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평군(1828)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왕족 및 문신.
사도세자의 3남[4] 은언군의 손자, 전계대원군의 2남[5] , 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둘째형이다. 전계대원군의 종가(宗家)인 누동궁의 1대 봉사손이자 2대 종주이다.[6]
2. 생애
2.1. 어린 시절
1828년(순조 28년), 강화도에서 유배 중이던 전계대원군 이광과 그의 첩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30년(순조 30년) 이광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가족들과 함께 한성부 경행방으로 이주했다.
아버지 전계대원군이 은언군의 서자인데다가, 할아버지 은언군도 여러 안좋은 사건에 엮였기 때문에[7] 처음에는 왕족의 작위를 받지 못했다.[8]
더군다나 큰형이자 전계대원군의 적자 회평군 이명[9] 이 민진용 역모 사건[10] 에 엮여서 1844년(헌종 10년)에 사사당하자 이복 동생 이원범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를 갔고, 거기서 일반 농민들처럼 살았다.
2.2. 철종 시기
그러다 1849년(철종 즉위년) 이복동생 이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다시 한성부로 돌아왔고 영평군(永平君) 군호를 받았다.[11][12] 참고로 이 때 영평군이 즉위하지 못한 이유는, 후술하겠지만 만성 질환을 앓고 있었고 어머니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첩이었으며, 큰형 회평군이 죽은 뒤라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가계를 이어야했기 때문이다.[13]
그리고 정조 때에 잠시 설치했다가 사라진 숙위소가 부활하면서 그 대장 직에 임명받았다. 이후 능령[14] 벼슬을 받았다. 또한 고종 때까지 국상 때마다 종친이 맡는 직책인 종척집사(宗戚執事)로서 활동했다.
1857년(철종 8년)에 본부인 평산 신씨가 사망한 뒤 곧 청도 김씨 김재협의 딸과 재혼했다.[15]
2.3. 고종 시기
고종이 즉위한 후 1868년(고종 5년) 3월 6일 흥선대원군이 내린 종친 항렬자 통일령으로 이름을 '욱(昱)'에서 '경응(景應)'으로 개명했다.
이후로도 종친으로서 왕실의 행사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왕실 족보 《선원보략(璿源譜略)》을 교정했고, 영혜옹주 및 의화군 이강의 혼례 때 주혼당상을 맡아 자신의 집을 전안[16] 하는 장소로 제공했다. 이외에도 판종정경(判宗正卿),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17] 으로 임명받아 활동했다.
3. 사후
1900년(광무 4년) 음력 3월부터 만성 소갈증 증세가 심해지다가 1902년(광무 6년) 2월 1일[18] 에 별세했다. 향년 74세. 〈제국신문〉에 따르면, 같은해 3월 6일에 발인했다고 한다.
묘소는 원래 경기도 포천군 주내면 선단4리(현 포천시 포천동 선단4통) 산 11번지 전계대원군 묘역 내에 있었다. 그러나 2015년 이후 후손들이 화장하여 현재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4. 대중 매체에서
작 중 그를 설명하는 단어는 '슬픈 2인자'이다. 사랑이든 권력이든, 언제나 이복동생 철종(김정현 분)의 뒤에 2인자로서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 속에 그늘을 지니고 있다. 철종의 침소를 지키는 금위대장으로, 철종을 무척 아낀다하여 홍별감(이재원 분)이 '동생애자'라 칭한다. 동생 철종과는 달리, 방법의 정당함 보다는 목적의 정당함을 우선시한다.
5. 후손
'''입양 릴레이'''
영평군은 첫 부인 평산 신씨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한 채 일찍 사별했고, 김재협의 딸인 청도 김씨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둘 사이에 자식은 있었으나 딸 한 명 뿐이었다.[19] 거기다 영평군은 고질병이 있어 더 이상 자식을 낳기 힘들었기 때문에 양자를 들여 대를 이어야 했다.
그래서 1864년(고종 1년) 9월에 선조의 서9남 경창군의 9대손 이신휘(李愼徽)[20] 의 아들인 이순달(李順達)을 입양했다.[21] 이순달은 이재순(李載純)으로 개명했고 1899년(광무 3년)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받자 황제의 4대손 자격으로 청안군(淸安君) 군호를 받았다.
청안군은 1904년(광무 8년)에 사망했는데 그도 자녀를 두지 못했다. 그래서 소현세자의 8대손 이재철의 아들 풍선군 이한용[22] 을 입양했지만 1890년(고종 27년) 16세로 사망했다.(...) 풍선군 역시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1897년(광무 원년)에 풍선군의 양자로 '''덕흥대원군'''의 후손인 청풍군 이해승을 입적시켰다.[23] 그래서 영평군 - 청안군 - 풍선군 - 청풍군까지는 전부 입양관계인 셈. '''영평군은 살아서 양증손까지 본 것이다.''' 참고로 저 때 영평군이 이해승을 입양할 것을 고종에게 직접 청했다.#
청풍군 이해승의 자녀들부터는 친자식들이다. 슬하에 아들 4명을 두었지만 큰아들과 둘째아들은 일제 치하 1943년에 자신보다 먼저 죽었고 그 자신도 1950년 6.25 전쟁 때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장손이 바로 그랜드힐튼 서울의 이우영 회장. 즉 영평군의 후손들이 현재 그랜드힐튼 서울 오너 일가이다.
[1] 덕흥대원군과 도정궁의 관계와는 달리 전계대원군은 누동궁에서 살았던 적은 없다. 철종이 왕이 되고 옛 집터 부근에 친아버지의 종가로 지은 것. 단 전계대원군을 모시는 종가이기 때문에 종주는 전계대원군부터 계산한다.[2] 여담이지만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회평군 명('''明''', '''日''' + 月)), 둘째는 영평군 경응('''景'''('''日''' + 京)應, 초명은 욱('''昱''', '''日''' + 立)), 셋째는 철종 변('''昪''', '''日''' + 弁)인데 전부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日)자다. 이는 이들 형제와 같은 항렬의 왕족들의 이름들도 마찬가지인데 먼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 문조)의 이름은 '영('''旲''', '''日''' + 大)'이며 은전군의 양손자 완평군 역시 초명은 '병('''昺''', '''日''' + 丙)' 이었다가 '승응('''昇'''('''日''' + 升)應)'으로 바꿨고 완평군 이전의 은전군 양손자였던 경평군의 이름 역시 '호('''晧''', '''日''' + 告)' 였다. 은언군의 큰손자이며 상계군의 양자이자 풍계군의 친자 익평군의 이름 역시 '희('''曦''', '''日''' + 羲)'였으며 남연군의 네 아들들의 이름은 흥녕군 창응('''昌'''('''日 + 曰''')應), 흥완군 정응('''晸'''('''日 + 政''')應), 흥선군 하응('''昰'''('''日''' + 正)應)인데 흥인군 최응('''最'''('''曰''' + 取)應)의 경우는 부수는 갈 왈(曰)로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붙였다.[3] 음력 신축년 12월 23일.[4] 서장남.[5] 서장남.[6] 누동궁의 종주 자체는 전계대원군부터고 전계대원군의 제사를 모시는 봉사손은 영평군부터이다. 그래서 1대 씩 차이가 난다.[7]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의 천주교 순교사건, 아들 상계군 추대 사건 등.[8] 전계대원군도 살아 생전엔 군호를 받지 못했다. 철종 즉위 후 전계군으로 추봉받고 곧바로 대원군 작위까지 받은 것.[9] 1827 ~ 1844. 첫 이름은 이원경.[10] 1844년(헌종 10년) 몰락한 노론 인물 민진용이 이원덕, 박순수 등을 포섭하여 은언군의 손자 이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다가 사전에 적발당한 사건이다. 민진용은 노론 재상 민응수의 4대손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오래 전에 몰락하여 중인이 되었고, 민진용은 무인으로 생활했다. 민진용은 이원덕(李遠德), 박순수(朴醇壽) 등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원덕은 의원으로 전계대원군의 지인이었고, 박순수는 양아버지 박종훈(朴宗薰)의 음덕으로 음서로 관직에 올라 부사를 역임했다. 바로 이들과 함께 이원경을 추대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당해 전부 끔살당했다. 사족으로 여흥 민씨 집안에서는 이후 민진용 항렬의 '용(鏞)'을 '호(鎬)'로 바꾼다. 바로 고종 시절 외척 세력이던 명성황후와 민태호, 민승호, 민겸호 등이 민진용과 같은 항렬이다.[11] 군호는 경기도 포천 북부 지역에 있었던 영평군(永平郡)에서 유래했다. 대략적으로 현재 포천시 영북면, 영중면, 일동면, 이동면, 창수면에 해당한다.[12] 여담으로 이 일대에 전계대원군의 묘가 있다. 철종이 이를 고려하여 군호를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13] 보통 이럴 때는 친자식이라도 서자가 잇지않고 양자를 적자로 입양해 잇는다. 대명률에는 적자와 서자가 모두 없을 때 양자를 들인다고 나와있어서 조선 초기엔 이를 따랐는데 조선 후기로 갈 수록 점점 서자가 있음에도 적자가 없다는 이유로 양자를 들이는 일이 많아졌다. 영평군의 경우는 특이한 경우다.[14] 陵令. 왕릉을 지키는 벼슬 중 하나[15] 영평군보다 훨씬 오래 살아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사망한다.[16] 奠雁. 혼례 때, 신랑이 기러기를 가지고 신부 집에 가서 상 위에 올려놓고 절하던 예.출처[17]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18] 음력 신축년 12월 23일.[19] 왕실 작위는 없으며 군수(郡守) 창원 황씨 황연수와 혼인했다. 1918년 사망.[20] 1868년 이휘응(李徽應)으로 개명한다.[21] 영평군과 실제 혈통으로는 21촌이다.(...)[22] 1907년(융희 원년) 풍선군(豊善君)으로 추증. 영평군과 실제 혈통 상으로 18촌(...), 청안군과는 23촌(...)이다.[23] 1908년 청풍군(淸豊君)으로 책봉. 근데 눈여겨 볼 건 이해승은 원래 덕흥대원군의 후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제 혈통 상으로는 무려 '''월산대군의 후손'''으로(...), 이해승의 친할아버지 이재숙이 덕흥대원군 후손의 양자가 되면서 그의 본가가 덕흥대원군파로 편입했던 것이다. 그래서 영평군과 실제 혈통 상으로 '''31촌(...)''', 청안군과는 '''32촌(...)''', 풍선군과는 '''33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