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
1. 개요
大院君
조선시대의 군호(君號). 선대 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승하하면 방계 종친이 유교의 종법(宗法)에 따라 예전 왕(추존 왕 포함)의 아들로 입양된 뒤 왕위를 계승하는데, 이 경우 그 왕의 친아버지(생부)가 받는 군호이다. 쉽게 얘기하면, '''왕의 친아버지 중 왕이나 세자가 아닌 사람에게 주는 군호이다.'''
대원군이었던 인물이 4명 있었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1] 이다.
보통 '대원군' 군호는 죽은 뒤에 추증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2] 그러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유일하게 '''살아 생전에''' 대원군이 되었으며, 고종 재위 초반에 직접 10년 간 섭정을 하면서 조선 역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래서 그냥 '대원군'이라고만 지칭하면 보통 흥선대원군을 가리키며 일반인들도 그를 떠올린다.
이러다 보니 대원군이라는 호칭 자체를 '왕을 대신하여 섭정하는 벼슬'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대원군' 호칭은 어디까지나 왕의 생부에 대한 '''명목상의 예우일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누구의 종통을 이어받았느냐가 혈연보다 중요했으므로, 대원군은 혈연으로는 왕의 아버지이지만 공식적(법적)으로는 왕의 아버지가 아니다. 예를 들어 선조는 명종의 아들이고, 철종은 순조의 아들이며, 고종은 문조의 아들이다.[3] 그렇지만 '''인정상 낳아준 친아버지를 다른 듣보잡 왕족과 같은 대우를 할 수는 없으므로''' 대원군이라는 호칭이 나온 것'''뿐'''이다.[4]
같은 식으로 대원군의 부인이자 왕의 생모는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고 예우했다.[5] 조선시대에는 예우가 곧 호칭이니 심각하게 구분될 것은 아니다. 종친이나 외가에 부마들에게 진짜 벼슬은 아니지만 조정 벼슬 품급을 적용하는 케이스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2. 경칭
'저하(邸下)', '합하(閤下)' 등으로 불렸다. '국태공 저하(國太公 邸下)', 또는 '대원위 합하(大院位 閤下)' 이런 식으로. 다만 조선이 갑오개혁 직후 명목상으로도 완전한 자주국 체제를 굳힌 이후에는 '전하(殿下)'로 불렸다. '대원군 전하(大院君 殿下)', '국태공 전하(國太公 殿下)' 하는 식으로.[6]
물론 저 경칭들을 실제로 들은 사람은 흥선대원군 한 명 뿐이다. 왜냐하면 위에 언급했듯 '''살아 생전 대원군'''이었던 사람은 그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3. 대원군 사손
순조 시기부터 '''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들은 몇 대를 가도 왕족으로 인정받았다.''' 덕흥대원군의 도정궁 사손, 전계대원군의 누동궁 사손,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운현궁 사손이 그 예다.
원래 왕의 4대손까지 왕족으로 인정받고 이후로는 일반 양반이 된다. 그래서 원칙대로라면 도정궁 사손 계열에서는 3대 사손 응천군 이돈[7] 까지, 누동궁 사손 쪽에서는 2대 사손 청안군 이재순[A] 까지, 그리고 운현궁계에서는 1대 사손 흥친왕 이희[A] 까지만 종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도정궁가에서 응천군의 아들인 4대 사손 이정한부터 9대 사손 이풍까지는 일반 양반 신분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손들의 수가 줄고, 그나마도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아졌다. 순조는 이대로 가다간 왕실의 후사가 전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그래서 1819년(순조 19년)부터 '''대원군가 사손들에 한해''' 대대로 왕족 지위를 세습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례가 드문 것은 아니다. 옆나라 일본에서도 미야케라는 분가를 만들어서 왕실의 후사를 유지하려고 했던 사례가 있다. 도쿠가와 막부에서도 쇼군직을 이을 정통이 끊길 것을 우려해 무려 막부의 개창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직접 '직계가 끊어질 경우 바로 이를 이을 방계'인 고산케를 지정하여 놓았다.[8]
이후 원래 왕족이 될 수 없는 사손들이 정식 종친이 된 사례가 있다. 도정궁의 경우 10대 사손 진안군 이언식부터 14대 사손 창산군 이해창까지[9] , 누동궁에서는 3대 사손 풍선군 이한용과[10] 4대 사손 청풍군 이해승, 그리고 운현궁의 경우 2대 사손 영선군 이준용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헌종과 법적 촌수로는 '''27촌'''인[11] 도정궁 13대 종손 이하전이 헌종 사후 왕위 후보 물망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12]
다만, 위에 언급했듯 왕족으로서의 군 작위 세습은 ''''사손 본인'만''' 해당한다. 쉽게 말하면, '''(왕의 4대손을 넘긴) 사손의 '동생이나 조카'는 왕족이 아니다.'''
4. 유사 사례
사실 고려시대에 '대원군'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케이스는 있었다. 공양왕의 아버지 왕균을 부원군(정원부원군)으로 추존했다고 한다. 신라의 갈문왕과도 비슷하다.
가끔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버지인 후안 3세를 대원군에 빗대기도 한다.[13]
한편 디시인사이드 삼국지 갤러리에서는 한때 조운이 장판파에서 목숨을 걸고 유선을 구해낸 이유가 유선이 사실은 조운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운을 순평대원군[14] 이나 자룡대원군[15] 으로 추존해야 한다는 드립이 흥하기도 했다.
대원군이 원래는 딱히 섭정을 하는 벼슬은 아니었는데도 흥선대원군의 섭정 이미지가 강해서 오늘날 정계나 언론에서는 정권의 막후 실세를 가리키는 별명이나 이런 인물들을 비꼬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김기춘 前 대통령비서실장을 두고 기춘대원군이라 말한다.
5. 역대 대원군
- 덕흥대원군 이초(德興大院君 李岧) : 1530 ~ 1559. 조선 11대 국왕 중종의 7남 덕흥군. 14대 국왕 선조의 아버지.
- 정원대원군 이부(定遠大院君 李琈) : 1580 ~ 1619. 선조의 5남 정원군. 16대 국왕 인조의 아버지. 나중에 원종으로 추증된다.
- 전계대원군 이광(全溪大院君 李㼅) : 1785 ~ 1841. 은언군의 서자로, 25대 국왕 철종의 아버지. 방계 왕족이라 군호를 받지 못했지만 그의 사후 아들이 왕이 되면서 군호를 받은 것은 물론 대원군에 봉해졌다.
-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 1820 ~ 1898. 우리가 일반적으로 대원군이라 칭하는 인물.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대원왕으로 승격 추존되기도. 그래서 대원왕으로서의 시호는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다. 만약 대한제국이 망하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면 대원왕의 칭호를 받는 사람이 더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망하는 바람에 유일한 대원왕이 되었다.
6. 대원군궁(大院君宮)
각 대원군들 및 그들의 사손이 사는 곳. 대개 이 곳이 대원군들의 아들들인 왕의 잠저(潛邸)[16] 인 경우가 많다. 정원대원군의 경우, 원종으로 추숭되었기 때문에 따로 대원군궁이 없다.[17]
7. 스포츠에서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 이미지가 너무 커서 스포츠에서는 다음과 같이 패러디되기도 한다.
[1] 조선의 마지막 대원군으로 이 사람을 마지막으로 대원군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2] 어찌보면 당연한게, 그 사람이 살아있었으면 그 사람이 왕위를 이을 가능성이 자기 아들보다는 더 높기 때문이다. 물론 종법 상 아랫 항렬을 양자로 들여 대통을 잇는 게 맞기 때문에 선대왕이 집안 내에서 항렬이 낮거나 나이가 어린채 승하하면 살아있는 대원군도 가능하다.[3] 인조의 경우 '''선조 → 정원대원군(원종) → 인조'''로 계승되는 새로운 종통을 세워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고자 생부 정원대원군을 예법에 맞지 않다는 서인 세력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추존을 강행했다. 대원군으로의 추존은 왕의 친부였기에 문제가 없지만, 문제는 묘호까지 올렸다는 것이다.[4] 그래서 사실 흥선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할 명분은 '''전혀 없었고''' 따라서 공식적으로 섭정한 것이 '''아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5] 왕비의 생부는 부원군(府院君)으로 생모는 부부인(府夫人)이다. 부원군의 경우 왕비의 생부가 아닌 신하에게 주기도 하고 부부인의 경우 대군의 정실부인 명칭과 같다.[6] 네이버 지식백과 - 1897년 7월 31일 토요일 독립신문: #. 운현궁 근처에 어느 죄인을 잡으려 매복해있던 별순검을 운현궁을 지키는(감시하는) 줄 알고 때리고 경무청가서 꼬장부렸다는 내용이다.(...)[7] 중종의 4대손.[A] A B 장조(사도세자)의 4대손.[8] 이후 몇 대가 지나지 않아 이 우려는 현실화되었고, 방계 3가 중 서열 2위인 기슈 번에서 후사를 이었다. 이후 또다시 직계 단절을 우려해 고산쿄라는 방계 계승 3가를 따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이후 도쿠가와 막부 말기~멸망 이후에는 이미 끊긴 적통은 물론 고산케 2개 가문 마저도 씨가 말라 고산케 말석 미토가의 핏줄이 쇼군, 고산케, 고산쿄를 모두 채워 승리(?)하였다.[9] 단, 13대 사손 경원군 이하전은 사후 추증.[10] 사후 추증.[11] 덕흥대원군의 친자 선조가 덕흥대원군의 형제 명종의 양자로 갔기 때문에. 실제 촌수는 '''25촌'''이다.[12] 하지만 물망에는 오를 수 있었어도 즉위 가능성은 없었다. 헌종과 '''7촌'''이라는 가까운 관계의 친척 이원범이 있었기 때문. 단, 이원범보다 유리한 점이 하나 있긴 있었다. 바로 항렬. 이원범은 아저씨 뻘 이지만 이하전은 당시 왕족들 중 '''유일하게''' 헌종의 조카 뻘이었다.[13] 생전에 왕위에 즉위하지 못했고 자기 대신 아들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스페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자기 사후에 스페인 왕정을 복구시키기로 결심했는데(왕실은 혁명으로 축출돼 망명 중이었음) 당시 후안 3세가 축출된 부왕 알폰소 13세의 뒤를 이어 스페인 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던 상태였다. 후안 3세는 장남이 아니었지만 형들이 일찍 죽어 왕위(?)를 승계한 상태였다. 프랑코는 그를 대신해서 그의 아들인 후안 카를로스 1세를 자기 사후 후계자로 세우기로 하고 후안 3세에게 왕을 칭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후안 3세로서는 마땅치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왕정을 복구시킬 절호의 기회였으므로 프랑코의 제안을 수락하고 더 이상 왕을 칭하지 않았다. 그 후 본인이 생존하던 중에 프랑코가 사망해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참고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즉위 직후 프랑코의 기대를 져버리고(...) 군부 독재 대신 민주화를 택했다. 후안 3세는 사후에 왕으로 추존됐다.[14] 조운은 사후 순평후로 추증되었다.[15] 자룡은 조운의 자(字).[16] 왕이 되기 전에 살았거나 태어난 집. 왕은 용에 비유되는데 그래서 용이 승천하기 전 '''잠겨있었던 집'''이란 의미다.[17] 게다가 정원군의 저택은 인조반정 이전에 광해군에게 빼앗겼고 궁궐이 들어섰으며 이게 바로 경희궁이다.[18] 이 쪽은 기사화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