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양부대부인

 



'''철종의 적모'''
'''完陽府大夫人 | 완양부대부인'''
'''호칭'''
'''완양부대부인'''(完陽府大夫人)
'''출생'''
1804년 2월 19일
'''사망'''
1840년 2월 19일 (향년 36세)
'''능묘'''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전계대원군묘
'''본관'''
전주(全州)
'''부모'''
부친 최수창(崔秀昌), 모친 광주 이씨(廣州 李氏)
'''부군'''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1. 개요
2. 생애
3. 사후
4.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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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계대원군의 본부인이자 철종의 적모(嫡母)이다. 대원군 부인 자격으로 부대부인 칭호를 받은 사람들 중 '''유일하게 임금의 생모가 아니다.'''
본관은 전주로, 고려시대에 상장군을 지낸 최순작과, 조선의 개국원종공신인 평도공 최유경의 후손이다.

2. 생애


1804년(순조 4년)에 한성부 동부 연지동(蓮池洞)에서 태어났다. 김좌근이 쓴 묘비명에 따르면, 어린 시절 부모에 걸리자 식사도 거르고 직접 부모의 간병을 할 정도로 효녀였다고 한다.#
언제 전계대원군과 혼인했는지, 그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다. 1827년(순조 27년)에 장남 이원경을 낳았고, 1830년(순조 30년) 전계대원군이 유배에서 풀리자 가족들과 함께 한성부 경행방으로 돌아와 살았다. 1840년(헌종 6년)에 사망했다. 향년 36세.[1]

3. 사후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군 하도면 중흥동에 묻혔다가 1856년(철종 7년)에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으로 이장하면서 전계대원군과 합장되었다. 묘비문은 1851년(철종 2년)에 당시 공조판서였던 김좌근이 짓고, 흥인군 이최응이 글씨를 썼다. 현재는 실전되었다.#
1849년(철종 즉위년) 의붓아들 철종이 즉위한 후 완양부부인을 거쳐 완양부대부인에 추증되었고, 더불어 친정 조상들과 형제들도 증직되었다.

4. 가족과 후손


슬하에 아들 이원경 하나만 두었다. 이원경은 전계대원군의 세 아들 중 장남이다. 1840년(헌종 6년)과 1841년(헌종 7년)에 연달아 부모를 잃었음에도[2] 평정심을 잃지 않고 두 이복동생들을 돌보며 그럭저럭 살다가 1844년(헌종 10년)에 민진용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1849년(철종 즉위년)에 철종이 왕이 된 뒤, 이원경은 복권되었고 회평군(懷平君)으로 추증되었다. 그러나 전계대원군 가문의 제사는 회평군이 아니라 의붓아들 영평군 이욱[3]이 받들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영평군은 완양부대부인의 양자로 입적했다. 그래서 완양부대부인의 제사 역시 전계대원군과 마찬가지로 영평군과 그의 후손들이 모셨다.
[1] 세는나이 37세.[2] 1841년에 전계대원군이 사망했다.[3] 전계대원군의 차남이자 서장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