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동궁
1. 개요
樓洞宮
조선 제25대 왕 철종의 친아버지 전계대원군의 종가. 한성부 중부 경행방,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익선동 한옥마을 자리(익선동 166번지 일대)에 있었다.
면적이 8,264㎡(2,500평)나 되는 상당한 규모의 궁이었으나, 현재는 헐리고 흔적을 찾기 어렵다.
2. 이름
말 그대로 '누동(樓洞)'에 있다는 뜻으로 동 이름은 이 근처에 있던 다락 우물(樓井)에서 따왔다.
2.1. 지명 유래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같은 대원군궁(大院君宮)인 운현궁은 인근의 천문을 맡아보던 관청인 서운관(書'''雲'''觀) 앞의 고개('''峴''')인 '운현(雲峴)' 에서 이름을 따왔지만 누동궁은 반대로 궁의 존재가 주변 지명에 영향을 끼친 경우이다.
누동궁 주변의 지명이 '궁동', '익동', '누동', '석정동' 등인데 이 중에서 '궁동(宮洞)' 은 누동궁이 있는 동네라 하여 '궁골'이라 하다가 '궁동'이 되었고 '익동'은 누동궁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였던 익랑(翼廊, 즉 날개가 뻗은 듯이 쭉 늘어서 있는 행랑)에서 유래했는데 사람들이 처음엔 '익랑동(翼廊洞)', '익랑골'이라 하다 나중에 '익동(翼洞)'이 되었으며 한자는 나중에 '익(翼)'이 '익(益)'으로 바뀐다. '석정동(石井洞)' 은 돌우물골 이라고도 하는데 누동궁 쪽에 돌을 쌓아올려 만든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이 동들은 1914년의 지명 통합 때 ''''익'''동('''益'''洞)'의 ''''익(益)''''에 인근 '정'''선'''방(貞'''善'''坊)'의 ''''선(善)''''을 붙여 '익선동(益善洞)'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3. 역사
3.1. 창건
3.1.1. 전계대원군의 삶
이광(훗날 전계대원군)은 사도세자의 서장남인 은언군 이인[1] 의 아들이다. 원래 왕과 세자가 아닌 왕족들은 궁궐 밖에 나가 살아야했고 영조의 손자와 증손자인 은언군과 이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광의 인생에서 한양에 머무른 세월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버지 은언군은 사실상 유일한 왕(정조)의 남동생인데다 큰아들 상계군 이담이 최고 권력자였던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의 양자였었기 때문에[2] 정조의 재위 기간 내내 위험 인물로 찍혀 고생을 많이 했다. 여러 번 옥사에 휘말려 귀양을 갔었고 끝내 죽을 때까지 유배 생활을 했다.[3] 귀양간 후에도 끊임없이 역모의 원인제공자로 지목받았으나 그나마 정조의 비호를 받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천주교 신자였던 은언군의 아내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순교했다. 이에 은언군은 서자 이철득과 함께 유배지에서 탈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붙잡혔고, 이로 인해 같은 해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리고 은언군의 남은 가족들은 전부 강화도의 은언군이 살던 곳으로 옮겨갔고, 이광 역시 30년을 그곳에서 가난한 농사꾼으로 지냈다.
그러나 남은 왕실의 후손이 거의 없는 상황에 1830년(순조 30년) 효명세자까지 요절하면서 다급해진 사촌동생 순조가 풀어줬다. 이후 이미 강화도에서 낳은 두 아들 이원경(4세)과 이욱(3세)과 함께 '''한성부 향교동(鄕校洞) 경행방(慶幸坊)'''에 정착해서 살았다. 1831년(순조 31년)에는 3남인 이원범을 낳았고, 평범하게 자식들을 키우며 지내다 1841년(헌종 7년)에 사망했다.
3.1.2. 누동궁 역사의 시작
그러나 이광이 죽고 3년 뒤인 1844년(헌종 10년)에 중인 민진용이 일으킨 반란에 이광의 장남 이원경이 엮여서 처형당했고 나머지 아들 이욱과 이원범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를 간다.(...)''' 5년 뒤 이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군호가 없던 이광은, 먼저 '전계군'으로 봉해진 뒤 곧바로 왕의 친아버지가 받는 '대원군' 작호를 받아 '전계대원군'이 되었다.
철종은 자신의 형제들에게도 군호를 주어 앞서 죽은 이원경은 회평군, 이욱은 영평군이 되었다. 그리고 역모로 죽고 자식도 없었던 큰형 회평군 대신 살아있고 별 다른 문제가 없던 둘째 형인 영평군 이욱에게 한성부 시절 가족들이 살았던 집을 증축, 보수하여 주었다. 이게 바로 누동궁이다.[4]
3.2. 전성기와 마지막
누동궁은 철종의 생가로 (비록 뒤를 이은 왕들이 형식적으로라도 철종의 계통을 잇지 않았지만)[7] 선대 왕의 생가로써 궁과 그 후손들은 융숭히 대접받았다. 누동궁 1대 사손 영평군 이경응[8] 은 왕실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왕실의 웃어른으로 종척 집사[9] 의 직위를 여러 번 맡았고 2대 사손 청안군 이재순은 군의 요직과 고종을 호위하는 직책을 두루 맡았다. 1869년(고종 6년)에는 안국동 별궁에 모셔진 전계대원군의 사당을 경행방에 있던 영평군의 집으로 옮겨 전계궁(全溪宮)이라 하였다. 영평군은 1902년(광무 6년), 청안군은 1904년(광무 8년)에 죽었고 3대 사손이 되어야 할 풍선군은 이미 1890년(고종 27년) 아버지, 할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청안군 사후 당시 15세였던 풍선군의 아들인 청풍군 이해승이 가주(家主)가 되었다.
이해승은 한일합방 이후 일제에게서 후작 작위를 받아 조선귀족이 되었고 당시 돈으로 16만 2천 원을 받아 본격적으로 친일하면서 재산을 많이 불렸다. 주인의 재산이 조선 최고의 수준이니 누동궁 역시 그에 걸맞게 상당히 화려했다. 당시의 누동궁을 방문했던 의친왕의 다섯째 딸 이해경은 “어머니와 가끔 큰 집이라 불리는 누동궁에 갔었어요. 당시 이우영 회장의 조부인 이해승 씨가 집 주인으로 계셨죠. 들어가는 입구부터 조경이 잘 되어 있었고 경치가 수려했죠. 출입문 입구에는 양쪽으로 커다란 도자기가 나열되어 있어서 마치 중국의 성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해승은 1930년대에 누동궁을 팔고 현재 서대문구에 있는 홍은동으로 이사갔다. 그렇게 조선시대 부터 이어온 누동궁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3.3. 그 이후
누동궁 자리(익선동 166번지 일대)는 정세권[10] 이 매입하였고, 정세권은 그 자리에 조선인들을 위한 한옥마을을 조성했다. 이후 부지는 행랑길, 누동궁1·2길로 나뉘었다가 다시 누동궁1·2·3길로 나뉘었는데, 2010년 도로명주소를 개편하면서 수표로28길로 합쳐졌다.
서울특별시는 2004년에 이 일대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아파트, 관광 호텔, 오피스텔, 근린 생활 시설을 지을 예정이었는데 10여년을 표류하다 계획을 무산시켰다.
2010년대 후반부터 뉴트로 바람을 타고 이곳의 옛 한옥들이 문화, 상업공간이 되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청년들이 많이 찾는 관광명소로 바뀌었다. 자세한 것은 익선동 한옥마을 항목 참조.
4. 역대 종주(宗主)
'''1'''. 전계대원군 이광(全溪大院君 李㼅, 1785년 ~ 1841년).
'''2'''. 영평군 이경응(永平君 李景應, 1828년 ~ 1902년). - 누동궁 1대 사손. 사손(嗣孫)의 댓수는 종주의 댓수에서 '-1' 하면 된다.
'''3'''. 청안군 이재순(淸安君 李載純, 1851년 ~ 1904년).
[11]
'''4'''. 청풍군 이해승(淸豐君 李海昇, 1890년 ~ 미상).
[12]
'''5'''. 이우영(李愚英, 1939년 ~ ).[13]
'''6'''. 이윤기(李允基, 1968년 ~ ).[14]
[1] 이복형제까지 합쳐서는 셋째 아들. 첫째 아들은 의소세손, 3살에 죽었고 둘째 아들이 정조이며, 그 다음 셋째이자 서장남이 은언군이다.[2] 왕실인 전주('''완'''산) 이씨에 홍국영의 본관인 '''풍'''산 홍씨를 따서 완풍군이란 작호를 받았었다. 물론 홍국영 실각 후 전부 원래대로 복귀.[3] 그나마도 처음엔 진도로 갔으나 정조의 단호한 결정으로 도성과 가까운 강화도로 옮겨갔다.[4] 하지만 전계대원군을 누동궁의 첫 번째 주인으로 보기는 애매하다. 전계대원군이 죽은 후 그의 가족들이 한동안 유배 등으로 떠나 있다가 돌아올 때 사실상 새로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도정궁도 원래 종친의 집일 뿐이었으나 덕흥대원군 생전부터 그의 후손들이 쭉 그 곳에 살면서 가계가 내려온 것이라 누동궁과는 다르다.[5] 익종도 철종, 흥선군과 같은, 그러니까 고종의 아버지 뻘 항렬이다.[6] 물론 형식상 순조의 양자가 되었지만.[7] 고종은 철종보다 한 항렬 아래기 때문에 충분히 철종의 양자로 왕이 될 수 있었으나 익종의 양자로 들어갔다.[5] 이는 당시 왕위 지명권을 가진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익종의 아내였기 때문에 고종의 아버지 흥선군이 신정왕후를 설득하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익종의 양자가 되면 신정왕후의 양자도 되니 법적 어머니로써 수렴 청정을 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에 신정왕후로써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철종은 방계에서 들어온 왕이고[6] 익종은 그래도 효종부터 내려진 직계 왕통을 이은 인물이었기에 익종의 양자가 되는 것이 좀 더 왕통의 정통성을 내세울 수 있었다. 실리와 명분 모든 면에서 앞서니 굳이 철종의 양자가 될 이유는 없었다.[8]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내린 '종친 항렬자 통일령'으로 이름을 이욱에서 이경응으로 고쳤다.[9] 종친으로써 각 행사를 총괄하는 임시 직책.[10]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부동산 업자이다. 전통 한옥에 근대적 생활양식을 반영한 개량한옥을 조선인들에게 대량 공급하여 조선인의 주거지를 확보하고 조선인의 주거문화를 개선하는 데 크게 공헌한 분이다. 오늘날 관광명소가 된 북촌한옥마을도 이 분이 아니었으면 존재할 수 없었다. 또한 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 운동의 재정을 담당하며 일제에 맞선 민족운동가였다.[11] 아버지 청안군 이재순보다 먼저 사망.[12] 아버지 청풍군 이해승보다 먼저 사망. 나라가 망했기에 청풍군 이해승 이후로는 군호가 없다.[13] 여기서부터는 누동궁에 거주한 적이 없는, 이름만 누동궁 주인이다. 유한회사 동원아이앤씨 그랜드힐튼서울 호텔의 창업주 겸 현재 명예 회장이다.[14] 유한회사 동원아이앤씨 그랜드힐튼서울 호텔의 현재 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