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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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사도세자의 서장자 은언군의 손자이고 전계대원군의 적장남으로, 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큰형이다.
2. 어린 시절
1827년(순조 27년) 9월 11일 신시(申時)에[2] 강화도에서 은언군의 서6남 이광(전계대원군)과 완양부대부인 최씨 사이의 적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이광은 가족의 역모 및 옥사에 연좌되어[3]강화도에 유배 중이었다.
이원경이 태어나고 3년 뒤인 1830년(순조 30년) 효명세자가 요절했다. 순조는 이대로 가다가는 왕실의 대가 끊길 것 같은 위기감을 느껴 이광의 일가를 방면했다. 이후 이광의 가족들은 한성부 향교동 경행방(鄕校洞 慶幸坊)에 정착해 살았다.
1840년(헌종 6년) 어머니가, 1841년(헌종 7년) 아버지가 연달아 사망했음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고 계속 두 이복 동생들을 잘 보살피면서 그럭저럭 살고 있었다.
3. 민진용의 난과 최후
그러나 3년상이 끝난 1844년(헌종 10년) 8월에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몰락한 노론계 인물 민진용이 이원덕, 박순수, 박시응 등을 포섭하여 역모를 일으키려다 적발된 사건(민진용의 옥사)에 엮인 것이다.
민진용은 노론 재상이던 대사헌 민응수[4] 의 4대손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오래 전에 몰락하여 중인이 되었고, 민진용은 무인으로 생활했다. 가담자 중 이원덕은 의원으로 이광의 지인이었고, 박순수는 양아버지 박종훈(朴宗薰)의 음덕으로 음서로 관직에 올라 부사를 역임했다.
순조 말기부터 헌종 초기까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주로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金逌根), 7촌 조카 김홍근(金弘根)이 쌍두마차가 되어 좌지우지하다가 1844년(헌종 10년)에 이들이 물러났다. 그러자 권력에 틈이 생기게 되었는데 바로 이 때를 노려 민진용 일파가 난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문제는 이원경이 이 역모에서 임금으로 추대될 대상이었던 것.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다들 상당한 중형을 받았는데 주동자는 전부 끔살에 단순 동조자도 귀양을 갈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실제로 참여는 안했다 해도 왕으로 선택된 대상이었던 그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다.[5] 결국 삼사와 의금부에게서 계속 탄핵을 당하다 같은 해 9월 6일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 향년 18세(만 16세).
4. 이후
이원경이 역모로 몰려 죽자 그의 두 동생들, 이욱과 이원범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갔다.(...) 그러다 1849년(철종 즉위년) 이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신원, 복권되었으며 1858년(철종 9년) 11월 9일 승지 서승보의 건의에 따라 '회평군(懷平君)'으로 추봉되고 현록대부 및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었다.[6]
시신은 처음 경기도 양주군 하도면 중흥동 삼각산 서남쪽[7] 에 안장했다가 다시 경기도 포천군 왕방산으로 이장되었으며, 뒤에 1856년(철종 7년) 4월 8일 포천군 주내면 선단4리 산11번지[8] 해룡산, 전계대원군 묘 동쪽 100m 지점으로 이장되었다. 묘비문은 1859년(철종 10년) 철종이 직접 짓고, 판서 김병학이 글씨를 썼다.
5. 후손
원래 회평군이 전계대원군의 유일한 적장자라 이후 가독(家督)[9] 을 이어야 했으나, 역모에 연루되어 일찍 죽고 뒤를 이을 아들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철종이 즉위한 후 생가(누동궁)의 후사를, 회평군의 서출 이복동생이자 철종의 둘째 이복형인 영평군이 잇도록 했다. 그런 상황에 회평군의 양자를 들이면 누동궁 서열 상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인지 회평군의 친 후손은 물론 족보 상 후손도 없다.[10]
[1] 여담이지만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회평군 명('''明''', '''日''' + 月)), 둘째는 영평군 경응('''景'''('''日''' + 京)應, 초명은 욱('''昱''', '''日''' + 立)), 셋째는 철종 변('''昪''', '''日''' + 弁)인데 전부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日)자다. 이는 이들 형제와 같은 항렬의 왕족들의 이름들도 마찬가지인데 먼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 문조)의 이름은 '영('''旲''', '''日''' + 大)'이며 은전군의 양손자 완평군 역시 초명은 '병('''昺''', '''日''' + 丙)' 이었다가 '승응('''昇'''('''日''' + 升)應)'으로 바꿨고 완평군 이전의 은전군 양손자였던 경평군의 이름 역시 '호('''晧''', '''日''' + 告)' 였다. 은언군의 큰손자이며 상계군의 양자이자 풍계군의 친자 익평군의 이름 역시 '희('''曦''', '''日''' + 羲)'였으며 남연군의 네 아들들의 이름은 흥녕군 창응('''昌'''('''日 + 曰''')應), 흥완군 정응('''晸'''('''日 + 政''')應), 흥선군 하응('''昰'''('''日''' + 正)應)인데 흥인군 최응('''最'''('''曰''' + 取)應)의 경우는 부수는 갈 왈(曰)로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붙였다.[2] 오후 3시 ~ 5시 사이다.[3] 이광의 기준 적모(嫡母) 송씨와 형수 신씨(상계군의 아내)의 천주교 순교사건, 형 상계군 추대 사건 등.[4] 인현왕후의 큰아버지 민시중의 손자.[5] 참고로 여흥 민씨 집안에서는 이 일이 있은 후 민진용 항렬의 '용(鏞)'을 '호(鎬)'로 바꾼다. 바로 고종 시절 외척 세력이던 명성황후와 민태호, 민승호, 민겸호 등이 민진용과 같은 항렬이다.[6] 이복 동생 영평군을 비롯한 다른 왕족들의 군호는 지명에서 따온 것이지만 회평군의 경우는 먼저 봉작받은 동생 영평군의 '평'을 따고 그 앞에 억울한 죽음을 맞은 것을 애통해하며 위로한다는 뜻으로 '회'를 넣은 것이다.[7] 경기도 고양시 효자동 일대[8] 경기도 포천시 포천동 선단4통[9] 집안을 이어 갈 장자(長子)의 신분.[10] 다만 대한제국 멸망 이후로 사후양자를 들인 것으로 추정되는 가계도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광평대군의 후손이 입양된 것으로 명목상 회평군의 5대손까지 자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