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제이 오코차
1. 소개
나이지리아의 前 축구선수로 1990년대 중후반 나이지리아의 황금기를 이끈 플레이메이커. 화려한 개인기로 유명하며 킥력도 좋아 프리킥, 페널티킥을 전담하기도 했다. 자국에서는 은완코 카누와 역대급 선수로 대우받는다.
2. 클럽 경력
특이하게도 아프리카 선수이지만 독일에서 데뷔했다.[1] 1990년 잠시 독일에 축구선수로 활약하는 친구를 만나러 여행을 갔는데 같이 훈련했을 때 팀의 코치가 오코차의 테크닉을 알아보고 계약한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3부리그 소속의 보루시아 노인키르헨과 계약한 오코차는 17세가 되는 해를 자신의 프로 데뷔 시즌을 보내는 해로 만들었고, 2년간 35경기에서 7골을 기록했다. 이런 활약 덕택에 그는 독일 전역에 실력을 입증하게 될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로 1992년 이적한다.
테크닉, 드리블, 개인기, 킥력 등에 강점을 갖고 있던 오코차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토니 예보아, 토마스 돌 등과 같은 선수들과 호흡을 맞췄다. 또한 1993년에는 그 '''올리버 칸'''을 농락하며 골을 넣은 바 있다. 이 골은 그 해 독일 올해의 골에 선정되었다. 1995-96 시즌 팀의 주포인 토니 예보아가 리즈 유나이티드 FC로 떠난 가운데, 오코차는 팀에 남았으나 팀은 2부리그로 강등되었다. 6년 간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90경기에 출전해 16골을 기록했다.
프랑크푸르트가 2부리그로 강등되자 오코차는 터키의 페네르바흐체 SK로 이적한다. 터키에서의 2시즌간 그는 리그에서 62경기에 나와 30골을 기록했다. 이 시기 오코차는 터키 시민권을 발급 받았고, 무함메트 야부즈라는 터키식 이름도 얻었다.
오코차는 1998년, 리그앙의 파리 생제르맹 FC으로 이적한다. 이때 그의 몸값은 1400만 파운드로, 당시 아프리카 선수로는 역대 최고 이적료를 기록했다. 이적료도 이적료지만 이 당시 파리는 엄청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거금을 들여 영입을 했으니 기대치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파리에서 4시즌간 그는 리그에서 84경기에 나서 23골을 기록했고 어린 호나우지뉴의 튜터 역할도 충실히 수행했다.
2002년 PSG와의 계약이 만료된 오코차는 프리미어리그의 볼턴 원더러스 FC에 입단한다. 초반 부상에 시달린 오코차였으나 혼자서 팀을 이끌어가며 맹활약했다. 특히 그해 웨스트햄을 상대로 꽂아넣은 중거리 슛은 팀의 올해의 골에 선정되었다. 2003-2004 시즌부터는 팀의 주장으로 임명되어 팀을 리그컵 준우승으로 이끄는 활약을 펼쳤다. 2006년 오코차는 주장 완장을 박탈당했는데, 오코차가 중동 클럽으로 이적하려는 욕구 때문에 태업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볼턴과의 재계약을 거부한 오코차는 결국 카타르 SC로 이적했다. 카타르에서 1시즌을 뛴 오코차는 미국, 호주 등지에서 러브콜이 왔으나 거절하고 잉글랜드 2부리그 소속의 헐 시티와 계약을 맺는다. 그러나 오코차는 부상 때문에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 못했고 은퇴를 생각했으나 헐 시티가 창단 이후 처음으로 EPL로 승격하자 은퇴를 번복했다. 그러나 시즌이 끝난 직후 오코차는 헐시티에서 방출되었고 결국 오코차는 은퇴를 선언했다.
3. 국가대표 경력
1993년 코트디부아르를 상대로 데뷔했다. 두번째 국가대표팀 경기인 알제리전에서는 0-1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프리킥 골을 터뜨려 팀이 4-1로 승리,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참가하는 데 일조했다. 1994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명단에도 포함되어 우승을 경험했으며 1994년 미국 월드컵에도 참가했다. 이때까지는 주로 서브 멤버였다.
1996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나이지리아 황금기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오코차는 주력 멤버로 98년 월드컵에 참가한다. 조별리그에서 스페인을 꺾는 등 돌풍의 팀이 되나 했지만, 16강 상대였던 덴마크에게 1-4로 완패하면서 무산된다. 이어지는 두차례의 네이션스컵에서는 각각 준우승, 3위에 그쳤고 주장으로 참가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 스웨덴, 잉글랜드라는 강적들과 묶이면서 죽음의 조에서 조 최하위로 탈락했다.
2004, 200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도 연속해서 3위를 기록하며 3대회 연속 3위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2004년 네이션스컵에서는 대회 1000호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한 바 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출전이 좌절된 상황에서 출전한 네이션스컵 대회 이후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여담으로 오코차는 프랑스에서 귀화요청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4. 플레이스타일
현역 시절 최고의 테크니션이였다. 아프리카 대륙에선 대적할 상대가 없는, 독보적인 공격형 미드필더다.
화려한 발재간은 마치 호나우지뉴를 보는 듯하고, 측면과 중앙을 가리지 않고 상대 선수를 특유의 발재간과 드리블로 제압한 뒤 시도하는 빠른 템포의 강력한 슛이 일품이었다.
장점에 대해서 종합하자면, 흑인 선수 특유의 유연한 움직임과 남미 선수 같은 테크닉, 드리블, 개인기를 갖고 있었으며 어디서든 강력한 슛을 연결할 줄 알았던 선수였다. 특히 테크닉이나 개인기에 대한 이야기를 더하자면, 상당히 화려하다.
신체 어느 부위로도 트래핑을 할 줄 알았으며, 상대 머리 위로 공을 뛰어올려 수비수를 벗겨내곤 했던, 여러모로 호나우지뉴의 선배 격에 해당하는 선수였다.
그러나 다소 자기 중심적인 플레이로 경기를 주도하던 선수였으며, 전체적으로 공격을 조율하는 경기 운영이나 패스 같은 측면에서는 드리블 능력이나, 테크니적인 면만큼 엄청난 편은 아니었다.
5. 여담
- 모국 나이지리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제이제이 오코차 스타디움이 있다.
-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KBS에서 방송한 비바 월드컵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나이지리아 대표팀 전력분석을 하면서 제작진이 훈련을 마치고 걸어가는 나이지리아 대표팀을 촬영했는데 오코차가 한국 방송 제작진들을 보더니 웃으면서 "오, 코리아? 헬로."라고 정감있게 인사를 하고 쿨하게 지나가는 장면이 나왔다.(...)
[1] 물론 독일에서는 카메룬, 가나계 이민자 2세들이 데뷔한 뒤 부모의 국가에서 활약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케빈 프린스 보아텡이나 조엘 마티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