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 페리

 

'''안드레 페리의 수상 및 영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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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삼보 엑써스 시절
'''이름'''
안드레 페리(Andre Perry)
'''생년월일'''
1970년 12월 19일 (53세)
'''국적'''
미국
'''출신학교'''
커피빌 커뮤니티 컬리지(NJCAA) (1989~1991)
앨라배마 대학교 (1991~1993)
'''포지션'''
파워 포워드, 센터
'''신체사이즈'''
196cm, 107kg
'''KBL 입단'''
2001년 KBL 외국인드래프트 1R 2순위 to 원주 삼보
'''KBL 소속팀'''
원주 삼보 엑써스 (2001~2002)
'''여수 코리아텐더 푸르미 (2002~2003)'''
서울 삼성 썬더스 (2003~2004)
'''등번호'''
30[1], 21[2], 0[3]
'''개인 타이틀'''
2001-02 KBL 올스타전 MVP & 덩크왕
1. 개요
2. 선수 시절
2.1. KBL 입성 전
2.2. KBL 시절
3. 여담


1. 개요


2000년대 초반 KBL에서 3시즌을 보냈던 운동능력이 좋은 빅맨으로, KBL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진 못했으나 특유의 쇼맨십 덕분에 인기가 많은 편이었으며 아직도 많은 팬들이 기억하고 있는 선수이다.

2. 선수 시절



2.1. KBL 입성 전


2년제인 커피빌 커뮤니티 컬리지를 졸업한 뒤, NCAA 사우스이스턴 컨퍼런스의 명문 앨라배마 대학교에 편입하게 된다. 안드레 페리가 합류한 1991년도 앨라배마는 4학년 콤비 라트렐 스프리웰, 로버트 오리가 맹활약하며 전미에서도 강호로 손꼽히던 팀이었는데, 페리는 첫해부터 주전과 식스맨을 넘나들며 경기당 평균 20분 정도의 출장시간을 확보, 평균 9.6득점-5.9리바운드를 올리는 키 플레이어로 활약했다. 91-92 시즌 팀은 NCAA 토너먼트 2회전(32강)까지 진출했는데, 정작 페리는 시리즈 내내 1초도 뛰지 못했다;;
스프리웰과 오리가 모두 NBA로 떠나고 맞은 92-93 시즌, 페리는 2학년 파워포워드 제이슨 캐피[4]에 밀리며 센터 포지션에서 주전과 벤치를 들락날락 거렸고, 원투펀치가 모두 졸업한 앨라배마는 성적이 급락하며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 결국 페리는 "3월의 광란"에는 한번도 얼굴을 비추지 못한채 졸업하게 된다.
이후 페리는 8년 동안 미국 하부리그인 IBA와 USBL를 비롯, 스위스, 도미니카 리그 등에서 전성기를 보내고 만 31세이던 2001년 시카고에서 열린 KBL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에 지원, 트라이아웃 내내 다수의 관계자들로부터 시즌 최고 선수라는 후한 평가를 받았으나 정작 드래프트에선 마르커스 힉스에 밀리며 전체 2순위로 원주 TG삼보 엑써스에 뽑힌다.

2.2. KBL 시절



2.2.1. 원주 삼보 엑써스 (2001~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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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즌 허재의 노쇠화와 두 외국인 선수들의 아쉬운 활약[5]탓에 리그 7위에 그치며 창단 최초로 플레이오프 진출해 실패했던 원주 삼보는, 제이슨 윌리포드 이후 오랜만에 Top class 외국인 선수인 페리를 뽑으면서 새 시즌에 대한 기대감이 매우 컸다.
하지만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뽑은 보스턴 칼리지 출신의 백인 덩크 머신 조나단 비어봄(199cm)이 프리시즌 내내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 퇴출되면서 연습용 선수로 데리고 있던 NCAA 디비전 II 출신의 해리 리브즈(200cm)와 시즌을 시작했고, 2라운드까지 페리가 평균 19득점-12.5리바운드로 골밑에서 어느 정도 활약해 준 반면, 골밑 파트너 리브스는 평균 11.9득점-8.6리바의 아쉬운 모습만 보여준 탓에 팀은 7승 11패로 하위권으로 처지게 된다.
2라운드 종료 후 원주 삼보 김동욱 감독은 결국 리브스를 내보내고 전 시즌 중국 CBA에서 뛰었던 찰스 맨트(193.7cm)[6]를 급히 데려왔는데, 맨트는 아예 빅맨도 아닌데다 기량 자체도 리브즈보다도 떨어졌고, 무엇보다도 무릎부상으로 제대로 뛸 수 없는 상태인데 에이전트가 사기쳐서 입단시킨 상황이었다.[7] 첫 게임부터 3점 슛 에어볼을 연이어 날려댄 맨트의 플레이에 김동욱 감독은 대노했고 달랑 4경기만에 긴급 퇴출시켰는데,[8] 대체 외국인 선수도 못 구한 상황이라 정경호를 급히 주전센터로 내세워야 했던 삼보는 12월에 열린 모든 경기를 지면서 9연패를 질주, 결국 김동욱 감독이 자진사퇴하고 만다.[9]
2002년 새해 첫날, 페리가 20득점-23리바운드에 블록 5개를 찍어낸 덕분에 원주 삼보는 홈에서 안양 SBS를 잡고 기나긴 9연패의 사슬을 끊었고, 이어진 서울 삼성과의 경기에서도 조지 워싱턴 대학교 시절 2년 연속 NCAA 토너먼트를 경험했다는 대체용병 패트릭 은공바(200cm)를 시험 투입하며 2연승!! 새해 시작되는 4라운드부터 원주 삼보의 대반전이 일어나는 줄 알았으나....
2m의 장신, 근육질의 몸, 거기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 덕분에 "디켐베 무톰보의 KBL 버전이 아니냐?" 하는 원주 팬들의 기대는 단 두 경기 만에 무너지고 만다. 팀 동료의 패스를 못 받아주는 심각한 기름손에 손쉬운 골밑슛조차 흘리고, 박스아웃, 스크린 같은 기본기조차 보여주지 못하는 그야말로 농구 초보자 수준이었던 은공바는,[10] 4라운드 중반부터는 아예 정경호, 박종덕 등에게도 밀려났고, 후반기 대반전은커녕 승률 3할대(18승 36패)로 팀 창단 이래 역대 최악의 시즌을 보낸다.
사실 전 시즌도 그렇고 이 시절 원주 삼보의 진짜 문제점은 외국인 선수가 아니라, 4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이란 영광속에 가려진 세대교체 실패, 그로 인한 주전-비주전간의 격차가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포인트가드 신기성의 상무 입대 공백을 메우기에 김승기의 기량은 아쉬웠고, 팀의 에이스 노릇을 하던 허재는 급격한 노쇠화[11]로 30분 이상 내보내면 다음 경기에 퍼져버리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이 시즌 평균 19.8점을 올리며 꾸준히 활약해주었지만 이들 주전 셋을 제외한 식스맨들인 박규훈(180cm,PG), 이형주(183cm,SG), 박종덕(198cm,C) 등의 기량은 그야말로 형편없었고, 애초에 에이스형 득점원이기 보단 블루워커에 가까운 선수였던 안드레 페리는 졸지에 팀내 주득점원 역할까지 맡으며 '''평균 21.3득점-13.7리바-2.4어시'''에 블록슛 1.9개를 찍는 등 맹활약했지만 팀을 구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막장으로 치닫는 팀에서 01-02 시즌 페리는 '''평균 출장시간 38분 40초''' 동안 쉬지 않고 뛰면서 팀에 헌신했지만, 한 팀의 에이스 역할을 맡기기엔 부족한 선수란 게 드러난 데다 200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김주성을 뽑은 원주 삼보는 김주성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위압감 있는 빅맨을 원했기 때문에,[12] 페리와의 재계약을 포기했다.
시즌 내내 홀로 고군분투하던 하위권인 팀 성적에도 불구 페리는 2002년 KBL 올스타전에서 팀 동료 정경호와 함께 감독 추천 선수로 선발되었고, 그간의 한을 풀듯 33득점-16리바운드로 맹활약하며 '''올스타전 MVP'''에 선정된다. 하프타임에 열린 덩크슛 컨테스트에선 조니 맥도웰을 뛰어넘는 덩크를 성공시키며 '''덩크 컨테스트 우승'''까지 거머쥔[13] 페리는 2002년 올스타전 최고의 스타에 등극했다.

2.2.2. 여수 코리아텐더 푸르미 (2002~2003)


원주 삼보와의 재계약 실패 후 2002년 외국인 드래프트에 다시 지원한 페리는 1년만에 주가가 많이 하락하며[14] 2라운드 17순위로 여수 코리아텐더 푸르미에 지명된다.
바로 전 시즌 어려운 팀 사정에도 불구, 득점왕 에릭 이버츠와 젋은 쓰리가드 정락영-전형수-황진원의 활약으로 시즌 말미까지 플레이오프 티켓 경쟁을 펼쳤던 돌풍의 팀 여수 코리아텐더였지만, 모기업의 부도로 팀 운영자금이 없어 2년차 가드 전형수를 팔아[15] 급전을 마련할 정도였고 훈련장이 없어 여수 지역 중고등학교 체육관을 전전해야만 하는 팀 사정 탓에, 이버츠-페리의 괜찮은 외국인 선수 조합에도 불구하고 여수 코리아텐더는 02-03 시즌 가장 유력한 꼴찌 후보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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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시즌에 들어서자 '''헝그리 군단''' 여수 코리아텐더는 1라운드 5승 4패, 2라운드에 7승 2패를 거두며 리그 선두권으로 치고 나가며 모두를 놀라게 한다. 둘이 합쳐 평균 41.9점-18.8리바운드를 올리던 이버츠-페리 조합은 예상보다도 훨씬 강력한 위력을 뽐냈고, 정락영-황진원의 젊은 가드진의 활기찬 운영과 변청운-진경석-김기만 등 투지 넘치는 포워드의 수비력이 조화를 이루며 대구 동양, 창원 LG, 원주 TG 등 강호들을 연파하며 한 때 리그 단독 선두에 오르기도 한다.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던 페리와 모범생 이버츠는 타팀 외국인 선수들과는 달리 훈련 중에도 한마디도 나누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경기에만 나서면 그야말로 찰떡 호흡을 과시했는데, 시즌 득점왕을 2차례나 차지할 정도로 공격력은 일품이었으나 늘 수비가 안 된다는 지적을 받으며 비시즌마다 이적 대상이 되어야했던 이버츠와 1:1 공격력은 딸려도 리바운드와 골밑 수비에 강점이 있었던 페리는 서로의 약점을 상쇄해주는 매우 좋은 조합이었다. 5라운드에 6연승을 달리며 플레이오프 직행까지 노리던 여수 코리아텐더는, 그러나 구단의 지원 부족 탓인지 선수단 전체가 갑자기 힘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6연승 이후 7연패의 늪에 빠지기도 했지만, 초반에 벌어놓은 승수가 많아 결국 최종 4위로 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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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성과의 6강 플레이오프에서 페리는 2경기 평균 13.5리바운드에 블록 4개씩을 찍어내며 아비 스토리-스테판 브래포드-서장훈의 트리플포스트를 훌륭히 막아냈고, 변청운-진경석-이버츠가 활화산같은 3점포를 쏘아댄 여수 코리아텐더는 2연승으로 서울 삼성을 스윕, 팀 창단이래 최고 성적인 플레이오프 4강 진출에 성공한다. 디펜딩 챔프 대구 동양과의 4강 플레이오프에서도 페리는 상대 빅맨 마르커스 힉스-얼 아이크를 상대로 2차전 31점, 3차전 29점을 올리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으나, 이버츠가 상대팀 에이스 마르커스 힉스에 압도당하며 부진한데다 여수 홈에서 열린 3차전에선 미심쩍은 판정까지 겹치는 바람에[16] 스윕패를 당하며 헝그리 군단의 질주는 멈추게 된다.

2.2.3. 서울 삼성 썬더스 (2003~2004)


02-03 시즌의 맹활약 덕분에 페리는 이버츠와 함께 재계약 통보를 받지만, 이버츠가 개인사업을 이유로 재계약을 거부한데다 페리 본인마저 허리 디스크 판정로 10주 아웃 판정을 받는 바람에 모두 팀을 떠나게 된다. 사실 페리의 부상이 그정도로 심각하진 않았으나, 이상윤 감독 후임으로 새로 부임한 추일승 감독 입맛에 맞지 않는 선수라 사실상 퇴출되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17] 이를 반증이나 하듯, 한국을 떠난 페리는 곧장 터키 2부리그에 진출해 버렸다.
이후 03-04 시즌이 시작되고, 전 시즌 최우수 외국인선수 마르커스 힉스가 부상으로 퇴출되면서 대체자를 물색하던 대구 동양은 안드레 페리를 1순위로 꼽고 접근하지만 페리는 이미 터키 2부리그 팀과 계약을 맺고 시즌을 진행중이던 상황이었고, 페리의 터키 소속팀으로부터 시즌 종료 후 페리를 보내주겠다는 확인을 받는다.[18] 그런데 시즌이 3라운드 중반을 지나던 시점에 센터 데릭 존슨을 부상으로 잃은 서울 삼성이 안드레 페리를 대체 선수로 지목하는 바람에 일이 꼬여 버린다. 대구 동양이 전 시즌 정규리그 1위 팀이라 외국인 드래프트에서 최하 순번인 탓에, 페리의 영입을 극비리에 추진하던 대구 동양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었고, 부랴부랴 페리를 대체선수로 신청하며 "안드레 페리 쟁탈전"에 가세했지만 전 시즌 정규리그 5위팀 서울 삼성에 결국 페리를 뺏기고 만다. 당시 오리온스 정태호 단장 인터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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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라운드 중반에 서울 삼성에 합류한 페리는 팀의 기대에 부응하며 평균 17.3점-10.8리바운드의 변함없는 활약을 이어갔고, 덕분에 수비부담을 덜은 서장훈은 공격에 좀더 집중할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페리의 가세에도 불구하고 서울 삼성은 좀처럼 연승을 달리지 못한채 시즌 중위권에만 머물렀는데, 애초에 속공 농구에 강점이 있는 주희정과 부상 이후 스피드를 기대할수 없었던 서장훈은 서로 맞지 않는 궁합이었고 여기에 서장훈 외에는 세트 오펜스에서 1:1로 공격을 해결해 줄 만한 "Go To Guy"가 없었던 탓에[19] 공격에서 오히려 부진을 겪는 팀이었다. 여기에 시즌 막판 주희정마저 부상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서울 삼성은 5연패에 빠졌고, 순위는 정규리그 5위까지 떨어져 버린다. 인천 전자랜드와의 6강 플레이오프에서도 그저 블루워커였던 페리는 큰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팀은 1승 2패로 무너지며 플레이오프에서 탈락, 주희정-강혁-서장훈의 황금 라인업을 가지고도 3시즌 연속 4강 진출에 실패한 김동광 감독은 시즌 종료 후 사퇴했다.
2004-05 시즌부터 외국인선수 제도가 자유계약제로 바뀌면서 유로리그 출신의 특급 외인들이 대거 가세하기 시작했고, 만 34세의 페리는 KBL 무대를 떠났고 곧 은퇴했다.

3. 여담


  • 고교 시절 농구에만 너무 열중하느라 수업을 등한시해, 결국 고등학교 졸업을 하지 못했고, 검정고시로 졸업자격을 얻은 뒤 커피빌 커뮤니티 컬리지에 입학했다.
  • 선수 은퇴 후, 퍼스널 트레이너와 유소년팀 농구 코치 등을 하다 몇 년 전부터 회사원이 되어 주로 세일즈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 잘 생긴 외모 덕분인지, 미국에서 광고도 한편 찍었다. 광고 영상
[1] 원주 삼보 시절[2] 여수 코리아텐더 시절[3] 서울 삼성 시절[4] 1995 NBA 드래프트 전체 20순위로 시카고 불스에 뽑힌 203cm의 파워포워드. 마이클 조던의 2차 쓰리핏 시절 벤치에서 가끔씩 나와 어벙벙한 모습만 보여주던 그 선수다.[5] 기록상으로 보면 꽤 괜찮았다. 장신센터 모리스 조던(204cm)은 평균 22.3득점-9.9리바, 백인 탱크로 불렸던 존 와센버그는 평균 22점-8.3리바-5.7어시스트를 올리긴 했는데, 둘다 수비가 꽝이었다. 조던은 몸싸움이 약했고 와센버그는 높이가 낮아(평균 블록 0.1개;;) 상위권 팀 빅맨들(서장훈, 재키 존스, 맥클래리, 맥도웰)과의 골밑 대결에서 자주 밀리곤 했다.[6] 리브즈와 마찬가지로 NCAA 디비전 II 대학(그랜드 밸리 주립대) 출신이다.[7] 이 무릎부상을 무려 '''첫 경기 직전'''에 맨트가 고백한다.[8] 4경기동안 평균 28분 남짓 출장해 9.8득점-5.8리바의 식스맨급 기록을 남겼다(...).[9] 이 때 전창진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승격된다.[10] 대체 대학시절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분명 대학 1~2학년 때 NCAA 토너먼트에서 2년 연속 주전 센터로 뛰었던 은공바였는데, KBL에서의 폭망 이후 농구선수 생활을 아예 접었고 현재 평범한 직장인(항공사 근무)이 되었다. 여담이긴 하지만 인터뷰 당시 조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 꿈이라는 포부를 밝힌 적도 있다.[11] 01-02 시즌 개막 시점 기준 '''만 36세'''(;;;)였다.[12] 이 시기의 외국인 선수 제도상으론 한 팀의 두 외국인 선수 신장합계가 397.78cm을 넘을 수 없었다. 안드레 페리(196cm)와 재계약하면 201cm 정도의 빅맨밖에 못 뽑기 때문에, 좀 더 장신인 센터를 뽑은 다음 테크니션인 단신 가드를 뽑는다는 게 당시 전창진 감독대행의 복안이었고, 실제로 204.4cm의 대형 센터 데릭 존슨(플레이오프 직전 205cm의 리온 데릭스로 교체)과 191.8cm의 슈팅가드 데이비드 잭슨을 뽑은 원주 TG는 02-03 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한다.[13] 사실 덩크는 밋밋했지만, 덩크 성공 후 보여준 맥도웰과의 커플 댄스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14] 만 32세로 나이도 많은데다 부족한 공격력 탓에 블루워커로 밖에 쓸 수 없다는 한계 탓도 있었지만, 원체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원주 삼보시절부터 통제가 잘 안 된다는 평이 있었고 거기다 01-02 시즌 말미에 KBL을 뒤흔들었던 외국인 선수들의 해시시 흡입 사건이 터지면서 외국선수들과 두루 친했던 페리까지 관련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고, 상위순번 팀들의 외면을 받았다.(결국 페리는 무혐의였다.)[15] 울산 모비스 get: 전형수여수 코리아텐더 get: 김정인 + 현금[16] 경기 내내 심판 콜이 디펜딩 챔피언 쪽으로 많이 쏠려있었던데다, 접전 상황에서 터진 페리의 호쾌한 덩크슛 이후 림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다는 심판 판정으로 테크니컬 파울을 받으며 분위기가 넘어갔다. (페리가 매달려 있던 시간은 1초도 안되었다.)[17] 하지만 이후 추일승 감독이 03-04 시즌 데려온 외국인선수들은 모두 변변치 않은 활약만 하다 연이어 교체되었고, 대기업 KTF에 인수되며 야심차게 출발한 전 시즌 4강팀 부산 KTF 매직윙스는 연고지-팀명이 바뀐 첫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다.[18] 이에 오리온스는 아이작 스펜서(197cm)과 1개월 단위로 계약을 맺으며 시즌을 보냈고, 3라운드 시작과 함께 페리를 합류시키기로 한다.[19] 이 시즌 단신 외국인선수는 수비장군 로데릭 하니발이었다. 이후부터 서울 삼성서장훈이 이적하기 전까지 외국인 선수 1명은 반드시 득점 머신(알렉스 스케일, 네이트 존슨 등)을 뽑는 게 전통이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