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칸

 


''' 올리버 칸의 역임 직책 '''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
올리버 비어호프
(1998~2000)

'''올리버 칸
(2000~2004)
'''

미하엘 발락
(2004~2010)

'''FC 바이에른 뮌헨 역대 주장'''
슈테판 에펜베르크
(1999~2002)

'''올리버 칸'''
'''(2002~2008)'''

마르크 판보멀
(2008~2011)

''' 올리버 칸의 수상 이력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1999 · 2001 · 2002
'''FIFA 월드컵 골든볼 2002'''
'''FIFA 월드컵 야신상 2002'''


'''베스트팀'''




<color=#373a3c> '''2001 Ballond'or'''
수상
마이클 오언
2위
라울 곤살레스
3위
'''올리버 칸'''
<color=#373a3c> '''2002 Ballond'or'''
수상
호나우두
2위
호베르투 카를루스
3위
'''올리버 칸'''
'''2002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호나우두
2위
'''올리버 칸'''
3위
지네딘 지단

'''2000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로타어 마테우스
(FC 바이에른 뮌헨)

'''올리버 칸
(FC 바이에른 뮌헨)
'''

올리버 칸
(FC 바이에른 뮌헨)
'''2001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올리버 칸
(FC 바이에른 뮌헨)

'''올리버 칸
(FC 바이에른 뮌헨)
'''

미하엘 발락
(바이어 04 레버쿠젠)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96'''

''' 올리버 칸의 기타 정보 '''




'''Fußball-Club Bayern München e.V.'''
<colbgcolor=#dc052d> ''' 이름 '''
'''올리버 칸'''
'''Oliver Kahn'''
'''본명'''
올리버 롤프 칸
Oliver Rolf Kahn
'''출생'''
1969년 6월 15일 (55세) /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카를스루에
'''국적'''
독일 [image]
'''종교'''
가톨릭
'''신체'''
키 188cm|체중 100kg[1]
'''직업'''
축구선수 (골키퍼 / 은퇴)
축구행정가
''' 소속 '''
<colbgcolor=#dc052d> ''' 선수 '''
카를스루에 SC (1975~1987 / 유스)
카를스루에 SC (1987~1994)
'''FC 바이에른 뮌헨 (1994~2008)'''
'''스태프'''
FC 바이에른 뮌헨 (2020~ / 보드진 )
FC 바이에른 뮌헨 (2022(예정)~ / 의장 )
'''등번호'''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 '''[2]
'''국가대표'''
86경기 (독일 / 1994~2006)
1. 소개
2. 클럽 경력
2.2.1. 초창기 (1994~1998)
2.2.2. 전성기(1998~2003)
2.2.3. 황혼기 (2003~2006)
2.2.4. 히츠펠트와의 마지막 2년과 은퇴 (2006~2008)
3. 행정가
4. 국가대표 경력
5. 플레이 스타일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7. 어록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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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독일의 前 축구선수.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분데스리가 역대 최다 클린시트 기록(196회) 보유자이며 한 시즌 최다 클린시트 기록(19경기 무실점/32경기 출전)도 갖고 있었으나 이 기록은 2014/15 시즌에 후배인 마누엘 노이어에게 깨졌다.[3]
레프 야신이 유일한 골키퍼 발롱도르 수상자라면 올리버 칸은 골키퍼로서는 유일하게 발롱도르 포디움에 2년 연속으로 2회나 들었다. 골키퍼라는 포지션을 감안한다면 실로 놀라운 기록. FIFA 올해의 선수에서도 호나우두에 이어 2위를 기록했던 바 있다. 1998~2003년 전성기 시절의 포스는 역대 그 어느 골키퍼도 범접하기 힘든 정도였다.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14년간 429경기에 출장했으며, 카를스루에 SC 시절까지 합치면 분데스리가 557경기에 출장했다. 이는 차범근과 함께 활약했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원클럽맨 카를하인츠 쾨르벨의 602경기와 함부르크 SV의 전성기를 이끈 전설적인 풀백 만프레드 칼츠의 581경기에 이은 분데스리가 최다 출장 기록 3위에 해당한다.
국내에서는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대회 직전 주전 선수들의 대거 부상 이탈과 세대 교체 실패로 '녹슨 전차 군단'이라는 비아냥을 듣던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억지로 끌고 올라가다시피 한 하드캐리로 준우승을 차지했던 활약을 눈앞에서 봤다 보니 잔루이지 부폰, 이케르 카시야스 등과 더불어 인지도가 매우 높다.[4]

2020년 1월부터 FC 바이에른 뮌헨의 보드진 멤버로 합류할 예정이며, 현재 CEO인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의 임기가 끝나는 2021년 12월 31일 이후부터 CEO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2. 클럽 경력



2.1. 카를스루에 SC


1987년 카를스루에 SC 팀에서 데뷔했지만 처음에는 필드 플레이어였다. 이듬해 카를스루에 유스에서 골키퍼로 뛰며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0년, 팀이 분데스리가로 승격한 후 그는 주전 골키퍼 자리를 차지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93-94시즌 칼스루헤는 UEFA컵 준결승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고, 그 과정에서 8강에서 만난 스페인의 명문 발렌시아 CF에게 메스타야 원정에서는 3:1로 패했으나, 홈에서 칸의 환상적인 활약에 힘입어 7:0이라는 믿기 힘든 대승을 거두며 4강에 진출한다.(독일에서는 이를 '''빌트파크슈타디온의 기적'''이라 칭한다.) 1994년에는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에도 발탁된다.

2.2. FC 바이에른 뮌헨


'''2008년 9월 2일, 현역 마지막 경기에서'''

2.2.1. 초창기 (1994~1998)


그의 활약상을 눈여겨 본 독일 최고의 명문 FC 바이에른 뮌헨은 1994/95 시즌을 앞두고 역대 골키퍼 최고 몸값(2.5M)[5]을 들여 칸을 영입한다.
이 당시 조반니 트라파토니, 오토 레하겔 감독 하에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선수단은 내외부로 사건사고와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라이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분데스리가UEFA 챔피언스리그까지 쓸어가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자존심을 구기고 있었다.
칸은 이적 후 거의 모든 경기에 출장하며 당시 FC 할리우드라는 비아냥을 듣던 바이에른의 해이해진 수비진을 휘어잡으며 주전 골키퍼로 군림했다. 그러나 도르트문트에게 2시즌 내리 리그 우승을 내주었고, 오토 레하겔 감독이 경질되고 프란츠 베켄바워가 임시감독으로 부임해 95/96시즌 UEFA컵 결승에서 지네딘 지단의 보르도를 꺾고 첫 메이저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바로 다음 시즌인 96-97 시즌에 칸은 복귀한 트라파토니 감독 하에서 생애 첫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한다. 이듬해에는 뮌헨에서 실패를 겪었던 오토 레하겔의 카이저슬라우테른에게 휘둘리며 리그를 내주었고, 그나마 DFB-포칼을 들어올린다. 그러나 팀의 불성실한 분위기 속에 다혈질의 트라파토니 감독 역시 분노의 인터뷰를 남긴채 떠난다.

2.2.2. 전성기(1998~2003)


그 다음으로 뮌헨에 부임한 감독은 전설로 남은 오트마어 히츠펠트. 그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보드진과의 마찰로 감독직에서 물러나 휴식 중인 상태였다. 히츠펠트가 부임한 첫 시즌부터 향후 몇년간 분데스리가와 유럽 절대강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바이에른에서 칸은 붙박이 주전으로 맹활약한다. 1999년부터는 은퇴 직전의 슈마이켈이나 당시 이탈리아의 신성 잔루이지 부폰, 각각 스페인, 프랑스 최고의 골키퍼 산티아고 카니사레스, 파비앵 바르테즈 등을 모두 재끼고 '''유럽 최우수 골키퍼상을 4년 연속 독차지했다.'''
1998-99시즌 인터밀란FC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CF 등 쟁쟁한 상대들을 상대로 선방 쇼를 보여주며 첫 챔피언스 리그 결승 무대를 밟았으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상대로 한 캄프 누에서의 결승전에서 전반 6분만에 터진 마리오 바슬러의 프리킥골로 앞서가면서 경기내내 맨유를 압도했으나 경기종료직전 두번의 코너킥에서 연달아 실점하며 순식간에 우승컵을 넘겨주고 만다.(영국에서는 이를 '캄프 누의 기적', 독일에서는 '캄프 누의 비극'이라고 명명한다.) 칸은 그나마 슈마이켈을 누르고 처음으로 UEFA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된것에 만족해야했다.
00/01시즌 챔피언스 리그에서 바이에른은 데이비드 베컴,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올레 군나르 솔샤르등이 이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8강에서 만나 홈,원정에서 모두 승리하며 2년전의 패배를 되갚아주며 4강에 진출했고 라울 곤살레스, 루이스 피구가 선봉을 맡은 레알 마드리드 CF를 상대하였으나 역시 홈/원정 모두 승리하며 결승전에 진출한다. 특히 4강 1차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의 경기는 칸의 인생경기 급으로, 거의 하이라이트가 뮌헨vs 레알이 아니라 칸vs레알 마드리드같은 경기가 나왔다. 칸은 무수한 선방쇼를 보여주며 지오반니 에우베르의 결승골을 지켜냈다.
2차전 홈에서도 옌스 예레미스의 프리킥 상황에서의 멋진 골과 지오반니 에우베르의 로빙골로 승리하며 바이에른은 2년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진출한다.
그리고, 칸의 클럽 생활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이 결승전에서 펼쳐진다.
산 시로에서 열린 결승전 상대는 스페인 최고의 스타 멘디에타 등을 앞세운 라리가의 강호 발렌시아였다. 먼저 멘디에타에게 PK골을 골을 먹혔으나 당시 주장이었던 슈테판 에펜베르크도 똑같이 PK골로 갚아주며 동점, 그 후 득점없이 결국 경기는 승부차기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칸은, 무려 3개의 PK를 막아내며 드디어 팀에 빅 이어를 안긴다.[6] 경기 하이라이트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전설의 승부차기 선방'''

'''KAAAAAAAAAHN! DIE BAYERN!!'''

칸은 이 시즌 UEFA 올해의 골키퍼에 선정되었으며 결승전 종료 후 산티아고 카니사레스를 위로한 장면 덕분에 UEFA 페어플레이 상도 함께 수상한다. 칸은 인터뷰에서 '내가 카니자레스를 위로한건 그가 어떤 느낌일지 완전히 이해했었기 때문이다. 2년전의 내가 그랬다'라고 소감을 밝혔다.[7]
[image]
물론 이 때의 공은 주장인 에펜베르크나 에우베르, 리자라쥐, 살리하미지치, 숄, 링케 등 팀원 모두의 공이었지만, 칸의 존재감은 이때부터 본격적이었다. 01-02 시즌 팀은 슈퍼컵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CA 보카 주니어스를 꺾고 인터컨티넨탈컵을 우승했고, 챔피언스리그도 다시 한번 8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만났지만 이번에는 3대2로 아쉽게 탈락, 리그/컵을 각각 도르트문트, 브레멘에 내주며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였지만 올리버칸은 여전히 4년 연속 UEFA 올해의 골키퍼에, 6년 연속 키커 올해의 골키퍼에 선정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리고 02-03 시즌, 리빌딩된 바이에른은 챔스에서는 로이 마카이의 맹폭에 충격의 조별리그 탈락을 겪었지만 다시 한번 리그와 포칼을 동시에 석권하면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2.2.3. 황혼기 (2003~2006)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칸은 부상, 동기부여 부족, 사생활 문제 등으로 침체기를 맞는다. 동시에 세계 골키퍼 원탑의 자리는 결국 지난 시즌 세리에 A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맹활약을 한 아주리 군단유벤투스 FC잔루이지 부폰이 차지하게 된다.
03-04 시즌에는 16강에 진출했으나 레알 마드리드 CF에게 합계 2대1로 패했다. 하필이면 이 경기에서는 칸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뮌헨이 전체적으로 부진하던 와중에서도 홈에서는 나쁘지 않은 경기력으로 레알을 거의 꺾었으나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그리 좋지 못한 프리킥을 쉽게 막아놓고선 캐칭실수로 알까기를 내줘 동점골을 허용, 1대1 무승부로 끝나게 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포칼도 3부리그팀 아헨에게 16강에서 발목잡히는 등 수난끝에 히츠펠트 감독도 경질되고 말았다. 물론 한시즌만에 폭망한 것은 아니고 여전히 유럽 정상급 키퍼 중 한명으로 활약했고 매 시즌 소수점대 실점률을 기록했으나 2000년대 초반같은 무적의 포스는 희미해지고 있었다. 칸은 이듬해 펠릭스 마가트 체제에서 04-05, 05-06 분데스리가, 포칼 2년 연속 더블 우승을 기록하는데 맹활약했다. 특히 2시즌 연속 DFB-포칼 결승에서 각각 샬케 04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상대로 엄청난 선방들을 보여주며 타이틀을 방어했다.

2.2.4. 히츠펠트와의 마지막 2년과 은퇴 (2006~2008)


2006-07시즌 바이에른은 03-04시즌 못지않은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 전반기 팀은 강등권과 승점 4점차이나는 나락까지 떨어진데다 후반기에도 승격팀 보훔에게 0대0 무승부를 하는 등 졸전이 이어지자 2007년 1월, 펠릭스 마가트 감독은 경질되었고, 바이에른의 영광의 시대를 이끌었던 오트마어 히츠펠트가 다시 부임했다. 챔스는 인터 밀란을 누르고 1위로 진출했는데 하필 조 2위로 올라온 파비오 카펠로레알 마드리드 CF를 16강에서 만나고 말았다. 칸은 이케르 카시야스와 선방쇼 대결을 펼치며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데이비드 베컴'''의 프리킥을 환상적으로 슈퍼세이브해내는 모습을 보여줬다. 바이에른은 레알을 원정다득점으로 꺾었지만 8강에서 천적 AC 밀란을 만나버리며 탈락했다. 나락까지 추락했던 팀은 차츰차츰 순위를 올렸지만 4위로 마감하며 UEFA컵으로 좌천되는 수모를 겪는다.
커리어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7/08 시즌, 칸은 히츠펠트 체제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바이에른의 더블을 이끌고 명예롭게 은퇴했다. 38세의 나이로 맞는 마지막 시즌까지도 소수점대 실점률로 방어해 냈으며, DFB-포칼에서 1라운드부터 4부리그 소속 SV 바커 부르크하우젠에게 뜬금 무승부를 거두며 승부차기까지 갔는데 여기서 2개의 슛을 슈퍼세이브 해내며 팀을 구해냈다. 더비 라이벌 관계인 TSV 1860 뮌헨과의 8강전에서는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PK 획득에 기여하는 롱패스를 성공시켰다. 결승전에서 클루게의 슛을 슈퍼세이브하는 등 커리어 마지막 순간까지 클래스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칸은 은퇴까지 무려 197회의 클린싯으로 역대 분데스리가 골키퍼들 가운데 가장 많은 클린싯을 기록했다. 2008년 5월 17일 헤르타 BSC를 4대1로 꺾은 리가 34라운드 마지막 경기가 칸의 공식전 은퇴전이 되었다.
그리고 2008년 9월 2일,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올리버 칸의 고별전으로 FC 바이에른 뮌헨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간의 친선전에서 은퇴경기를 치르며 수많은 바이에른 팬들의 기립박수와 눈물속에서 칸은 그라운드를 떠났다.[8]
칸의 은퇴 후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어서 바이에른은 한동안 꽤 죽을 쒔다. 한스 외르그 부트의 회춘으로 2009-2010 시즌에 어떻게든 다시 우승은 했지만 골키퍼 문제는 여전히 불안요소였다. 프런트의 신뢰를 받았던 젊은 골키퍼 미하엘 렌징은 팬들에겐 전혀 신뢰받지 못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방출. 그 후 루이 반 할 감독을 비롯 바이에른 프런트는 역시 어린 선수인 토마스 크라프트를 신뢰하며 밀어주는 모습을 보였지만 렌징 수순을 타더니 역시 방출. 2011 시즌에 FC 샬케 04마누엘 노이어를 대체자로 영입했고, 노이어를 통해 비로소 바이에른은 골키퍼 문제를 해결했다. 노이어는 이적하자마자 1011분 무실점 기록으로 칸의 1004분 기록을 경신했고, 28세때 109회의 클린싯을 달성해 칸의 최다 클린싯 기록도 경신할 수 있을것으로 보인다. 칸도 인터뷰나 해설중에 간간히 언급하는걸 보면 노이어의 활약상에 흡족하신 모양.[9] '''그리고 2021년 1월 24일 17시 18분, 분데스리가 2020-2021시즌 18라운드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이 FC 샬케 04 원정 경기에서 4-0으로 클린시트로 끝내서 대승을 거둠과 동시에 마누엘 노이어는 423경기만에 올리버 칸의 기록[10]를 넘어서게 되었다.'''
여담으로 올리버 칸은 독일이 2014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자 인터뷰에서 그는 발롱도르 받을 자격이 있다고 크게 칭찬도 해줬다.

3. 행정가


5년 계약을 맺으며 2020년 1월 1일부터 이사회의 멤버로 활동 할 예정이다.
2021년 12월 31일 임기가 끝나는 루메니게의 후임으로 FC 바이에른 뮌헨 A.G의 이사장으로 취임할 예정이다.
보드진에 합류한 이후로 뮌헨 경기를 루메니게와 함께 직관하러 다니고 있다. [11]
2020년 2월 29일 호펜하임전에서 뮌헨 원정팬들이 호펜하임의 구단주를 모욕하는 걸개를 보이자 본인이 직접 관중석으로 걸어가 팬들에게 자제해달라고 부탁 했다.[12]
현재 보드진으로 올라와서 한지 플릭 감독과 토마스 뮐러의 재계약에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티아고와 재계약에 근접해있고, 재계약 협상이 시원찮던 노이어와도 긍정적인 대화를 통해 풀고 있다고 한다. 결국 노이어도 재계약을 체결하며 칸은 부임 이후 감독, 주장, 부주장과의 재계약을 모두 성공시키는 행보를 보였다.
칸이 팀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부임한지 반 년 만에 팀이 트레블을 달성해버리며 그 역시 칭찬을 듣고 있다.

4. 국가대표 경력



4.1. 1994 FIFA 월드컵 미국


1994년 자신의 첫 메이저 대회인 미국 월드컵에 참가했지만, 이 때는 보도 일그너, 안드레아스 쾨프케라는 이미 정상급 골키퍼가 2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3rd 골키퍼였기 때문에 참가에 의의를 두었다. 조예선 상대에 대한민국도 있었기 때문에 이때는 알려지진 않았지만 대한민국과 칸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이때 그는 독일을 상대로 후반전이나마 몰아붙이는 한국의 투지와 정신력에 감탄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 예선 상대였던 대한민국에도 역시 3rd 골키퍼였던 한 대학생 선수가 있었는데, 그 선수는 공교롭게도 독일전 후반전에 최인영과 교체 출장하여 선방한다. 그 둘은 8년 뒤 국대 주전으로 팀을 이끌며 야신상을 두고 경쟁하며 4강전에서 조우하게 된다.'''

4.2. UEFA 유로 1996


두번째 메이저 대회인 유로96에서는 주전 골키퍼인 보도 일그너가 불참했지만 세컨 키퍼였던 쾨프케가 주전을 차지[13], 역시 선배에게 밀려 서브 키퍼로 참가했다. 하지만 독일은 이 대회에서 결승전에서 체코를 꺾고 앙리 들로네 컵을 들어올렸다. 칸의 첫번째 국가대표 메이저 대회 트로피였다.

4.3.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쾨프케가 이 대회에서도 주전을 차지하며 칸은 '''또''' 서브 키퍼로 참가한다.
하지만 칸에게는 이 대회를 계기로 지금보다 더 힘든 길을 걷게 될 상황에 처한다. 영원할 줄 알았던 조국의 영광과 전력이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조예선에서 여타 대회와는 다르게 그다지 속 시원한 경기를 펼치지 못했고 16강전 멕시코전에서는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가기까지 하더니 결국 8강전에서 곪았던 고름이 터지고 만다. 처녀 출전국이자 이제 갓 만들어지기 시작한 나라인 크로아티아에게 0:3으로 완패해 시작 전 상대를 '코딱지만한 나라' 라고 비하하면서까지 임했던 경기에서 망신을 당한다. [14]
힘과 제공권을 앞세운 단단한 분업 축구를 장점으로 하던 독일 축구에 한계가 찾아온 것이다.
독일 국대의 주장 슈테판 에펜베르크는 4년전에 법규를 시전하는 바람에 국대에서 영구 퇴출당했고, 여전히 주전이었던 공격수 위르겐 클린스만은 3골을 넣었지만 노장축에 들어선 선수였고, 마테우스, 콜러, 헬머, 부흐발트 등의 주전선수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축구 역사에서 가장 커다랗고 꾸준한 발자취를 남겨왔던 독일은 '''전대미문의 침체기'''를 맞이한다.
독일은 충격에 휩싸였고 위기를 깨닫고 본격적인 개혁에 나선다. 이 대회를 끝으로 쾨프케는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으며 칸은 전차군단의 새 문지기가 된다. 하지만 조국의 영광을 다시 되찾아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어깨에 짊어지고 시작한 것이다.

4.4. UEFA 유로 2000


칸이 주전으로 나선 첫번째 메이저 대회. 2년 전과는 다르게 독일에는 새로운 젊은 선수들이 많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포르투갈, 잉글랜드, 루마니아와 한 조가 된 독일은 첫 경기 루마니아전에서 선제골을 내 주면서 끌려가다 숄의 중거리 골로 겨우 비기더니, 이전까지 강한 면모를 보여준 잉글랜드에게는 0대 1 패배, 그리고 마지막 포르투갈전에서는 세르지우 콘세이상에게 해트 트릭을 내 주면서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광탈하고 만다. 칸은 콘세이상의 2번째 골을 알까기로 내주는 수모까지 당한다. 분데스리가 우승은 물론 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거머쥔 칸이지만 여전히 세계축구의 흐름에 떨어지는 국대의 전력앞에선 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독일은 본격적으로 '''녹슨 전차 군단'''이라는 조롱까지 받아가며 그렇게 힘겨운 부진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4.5.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image]
칸이 주전으로서 참가한 첫 번째 월드컵.[15] 그러나 지역 예선에서 철천지 원수 잉글랜드에게 1:5로 패배[16]하는 등 여전히 전세계의 시선은 독일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세계무대에서도 당당히 존재감을 자랑할 수 있었던 선수는 칸과 미하엘 발락 기껏 둘 뿐이었고 나머지 선수들은 그저 그런 A~B급 선수였다.[17] 대회 전 그들은 여전히 '녹슨 전차 군단' 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삿포로에서 열린 조예선 첫 번째 경기에서 독일은 사우디아라비아를 8:0으로 인정사정 없이 발라버리며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다음 아일랜드 전에서는 로비 킨의 두 번의 1대1 상황과 문전 헤딩을 모두 환상적으로 선방해내며 1:0 승리를 지키나 싶었으나 후반 인저리 타임에 한순간의 침투에 동점골을 내주며 비겼다. 이것이 독일과 칸에게는 결승전 전까지 상대에게 허용한 '''유일한 실점'''이었다.[18] 다음 카메룬 전에서는 발라크와 클로제의 활약으로 깔끔하게 2:0 승리를 거두며 16강행을 확정지었다.
16강전 파라과이, 8강전 미국, 4강전 대한민국. 모두 독일의 그물을 가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칸은 엄청난 활약으로 무수히 많은 슛을 막아낸다. 특히 미국전에서 랜던 도노반을 필두로한 미국의 끈질긴 공세를 홀로 모조리 막아낸 칸의 활약은 전율 그 자체. 적어도 축구팬들은 이 대회만큼은 '''수비수인 골키퍼'''가 팀을 이끌고 결승으로 계속 밀어올리는, 레프 야신 이후로 다시는 보기 힘들지 모르는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19] 칸은 타국의 골키퍼는 물론이요 필드 플레이어조차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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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시 4강에서 그의 대활약상을 더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2002년 월드컵을 시청한 사람은 그의 환상적인 선방을 아마 잊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전반 7분 이천수의 논스톱 슛을 동물적인 반사신경으로 붕 날라 한손바닥으로 쳐냈던 것과 이천수의 크로스를 마치 매트릭스같이 뒤로 날아올라 라인 바깥으로 쳐낸 선방, 송종국의 슛을 세컨볼 없이 막아낸 선방 등. 후에 이천수가 소회하길 2002년 당시 당돌했던 이천수는 어느 누구와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고 그 생각대로 4강까지 진출했고 위의 움짤의 슈팅을 찼을 때에도 100% 골이라고 확신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칸의 선방에 의해서 막히는 순간 '아 오늘은 질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고 한다.
결승전에선 카푸와의 충돌로 손가락 골절 부상을 당했음에도 끝까지 경기에 임했다. 이후 이 부상 여파로 인한 치명적인 캐칭 미스로 호나우두에게 선제골과 추가골을 내주며 2:0으로 패해 우승컵과 스포라이트를 브라질에게 뺏겼지만, 그는 누구도 이견을 낼 수 없는 대회 최고의 선수였다. 경기 도중 손가락 부상의 영향으로 첫 골을 먹히게 된 것도 있는, 칸의 입장에서는 운이 없었던 측면이 있는 건 사실이나 어쨌든 수상 당시 논란이 있었는데, 당시 골든볼 투표는 하프타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20] 전반전을 무실점으로 막은 칸이 수상할 수 있었고, 만약 경기 종료 후 투표를 실시했다면 호나우두가 골든볼을 탔을 것이란 얘기도 만만치 않게 나왔다. 이 때문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2006 월드컵부터는 골든볼 투표를 하프타임이 아닌 후반전 종료 후에 실시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그런데 기껏 바꿔놨더니 지단이 골든볼 투표 1위를 한 상태에서 연장전에 박치기로 퇴장당해서 또 모양새가 이상해지긴 했지만...
이 대회에서 올리버 칸은 야신상[21][22]과 골든볼[23]을 모두 석권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역대 월드컵에서 골키퍼로서 골든볼(혹은 MVP)를 받은 선수는 칸 뿐이다. 심지어 야신상의 기원이 되는 선수인 레프 야신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한일 월드컵에서의 활약 덕에 FIFA 올해의 선수 2위에 올랐으며, 발롱도르도 2년 연속 최종후보 3인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FIFA 올해의 선수 최종 3인에 들거나 발롱도르 최종후보에 2년 연속으로 이름을 올린 골키퍼는 칸이 유일하다.''' 이는 지금 우리가 최고의 골키퍼를 논할때 언급되는 이케르 카시야스잔루이지 부폰, 페트르 체흐조차 이뤄보지 못한 업적이다.

4.6. UEFA 유로 2004


2년 전의 대성공으로 독일은 자신감을 되찾았지만 칸과 발라크의 투맨쇼에 힘입은 성과라며 여전히 의문을 보내는 시선도 줄지 않았다. 위르겐 클린스만, 올리버 비어호프 이후 대형 골잡이와 창의적 미드필더의 부재, 수비진의 노쇠화 등등 여전히 약점이 많은 독일이었다.
칸은 네덜란드전부터 꾸준히 좋은 선방을 보여 줬지만 체코와 네덜란드에게 밀리며 독일은 조 예선에서 또다시 탈락하고 만다. 네덜란드전에서도 칸의 경기내내 선방쇼에 힘입어 겨우 무승부를 한데 이어 최약체 라트비아에게마저 무재배를 하며 탈락 위기에 처한다. 최종전 체코전에서 미하엘 발라크의 멋진 선제골로 앞서가지만 곧바로 2골을 내주며 역전당해 2무 1패로 탈락하고 만다. 결국 루디 푈러 감독은 경질되었다. 이들에게 고전한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축구 역사에 변변한 발자취도 남긴 적이 없는 처녀 출전국인 라트비아에게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경기력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4.7. 2006 FIFA 월드컵 독일


루디 푈러의 후임으로 온 감독은 무려 칸과 같은 시기에 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던 젊은 초짜 감독 위르겐 클린스만이었다. 클린스만은 안드레아스 쾨프케 골키퍼 코치와 의견 충돌을 일으키면서까지 칸이 아닌 옌스 레만에게 골문을 맡기려고 했고, 칸 또한 역시 한 성깔 하는 레만과 신경전을 벌이며 주전 자리 수호를 위해 애썼다. 하지만 레만이 아스날에서 챔피언스리그 10경기 연속 클린시트로 연속 무실점 기록을 갈아치우는 등 승승장구하는 사이 칸은 전성기보다 못 미치는 활약으로 인해 결국 뺏긴 주전을 다시 되찾아 오지 못하고 세컨드 키퍼로 조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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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에게 어울리지 않는 벤치에 쓸쓸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팬들은 매우 익숙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회가 다가오면서 현실을 받아들이며 후보로써도 최선을 다하는 프로로써의 정신을 보여주었고 아르헨티나와의 8강 경기 승부차기 직전에 레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독려하는 진정한 프로의 자세를 보여주기도 한다.[24][25] 서로 미소와 악수를 교환하는 모습은 훈훈함 그 자체. 멋진 남자 칸.
월드컵 마지막 경기인 포르투갈과의 3,4위전에선 주장완장을 달고 주전 골리로 출전하였다. 파울레타데쿠의 페널티박스 안 슛팅은 물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프리킥까지 쳐내는 등 훌륭한 선방들을 보여주며 결과적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그래도 역시 아쉬운지 말없이 잔디 위를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그라운드를 둘러보기도... 그리고, 녹슨 전차군단의 오명을 받던 2000년대의 독일을 대표하는 선수로써 지난 영광의 세월을 뒤로 하고 월드컵 3,4위전을 끝으로 독일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4년뒤에 비슷한 모습이 만들어졌다. 독일은 똑같이 스페인에게 0:1로 지는바람에 이때와 똑같이 3,4위전에 진출했는데 이 당시 주전으로 미친 활약을 보여주던 노이어한스외르그 부트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하였다.

5. 플레이 스타일




가히 ''''짐승''''[26]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반사 신경을 활용한 선방, 박스 장악력, 최후방에서 아군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리더십, 그리고 불 같은 성격과는 반대로 필드 위 페널티 박스 안에서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판단력과 무시무시한 카리스마까지 갖춘 선수였다.
골키퍼로써로도 적당한 키에 공중볼 처리도 아주 능했으며 중거리 슛도 잘 막아냈다. 특히 1:1 상황에서 굉장한 능력을 보여 줬는데 그의 침착함과 민첩성이 이를 뒷받침했을 것이다. 또 반사 신경도 매우 뛰어나서 매번 탄성이 절로 나오는 슈퍼 세이브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공이 애매하게 오는 상황에서도 서슴없이 몸을 날려서 막아내는 투지도 겸비하고 있었다.
골키퍼이긴 하지만 골킥이나 패스를 할때 항상 오른발로 차고 거의 왼발을 못쓰는 수준이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 FC 바이에른 뮌헨 (1994~2008)
    • 분데스리가: 1996-97, 1998-99, 1999-2000, 2000-01, 2002-03, 2004-05, 2005-06, 2007-08
    • DFB-포칼[27]: 1997-98, 1999-2000, 2002-03, 2004-05, 2005-06, 2007-08
    • DFB-리가포칼: 1997, 1998, 1999, 2000, 2004, 2007
    • UEFA 챔피언스 리그: 2000-01
    • UEFA컵: 1995-96
    • 인터컨티넨탈컵: 2001

6.2. 개인 수상



7. 어록


'''"스포츠맨이라면 지는 법도 배워야 한다. 비록 후보로 벤치에 앉을지라도 월드컵에 출전하여 나의 경험으로 후배들에게 힘이 되겠다."'''

- 자국에서 열린 2006년 월드컵에서 결국 경쟁에 밀려 세컨 키퍼로 이름을 올렸지만 프로정신을 지키겠다며 언급했던 말

'''패자전은 없다.'''

Es gibt keinen

'''"실점은 수비수 탓이다."'''


8. 여담


  • 상당히 다혈질이라고 한다. 근데 그런 다혈질도 이 사람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는정도.
  • FM2007에서는 리더쉽 20의 막강능력치를 보여준다(기타 신체능력도 마흔에 가까운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수준급). 여담이지만 풋볼 매니저에서는 자신의 본명을 올리기 보다는 자신의 라이벌인 옌스 레만과 자신이 인터넷에서 아이디로 쓰는 mustermann을 합쳐서 jens mustermann을 자신의 호칭으로 써달라고 하였다고. 버젼마다 좀 달라서 본명인 올리버 칸이 올라오기도 하지만 저 이름이 보인다면 그건 올리버 칸이다.
  • 경영학 석사 학위가 있으며, 주식투자에도 조예가 깊다. 은퇴 후 ZDF에서 주로 A매치나 메이저 대회 경기들의 해설을 맡았다. 목소리도 제법 세련되고 깔끔하다.
  • 인상적인 일화로는 일본에서 어린이 10명과 PK를 치뤄 골이 들어가는만큼 한 골당 100만 엔씩 주최 기업 측에서 기부를 한다는 내용의 자선 행사에 참여했다. 물론 사람들은 그가 대충 봐주리라 생각했지만 차는 족족 모두 막아내어 결국 한 골도 허용하지 않았고 '아무리 가벼운 놀이용 게임이라도, 내가 지키는 골대에 골이 들어가게 할 순 없다'며 모두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다들 벙쪄있는 찰나 '하지만 기부는 꼭 해줘'라며 자기 명의의 1천만 엔짜리 수표를 꺼내 사인을 하고 기부함에 넣었다는 훈훈한 이야기.
  • 저런 일화와는 대조적으로 사생활은 깔끔하지 못하다. 아내가 임신 중이었음에도 다른 여자를 끼고 을 마시기도 했다.
  •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내한 당시 베지밀을 마시고 신이 내린 음료라 격찬하고 박스째로 구입해 독일로 공수했다는 루머가 있다.

  • 2001년 FC 한자 로스토크와의 리그 경기 중 2:3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경기 종료 마지막 코너킥 상황에 상대편 골로 쇄도하여 펀칭으로 골을 넣은 기행을 벌인 적이 있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실수로 손에 맞았거나 한 것도 아니고 아예 손을 뻗어서 말 그대로 펀칭을 해버린다. 결국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고, 경기 후 키퍼가 골 에어리어에서 펀칭을 하는 게 뭐가 문제냐라고 하기도. 그게 상대편 골 에어리어라서 문제였지...물론 정말 모르고 그랬을 리는 없고, 퇴장을 당한 후에 씩 웃으며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98-99 시즌 후반기 도르트문트 원정에서 상대 공격수 스테판 사퓌자에게 옆차기를 날리고[28] 헤어초크의 목을 물어뜯는 시늉을 해[29] 빈축을 샀다. 이후 도르트문트 팬들은 홈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경기할 때 칸에게 바나나 껍질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풍습은 현재 뮌헨의 수문장인 마누엘 노이어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의 인상적인 활약으로 일본에도 팬이 많다. 팬이 많다기보단 뭔가 네타 요소로 활용되고 있다는 게 정확한 것 같지만... 독일 국가에 맞추어 바나나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감격의 매드무비가 유명.
  • 성질머리와 카리스마, 박스 장악력은 세계 최강이다만... 칸의 유일한 천적은 칸 이전의 바이에른의 주장이었전 슈테판 에펜베르크. 그에게 훈계를 하다 역으로 사자후 관광을 당한후 순한양이 된 칸의 모습이 나름대로 개그다.[30][31][32]
  • 은퇴 후에는 해설가로 활약 중이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우루과이의 16강전 ZDF 중계의 해설을 올리버 칸이 했었는데, 경기 후 칸은 '비록 경기는 우루과이가 승리했으나 진짜 축구를 한 쪽은 대한민국이었다'라고 애정어린 인터뷰를 했다. 그러나 루이스 수아레스의 환상적인 감아차기 결승골을 두고 정성룡 골키퍼의 경험 부족을 간접적으로 언급하며 아쉬워했는데, 그 상황에서 수아레스가 찰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골키퍼는 그걸 알았어야 했다고 인터뷰했다.
  • 현역 시절에 가장 위대한 선수는 당연히 호나우두라고 했지만 가장 악몽같은 선수는 바로 수페르 피포 필리포 인자기.[33]
  •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바이에른 뮌헨의 클럽하우스를 찾아왔을 때, 지붕 위에서 누군가가 던진 물벼락을 맞고 말았다. 범인은 바로 꼬마거인.
  • 2000년 4월 12일 SC 프라이부르크 원정 경기에서 골킥을 차던중 프라이부르크 관중석에서 날아온 골프공에 관자놀이를 맞았다. 칸은 피치에 쓰러졌고 간단한 부상 치료 후 담담하게 다시 골문 앞에섰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자마자 그의 통제력은 끝났고 광분하며 프라이부르크 관중들과 선수들에게 화를내며 욕을 했다고 한다. 당시 팀 매니저였던 울리 회네스가진정 시키려했지만 실패했다. 당시 감독이였던 오트마어 히츠펠트는 공이 좀더 옆으로 갔으면 눈에 맞아 실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2001년에는 팀에게 4분 챔피언이라는 극적인 리그 우승과 긴장감 넘치는 승부차기 끝에 빅 이어를 안겨주면서 발롱도르 3위를 차지하고, 2002년에는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활약하면서 조국에게 준우승을 안기고 본인은 골키퍼로서는 현재까지 유일무이하게 월드컵 골든볼과 야신상을 동시에 수상하고 발롱도르 3위와 FIFA 올해의 선수 2위를 기록하면서 당대 최고의 골키퍼라는 것을 증명했지만 정작 이 두 해에 있었던 UEFA 올해의 팀 골키퍼 자리에 본인은 선정된 적이 없었고, 그 이후에도 선정된 적이 없었다. 또한 FIFA/FIFPro 월드 XI에도 단 한 번도 선정된 적이 없었다.[34]
  • 분데스리가, UEFA 챔피언스 리그, FIFA 월드컵과는 좋은 인연이 있었던 반면에 유난히 UEFA 유로와는 좋은 인연이 적었다. UEFA 유로 1996은 조국이 우승했지만 본인이 주전이 아니었고, UEFA 유로 2000UEFA 유로 2004에서는 본인의 활약 이전에 조국인 독일의 전력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아서 조별리그에서 광탈당하고 말았다. [35]
  • 은퇴하고 나서는 에펜베르크와 같이 불같은 성격이 많이 가라앉은 듯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송 타야 되니까...
  • 2020년에 바이에른 뮌헨 보드진에 합류한다는 소문이 있다. 그리고 구단의 공식발표를 통해 단순한 소문이 아닌 사실로 밝혀졌다. 2022년부터는 바이에른 뮌헨의 CEO로 활약할 예정.
[1] 선수 시절 93kg.[2] 후보로 출전한 1994년 월드컵에서는 22번을, 그리고 유로 1996/1998년 월드컵/2006년 월드컵에서는 12번을 달았다.현재는 노이어 의 등번호[3] 노이어는 무려 20경기 무실점/32경기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2015/16 시즌에 또 노이어가 기록을 경신했다! 리그 마지막 경기인 하노버전에서 노이어가 무실점으로 틀어막다 교체된 후에 스벤 울라이히가 실점을 하여 통계를 내는 곳마다 다르지만 대부분의 경우 21경기 무실점/32경기 출전으로 집계했다.[4] 2002, 2006, 2010년에 야신상을 수상하게 되는 이 3명의 월드 클래스 골키퍼는 모두 2002년에 한국을 상대했다. 칸은 그 셋 중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게,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한국을 압도하는 경기력을 한참 선보여 키퍼가 돋보일 일이 비교적 적었지만 칸은 한국을 상대로 졸전을 펼친 독일에서 거의 유일하게 빛난 선수 중 하나였기에 더욱 눈에 띄었다. 특히 이천수의 다이렉트 슈팅을 한 손으로 막아내는 장면을 회자하며 "독일 골키퍼만 아니었으면 한국이 결승에 갔을 것"이라 회자하는 팬들도 많다.[5] 지안루이지 부폰유벤투스 FC 이적 당시 5.2M으로 기록이 경신됨.[6] 경기가 끝난 후 통곡하는 상대 키퍼 산티아고 카니자레스를 위로하는 훈훈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카니자레스가 통곡한 이유는 그 전 시즌 준우승팀도 발렌시아였기 때문...[7] 칸의 바이에른은 2년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상대로 압도적인 경기를 펼치고도 후반 추가시간이었던 46분, 48분에 세트피스 상황에서 연달아 실점, 눈앞에서 우승컵을 뺏기며 종료 직후 바이언 선수들이 운동장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연출된 적 있다.[8] 이 때 칸이 교체아웃되면서 은퇴식이 열렸고, 영국의 성악가 폴 포츠가 초청되어 Time to say goodbye를 라이브로 불렀다.[9] 여담으로 노이어는 샬케 시절 올리버 칸의 코너 플래그를 뽑는 세리머니를 따라하면서 뮌헨을 조롱한 적이 있다. 그래서 처음에 노이어가 뮌헨에 왔을때 우리 레전드를 조롱한 선수가 어떻게 레전드의 후계자가 될 수 있나며 반대하던 팬들도 상당했다. 노이어가 잘하면서 그런 얘기는 쏙 들어갔지만.[10] 196경기[11] 여담으로 칸이 경기를 보러오면 이상하게 노이어가 클린시트를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팬들은 농담삼아 올리버 칸이 경기를 보러 안 왔으면 좋겠다고 하는 중.[12] 실제로 미국의 폭스 스포츠 해설자 왈: "저기 올리버 칸이 걸어오는군요. 저라면 저 분한테는 함부로 대들지 않을 겁니다."(...)[13] 참고로 쾨프케가 일그너보다 선배다.[14] 처녀 출전국이긴 했지만 크로아티아 전력은 구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 갈라져 나온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다보르 슈케르와 로베르토 프로츠네스키, 즈보미디르 보반 등은 이미 유럽 명문클럽의 핵심 선수들이었다.[15] 동시에 로타어 마테우스의 은퇴로 주장자리도 물려받았다.[16] 이 경기는 약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잉글랜드 축구 팬이 독일을 조롱하는 데 꺼내는 1등 떡밥이다. 이때 유니폼에 이 날의 날짜와 득점을 적어놓은 프린팅을 정식으로 발매해서 팔았을 정도. 얼마나 많이 찍어내 팔았는지 한국에서도 상설 같은 데 자주 보였다. 더구나 이 경기의 주심이 그 유명한 이탈리아의 피에르루이지 콜리나 심판인데 이 심판이 독일의 경기를 진행하면 승률이 상당히 낮은 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해당 경기였고 결국 패했다.[17] 바이에른의 전설의 테크니션 메멧 숄과 차세대 에이스 제바스티안 다이슬러, 수비의 핵 옌스 노보트니 등 그나마 이름값 있는 주전들이 대회 전에 대거 부상당했고, 이 대회에서 5골을 넣으며 깜짝 스타가 된 미로슬라프 클로제는 대회 전까지 조국에서도 '대체 이 선수를 왜 뽑았냐.'라는 비판을 듣는 선수였다.[18] 참고로 이 골을 넣은 선수는 그 옛날 이영표와 같이 토트넘 홋스퍼 FC에서 활약했던 로비 킨.[19] 뭐 엄밀하게 따지면 더 찾을 수 있기는 하다. 단적으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파라과이 전력의 과반수 이상이라고 불리던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같은 경우라거나. 하지만 이때 파라과이는 16강에서 탈락. 굳이 비슷한 사례로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준우승팀 아르헨티나의 세르히오 고이코체아가 대표적인데, 워낙 대표팀에 최종보스가 있어서 스포트라이트가 쏠리지 않았지만, 이때 아르헨티나는 8강전과 4강전 연속 승부차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으며, 이는 역시 고이코체아의 미친 퍼포먼스 덕분에 이룬 성과였다. 물론 이 때의 마라도나의 활약도 대단했지만 말이다.[20] 이전 1998년 프랑스 월드컵까지는 결승전 시작 전에 이루어졌다.[21] 결승전이 열리기 전 수상이 확정되었다. 경쟁자였던 이운재의 대한민국과 뤼슈튀 레츠베르터키가 4강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확정이었기 때문.[22] 결승전에서 멀티골을 넣고 대회 8골을 넣은 호나우두가 골든볼을 수상할 수도 있었지만 골든볼 투표 마감이 결승전 하프타임까지여서 호나우두가 두 골을 넣기 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의 골든볼 수상에 이견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가히 절대적인 활약이었다.[23] 실버볼은 호나우두, 브론즈볼은 홍명보.[24] 이 때문이었을까, 레만은 승부차기에서 에스테반 캄비아소와 로베르토 아얄라의 PK를 멋지게 막아내며 팀에 승리를 안긴다. [25] 2010 남아공 월드컵 때 안정환 역시 이 때의 칸처럼 벤치에만 앉은 상태임에도 어린 후배들을 독려하고 하나로 뭉치게 하는 대선배의 모습을 보였다.[26] 칸은 자신을 일컬어 '내가 집에서 기르고 있는 짐승(...)'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27] 역시 숄과 더불어 개인 통산 최다 포칼 우승기록이었으나 13-14 시즌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7회 우승을 달성하며 최다 우승 기록을 넘겨줬다. 필립 람 또한 2016년 우승으로 7회 우승을 기록했다.[28] 경기가 과열된 상황에서 사퓌자가 오프사이드가 선언됐음에도 멈추지 않고 달려오자 빡친 칸이 옆차기를 날렸다. 직접적인 가격은 아니었고 살짝 스치는 시늉만 했기에 카드는 안 나오고 주의로 끝났지만...[29] 역시 경기가 과열된 상황에서 골대 바로앞에서 칸이 공중볼을 잡으려할때 헤어초크가 칸을 밀어 골을 넣으려하자 빡친 칸이 뺨과 목을 물어뜯는 제스쳐를 취했다.[30] 근데 에펜베르크와 찍힌것중 칸 뒷모습 사진을 보면 관광당하는거 같지만 옆에서 본 사진은 그냥 둘다 포효하면서 기뻐서 미쳐 날뛰고있는 사진이다.[31] 그래도 실제로 에펜베르크의 포스에 칸도 긴장빨았던건 사실. 특히 인터뷰때 에페가 기자 말을 잘 못알아듣자 칸이 말해주려하는데 '넌 입좀 다물어'라고 쏘이며 관광당한 일화도 있다.[32] 또한 2001년 분데스리가 우승을 확정지은 4분 챔피언 사건 당시 뮌헨이 마지막 순간에 얻은 간접 프리킥을 칸이 에펜베르크보고 자기가 차게 해달라고 했는데, 에펜베르크가 미쳤냐는 식으로 노려보니까 조용히 수비벽에 가서 서있기도 했다...[33] 왜 썅욕나오는지는 인자기의 바이에른 뮌헨 전적에서 4경기를 치뤘는데 총 합쳐서 7골의 득점력을 보여 줬다. 왜 싫어하는지에 대한 답이 여기 있다. 사실 키퍼 입장에서도 어디 있는지 모르게 가만히 있다가 툭 튀어나와서 골 넣는건 무진장 싫을 것이다.[34] 물론 UEFA 올해의 팀은 2001년부터 시행되었지만 선정 방식이 그저 인터넷 팬투표로만 선정이 되는 방식이어서 실력과 카리스마로 팬도 많았지만 여러 가지 구설수도 같이 있었던 칸인 만큼 안티도 많았던(.....) 그가 투표에 안 좋은 영향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는 점과 FIFA/FIFPro 월드 XI은 애초에 세계 최고의 골키퍼 자리를 잔루이지 부폰, 페트르 체흐, 디다 등에게 넘겨주었던 2005년에 처음 시행되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35] 노이어는 월드컵 우승 경력은 있지만 유로 경력은 최고 기록이 4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