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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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정락영(鄭樂泳)
'''생년월일'''
1975년 8월 9일 (49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학교'''
삼일상고 - 한양대학교
'''포지션'''
포인트 가드
'''신체조건'''
183cm
'''프로입단'''
1998년 신인드래프트 2라운드 15순위
'''소속팀'''
대구 동양 오리온스 (1998~2000)
여수 골드뱅크 클리커스/코리아텐더 푸르미 (2000~2003)
부산 KTF 매직윙스 (2003~2005)
서울 SK 나이츠 (2005~2009)
1. 개요
2. 선수시절
3. 여담
4. 관련 문서


1. 개요


한양대 출신의 전 농구선수로 KBL 통산 11시즌 동안 3개 팀에서 주전과 백업을 오가며 활약했다.

2. 선수시절



2.1. 대학 시절


한양대 시절 주전 포인트 가드이긴 했으나 강기중, 이홍수 등과 플래툰으로 번갈아가며 나오는 일이 잦았다. 어차피 당시 한양대는 "초슈퍼울트라에이스" 추승균의 원맨팀이었던지라, 대학 시절 정락영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고 게임 운영보단 수비에 강점이 있는 가드 정도로 평가받았다.

2.2. 프로 시절



2.2.1. 대구 동양 오리온스 (1998~2000)


1998 신인드래프트 2라운드 15순위로 대구 동양에 지명받아 프로생활을 시작하는데, 하필 데뷔 시즌이 그 유명한 '''"32연패"''' 시즌이었다. 당시 대구 동양은 전희철, 김병철, 김광운 등 기존 주전들은 물론 드래프트 1라운드에 선발한 박재일까지 모조리 군대 및 공익근무로 보내버리면서 노골적인 탱킹시즌을 보냈고[1] 얇은 선수층 탓에 데뷔 시즌부터 주전 포인트 가드를 맡게 된 정락영은, 98-99 시즌 전 경기에 출장해 8.8득점-4.4리바-3.6어시-1.8스틸로 활약했지만, 팀의 굴욕적인 연패 행진을 막을 순 없었다. 연패가 시작된 지 두 달이 훌쩍 지난 2월 28일 광주 나산과의 게임에서, 정락영은 팀내 최다인 24점을 올리며 활약, 기나긴 32연패의 사슬을 끊을 수 있었다.
99-00 시즌 소집해제로 복귀한 전희철에 신인 드래프트 2순위 조우현이 가세하면서 스쿼드가 급 두터워진 대구 동양은 지난시즌 에이스였던 정락영의 기량이 미덥지 않아졌고, 정락영을 대학 때처럼 이인규(187cm, G), 박규훈(180cm, G)과 플래툰 1번으로 돌린다.

2.2.2. 여수 골드뱅크 클리커스/코리아텐더 푸르미 (2000~2003)


00-01 시즌을 앞두고 포가난에 시달리던 여수 골드뱅크의 레이더에 포착되며 현금 2500만원에 여수로 옮긴 정락영은, 새팀 여수 골드뱅크에서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달리게 된다. 이적 첫시즌엔 임대로 영입된 박성배(180cm, G)의 맹활약에 밀려 후보였지만, 다음 시즌인 01-02 시즌부터 주전 1번 자리를 꿰차며 정락영-전형수-황진원의 역동적인 백코트를 구성, [2] "헝그리군단" 여수 코리아텐더의 돌풍을 몰고왔고, 정락영 본인은 평균 5.3어시를 배달하며 리그 수위의 포인트 가드로 꼽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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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3 시즌 들어 팀의 재정난이 심각해지면서 구단 운영비 마련을 목적으로 백코트 파트너이자 팀의 에이스였던 전형수가 현금 2억 5천만원에 울산 모비스로 팔려갔지만, 팀은 평균 5.8 어시스트를 배달한 정락영의 리딩 하에 외국인 선수 에릭 이버츠(198cm, F), 안드레 페리(196cm, C)까지 더욱 똘똘 뭉치게 되었고, 시즌 내내 코리아텐더 열풍을 일으키며 정규리그 4위에 플레이오프 4강이라는 프랜차이즈 사상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두게 된다. 그 동안 농구단 매각에 어려움을 겪으며 해체 위기까지 겪었던 여수 코리아텐더는 바로 이 시즌의 호성적 덕분에 대기업 KTF에 팀을 매각할 수 있었다.

2.2.3. 부산 KTF 매직윙스 (2003~2005)


구단이 KTF에 인수되어 부산 KTF 매직윙스가 된 뒤 04-05시즌에 파워풀 외인 듀오 애런 맥기(201cm, C)-게이브 미나케(196cm, F)의 활약 덕분에 다시 한번 정규리그 4위에 오르지만, 시즌 평균 7.8 어시스트를 뿌리던 일명 포인트포워드 현주엽의 존재 탓에 정락영의 팀내 비중은 대폭 줄어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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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시즌 현주엽이 FA로 나갔으나 전시즌 MVP였던 신기성이 FA로 영입되면서 정락영의 출장시간은 급감했고, 시즌 도중 슈퍼스타 이 포함된 3:3 트레이드[3]에 끼워져 서울 SK로 이적한다.

2.2.4. 서울 SK 나이츠 (2005~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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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SK에서의 3시즌동안, 정락영은 임재현, 김태술 등과의 주전경쟁에서 밀리며 내내 백업멤버로 지냈고, 07-08 시즌 종료 후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은퇴로 내몰렸다.
이후 정락영은 2군 드래프트에 신청해 서울 SK에 재선발(...)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다시금 부활하진 못하고 08-09에 4경기 출전에 그친 후 정말로 은퇴했다.

3. 여담


부산 KTF 시절인 2004년, 독일 K1X사[4]에서 정락영의 시그니쳐 농구화 "Rock-Young"을 출시, '''KBL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농구화 시그니처 모델이 되기도 했다.
2019년 9월 29일, 제주도에 거주하면서 동호회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 근황을 전했다. 제주도서 만난 정락영, “농구 인기 회복에 기여하겠다”

4. 관련 문서


[1] KBL 초반에는 7, 8, 9, 10위 팀들에 신인 지명확률이 각각 10, 20, 30, 40%로 차등 지급되었고 따라서 고의 탱킹이 가능했다. 하지만 98-99 시즌을 꼴찌로 마친 대구 동양은 결국 2순위에 그치며 1999년도 1순위(조상현)를 98-99 시즌 9위팀 광주 나산에 뺐겼고, 중앙대 출신 슈터 조우현을 지명하는데 그쳤다.[2] 세 명 모두 공격형 가드에 가까웠지만, 주로 정락영이 1번을, 공격력이 뛰어난 전형수2번, 수비가 좋은 황진원3번을 주로 맡았다.[3] 서울 SK get: , 정락영, 김기만 ↔ 부산 KTF get: 조상현, 황진원, 이한권[4] 한때 NBA 덕 노비츠키가 신었던 모델. 독일병정의 국산품 애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