거부감 없이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고 당시 스페인 선교사들의 기록을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묘사가 된다.
테노치티틀란과 그 부속도시들을 합쳐서 최소한 수십만에 달하는 인구를 주변 호수의 어획으로 먹여살리는건 당연히 급속한 남획으로 인한 수자원의 고갈로 이어져 쉽지 않을 것이고, 칠면조같은 가금류나 토끼같은 작은 포유동물은 잡아봤자 애초에 고기양이 얼마 안 나오기 때문에 어차피 넘쳐나는 인적자원이 있다면 차라리 식인에 대한 금기를 없애고 식인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이는것이 더 제국의 장기적 운영에 효율적이었을것이다.

5.2.1.2. 반론

당연히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가장 유명한 반론이라고 하면 1978년 베르나르드 R. 오르티스 데 몬텔라노(Bernard R. Ortiz de Montellano)의 논문이 있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아즈텍 제국의 인신공양과 식인은 (기근 등 식량이 부족한 때가 아니라) 오히려 곡물 추수기간 등 식량이 풍족한 기간에 더 자주 행해졌다고 한다. 즉, 아즈텍인들에게 식인은 (미국에 정착한 유럽인들이 추수감사절을 맞아 칠면조 요리를 먹는 수준의) 종교적, 문화적 행사에 가깝지 단백질 부족에 따른 불가피한 생존이라고는 보기 힘들다는 뜻이다.
또한 당시 멕시코에서 고기를 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가정과 달리 테노치티틀란은 호수 위에 자리하여 어업이 가능한 정도를 넘어서 매우 풍부한 수산자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17세기 당시 기록에 따르면, 테노치티틀란이 위치한 텍스코코 호수 인근의 비교적 작은 호수였던 소치밀코(Xochimilco)호수와 찰코(Chalco) 호수에서는 1년에 잡히는 물고기의 양이 각각 100만 마리 이상일 정도였다고 하며(출처 : Freshwater Fishes of North America: Volume 2: Characidae to Poeciliidae, Melvin L. Warren, Jr., Brooks M. Burr) 실제로 당시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어업 유적이나 도구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거기다 아즈텍 제국은 [14]토끼, 칠면조, 오리 등을 식육용으로 길렀으며 특히 칠면조는 유럽인들이 도래하기 전부터 이미 가축화와 사육에 성공하였을 정도였다. 그리고 멕시코 특유의 친환경 농사방식인 치남파(Chinampa) 농업으로 인하여, 지력이 고갈되는 일도 거의 없이 농업 생산량도 풍부한 편이었다.
비교문화사적으로도 아즈텍 제국의 식인을 단순히 단백질 부족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대형 초식 동물이 존재하는 지구상의 다른 나라에서도 , 같은 동물은 일단 군사용, 농업용, 운송용으로 쓰이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이들 동물의 도축에는 크고 작은 제한이 있었으며 고기 그 자체만을 위하여 사육되거나 하는 잦은 식용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돼지는 인간용 식량자원을 먹여 키우는 등 사료가 과다하게 투입되는 문제로, 은 풀뿌리까지 완전히 뽑아먹는 습성상 넓은 목지를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키워야 하는 등의 문제로 그리 효율적으로 사육할 수 있는 식용 동물은 아니었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단백질 위주의 식단은 공장형 축산이 도입됨에 따라 탄생한 것이지, 인류 역사상 육식 그 자체가 풍족했던 전근대시대는 원래 거의 없었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집에서 키우는 , 가금류(, 오리) 그리고 사냥으로 얻을 수 있는 사슴이나 토끼 등의 야생동물로 단백질을 보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환경적인 측면에서 아즈텍이 크게 불리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육식을 의도적으로 피했던 나라의 예로 봤을때도, '''단백질 부족이 곧장 식인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가장 유명한 예로는 약 1,200년간 육식을 기피해던 전근대 일본의 사례가 있는데, 16세기 당시 일본의 경기지방(쿄토, 오사카, 사카이 등)의 인구를 전부 합치면 약 100만명을 넘길 정도였지만 그들은 대형 초식동물을 식용하지 않고 조류와 물고기를 먹는 식습관을 기반으로 단백질을 충분히 보충하였다. 물론 전근대 일본인들은 식량 부족등으로 인하여 마비키를 통해 인구를 인위적으로 조정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에도시대 일본 전체의 인구가 아즈텍 전체의 인구보다 훨씬 더 많았다는 점과 아즈텍 제국에도 멕시코만과 태평양, 그리고 텍스코코 호수의 풍부한 수자원과 산, 고원, 열대우림 등에서 서식하던 야생동물들이 충분히 존재했었음을 고려하면, 아즈텍인들의 식용 동물 자원이 다른 문명보다 월등히 부족했다는 증거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1970년대 현대 멕시코인들의 식단보다 과거 아즈텍인들의 식단이 훨씬 더 풍족했다'는 주장까지 언급하는 학자가 있을 정도이다.
결과적으로, 테노치티틀란은 틀락스칼텍을 비롯한 주변 부족들에게 방대한 양의 공물을 빨아들이는 체제를 갖췄음에도 식료품보다는 공예품과 사치품을 위주로 요구한 걸 보면, 영양 측면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으며 '''고기 공급과 관계 없이 식인을 즐긴 것은 맞다.'''
메소아메리카에 대두는 없었지만, '''신대륙 원산인 강낭콩[15],테라피콩,적화 강낭콩등이 존재했고, 이를 주곡 작물중에 하나로 보편적으로 섭취하였다.''' 지력 회복 효능은 대두보단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기후에 따라서 현대에도 대두보다 선호되기도 한다.
도리어 유럽은 아메리카 토산 강낭콩을 지력 회복 작물로 도입해서 서구인에게 콩이란 곧 강낭콩으로 명명하게 된다. 그냥 bean 으로 표기하면 보통 강낭콩을 가리키고, 다른 콩류와 구분하기 위해서는 common bean 이라고 부른다. 아메리카가 유럽으로부터 지력회복작물을 들여온게 아니라 정 반대로 유럽을 강낭콩으로 포밍했단 말이다.
당연히 '''축산업보다 강낭콩 재배가 에너지 효율이든 단위면적당 생산량이든, 공급의 안정성이든 모든 부분에서 효율적이다.''' 이러한 강낭콩 재배로 아즈텍인 더 나아가 메소아메리카인들은 '''단백질 부족 현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5.2.1.3. 재반론

환경에 따른 식인론을 지지하는 이들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몬텔라노의 논문(1978)보다 나중에 낸 저서인 "음식문화의 수수께끼(1985)"에서 몬텔라노가 제시한 위 반론들을 하나하나 반박하고 있다. 그 논지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아즈텍인들이 칠면조로 단백질을 얻으려면 사료가 고기로 전환되면서 나오는 90%의 손실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아즈텍에 잉여곡물이 충분했는가?
  • 개한테 콩과 옥수수를 먹여서 살을 찌우는 건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다.
  • 몬텔라노와 다른 학자가 수집한 아즈텍인들의 식품 목록을 보면, 주식인 콩과 옥수수, 채소, 과일 외에 개-칠면조와 수많은 야생동물이 있다. 사슴, 아르마딜로, 물새, 들새, 물고기, 방울뱀, 쥐, 벌레, 물파리가 호수 위에 낳은 알까지 걷어서 먹었다. 몬텔라노는 "이렇게 다양한 대체식품이 있으니 인육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고 말하지만, 나(마빈 해리스)는 "이렇게 다양한 대체식품을 먹는 사람들이 인육이라고 못 먹겠는가?"라고 묻겠다. 그리고 물파리 알까지 걷어먹어야 했다는 건 그만큼 단백질이 부족했다는 증명이다.
  • 위 주장을 인정한다고 해도, 테노치티틀란에서 반경 20마일 안에 거주하는 백만 명에게 분배할 수 있는 짐승고기와 생선, 새의 고기는 1년에 1인당 몇 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 구세계의 지배층은 포로를 살려두고 일[16]을 시킴으로서 고기를 더 생산할 수 있었지만 아즈텍에서는 살아있는 포로를 활용해서 고기를 생산할 수 없었다.
  • 정복한 지방에서 잉여곡물을 가져와 더 많은 칠면조를 키우려고 해도 곡물을 운반할 수단이 사람의 등짐밖에 없다. 일꾼이 왕복하면서 먹는 곡물의 양이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하는 양보다 더 많다.
  • 옥수수 수확철에 많은 포로를 잡아먹은 건, 그때가 "식량이 가장 부족한 시기"가 아니라 "희생물을 살찌우기 좋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수확한 옥수수를 사료로 삼아서 잡아먹을 포로를 가축처럼 살찌운 거다. 대부분의 희생물은 전쟁포로인데, 배고픈 계절은 멕시코 분지의 겨울 우기이고 수확기는 건기이다. 전쟁은 당연히 우기가 아니라 건기에 하는 행사다. 건기에 적지에 쳐들어가면 잘 익은 적의 곡물로 군량을 보급하고 빼앗은 곡물을 포로에게 먹이고 포로에게 등짐을 지워 운반해온 뒤 포로를 잡아먹을 수 있다.
  • 결론 : 아즈텍인들의 식인은 단백질 부족이 원인인 것이 맞으며, 포로를 살려서 노예로 삼는 것보다 죽여서 고기로 먹는 쪽이 정치/경제적으로 더 이익이 되었다.
아즈텍에서 식인이 사라진 것은 유럽에서 전래된 '''돼지'''가 완벽하게 인육을 대체한 이후 부터이며, 또한 만주가 원산지인 대두가 유입되어 옥수수 농경으로 인해 토질에서 고갈되는 질소를 보충해주면서 옥수수 농사 연작이 가능해지고 나서 남미인들의 고질적인 식량부족도 혁신적으로 개선되었다.

5.2.2. 의례의 과정


인신공양을 하는 종교적 의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사제들이 제단에 모이고 제물들은 벌거벗겨진 상태에서 포박을 당한 채 기다린다. 한 명 한 명 제단으로 끌고 가 눕힌 후, 사제는 흑요석으로 만든 칼로 정확하게 제물의 심장이 있는 쪽 가슴을 오려내고 심장을 도려낸다. 그리고 그렇게 제단에서 심장을 먼저 태운 다음 죽은 제물은 따로 모아서 교수형 자세로 불에 구워졌다.
이 의식은 아무 때나 하는 건 아니고 태양신과 관련된 시기에 적합한 여성들을 추려내어 의식을 진행했다. 이 의식에 사용되는 여성은 태양신께 자신을 바치는 행위로써 의식이 끝나면 여신으로 추앙받았다. 잡아온 적의 전사를 잡아먹거나, 제물로 삼는 일도 꽤 흔했다.[17] 개중에는 짐승처럼 다리나 목에 줄을 묶어서 기둥에 매어놓고는 실력 좋은 전사와 죽을 때까지 싸우게 만드는 것도 있었는데, 이때 제물이 되는 전사에게는 방어용으로 비루한 무기만 지급해주고는 흑요석 칼날이 달린 곤봉과 갑옷으로 철통무장을 한 전사와 싸우라고 했다.
의식을 행하는 방법으로는 대표적으로 5가지가 있는데, 평균적으로 심장을 꺼내 불에 굽는 것과 여성의 경우는 제단에 눕혀 목을 치는 방법이 사용됐다. 이외에도 화살로 벌집을 만들거나 불에 굽거나, 맨몸에 칼 하나만 주고 전사와 겨루게 하는 등의 방법이 있었는데, 이는 제물이 피를 많이 흘릴수록 태양신에게서 더욱 큰 축복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왕의 생일이라든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거나 국경일로 삼을 만한 기념일에도 수많은 사람이 제단을 지났다. 특히 테노치티틀란에 처음으로 신전을 세운 날에는 그날 당일에만 3만 명을 제물로 바쳤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이나 디에고 두란 수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티소크 황제의 2만 처형이나 1487년 피라미드 완공 기념식에서의 8만 연속 처형도 있다. 티소크의 2만 처형 당시엔 시체를 다 감당하지 못해서 늪지에다 아무렇게나 버렸고, 8만 처형 당시엔 도시 밖까지 길게 줄이 늘어져 자기 차례만을 기다렸다.

5.2.3. 통치 수단


아즈텍의 인신공양 역시 통치 수단의 일종이었다. 우리가 아는 익숙한 아즈텍 신화에서는 태양을 뜨게 하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쳐야만 한다며 매일 인신공양을 하는 명분을 설명했다. 그래서 문화상대주의적인 관점으로 유럽의 십자군 전쟁이라든가. 마녀사냥이라든가, 심지어 근현대의 이념 이데올로기로 인한 대량학살을 들고 와서 '아즈텍인들은 이 교리를 진지하게 믿어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런 행위를 저지른 거지 다른 문명권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하는 논지를 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태양을 움직이기 위해 매일매일 신선한 심장을 바친다는 신화'는 제사장 틀라카엘렐이 제국 통치에 적합한 극한의 효율을 따져서 이 아즈텍 종교를 손봐서 만들었다. 그 전에는 멕시코에 태양에게 인신공양으로 에너지를 불어넣어야 태양이 움직인다는 설은 없었다. 몬테수마 1세의 아버지인 이츠코아틀 틀라토아니 시절에 침투민족인 아즈텍인들이 피지배민들을 지배할 명분으로 대대적인 신화 만들기에 나서며 아즈텍 종교가 정립됐다. 또한 당시 몬테수마 1세의 재위기는 자연재해가 빈번하던 흉흉한 시기로 적절한 인구수 조절로 왕족 권력의 안정적인 통치를 꿰하는 일면도 있었다. 이 시기 전까지만 해도 멕시카 일족이라 해서 인신공양이 특별히 심하지 않았으며 기존 마야나 주변 부족들처럼 전쟁에서 패배한 쪽의 왕족이나 전사들만 희생제물로 바치거나 왕족이 자해를 하여 바치는 선에서 그쳤었다.
다름이 아니라 아즈텍이 패권을 잡기 전 테오티우아칸 등의 잘나가던 선진문명들도 갑작스러운 몰락을 겪으며 쇠락한 사례가 굉장히 많은데 그 배경은 신대륙 특유의 재해가 빈번한 환경과 그에 취약한 이들 주변 문명사회의 약점 때문이었다. 이런 혼란 와중에는 하극상이 굉장히 자주 일어났는데 주로 지배를 받던 평민층이 들고 일어나 지배자층들을 공격해 쫓아내고 다시 사람들이 흩어졌다가 모이길 반복하는 역사적 흔적이 거의 동일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서 자연재해란 곧 지배계층의 위협과도 직결되었기에 이런 군중의 불만을 조절하는 차원에서라도 제물을 적나라하게 바치는 공포정치를 통해 아즈텍 지배층은 자신들의 지배를 굳건히 하려했던 것이다.
이츠코아틀과 틀라카엘렐은 아즈텍 종교를 재편성하며 아즈텍인이 기존에 쓰던 경전 및 서적과 피지배인들의 서적을 이단으로 규정했고, 아즈텍의 책[18]이든 피지배인의 책이든 기존의 책들을 죄다 검열해 새로 정립된 아즈텍 종교에 맞게 바꾸거나 없앴다. 이들은 메소아메리카 피정복민의 신화와 아즈텍인들의 고유신앙을 버무려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는데, 그런다고 사람의 사고가 바로 바뀔 수는 없는지라 기존의 역사서와 종교책들은 소각시켜버리는 일을 직접 겪어본 사람들과 이를 구전으로 들어서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생생이 살아 숨쉬며 길거리마다 널려있었고 비록 기존의 문화는 온전히 전해지지 못했지만 이러한 탄압이 벌어졌다는 역사는 전해지게 되었다.
즉 이들이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살육하고 인신공양하며 식인했던 것은 종교 권력+세속 권력으로 저지른 통치 행위, 유희 행위로서 강인한 전사를 바쳐서 제국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대신 식민부족을 바쳐 저항력을 약화시키고, 각 식민부족마다 제물 할당량을 정해서 서로서로 싸우도록 유도해 분열시키고, 아이들은 틀랄록이 좋아하니 바쳐 자연재해가 빈번했던 환경에서 인구조절도 하는 무시무시하게 정교하고 사악한 설계로 짜여진 국가 시스템의 중추였으며, 당대 주변 부족민들의 증오를 썩어넘치도록 받았다. 아즈텍의 정치사회문화 자체에서 꽃 전쟁과 이민족에 대한 인신공양과 식인은 재미있고 즐거운 문화 컨텐츠이자 정교한 국가 시스템이였던 것이다.
그 부작용으로 휘하 부족들의 원한을 어마어마하게 사긴 했지만 아즈텍 제국은 각 부족의 지도부를 회유하고 교육해 부족보다는 아즈텍에 소속감을 느끼도록 유도해 반란을 억제하였다. 이들은 사실상 아즈텍의 귀족이나 다름없었고 본인들 또한 그렇게 생각하였기에 꽃 전쟁에서 실제로 포로로 잡히고 죽어나가는 부족민들과는 단절되어있었으며, 아즈텍에 반기를 들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한 부족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해도 지휘 경험이 있는 수뇌부는 친아즈텍파고 다른 부족과 손을 잡으려고 해도 수뇌부간의 커넥션 없이 구심점이 되기는 요원했던 것이다. 물론 제국 휘하가 아닌 틀라스칼텍인에게는 생으로 증오를 받았지만 애시당초 아즈텍의 군사력은 압도적이었고 그들은 전쟁이 나면 '수확'하기 위한 목장이었으니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아즈텍은 톨텍도 마야도 이루어내지 못한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상당히 잘 짜여져있었기에 천재지변이나 지나친 군사국가화 등의 요인으로 아즈텍 제국이 약화되지 않는 이상 제국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뿐이었다. 그러나 대륙 내에서는 있을 수 없던 변수인 스페인 침략자들이 나타나 이들을 규합하면서 그 사이클은 깨져버렸고 멸망으로 이어졌다.

5.2.4. 소멸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걸 직접 목도한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과 선교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일평생을 가톨릭에 충실하며 국가를 위해 살아온 그들의 눈에는 대단히 충격적이었고, 야만 그 자체였다. 게다가 남편을 따라 멕시코에 왔던 스페인 출신의 여성들이 아즈텍 인들에게 사로 잡혀 인신공양되고 식인까지 되는 일까지 있었으니 아즈텍의 풍습이 당시 스페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을리는 두말하면 입 아플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로마 제국에 정복당한 이후로는 인신공양 풍습이 사라졌고[19] 중국진나라 이후 사라진 풍습이었다. 순장 풍습은 청나라 초까지 지속되었지만, 하늘에 제의를 올릴 때 사람을 바치는 것과는 별개이고 한나라 성립 이후 유교가 보편화되면서 제아무리 전제군주라 하더라도 순장을 강행하는 것은 신하들의 큰 반발을 부를 것을 각오해야 했기에 대부분 왕이 죽기 직전에야 명령을 내리곤 했다. 그나마도 후계자가 정치적 부담을 지지 않기 위해 선왕의 순장요구를 거부하는 일도 많았다. 로마 제국을 거쳐 기독교가 보편화된 이후 사라졌으며, 이는 그 어떠한 종교가 보더라도 사라져야 할 문화였다. 일례로 스페인에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스페인 전역을 정복한 이후 완전히 사라졌으니 말 다한 셈. 에르난 코르테스와 선교사들이 아즈텍 원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킬 필요성을 느낄 정도였다.
코르테스는 아즈텍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물러나던 도중 대대적인 인신공양 제의를 보고 경악해 대포로 제단을 부수고 석궁으로 사제를 저격하고 깽판을 친 뒤에 제물로 죽음을 기다리던 이들을 구출했다. 이때 목숨을 건진 자들이 1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대대적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이때, 구출된 자들로부터 사연을 들은 코르테스 일행들은 인신공양이 벌어진 이유가 말/소/돼지/양 같은 대형 가축의 부재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었고, 코르테스가 사비를 털어 일단 사육 난이도가 낮고 번식율이 엄청 높은 돼지[20]를 구해서 키우게 한다. 잠깐 스페인에 갔다 온 사이 돼지는 엄청나게 불어난 상태였다고. 스페인의 멕시코 일대 정복 이후 피의 의식을 금지하고 인신공양 풍습은 이후 가축들이 대거 들어온 뒤에 사라진다.
아즈텍은 스페인인들이 들어와서 멸망할 때가 되어서야 주변 민족에게 회유책을 썼지만, 수백여 년 동안 폭압을 저지른 식인종들에게 그런 자비를 베풀 주변 민족은 이미 없었다. 테노치티틀란의 함락 당시, 스페인의 원주민 동맹군 15만 명은 코르테스와 스페인인들이 학살을 말렸음에도 지난 수백여 년의 보복으로 저항하는 아즈텍인들을 학살해버렸다.

5.3. 가톨릭으로 개종되기까지


아즈텍 제국이 정복된 이후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노력했다. 제일 먼저 틀락스칼텍의 왕과 귀족들이 세례성사를 받았으며, 에스파냐에 우호적인 원주민들이 그 뒤를 이었는데, 1540년대에 이르면 이미 250만 명 가까이 되는 원주민들이 가톨릭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가톨릭 전승에 의하면 이 시기에 '''과달루페의 성모가 발현'''했다고 한다. 교회 측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1531년 12월 9일 이른 아침, 아즈텍 농부인 성 후안 디에고 쿠아우틀라토아친(San Juan Diego - Cuauhtlatoatzin)이 미사에 참례하려고 테페약 언덕 꼭대기를 넘고 있을 때, 신비롭고 찬란한 빛을 내는 구름 속에 푸른 망토를 입은 성모 마리아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는 그에게 나우아틀어로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믿으며, 내 도움을 요청하는 지상의 모든 백성의 자비로운 어머니이다. 나는 그들의 비탄의 소리를 듣고 있으며 그들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위로하고 있다. 나는 너희가 나의 사랑과 연민, 구원 그리고 보호를 증거로 제시하는 표시로 내가 발현한 이곳에 성당을 세우길 바라고 있다. 그러니 너는 멕시코 주교관에 가서 이곳에 나를 위한 성당을 세우는 것이 내 소망임을 전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성모 마리아는, '''자신이 발현한 장소에 성당을 세워 자신을 공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성모 마리아를 보고 놀란 쿠아우틀라토아친은 그대로 주교관으로 달려가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보고했지만, 스페인 카스티야 출신의 후안 데 수마라가 주교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테페약 언덕은 과거 아즈텍인의 신이었던 토난친 여신의 성소였기 때문이다. 수마라가 주교는 쿠아우틀라토아친에게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는 기적의 증거를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쿠아우틀라토아친이 주교를 만나고 나서 테페약 언덕을 지났을 때, 그는 다시 성모 마리아와 마주쳤다. 그는 성모 마리아에게 주교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는데, 그러자 성모 마리아는 '''"언덕 위에 장미꽃이 피어 있으니, 꺾어다가 주교에게 보여 주라"'''고 말한다.
문제는 테페약 언덕 꼭대기가 이 필 수 없는 '''험한 바위 언덕'''이었던 데다가, 당시 계절도 꽃이 필 수 없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의 말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쿠아우틀라토아친은 그곳에서 (그 지역 자생종이 아닌 수마라가 주교의 고향인) 카스티야산 장미들이 만발한 것을 목격하였고, 꽃들을 채집하여 자신의 망토로 쌌다. 그러고는 서둘러 내려와 성모 마리아에게 다시 갔다. 성모 마리아는 그가 가지고 온 장미들을 보고 손수 그의 망토에 가지런히 다시 놓아주었다. 뒤이어 그녀는 쿠아우틀라토아친에게 말했다.

후안, 이 여러 가지 장미송이들이 네가 주교에게 가져가야 할 표적이다. 너는 주교에게 이것들을 가져가서 내 소망을 깨닫도록 하고, 내가 요청한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내 이름을 들어 말하도록 하여라. 너는 나의 심부름꾼으로서 신념을 지니고 행동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나는 너의 망토에 싸인 꽃송이들을 주교 앞에 나아갈 때까지 풀어 보이지 않을 것을 엄격하게 명령한다. 그것들을 조심해서 가져가도록 하여라. 네가 그에게 모든 사실을 설명할 때, 내가 너를 산 위로 보냈으며 거기에서 이 꽃들을 발견했다고 전하여라. 그렇게 한다면 너는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며 내가 요구한 성당이 세워지는 날까지 너는 그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주교는 쿠아우틀라토아친이 가져온 장미꽃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그런데 그때 신기하게도 '''장미꽃들이 마루 바닥에 폭포처럼 흩뿌려지면서,'''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 후안 디에고의 망토에도 새겨져 나타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를 본 주교는 그 경이로움에 놀라 그 즉시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 새겨진 망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성모 마리아의 요청을 믿지 않고 무시한 죄를 지은 자신에 대해 용서의 기도를 바쳤다. 성모가 바란대로 성당이 그대로 세워졌음은 물론이다. 이 성당이 과거 아즈텍인이 제례를 행하던 피라미드 바로 위에 세워지긴 했다.
이후 후안 디에고로 개명한 쿠아우틀라토아친은, 테페약 언덕에 세워진 작은 성당을 지키면서 자신이 겪은 기적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실제로 많은 원주민들이 개종했는데, 사실 다신교적인 신앙을 갖고 있던 원주민들은 하느님[21]도 우이칠로포치틀리, 토난친, 케찰코아틀 같은 아스텍의 전통적인 신과 동급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 때문에 전통 신에게 지내는 제사 의식 등이 여전히 아스텍인의 종교관에 남아 있었으며, 멕시코나 중앙아메리카 지역의 예수상이 그토록 피칠갑(?)을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멕시코인 개종자는 약 900만 명이었는데, 성모 발현의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당시 원주민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얻은 건 사실로 보인다. 교황청에서 인정한 첫 번째 성모 발현인 과달루페의 성모에 대해 역대 교황들은 성모 신심을 바치며 공경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0년 5월 6일2002년 7월 31일 과달루페의 성모 성지를 방문하고 시복식시성식을 집전하면서 후안 디에고를 복자품과 성인품에 올렸다. 시복식 영상, 시성식 영상
스페인 선교사들은 또한 '''인신공양'''으로써 태양이 뜨도록 유지한다는 원주민들의 신앙관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매일매일 피를 흘리시고, 여러분들이 매일매일 그분의 살을 먹으니'''[22] 태양이 멈출 일은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으며, 실제로 인신공양을 하지 않고도 태양이 뜨는 것을 본 원주민들이 자연스럽게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와 관련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초기 포교 시절에 원주민들이 세례성사를 매우 영험한 주술 정도로 여기고 세례성사를 한 번만이 아니라 수 차례 - 심하면 몇십 차례도 받으려고 했다는 기록은 분명 있다.[23]

5.4. 꽃 전쟁


아즈텍의 전쟁 방식으로 대표적인 것은 '꽃 전쟁'이다. 꽃 전쟁은 이후 서구 역사가가 붙인 이름인데, 서로를 죽이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포로로 잡기 위한 전쟁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아름다운 이름과는 반대로 실상은 상당히 추악한데, 이 전쟁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 이후에 인신공양을 위한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즈텍 제국은 초기에 제국을 건설하면서 저항하는 여러 도시민들을 완전히 섬멸시키고 도시 자체를 말살시키는 일반적인 '전멸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멸 전쟁은 당연히 아즈텍인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우세한 세력을 중심으로 한 봉건제도로 뭉치거나, 동아시아식 조공의 형태로 충돌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갈만 하지만, 아래에서 서술할 인육 문제 때문에 평화적인 외교 관계가 성립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아즈텍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쟁으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해야 했지만, 대규모 원정은 부담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담이 적게 드는 의례화된 전쟁으로 아즈텍 제국의 힘을 과시하면서 동시에 인육도 확보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그것이 바로 '꽃 전쟁'이다. 아즈텍 제국은 이 꽃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상당히 독특한 제도(?)를 두었다. 귀족이나 평민 계층에서 상업에 종사하며 주변 지리에 정통한 자를 뽑아서 일종의 외교관인 '포치테카'(pochteca)를 만들었다.
이 포치테카들은 아즈텍의 속주나 주변국에 일종의 외교 사절로 파견되어 일하였으나, 실상은 아즈텍 제국을 위한 스파이 활동을 수행하였다. 포치테카들은 적당한 시기에 속주와 주변국들에서 아즈텍 제국에 위기가 닥쳤다는 거짓 소문이나, 반 아즈텍 주의를 부추기는 선전 활동을 해서 그들이 전쟁에 나서도록 만들었다.[24] 그렇게 전쟁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아즈텍의 압도적인 군대에 밀려 포로로 잡혔고, 그대로 인신공양을 위한 제물이 되었다.

6. 경제


지역마다 다른 통화가 사용되었다. 물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본 화폐 단위는 카카오이다.
카카오는 밀랍이나 점토, 야생 카카오 아종 등으로 위조화폐를 만들 정도로 귀중하였다. 요즘의 물가 가치로 환산해보면 편차가 꽤 심하다. 현대의 인신매매는 범죄 행위이므로 소녀를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고, 칠면조 알을 기준으로 하면 작은 토끼 1마리에 2만 원, 칠면조 알은 2천 원, 소녀는 40만 원, 0.62kg의 금은 20만 원이 되는데, 반면 금을 기준으로 하면 작은 토끼 1마리에 500만원, 칠면조 알은 50만원, 소녀는 8,000만원, 0.62kg의 금은 4,000만원인 셈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과거 금값에 비해 지금 금값이 훨씬 비쌀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금의 외양만 이용해서 사치품, 치장, 제사 같은 경우에만 활용되었으나, 오늘날엔 금의 성질을 보고 온갖 전자 제품에 대부분 금이 소량이라도 들어간다. 거기다 옛날부터 금은 계속해서 채취해왔기 때문에 공급이 줄어든 것도 한 몫 한다. 게다가 멕시코 지역에서는 그때 당시에 금광이 많았다.
더군다나 신대륙 문명에서는 구대륙처럼 금이나 은이 화폐로 쓰인 사례가 전무했다. 그나마 잉카 문명에서는 금은 태양과 태양신을 상징하는 금속, 은은 달과 달의 신을 상징하는 금속이여서 종교적 측면에서 매우 중시해서 특권계층은 온갖 금은 장신구들을 두르면서 왕과 귀족임을 알리는 증표로 쓰이는 등 계급 체계에 깊이 관여한 매우 중대하게 여겨지던 금속이었으나, 메소아메리카에서는 그냥 자연에 있는 금속 1이었을 뿐이다. 메소아메리카에서 구대륙 문명의 금은의 위상을 차지한 것은 비취석과 터키석, 케찰새의 깃털이였다. 결국 당시 메소아메리카의 금의 가치를 현재 금 시세를 대입하는 것은 넌센스라는 것이다. 이는 아즈텍 문명에서 금속을 제련하는 기술이 전무했던 것과 관련이 깊다. 아무리 금이 황홀하게 빛난다고 한들, 캐내지 못하면 그냥 빛나는 돌덩어리 A에 불과할 뿐이다. 잉카인은 고산지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해 금이나 은을 제련할 정도의 온도를 만들어낼 수 있었기에, 진작부터 금과 은으로 온갖 장신구를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저지대에서 살았던 아즈텍인들이 이런 기술을 개발해내기는 무리였다.
다른 화폐로는 카치틀리(quachtli)라고 불리는 면직물이 있었으며, 테노치티틀란의 일반인들은 1년에 20개의 면직물을 소비할 여력을 가지고 있었다. 카치틀리 1필은 카카오 65개의 가치가 있었다.
아즈텍인들은 시장(티안키스)에 가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매일 6만 명이 틀라텔롤코라는 곳의 큰 시장에 갔는데, 한 스페인의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시장에 가는 것과 천당에 가는 것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대개의 아즈텍 부인들은 천당을 고른다. 그러나 먼저 천당에서 시장에 갈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강을 통해서 물자가 오가고 상인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했으며, 아즈텍의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5일장이 섰다. 그만큼 귀족들과 왕족의 소비력이 막강했으며, 새의 깃털과 재규어의 가죽, 카카오와 황금, 해안지역에서 가져온 굴, 거북, 가재 등 온갖 물자들이 몰려들었으며 밀수가 이루어졌다.
아즈텍에 바퀴가 있었는지 여부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거리지만, 대체로 바퀴가 물류 수송에 커다란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수도 테노치티틀란부터가 운하도시였고, 물류에서 카누가 차지하는 부분은 현대의 자동차 그 이상이었다. 아즈텍에서는 상인의 카누를 부수는 것은 전쟁을 의미하는 행위였다. 실제로 이 지역의 바퀴 유물도 완구같은 형태로만 발견되고 있다. 아즈텍 문명이 세계사적 관점에서 중세의 문명이 아닌 원시/고대의 문명 수준으로 여겨지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퀴 사용의 유무다.

7. 사회 구조



7.1. 귀족 계급 / 피필틴


서양 문명에서 귀족으로 불리는 계층인 지도자 층을 아즈텍에선 '피필틴'(Pipiltin)으로 불렀다. 이들의 지위는 상속되며 힌두교브라만 계급처럼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고위직을 담당했으며 공무원, 제사장, 대상인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유럽의 대학과 같은 고등 교육기관인 '칼메칵'(calmecac)을 운용하였으며 이곳에서 제례, 전쟁 수행, 행정 기술과 같은 실무 능력과 고위층으로서 요구되는 사교 예절에 대해서 배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교육기관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피필틴들뿐이었다.
일본의 다이묘처럼 피필틴들은 행정 업무에 대한 보상으로 일정한 크기의 봉토를 하사받았는데, 이를 '필랄리'(pillali)라고 불렀다. 이 봉토는 아즈텍 사회에서 실질적인 농노 계층인 '마예케'(mayeque)들이 운영하였다. 마지막으로 피필틴들이 정부로부터 받는 가장 큰 특권은 바로 조세의 완전 면제였다.

7.2. 평민 계급 / 마세우알틴


사회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 장인 그리고 소수의 상인들로 구성된 이들을 마세우알틴(macehualtin)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자신들의 소득의 일부를 국가에게 바쳐야 하는 의무를 지닌 일종의 신민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주로 마을 규모의 공동체 경제 단위를 구성하며 살았는데 이를 '칼풀리'라고 불렀다. 칼풀리는 일종의 지연과 혈연으로 묶인 집단을 말하며 각 칼풀리는 공동으로 땅을 소유하고 이를 후대의 구성원에게 물려주었다.
이런 칼풀리를 운영하기 위한 마세우알틴 계급의 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이 따로 존재하였는데, 이를 '텔포치칼리'(telpochcalli)라고 불렀다. 이 교육기관은 기초적인 종교 신앙과 전쟁에서 징집병의 역할을 수행할 마세우알틴들의 전투 교육, 그리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전수했다.

7.2.1. 테쿠틀리, 테칼레케, 칼풀레케


마세우알틴들의 사회체계를 결정하는 칼풀리는 그들 사이에서 지배와 피지배 계층을 나누기도 하였다. 칼풀리를 지도하고 법적, 경제적 책임을 지는 이들을 '테쿠틀리'(tecuhtli)[25]라고 불렀으며, 칼풀리 내에서 나오는 일정량의 생산물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마세우알틴들은 이 테쿠틀리를 통해서 중앙에 세를 납부하였는데, 자신이 속한 칼풀리에게 세수를 바치는 이들은 '테칼레케'(tecaleque)라고 불렸으며 틀라토아니(아즈텍 사회의 종교체계)에게 세수를 답부하는 이들은 '칼풀레케'(calpuleque)라고 불렀다. 칼풀리라고도 불리는 이 사회 체계는 아즈텍 사회 체계 전체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7.3. 노예 계급 / 틀라코틴, 마예케


노예로 번역되는 아즈텍의 노예 계급을 틀라코틴, 또는 마예케라고 불렀다. 이들은 정복한 도시의 공물로서 끌려오거나 채무관계가 얽혀있는 경우 빚을 갚을 때까지 노예로 삼았는데, 일을 태만히 하면 종교적 제물 혹은 식용으로 팔아 버리기도 했다.
자유민의 경우 채무를 불이행하거나 죄를 지을 경우, 일차적으로 벌금을 납부하였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노예 신분으로 편입되었다. 만약 여기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제물로 바쳐졌다. 하지만 노예들도 (성실하게 살 경우에 한해서지만) 개인의 일상생활에는 전혀 제약을 받지 않았으며, 결혼하거나 돈을 모아서 스스로 자유를 사는 것도 가능했다. 심지어 노예가 노예를 소유할 수도 있었다.[26] 무엇보다도 주인이 자신을 학대한다고 느꼈을 경우 지역 내 특정 신전으로 도망치면 그 자리에서 해방을 인정받을 수도 있었다 한다.

7.4. 계급 간의 사회 이동


아즈텍의 계급 사회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근대적인 국가들의 딱딱한 계급 사회와는 매우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아즈텍의 계급은 고정된 것이 아닌 자유롭게(물론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넘나들 수 있었으며, 이 벽을 가장 쉽게 넘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전쟁이었다[27].
사회 지도층이자 귀족인 피필틴의 경우에는 전공을 세우거나 포로를 잡아오는 수에 따라서 더 많은 봉토를 선사받았다(이는 아래에 설명된 꽃 전쟁과도 관련이 있다.). 평민 계급인 마세우알틴도 피필틴들의 무공에 버금가는 능력을 보여주면 피필틴의 자리에도 오를 수 있었으며, 그의 자녀도 피필틴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노예 신분인 틀라코틴의 경우에는 전투에 나가서 공을 세우면 자유민이 되었는데, 이를 재규어 전사독수리 전사라 불렀다. 오늘날로 따지면 장교에 해당하는 자유민이었다. 다만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재규어 전사와 독수리 전사는 큰 차이가 있었다. 재규어 전사는 전술한 대로 평민이 적을 포로로 4~8명 정도를 잡으면 될 수 있는데 반해 독수리 전사는 귀족 계급이었다. 현재로 비유하자면 위관과 영관 수준의 계급차이가 존재한다. 또한 재규어 전사나 독수리 전사는 재규어 가죽이나 독수리 가죽으로 만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즈텍인들은 동물 가죽옷은 야만인들이나 입는다고 생각해서 멸시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은 누비옷에 가지각색의 깃털을 붙여서 문양을 꾸민 것이다. 애초에 그 수많은 병력에게 입혀야 되는데 재규어를 잡는 게 쉬울 리도 없고.
아즈텍 사회의 법률은 굉장히 엄격하였고, 계급 간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진행되었다. 피필틴의 경우에는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처벌을 통해서 마세우알틴으로 강등될 수 있었으며, 심각한 경우에는 틀라코틴으로 더 강등시키거나 아예 제물로 써버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러한 계급 간 이동은 다른 메소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다른 아즈텍 사회의 경쟁력 중 하나였으나, 사실상의[28] 마지막 황제였던 몬테수마 2세가 제위 관련된 문제로 큰 곤혹을 치른 후 계급간 이동이 상당히 경직되었으며, 특히 재규어 전사와 독수리 전사를 폐지하면서 국방력에 심각한 문제를 안기게 되었다.

7.5. 역대 황제




7.6. 기타


인신공양, 식인 등의 야만적인 풍습이 있었던 국가임에도 의외로 장애인들에 대한 대우는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

8. 스페인에게 정복된 이유


왜 이 거대한 제국이 그리도 쉽게 망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스페인의 로 대표되는 무력의 기술차와 주변 부족들의 적의(敵意), 전염병의 유행 정도로 요약된다.

8.1. 전염병?


아즈텍이 몰락한 제일 큰 원인은 당시 스페인인들이 옮긴 전염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원두증 바이러스(monkeypox, 1511–1512), 단핵구증가증(mononucleosis, 1545–1548), 그리고 황열병(1576–1581)으로 인해 인구의 75%가 죽어나갔고, 이 당시에 입은 피해가 너무도 막심하여 스페인의 식민지배 기간 동안 백인 이주민과 흑인 노예들이 유입에도 끝내 인구는 회복되지 못했고, 멕시코의 인구가 아즈텍 시절때로 회복된것은 19세기 말의 일이었다.
당시에는 총은 강력하지만 효율적인 무기는 될 수 없었고, 숫자에서도 스페인 측이 훨씬 열세였다. 의외로 총은 등장 당시 임팩트는 컸지만, 워낙 원시적인 수준이라 별로 쓸 만한 물건은 못 되었다. 가령 총으로 무장한 정예부대인 스트렐치가 있었는데도 창기병인 윙드 후사르가 주축이 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발린 루스 차르국의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론도 있다. 아즈텍의 패배 원인으로 흔히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천연두 등의 전염병이지만, '''스페인의 정복은 '전염병 등이 문제가 될 정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한 전염병은 정복 과정에서가 아니라 정복 이후 원주민들의 저항 역량을 약화한 요인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을 케찰코아틀로 인정해서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사실과 다르다. 아즈텍인들은 스페인인들이 케찰코아틀을 자처하기 전에는 그들을 케찰코아틀로 부르지 않았고, 그 뒤에도 콩키스타도르들의 탐욕스러움 때문에 그들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곧 인식했다. 무엇보다도 아즈텍인들은 스페인인들의 공격에 맞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8.2. 전투 능력의 격차


아즈텍이 패배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전투 능력에서의 차이였다. 아즈텍은 기본적으로 석기 문명이었기 때문에 스페인과 군사 기술에 있어 크게 뒤쳐졌다. 비슷한 위치였던 잉카와 스페인의 전쟁 사례를 봐도 이 격차는 수백의 스페인 군대가 수십 배의 원주민 군대를 큰 손실 없이 물리칠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29]
여기에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아즈텍 특유의 전쟁 방식이었다. 아즈텍에도 본디 '전멸 전쟁'이라고 부르는, 상대방의 도시를 완전히 말살시키는 방식의 전쟁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전쟁은 그다지 흔하지 않았고, 주로 아즈텍의 지배 체제가 확립되기 전에 벌어졌다. 따라서 스페인인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아즈텍의 무기 체계와 전술 등은 '꽃 전쟁(La guerra de las flores)'이라고 부르는, '''상대방을 죽이기보다는 부상을 입혀서 포로로 잡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30]에 특화된 상태였다. 적을 부상 입혀서 포로로 잡으면, 그 포로를 가족처럼 잘 대해줬다고 한다. 물론 잘 대해주고 나서는 식량으로 삼았으며(...), 이는 '''꽃 전쟁 자체가 인신공양식인을 목적으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촉이 뭉툭한 화살을 쏘고, 마쿠아후이틀(Macuahuitl)이라고 불리는 석제 무기의 흑요석 날을 빼놓는 식으로 사용했다. 이유는 괜히 죽이는 것보다는 공양을 바치든 노동력을 얻든 잡아먹든 포로로 잡는 쪽이 훨씬 좋았기 때문. 이러한 이유로 아즈텍의 무기는 근접과 사격 상관없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보다는 부상을 입히는데 적합한 수준이었던지라 갑옷을 받쳐 입은 스페인인들을 상대하는 데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32]
아즈텍인들도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스페인인들과 싸울 때는 '꽃 전쟁'처럼 포로로 잡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으며, 스페인인들에게서 노획한 검을 사용하는 등의 노력은 했다.[33] 슬픔의 밤 당시에는 관습적으로 금지하던 야습으로 적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고, 그 싸움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쟁에서 적군들을 몰살시켰다. 하지만 기껏 힘들여 쓰러뜨린 스페인인을 산 채로 끌고 가려다가 도로 빼앗긴 사례가 꽤 많은 것을 보면, 전통적인 싸움 습관을 아주 버리지는 못한 듯 하다. 에르난 코르테스조차도 슬픔의 밤 당시 압도적인 수의 아즈텍 전사들과 싸우던 중에 중과부적으로 쓰러져 끌려가다가 동료 병사들에게 구출된 적이 있다.
하지만 새로운 적과의 싸움에 적합한 무기와 전술을 개발하고 훈련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특히나 아즈텍인들은 스페인 기병에 맞설 효과적인 방법을 찾지 못했으며, 게다가 지휘관이 사망하면[34]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여겨서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지곤 했다. 반면에 스페인인들은 지휘관의 사망을 대비하여 그를 대신할 부지휘관을 정해놓아 혼란에 빠지는 일이 적었다.
따라서 스페인인들은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기병 돌격 등으로 아즈텍인의 대열을 무너뜨리고 지휘관을 골라 죽임으로써 비교적 쉽게 승리를 거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오툼바 전투가 그 좋은 예다. 대열을 무너뜨릴 건덕지조차 없는 게 스페인인들은 멀리서 화승총쇠뇌저격해서 지휘관을 사살하면 그것 하나만으로 전투는 종료되었다.
반면에 코르테스 휘하의 스페인군 병사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국토 회복 운동, 즉, 무슬림들과의 오랜 전쟁을 통해서 단련된,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정예병들이었다. 스페인인들은 빠른 속도로 상대편을 죽이기에 알맞은 검과 검술을 갖추고 있었고[35] 수적 열세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실력과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당시 유럽은 아즈텍에 비해서 기술적으로 크게 앞서 있었으므로 화약이나 조립식 전함같은 무기를 동원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들은 단지 유럽에서 가져온 무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현지에서 재료를 모아서 화약과 포탄을 제조[36]했고, 호수에 띄울 조립식 전함 역시 우호적인 현지 원주민들의 협력 하에 직접 건조한 것이었다. 틀락스칼라에서는 원주민들로부터 구리를 공급받아 자체적으로 화살촉을 제작하기도 했다.[37]
또한 아즈텍에는 금속제 무기가 없었다. 그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마쿠아후이틀로, 나무 몽둥이에 날카로운 흑요석 날을 여러 개 박아넣은 무기였다. 이 무기는 금속제 갑옷이 아닌 일반적인 직물이나 가죽, 그리고 맨살에는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했으나[38] 스페인인들의 갑옷에는 의미가 없었고, 이는 다른 흑요석 무기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로 금속제 갑옷도 있을리 없었다. 아즈텍의 갑옷은 솜을 넣은 두꺼운 누비옷 수준이었고, 스페인인들도 나중에는 무거운 강철 갑옷 대신에 아즈텍 방식의 갑옷을 종종 입게 된다. 금속제 갑옷보다 가벼워서 활동하기 편한 데다가, 원주민들의 무기[39]를 막아내는 데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그것도 모자라서 스페인인들은 금속제 도검과 쇠뇌는 물론이고 심지어 화약을 사용하는 이나 대포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러니 아예 화력 면에서 아예 게임 자체가 되지 않았다.[40]
아즈텍 문명이 고대 문명 혹은 원시 석기 문명에 머물렀다는 오명이 마냥 오명만은 아니다. 15세기 당시 아프로유라시아 대륙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문명은 철을 다룰 줄 알았다. 유럽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서아시아북아프리카에서도 총포는 몰라도 철은 다 쓸 수 있었다.
철 기술의 기원은 서아시아의 고대 히타이트인들로, 각자 시기의 차이가 있지만[41]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 아프로유라시아 대륙 여기저기에 퍼져나갔는데, 아즈텍 제국의 경우에는 아메리카 대륙에 속하다 보니 해당 국가들에게 야금기술이 전파되지 못했다.

8.3. 주변 부족과의 갈등


스페인의 아즈텍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 콩키스타도르과 함께 행군하는 멕시코 원주민 부족 병사들
사실 위에 나온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즈텍의 지나친 인신공양 관습과 과도한 공물 요구 탓에 제국의 지배를 받던 '''인근 도시국가들과 원주민 부족과 아즈텍의 사이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아즈텍 이외의 다른 원주민들이 왜 코르테스에게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는지 의아해할 수 있는데, 당시 멕시코 원주민들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특히 아즈텍은 하도 깡패짓을 한 통에 주변국들의 입장에서는 그저 철천지 원수일 뿐이었다. 대략 아즈텍을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의 나치 독일, 주변 원주민들을 나치 독일군에게 학살당하던 유럽의 유대인집시인들,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을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의 미군이라고 생각하면 감이 올 것이다. 아즈텍 지도자들은 주변 부족들을 신이 내려주신 과일과 같으니 우리도 잘 즐겨야 하지만, 훗날 신들께 대접하기 위해선 멸종하지 않게 잘 관리해야 한다고 여겼다.[42] '''말 그대로 노예보다도 못한, 잡아먹을 가축 취급을 한 것이다.'''
스페인의 침공 당시에 아즈텍의 동맹 도시는 2곳이 전부였고, 나머지 중소 규모 도시들은 인신공양에 저항하던 상황이었으며, 스페인의 지원이 시작되자 아즈텍을 공격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났다. 아즈텍의 멸망은 아즈텍과 사이가 나쁜 원주민 부족들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에르난 코르테스는 이들의 관계를 이용한 것이다.
이후로 스페인 세력이 나머지 중남미 일대를 근대적 의미로의 식민지로 평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도만 보면 스페인 제국의 세력과 땅이 엄청나게 커 보이지만, 이 중 많은 지역은 일차적인 '정복'이 이루어진 다음에도 수백 년을 자기들 할 거 하면서 살았기에 제국의 통치권은 실질적으로 점과 선에 가까웠다.
중남미 토착 문명의 복속과 멸망의 초석을 놓으며 큰 흐름을 주도한 건 콩키스타도르들과 그 뒤에 있는 스페인이었지만, 전근대적 기술력의 한계로 인하여 스페인 정복 후에도 1500년대~1600년대를 통틀어 독자적인 원주민 세력의 자체적인 영향력은 상당히 유지되었고, 자연스럽게 무늬만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내에서 원주민 세력들이 따로 따로 서로 항쟁하고 경쟁하는 구도는 오래 지속됐다.
인근 원주민들의 도시국가들과 부족들은 아즈텍에게 너무나 핍박받고 살아 아즈텍이라면 치를 떨며 원수로 여겼던 터라, 스페인이 본격적으로 아즈텍 정벌에 나서자 자발적으로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꽤 큰 규모의 병력까지 제공하여 스페인군과 함께 싸웠다. 아무리 화력에 무기/갑주가 좋아도 보급 등의 문제로 스페인인들만으로는 무리 또는 굉장히 힘들었을 전쟁이 아즈텍 제국 내부의 피지배 원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원 덕택에 유리해질 수 있었다.
당시 스페인과 스페인의 경쟁 라이벌이었던 포르투갈이 식민지배했던 다른 아메리카 지역들의 경우를 보면…
  • 마야 문명이 위치한 멕시코 남부 유카탄 반도와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벨리즈 등 중앙아메리카 북부 일대의 경우 각각 도시국가와 여러 군소 부족 하나하나와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에 1세기가 넘게 스페인군의 정복 활동이 이루어져서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에 가서야 스페인에 완전히 복속되었다.
  • 스페인의 식민 진출 이전 아즈텍의 영향권에 속해있지 않았던 캘리포니아 반도, 치와와, 두랑고, 코아우일라 등 멕시코 북부 지역과 캘리포니아 주, 애리조나 주, 뉴멕시코 주, 텍사스 주 등 미국 서남부 지역들의 경우에도 마야 문명권이던 멕시코 남부 지역,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벨리즈 같은 중미 북부 지역들과 비슷하게 콩키스타도르들이 멕시코 북부 지역과 미국 서남부 일대에 분포하던 나바호, 푸에블로, 치리카와, 추마시, 후파, 포모 등 현지의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각각 정벌하는 데 많은 시간들을 쏟아야 했기에,[43] 17세기 중후반기에 와서야 스페인에게 정복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토가 방대하고 척박한 사막지대가 많아 스페인에게 정복되지 않은 원주민 부족들의 상당수가 잔존해있었으며, 이후 스페인 제국이 몰락하고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으로 영토를 팽창하던 미국과 스페인에서 독립한 옛 식민지령 국가였던 멕시코에 의해 모두 완전히 정복되었다.
  • 잉카 제국의 영역권에 속해있던 페루에콰도르, 볼리비아 등의 경우, 이전 멕시코 지역에 있던 아즈텍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침공 이전 잉카 제국과 까나리, 차차포야, 챵카족 등 피지배 원주민 부족 간의 내분과 갈등이 증폭되면서 이들 모두 남미 대륙으로 들어오던 스페인인들과 손을 잡아 잉카 제국을 공격하고,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의 함락까지는 아즈텍이 붕괴하는 시점에서 멸망했기에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잉카 멸망 이후에도 망코 잉카 유판키와 투팍 아마루와 같은 잔존 잉카 세력들이 40년 가까이 항전하다가 1572년에 스페인에게 완전히 정복, 평정되었다.
  • 파라과이의 과라니는 스페인군을 상대로 한 게릴라 방식의 반란이 끊임없이 이어져 스페인 식민 당국이 유화책으로 겨우 달랬다.
  • 승마술이나 화약 무기 등 유럽식 전쟁 방식에 빠르게 적응, 습득하고[44] 종족들 간의 결집력도 있어서 본격적으로 스페인에게 반격까지 가했던 칠레아르헨티나 남부 파타고니아 지역에서 분포하던 마푸체와 카웨스카르, 테우엘체[45] 같은 남미 원주민 부족들의 경우[46] 결국 스페인 식민제국 시절이 끝날 때까지 제대로 평정을 못하여 북부 지역은 스페인이 지배하고, 남부 지역은 원주민들이 지배하는 불완전한 상태에서 스페인의 식민통치가 이뤄지다가, 옛 식민지였던 칠레아르헨티나가 독립국가로 독립한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아르헨티나, 칠레 정부가 추진한 남부 개척 정책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었다.
  •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의 식민지이자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중 영토 면적이 가장 방대했던 브라질은 포르투갈이 그 방대한 면적의 브라질 영토를 전부 다 식민지배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식민지 개척 초기에 해안 지역만 포르투갈의 통제력이 미쳤고, 포르투갈의 통제력이 닿지 않던 서부 내륙 아마조니아 밀림 지역의 원주민 부족들 다수는 반독립 상태를 유지했다가 이후 포르투갈 식민지 중후반기에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 서부로 대거 진출하여 본격적인 서부 개척이 이뤄지고, 식민지였던 브라질이 독립국가로 독립하면서 완전히 브라질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심지어 아마조니아 지역은 인간의 접근이 어려운 정글 지대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현대에도 브라질 정부의 행정력이 닿지 못하는 곳이 많으며, 그래서 21세기에나 그 존재가 알려진 미접촉부족이 꽤 있는 편이다.
  • 베네수엘라의 경우 카라카스족의 카시쿠 과이카푸로 추장이 베네수엘라의 여러 원주민 부족들과 연합하여 밀림과 습지대가 많은 베네수엘라의 지형을 활용해 스페인군에게 항거하는 등 현지 원주민들의 저항이 끈질기게 이어졌고, 결국 1552년에 와서야 완전히 스페인에게 정벌된다.
  • 우루과이의 경우 스페인이 노리던 , , 구리 등 지하 자원들이 여타 라틴아메리카 지역들보다 빈약한 데다 식민지 개척 초기 축산업이나 어업 정도 빼고는 얻을 수 있는 산업이 별로 없어[47] 페루,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칠레 같은 다른 스페인령 남미 지역들에 비해 사실상 쓸모 없는 땅에 가까웠고, 내륙 오지에서는 차루아 같은 현지 원주민들이 극렬하게 저항했으나, 이후 스페인이 막대한 병력수를 동원한 정복 전쟁을 밀어붙여 차루아 등 현지 남미 원주민들이 차지하던 내륙지대까지 모조리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일부 잔존 부족 세력들이 스페인 식민지 시기 후반까지도 살아남아있었는데 우루과이가 독립국으로 독립한 이후에 와서야 우루과이 정부에 의해 모두 정벌되었다.
  • 아즈텍, 마야 문명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멕시코 중남부 지역에서 번성하던 다른 원주민 문명인 타라스칸(푸레페차)은 1521년 스페인의 공격으로 아즈텍이 멸망한지 9년뒤인 1530년에 스페인군에게 정복되었다.
  • 코스타리카, 파나마, 니카라과중앙아메리카 남부 지역의 국가들의 경우 자그마한 국토 면적에 비해 습하고 험한 늪지대와 밀림들이 워낙 많아 18세기까지 스페인의 직접적 통제가 먹히지 않는 내륙 지역들이 군데 군데 존재하고 있었다.
  • 남극해와 가까운 남아메리카 최남단의 티에라델푸에고 섬에서 살던 야간 족과 오나 족 같은 원주민들의 경우 한랭하고 거친 기후에 스페인조차도 쉬이 침략하지 못해 마푸체와 테우엘체 족 등 아르헨티나와 칠레 남부 본토 지역에서 살던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식민지 시절까지 사실상 반독립 지역으로 남아있었지만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의 지배에서 독립한 직후인 1860년대와 70년대를 전후하여 티에라델푸에고 섬을 칠레령과 아르헨티나령으로 분할 합병한 칠레 군와 아르헨티나 군, 백인 이주민들에 의해 모조리 학살/토벌되었다.
다른 지역 원주민들은 다 오랫동안 잘 버티거나 후일 정복되었어도 그럭저럭 버텼지만, 아즈텍만은 이러한 요인으로 말미암아 스페인 콩키스타도르 군대와 연합한 원주민 부족의 공격에 오래 버티지 못했다.
특히 제물 대상자들의 스페인 정복자들에 대한 지지가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들에게 스페인 정복자들은 자신들이 제물이 되는 것을 막아줄 유일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자기들이 제물이 될 뻔했을 때 구해준 적도 있다. 특히 그 대표격인 틀락스칼텍인들은 슬픔의 밤에서 에르난 코르테스가 탈탈 털려서 도주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코르테스를 도운 보답으로 영토 보존, 자치권, 세금 면제, 아즈텍 영토 할양 등의 혜택을 약속받았고, '''이 약속은 스페인이 물러날 때까지 지켜졌다.'''
추가로 코르테스는 끝까지 자신을 도운 틀락스칼텍인들에게 스페인에서 가져온 돼지 수십 마리를 선물로 주고 잠시 스페인에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돼지가 3만 마리에 달할 정도로 크게 증가했다. 물량과 동원 전력의 측면으로 보면 사실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은 틀락스칼텍을 주축으로 한 다양한 '''반아즈텍 동맹군'''의 업적에 가깝고, 이 중에서 스페인 세력은 분명히 주도적인 지도 세력이긴 했지만, 머릿수로는 훨씬 더 많은 반아즈텍 토착 협조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인구가 천만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테노치티틀란 공방전 자체도 스페인인들은 2천 명도 안 되는 규모였지만 텍스코코, 틀락스칼텍, 오토미 등의 원주민 동맹군이 주력이라서 이들을 합한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5만 정도 규모의 아즈텍 방어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 특히 그동안 인구는 훨씬 많았지만 구심점이 없어서 맨날 아즈텍에게 당하고만 살았던 틀락스칼텍은 '''스페인콩키스타도르'''라는 제대로 된 구심점이 생겨버리자 아주 거칠 것 없이 아즈텍을 압살해버렸다.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은 25만 명이 살던 당대의 초거대 도시로, 호수 속에 있었던 자연요새였다.[48] 게다가 테노치티틀란의 25만 명의 시민들은 유사시 전부 전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인들이 주변 원주민 도시들과 군사 협력을 하고 조립식 전함을 동원해 호수를 장악해서 한 번에 도시에 갇히게 되자, 호수는 오히려 아즈텍인들을 봉쇄하는 치명적인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텍스코코 호수는 석회수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본래는 마실 수가 없는데, 고립된 상황 속에서 이 물을 마시게 된 아즈텍인들은 병이 들어 더욱 위기에 몰렸다. 철저히 고립된 상황과 석회 성분이 많은 호수는 전염병의 대유행도 불러왔다.
결국 1521년, 스페인인들과 원주민 동맹군의 총공격에 아즈텍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그들의 주도면밀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해 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되어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이때 원주민 동맹군은 아즈텍에 대한 원한이 단단히 쌓여 있었던지라 스페인인들보다 더 잔혹하게 아즈텍인들을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아즈텍인들이 학살당한 것은 아니었다. 항복한 사람들은 코르테스의 비호 아래 용서받았고,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만 학살되었다.[49]
항복한 아즈텍인 중에서 귀족이자 아즈텍 군사령관인 틀라쿳신은 마지막까지 아즈텍의 저항을 이끌며 코르테스에 맞섰으나 아즈텍이 멸망하고 나선 바로 친스페인 인사가 되어 멕시코 시티를 재건하는 직책까지 맡았고, 이를 잘 수행해내어 스페인 총독에게서 작위를 받고 상당한 수의 하인과 땅, 고급 주택을 보유한 고위 인사가 되었다.[50] 몬테수마 2세의 딸인 아즈텍의 공주 테쿠이츠폿신은 틀리아토니의 적통인 그녀의 가치를 알아본 코르테스의 적극적인 보호로 아즈텍 황족을 말살하려 했던 원주민 동맹군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고 코르테스의 배려로 스페인인 장교 알론소 데 그라도의 아내가 되어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 현존하는 몬테수마 2세의 후손들은 모두 그녀의 후손들이며 이 가문은 1935년 멕시코 정부에서 지급을 중단할 때까지 연금을 수령받았다. 남계로 내려온 적통도 있었지만 그쪽은 1836년에 마지막 후손이 뉴올리언스에서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대가 끊기게 되었다.
잔존한 아즈텍인들은 테노치티틀란 재건과 지방 반란을 진압하는데 동원되었는데,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인 틀락스칼라의 군대와 구 아즈텍 제국군이 한 깃발 아래 싸우는 웃지 못할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촌극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며, 멕시코 제1제국 건국 이래로 테노치티틀란의 후신인 멕시코 시티와 틀락스칼텍의 후신인 틀락스칼라 주는 현재까지도 같은 멕시코 땅이다. 물론 역사가 역사인지라 두 지역 주민들은 서로를 각각 매국노의 후손과 식인종의 후손으로 욕하는 등 현재까지도 사이가 매우 나쁘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교황청에 투서를 넣어 자신과 원주민 현지처 사이에서 생긴 자식들에게 적자 지위를 부여해 재산을 상속하게 하거나,[51] 친분이 있던 원주민과의 혼혈들에게 이런저런 조치를 취했다. 그 때문에 에르난 코르테스는 현대 멕시코 메스티소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9. 이미지


고도의 천문학, 대규모 도시, 무상 의무교육[52] 등 고도의 문명을 세웠음에도 '''인신공양, 식인''' 등 상당히 야만적인 풍습들 탓에 대중문화에서는 잔혹한 야만인의 대표주자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편견이나 정복의 정당화를 제거하고 보더라도 상당 부분 사실이다.'''
한편,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명이 다들 그렇듯이 15세기에 최전성기를 누리던 아즈텍을 원시 문명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53] 물론, 당시 유럽중국 등의 유라시아 세계에 비해서 아즈텍의 문명이 낙후되어 있었지만, 호수 위에 도시를 건설하고 농사를 지어 15~30만 명을 부양했다거나, 고대 이집트 수준의 천문학 역법을 보유하고 있었다거나 하는 점에서는 원시적이라고 불릴 이유가 전혀 없다. 문화가 굉장히 야만적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긴 했지만. 또한 이러니 저러니 해도 금속문명이 없어 일상도구와 전쟁무기 양쪽 모두 '''석기'''였기 때문에 석기문명이라는 말이 완전히 틀린것은 아니다. 실제로 석기를 썼으니까 말이다.
주변국에 대한 지배 형태나 잔혹한 인신공양 등 고대 중국상나라와 유사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흔히 열대우림에서 발생한 문명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이는 인근 유카탄 반도의 마야 문명의 이미지와 섞인 것으로, 아즈텍이 존재하는 멕시코 중앙고원은 고지대 상춘 기후라서 열대우림은커녕 도리어 건조한 편이여서 초원 사이사이에 선인장이 많이 자라는 편이다. 아즈텍 건국 신화에서도 독수리가 선인장 위에 서서 뱀을 먹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54]

10. 오늘날의 평가


한때는 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아서 멸망한 선량한 제국이라는 인식이 많았으나, 발굴된 유적에서 다른 문명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대규모 인신공양과 식인 흔적이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과거보다 평가가 많이 추락했다. 오히려 침략을 주도한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러한 악습을 철폐했다는 이유로 재평가가 이뤄지기도 했을 정도.
굳이 옹호하자면 거대한 규모의 인신공양이 야만적이기는 하나, 잔혹성을 배제하고 보면 이러한 인신공양을 활용한 국가 시스템이 있었기에 아즈텍이 대제국을 이룩할 정도로 강국이 된 것 또한 사실이다. 현 멕시코에서 아즈텍은 나와틀계의 첫 통일을 이룩해낸 국가로서 중국의 진나라에 비견될 입지로 높게 평가받고 있으며, 이 때문에 멕시코 정부는 아즈텍의 후손을 표방하며 인신공양에 대해 문화상대주의를 내세우며 옹호론이 나오는 것이다. 아울러 단 한번도 통합된 정체성을 갖지 못했다가 독립 이후에야 멕시코인이라는 정체성을 조금씩 만들어가야 했던 멕시코로서는 자기들이 독립해나온 누에바에스파냐와 코르테스를 비판하고, 누에바에스파냐 이전 지역 맹주였던 아즈텍을 국가 정체성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55]
하지만 상술했듯 문화상대주의는 결코 만능이 아니며, 진나라가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행한 분서갱유가 세간의 지탄을 받듯 아즈텍의 인신공양이 비판을 피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거기에 민족자결주의 등의 사건으로 '민족'이라는 분류 개념이 강해진 현 서방에서는 부족의 구분없이 민족으로만 구분하는 일이 잦지만 나와틀계라고는 해도 피지배 부족에게 테노치티틀란은 별개의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피지배 부족 입장에서는 엄연히 침략이고 끔찍한 잔혹행위였다. 그러한 행위가 결국 적대감을 불러 멸망했으니, 아즈텍의 가혹한 지배는 국가를 강하게 만든 행위인 동시에 국가를 멸망시키는 원인이 된 셈이다.
또한, 마냥 누에바에스파냐를 절대악처럼 취급하기에는 애매한 것이 멕시코 일대가 그나마 유럽인과 원주민이 비교적 잘 융화된 지역인 것도 사실이다. 학살을 막으려고 나와틀어와 현지 풍습을 반드시 배우게 하는 등 가톨릭계의 노력에다가, 열대우림이 아닌 고원 지역이라서 스페인 정부의 지배력이 미치기 용이했기 때문에 진출 초기 성립된 엔코미엔다들이 차차 정리되며 일반적인 전근대 지배자-피지배자 관계까지 이끌어가는데 성공했다. 북미 국가들은 원주민들을 말 그대로 학살하며 나라를 세웠지만, 멕시코는 혼란스럽기는 했어도 그런 역사는 없으며 19세기에 순수 원주민 혈통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스를 배출했다.[56]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에르난 코르테스의 침략 등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아즈텍 제국이 피지배인들에게 악한 행동을 하긴 했지만 스페인인들에게 적대 행위를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코르테스의 정복 이후 아즈텍 제국이 피지배 민족들에게 행하던 비인간적인 풍습이 근절되기는 했으나, 코르테스 역시 부와 권력을 노리고 침략 행위를 벌인 콩키스타도르 중 한 명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이다. 인신공양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해당 지역 민족들을 탄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57] 따라서 아즈텍 제국의 문제점이 속속들이 발견된다 해서 코르테스를 영웅시하는 오류 역시 피해야 할 것이다.

11. 여담


세계 유일본인 아즈텍 시대 가죽 지도(11세기 제작)를 국내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내 혜정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맨눈으로 보면 그냥 가죽 덩어리 같지만 첨단 도구로 확대하면 보인다고 한다.
총, 균, 쇠에 따르면 잉카 제국과는 단순히 교류가 없는 정도를 넘어 서로의 존재조차도 몰랐다고 한다. 유라시아에서는 이미 2000년 전에 8,000km나 떨어져 있는 로마 제국한나라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교류도 있었던 것과는 대비되는 부분. 두 중남미 제국은 둘 다 해운업이 발달한 문명이 아니었고 그 사이는 빽빽한 밀림인 다리엔 갭과 높은 안데스 산맥로 막혀 있었다.[58]
다만, 총, 균, 쇠에서는 이로 인해 잉카 제국의 수레를 끌 수 있는 중남미 유일의 짐승인 라마와 아즈텍 제국의 육상 수송의 효율성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킬 수 있는 도구인 바퀴가 만나지 못했다는 점을 아쉬움을 담아 서술하고 있다. 운송수단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 역량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힘 좋은 가축과 바퀴 달린 기계, 그 둘의 조합은 당연히 패권 국가의 기반이 되는 중장거리 운송수단이다. 만약 그 두 요소가 조합될 수 있었더라면 역사는 정말 크게 변했을 것이다.
아즈텍 시대의 유물 중에는 인간의 두개골처럼 생긴 커다란 호루라기가 있는데 불면 마치 정말로 인간의 절규 같은 소리가 나와서 일명 '죽음의 호루라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호루라기의 구조가 실제 인간의 성대, 목 구조와 흡사하다는 사실이 매우 섬뜩하다. 인신공양을 수도 없이 했으니 그 과정에서 해부학적 지식도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자들은 이 유물이 스페인 정복자들의 기록에 언급된 "아즈텍인들은 싸울 때마다 요란한 비명 소리를 질렀다."라는 내용과 연관시켜, 아즈텍인들이 전쟁이나 인간 사냥을 할 때에 적들에게 겁을 주려는 목적에서 만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링크
아즈텍 왕조의 계승권은 그 왕조의 마지막 공주가 스페인인과 낳은 자손들에게 있다. 그래서 아무도 이 왕조를 부흥시키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스페인에서 공작의 대우를 받으며 지금도 가계가 이어지고 있어서, 언제고 이들을 다시 불러줄 날을 기다리고 있다.

12. 창작물에서의 등장


고도의 도시행정 능력과 25만의 인구부양 능력을 지닌 거대 문명제국이 '''전원 식인종'''이라는 충격적 사실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영화든 드라마든 연극 만화 애니메이션 등등 직접적으로 등장하거나, 아즈텍 문명을 모티브로 삼아 만들어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이 존재한다.
마야, 잉카와 함께 아메리카 지역의 원주민 문명 중에서는 익히 알려진 문명인 탓에 창작물에도 자주 등장한다.
Warhammer리자드맨들의 전체적인 문화와 모티브가 아즈텍과 마야 등 중미 문명에서 따왔다. 특히 적대적인 타 종족을 죽여 제물로 바친다는 점이 비슷하다. 다만 기술적으로 매우 열악했던 아즈텍과는 달리, 리자드맨들은 올드 원들의 피조물로 초고대문명에 가까운 기술력을 보여준다.
메이플스토리의 보스 몬스터 자쿰의 디자인은 아즈텍 문명의 유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모탈 컴뱃 X부터 등장하는 코탈 칸은 지구인이 아닌 외계 아웃월드 출신이긴 하지만, 복장과 쓰는 무기 등을 보면 아즈텍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특히 산 채로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뽑아버리는 페이탈리티는 빼박 아즈텍식 인신공양.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에는 중미의 마술 조직 '날개 달린 자의 귀환'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아즈텍 문명에 기반을 둔 마술 틀라위스칼판테쿠틀리의 창아즈텍식 피부부적 마술 등을 사용한다. 에차리쇼치틀, 텍파틀이 이 곳 출신.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 남미를 대표하여 등장하는 개근 문명. 시리즈마다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정복과 문화를 지향하는 문명으로 싸울수록 내정 보너스를 얻는 문명이다. 문명 온라인에서도 플레이 가능한 문명으로 채택되었다.
  • 문명 4 : 희생의 제단이라는 고유 건물은 법원을 대체하는데, 노예 노동 시 불만이 감소한다. 즉, 남의 땅 빼앗아서 희생의 제단 지어놓고, 주민들을 노예노동 시키는 문명.
  • 문명 5 : 적을 죽이면 문화 점수가 들어온다. 즉, 주변의 만만한 문명 하나 붙들고 계속 전쟁 상태 유지하면서 병력을 잡아먹어 문화를 충당하는 문명.
  • 문명 6 : 고유 유닛인 독수리 전사가 적을 처치하면 일정 확률로 일꾼이 되고, 문명 특성으로 일꾼을 소모하여 건설 속도를 가속시킬 수 있다. 따라서 독수리 전사로 적을 포로로 잡고 그 포로는 도시 생산에 갈아넣는 식으로 운영하게 된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에선 2편 확장팩3편 확장팩에서 플레이 가능한 문명으로 나온다. 2에서나 3에서나 보병이 주력인 문명인데 뜬금없이 거북선이 등장한다. 아즈텍이 망했을 때 거북선은 아직 발명되지도 않았었다.
크루세이더 킹즈 2의 DLC 선셋 인베이전에서는 유럽을 침략한다. 알려져 있다시피 콜럼버스 이전에 바이킹들이 아메리카를 먼저 발견했는데, 이 때 바이킹의 항해 기술이 아즈텍인들에게 노획되었다는 설정.[59] 이후 아즈텍인들은 발달된 항해 기술을 바탕으로 수백년에 걸쳐 아메리카의 패권 국가가 되고, 1200년대에 이르러 12만의 병력을 이끌고 유럽을 침략한다. 이 설정은 몽골 제국 침략으로 인해 후반부가 아주 하드코어한 동유럽, 중동 지역과 달리 서유럽은 후반부 플레이가 루즈해진다는 이유에서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나온 것이다. 한편 잉카 제국은 무슨 짓을 한 건지 13세기에 총을 개발해서 아즈텍과 대립하고 있다고 한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1부 프롤로그에서 아즈텍 제국의 어느 부족이 돌가면의 힘으로 세계정복을 꿈꾸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졌다는 언급이 나온다.
미디블2: 토탈 워에 등장. 오리지널에서는 AI 팩션이며 확장팩 킹덤즈의 아메리카 캠페인에서 쓸 수 있다. 고증대로 철제 무기와 방어구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유럽의 중보병 및 기병, 포병에게 골고루 약하다. 그러나 유럽의 병력은 반드시 원정군일 것이기 때문에 수적으로 압도할 수는 있다. 아즈텍의 병력은 부대 단위당 병사 수가 더 많으며, 사기도 높게 잡혀 있어서 병종의 우위를 누리기 힘든 시가전 등에서 유럽 군대와도 거의 대등한 싸움이 가능하다. 야전에서 아즈텍으로 유럽 군대와 야전을 벌이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에르난 코르테스가 충분히 증명하지 않았던가?[60]
스타바운드의 조류형 외계 종족 아비안은 아즈텍 제국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NPC 이름도 나와틀어로 되어 있으며, 건축 양식도 비슷하고, 종교 의식으로 인신공양을 하기도 한다.
주토피아영화에서 피닉의 밴에 그려진 그림으로 나온다. 코요테로 패러디된건 덤. #
SCP-034는 아즈텍 설화의 흑요석검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블랙 앤 화이트 2에선 그리스를 침공한다. 그 외에도 많은 속국들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야만한 아즈텍'''이라며 치를 떨며 혐오한다. 그렇지만 무력적으로 짱 세서 얌전히 닥치고 있었는데, 신이 그리스를 이끌고 와버리자 문화적이든, 군사적이든 아즈텍보다 그리스가 낫다는 판단하에 죄다 배신해버린다.

13. 아즈텍 제국 캐릭터



[1] 아즈텍 제국 언어인 나와틀어의 발음을 로마자로 옮김.[2] 우이칠로포치틀리, 케찰코아틀 등의 신들을 섬기는 다신교.[3] 명목상으로 테노치티틀란의 틀라토아니가 스페인 식민 당국의 허수아비 임금으로 1565년까지 존재했다.[4] [jéːʃkaːn̥ t͡ɬaʔtoːˈlóːjaːn̥\][5] 출처: 디에고 두란, 누에바에스파냐의 인디오 역사, Codex Chimalpahin Vol.2 등.[6] 서울의 행정구 중 하나인 금천구의 면적이 13km2 정도이다.[7] 사실 당시 대부분의 도시들이 오늘날보다 작았던 이유가 인구를 늘리고 도시 면적을 넓혀도 당시 기술수준의 한계로 식수, 위생, 식량 등 각종 제반 환경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인구 천단위 인구를 가진 소도시들이 점조직 형태로 위치해 있었다.[8] 남자 한정이면 스파르타.[9] 스파르타와 비교하자면, 둘 다 소수의 지배민족이 다수의 피지배민족을 억압적으로 누르는 군국주의적 사회라는 바탕에서 군사적 우위를 지키기 위한 정병을 키우고 지휘체계를 미리 확립하고 훈련시킨다는 동일한 목적에서 의무교육이 탄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은 육체 훈련도 중요시했지만, 타 폴리스인들에게 위명이 자자할 정도로 당대의 수학, 과학, 철학 등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 과정을 통과해야 했었던 반면에, 아즈텍은 귀족들이라도 교육과 군사 훈련의 균형이 맞지 않아서 현대의 장교 육성 교육과 비슷했다. 그래도 귀족들은 스파르타의 살인적 학대 수준의 만학능통까진 아니라도 어느 정도의 고등 교육 과정을 거쳤으나, 평민들에게는 단순히 징병 훈련소와 가사일 단련에 지나지 않았다는 한계가 명확했다.[10] 바로 위의 인신공양 사진은 성룡이 용형호제의 맨 첫 장면에서 패러디하게 된다. 다만 성룡이 깽판을 치는 바람에 인신공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고, 성룡만 공격하다가 나중에 성룡이 경비행기를 타고 도망가자 되려 그 비행기에 절을 한다.[11] 멕시코는 스페인에게서 독립할 때부터 멕시카 민족의 후예를 자처했기 때문에 마야보다는 아즈텍 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다. 물론 마야 문명도 무조건 홀대받는 것도 아니어서 치첸이트사나 툴룸 등 마야 문명 시대의 유적지들도 관광지로 개발하는 등 마야에 대한 역사 연구와 관광 상품화도 이뤄지고 있을 정도다.[12] 케찰코아틀도 아이들을 제물로 받았지만 오로지 아이들만 받는 신은 틀랄록이 유일했다.[13] 아즈텍보다 남쪽에 있는 잉카에서는 대량으로 제물을 바칠 필요가 있으면 가축인 라마알파카를 수백 마리씩 죽여서 제물로 바치곤 했다. 잉카에서는 인신공양을 해도 한두 명으로 그쳤고 그 고기를 먹지도 않았다.[14]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테치치라고 불리는 소형견종. 오늘날 치와와의 조상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반론도 만만찮다.[15] https://ko.wikipedia.org/wiki/%EA%B0%95%EB%82%AD%EC%BD%A9[16] 가축을 돌보게 하거나, 가축의 사료를 생산하게 하거나, 사냥을 하는 것.[17] 멜 깁슨이 감독을 맡은 영화 아포칼립토에서는 주인공 일행을 포함한 남성들이 인신공양의 제물이 되는 장면이 나온다. 단, 그 영화에서 묘사하는 문명은 마야 문명이다.[18] 아즈텍은 문자가 없었지만 지도의 도해처럼 기호를 그림화한 그림으로 책을 만들어서 후대에게 지식을 물려주었다.[19]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 원정 이전에 이미 인신공양 풍습은 모두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대세다. 위커맨 문서 참고.[20] 한 번 태어날 때마다 10쌍둥이는 기본이다.[21] 토착화되어 나우아틀어로 테오틀(Teōtl, '신')이라 불렸다. 스페인어하느님은 "El Dios"이라 하고, 거기에서 나우아틀화가 된 것이다.[22] 괴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가톨릭성체성사 교리에 따르면, 이 표현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오히려 성체성사를 표현하는 매우 정확하기 그지없는 표현이다. 사실 가톨릭에서 예수의 죽음은 창조주가 피조물들을 위하여 인신공양을 스스로 당하고, 창조주의 피와 살을 피조물이 뜯어먹음으로써 창조주의 초월적인 사랑이 드러난다는데 의미가 있다. 당연히 이 교리는 표현 자체부터 직관적인 면에서 원주민들의 취향에 너무나 잘 맞았다. 그리고 딱히 괴이할 것도 없는 것이, 애초에 예수가 모든 사람을 위해 제물이 되어주었으니 사람이나 동물을 바치는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는 기독교의 교리 자체가 기존 종교의 제사의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구세계(특히 유럽 문화권 주변)에도 고대에는 바알신앙 등 인신공양을 요구하는 종교가 있었고, 인신공양을 혐오한 로마 종교나 고대 유대교에서도 가축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의식은 아주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 따라서 기독교의 이같은 교리는 이전의 기존 종교에 비해 간소하고 효율적인 종교 의식을 통해 특히 가축을 제물로 바칠 경제적 여유가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크게 어필했던 것. 이와 같은 현상이 아즈텍에서도 반복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23] 가톨릭7성사세례성사견진성사는 일생에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다. 성품성사부제품, 사제품, 주교품의 3단계가 있는데, 역시 각 단계의 품은 한 번씩만 받을 수 있다. 세례성사가톨릭 신자가 되는 입문 성사로, 세례성사를 받아야 나머지 성사들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24] 현대의 화이트 요원들과도 비슷하다. 대개 대사관 같은 외교공관에서 고위급 직원으로 위장한 이들이 현대의 포치테카인 셈이다.[25] 사회적 지휘 말고도 "어르신"이라는 뜻을 가졌다. 신들의 이름에도 테쿠틀리가 붙은 경우도 많다.[26] 조선시대의 노비도 이와 유사하게 노비를 부리는 경우가 있었다.[27] 사실 근세 이전의 계급제도가 다 이런 식이었다. 조선이나 중국에서는 과거 제도를 치러서 여기서 합격한 사람들이 양반이나 신사로 불리면서 지배 계층을 형성했고,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이전의 일본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이들에게 다이묘들이 칼과 영지를 하사하고 가신으로 부리기도 했으며, 12세기 이전의 유럽기사들은 주로 부유한 평민 계층에서 충당되어 이들 중에서 공적이 큰 사람들에게 귀족 작위가 내려지는 일은 많았다. 유럽, 일본 사회와 아즈텍, 조선, 중국 간의 차이라 하면, 유럽이나 일본은 근세 이후로 이렇게 형성된 신분제가 아예 고정되어 근대까지 이어진 것이고, 아즈텍과 조선, 중국에서는 이런 식의 느슨하고 유연한 신분제도가 멸망 시까지 유지되었다는 차이가 있다.[28] 몬테수마 2세의 후임자인 쿠이틀라왁과 쿠아우테목은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죽음을 맞이했다.[29]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이세환 기자가 추정한 기술력 격차는 대략 잉카나 아즈텍이나 4,000년에서 5,000년사이로 추정하였다. 해당 방송에서 아즈텍의 기술력은 중국 상나라 시절의 수준이라고 평했다.[30] 이는 중세 유럽의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이 경우에는 몸값을 받는 것이 목적이었다.[31] 코르테스도 투석구에 맞고 두개골이 함몰되는 바람에 죽다 살아났다.[32] 훗날, 잉카 정복 때도 마찬가지로 아즈텍인들이 사용하던 투석구만은 예외였다. 고무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을 뭉쳐서 공 모양으로 만든 무기인 투석구는 충격을 전달하는 무기였기 때문에, 찌르고 베는 무기를 막는데 좋은 금속갑옷도 충격을 완벽히 막지 못하고 스페인인들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일격에 두개골을 함몰시킬 수 있을 정도로 투석구의 위력은 일반인의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31] 투석구의 크기가 상당히 컸기에, 아무리 고무라고 해도 이 정도로 강력한 건 이상하지 않다. 이런 수준이니 갑주 위에 맞는다 하더라도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오히려 아즈텍인들이 입고 다녔던 두꺼운 천옷이 투석구를 막는데는 더 유리했다.[33] 그러나 사용법을 몰라서 검을 자루에 끼워 낫처럼 만들어 대기병 병기로 사용했다.[34] 일반 병사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화려하게 치장시켜 놓았는데, 이렇게 하면 오히려 적의 눈에 띄기 쉬웠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정복한 잉카 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35] 당시 스페인 정복자들이 쓰던 검은 톨레도산 강철로 만든 예리한 검이어서 유럽 최고 품질을 자랑했다. 숙련된 검사가 사용할 경우, 단 일격에 사람의 팔이나 다리를 잘라낼 정도였다고 한다. 코르테스의 부관인 알바라도가 테노치티틀란에서 축제를 벌이던 아즈텍인들을 공격할 때에도, 스페인인들이 휘두른 검에 아즈텍인들의 사지가 잘려지고, 심지어 배가 찢어져 내장이 나와 그것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아즈텍인들이 속출했다고 하니 흠좀무…[36] 포포카테페틀 화산 분화구에 직접 들어가 황을 구했다고 한다. 초석은 열대지방 흙에 산재해 있던 걸 물에 타 말려서 채취했고, 포탄은 석재로 만들었다.[37] 당시에는 철 대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구리주석을 조합한 청동 대포를 사용했기 때문에 구리와 주석들을 모아서 청동 대포를 만들어 쓴 것으로, 아즈텍인들은 물러터져서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돌들이 그런 흉악한 무기가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38] 코르테스의 말 목이 마쿠아후이틀에 의해 단번에 잘려나가 코르테스가 죽을 뻔했다는 기록도 있다. 흑요석의 단면은 매우 날카로워서 수술용 메스로도 쓰인다. 그러나 그 날카로움과는 별개로 그 단단함은 강철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기에 스페인군의 강철 검과 부딪히면 깨지거나 부서졌고, 스페인인들의 강철 판갑에도 거의 효과가 없었다.[39] 흑요석 무기가 아닌 투석구. 전술했듯 투석구 상대로는 금속 갑옷보다 나았다.[40] 코르테스 휘하의 스페인인들이 아즈텍에 도착해서 맨 처음 한 행동이 바로 화산을 찾아다닌 것이었는데, 화산에서는 화약의 재료가 되는 유황초석이 많았기 때문이었다.[41] 고대 이집트그리스, 레반트메소포타미아 일대는 빠르게 철 기술이 전파되었지만 중국은 지리적인 환경상 서방의 이민족들을 통해 전국칠웅의 시대에 접어들고 나서야 자리잡힌다. 한반도만주부여고조선이 있던 기원전 2~3세기경쯤에 철 기술이 자리잡히며, 일본한반도에서 이주한 야요이인들로 인해 청동기와 철기가 동시 유입되었다.[42] 실제로 이와 비슷한 말을 몬테수마 2세가 코르테스에게 직접 말하는 장면이 있으며 이는 스페인 신 풍속사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들을 남겨두는 첫번째 이유는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제사의 제물로 바쳐야하기 때문이며, 두번째 이유는 젊은 세대가 게을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43] 특히 뉴멕시코 주의 경우 스페인 세력들이 점령했다가 원주민들의 반격으로 축출되는 일까지 있었다.[44] 이는 미국인디언 전쟁 당시 미국 중서부/남서부 지역의 북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비슷했다.[45] 후안 페론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바로 이 부족 출신이다.[46] 반면 아르헨티나와 칠레 중북부 일대에서 살던 차루아, 아이마라, 케추아 같은 다른 남미 원주민 부족들은 커다란 저항 없이 스페인에게 손쉽게 정복되었다.[47] 지금도 우루과이는 남미에서도 육우 사육 등 축산업이 잘 나가는 나라이다.[48] 테노치티틀란은 스페인에 의해 함락된 후 호수를 메워 현재의 멕시코 시티가 되었는데, 호수를 메워서 만든 도시라는 특성상 멕시코시티 도시철도를 건설하기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49] 코르테스가 남긴 기록에 보면 "멕시카(아즈텍 민족)를 죽여라!"라면서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죽했으면 스페인 병사들이 말렸을 정도로 아즈텍인들에 대한 증오는 실로 엄청났다.[50]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목테수마 데 툴텡고 공작이라는 스페인 작위를 계승해오고 있다.[51] 전부는 아니었지만 서장자 마르틴 코르테스를 비롯한 4명은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52] 위에도 써있지만 의무교육이 아니라 그냥 군국주의 징병제였을 뿐이다[53] 1248년 건국. 당시 한반도에 있던 국가는 고려. 신라가 아즈텍보다 1300년은 더 전에 생겼다.[54] 흥미롭게도 아즈텍과 비슷한 기후를 가진 곳은 아즈텍을 정복한 스페인이다. 둘 다 산악 건조지형이라는 면에서 크게 비슷하다. 괜히 스페인의 북중미 식민지배의 중심지가 멕시코 시티와 인근 지역이 된 게 아니다. 유럽에서 미국의 서부극을 흉내내 찍으면서도 미국 본토 서부극과 달리 텍사스(과거에는 멕시코령이었음)나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역이 주된 배경이 되는 스파게티 웨스턴 또한 사막이나 황무지를 배경으로 한 촬영이 주로 스페인에서 이루어졌다.[55] 만약에 오늘날의 멕시코 영토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의 발칸 반도 국가들과 아랍 국가들처럼 지역, 언어, 문화 등에 따라 멕시코 시티, 틀락스칼텍, 타라스칸, 토토낙, 치치멕, 마야 등 여러 국가로 쪼개져 제각기 독립했다면 오늘날의 멕시코 지역에서 아즈텍 제국에 대한 평가는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특히나 틀락스칼텍인들과 말린체에 대해서는 현실의 멕시코와 달리 동정론이 많아졌을 것이다.[56] 단, 후아레스는 아즈텍과 무관한 자포텍족 출신이고, 임기의 거의 전부를 프랑스와 싸우느라 보냈으며 이후 멕시코의 모든 국가원수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백인 혈통이 강하다.[57] 바야돌리드 논쟁 항목에서 보듯 아즈텍 제국 멸망 후 이 지역을 정복한 스페인인들은 해당 지역 민족(인디오)들을 노예처럼 부렸다.[58] 사실 근대 시기에도 안데스 산맥 때문에 아르헨티나칠레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59] 물론 바이킹들이 아메리카에 당도한 것은 9세기 경의 일이고 아즈텍은 13세기 경에나 등장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다. 지역도 아즈텍은 중미에 위치한 반면 바이킹들은 캐나다 해안가에만 당도했다.[60] 다만 플레이어는 기병의 기 자도 모르던 당시 아즈텍 지휘관이 아니며, 기병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으므로 얘기가 좀 다르다. 게다가 AI 역시 멍청해서 기병을 제대로 활용 못하니, 보병의 빠른 이동속도와 압도적인 병력수로 유럽 보병을 포위공격+기병대에 보병 우라돌격을 시킨다면 중수 이상 되는 실력만 가져도 손쉽게 이길 수 있다. 오히려 포위공격이 불가능해 한 번에 한 놈 법칙 식으로 스페인군에게 학살당하기 일쑤인 시가전에서 더 불리하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