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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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鄭律成(중국어: 정뤼청)(1914년 7월 7일~1976년 12월 7일)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가이자, 북한의 군인, 중국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활동한 조선족 음악가(작곡가), 중국 공산당의 100대 건국공신 중 하나이다.
2. 생애
본명은 '정부은(鄭富恩)'으로, 광주 출신이다.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1929년) 전주 신흥학교에 입학, 1933년 신흥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난징으로 건너갔다.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의열단에 가입했다. 중국에 머물면서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등을 공부했다. 이 때 의열단장이자 조선혁명간부학교장이던 김원봉이 '음악으로 성공하라'는 뜻으로 '율성(律成)'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1936년 그는 첫 작품 '오월의 노래'(五月之歌)를 작곡했으며, 중일전쟁 발발 후 난징을 떠나 1937년 10월 중국 공산당의 본부가 있는 옌안에 도착했다. 1939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팔로군 행진곡'(현 '중국 인민해방군 행진곡')을 작곡했다.
작곡 활동과 함께, 1941년 7월부터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비롯해 이듬해(1942년) 12월부터 타이항산의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 등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44년 4월 다시 옌안으로 돌아온 뒤,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 황해도 해주에서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이 때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인재를 양성했다. 1947년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구락부장을 지냈고, 인민군 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됐다.
6.25 전쟁 중인 1950년 9월 중국으로 갔다가, 동년 12월 중국 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돌아와 전선 위문활동을 전개했다. 1951년 4월 저우언라이의 요청으로 다시 중국으로 갔으며, 1956년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가 숙청되는 것을 보고 중국 국적을 얻어 정착했다.[1] 이후 중국에서 작곡가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편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 기간, 홍위병들의 수많은 협박과 함께 친구들에게서 받은 원고가 모두 수색당해 많은 악보 등이 유실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마오쩌둥이 죽고 문화 대혁명이 끝난지 1976년에 베이징 근교의 한 운하에서 낚시를 하던 도중 심장병으로 돌연 쓰러져, 62세로 사망했다.
사후 1988년, 덩샤오핑의 명령으로 그가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이 ‘중국 인민해방군가’로 정식 지정되면서 복권됐다.
3. 작품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했으며, 이외에도 '연안송' 등 여러 곡들을 작곡했다.
4. 기타
생가가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있는데, 그의 이름을 딴 도로명인 '정율성로'가 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한때 친중 분위기와 맞물려 대대적으로 기념사업을 하고, 매년 정율성 음악축제를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북한군에 복무한 전력과 6.25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으로 북한정권에 부역한 경력, 조선인민군을 찬양하는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한 전력이 있고 사드 배치 갈등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반중 쪽으로 변해감에 따라 최근에는 기념사업이 한풀 꺾인 상태다
정두언 전 의원의 친척(큰삼촌 뻘)이다.
가족으로는 훗날 외교관으로 활동한 딩쉐쑹(丁雪松,1918~2011) 과 1941년 결혼하여 딸 정샤오티(郑小提, 1943~)를 두었다.
정율성의 생애를 다룬 만화가 2019년에 발간되었다. 제목은 옌안송 -정율성 이야기-. 박건웅 작가가 제작했다. 위에서 언급한 정율성의 딸인 정샤오티가 감사의 인사를 친필로 남겼다.
[1] 중국인으로 귀화했기 때문에 영어 위키백과에는 정율성의 표준중국어 발음의 한어병음 표기인 Zheng Lücheng으로 나온다.[2] 조선인민군가와는 다른 노래다. 이 쪽은 리범수 작사, 라국 작사의 노래다. 제목이 비슷해서 그런지 '조선인민군가'도 정률성 작곡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