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해안경비대

 

1. 개요
2. 역사
3. 기구도(1947.02.08.당시)
4. 주요 인물


1. 개요


[image]
조선해안경비대 모표 재현도[1]
+3 朝鮮海岸警備隊
Korean Coast Guard[* 현 [[대한민국 해양경찰청]]은 "Korea Coast Guard라고 번역한다.]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으로 1945년 11월 창설된 해방병단의 후계 조식으로 조선경비대 예하에 놓인 해상 전력이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9월 5일 해군이 창설되면서 발전적으로 계승했다.

2. 역사


1946년 6월 15일 통위부(統衛部)[2] 예하로 설립되었다. 주요 주체는 해방병단(海防兵團)과 미군정청 산하의 남조선해안경비국이었다. 광복후 조직된 해사대(海事隊)와 이를 발전시킨 해방병단은 도서와 해안의 경비를 맡았다. 해사대는 1945년 8월 21일 훗날 초대 해군참모총장이 되는 항해사이자 수입식품 사업자였던 손원일과 윤치창에 의해 설립되었고 해방병단은 1945년 11월에 설립되었다. 해방병단은 일본군이 남긴 시설을 인수하고 조함창(造艦廠)을 세워 폐선을 수리하고 취역하였다. 그러면서 인원을 1천명 가량 확보하였다. 조선경비대 외에는 각종 군사조직들이 미군정청의 인정을 받지 못 한 것과 달리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일본군 해군의 주축이자 브레인 격인 항해병과엔 일본인 순혈주의가 심각해 한국인들이 거의 들어가지를 못 했다는 점과[3] 만주군 해군은 있으나마나였고 광복군엔 해군이 없었고 중국군 쪽에도 해군이 영 부실해서 초창기 해군에 군경력자라고는 일본 해군에서 (항해병과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시다바리격인 육상근무자 출신 및 일본군과 만주군의 육군 출신들 뿐이었는데, 이들은 항해와 함정 분야에 대해선 문외한이어서 한국 해군의 핵심 수뇌부가 아닌 주변적인 존재들이었고 수뇌부는 군 출신보다는 민간 상선사관 출신 위주여서 핵심 수뇌부에 일본군 경력자가 적었기 때문이 아니었나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단 해방병단이 완전히 사설조직인 건 아니다. 1945년 11월 미군정청 운수부장인 칼스텐 육군 소령이 경남 진해의 해안 및 도서 순찰을 맡을 인원을 민간에 요청하면서 생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외부에 아웃소싱 용역으로 만든 집단이 정규군이 된 셈이다. 손원일 제독은 처음에 해군이 아닌 해안 경비대라는 사실에 반발했으나, 미군정청이 차후 해군으로 격상시켜 준다고 약속하자 이를 수락했다.
새로이 편성된 조선해안경비대는 1946년 1월 14일에 사설기관으로 만들어놓은 해방병단 본부를 소급해서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부로 개칭하였고 같은 해 9월에 미합중국 해군으로부터 상륙정 2척과 소해정 등을 받았다. 1947년엔 한국의 주요 항구에 기지를 세웠고 1948년 정부 수립 직전까지 3천명의 인원과 함정 105척을 확보하였다. 1948년 9월 5일에 대한민국 해군이 되었다. 해군 창설 이후에도 한동안 해경의 업무도 병행하다, 1953년에 내무부 치안본부 예하로 대한민국 해양경찰청의 전신인 해양경찰대가 설립되자 일부 해안경비업무와 치안유지업무를 해양경찰대로 이관하였다.
창설 초반엔 미군정 산하 육군 장교들이 와서 육방부스러운 마인드를 뽐냈는데, 이는 미 군정청이 기본적으로 미 육군 24군단 인원들로 편성되어 위관급이나 영관급 장교들이 중앙과 지방 행정관료 노릇을 했던 탓이다. 결국 바다에 대해선 자기들보다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불필요한 간섭과 통제만을 일삼던 미 육군 장교들에 실망한 손원일 제독이, 그나마 말이 통하던 칼스텐 소령에게 요청하여 고문들을 해안경비대 장교와 부사관들로 교체토록 했고, 이들은 조선해안경비대에 매우 열정적으로 지원과 협조를 해 줬다고 한다. 미 해안경비대는 오늘날까지도 자신들이 신생국의 해군이 된 해안경비대 창설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자부심으로 삼고 있으며, 홈페이지 등에도 자료 사진 등을 게시하고 있다.
창군 인사들은 해군부를 설립하길 원했으나 미국에서도 육군부와 해군부가 국방부로 통합되던 터라 한국에서도 국방부가 창설되었고 해군부는 설립되지 않았다.
해안경비대 군악대를 창설할 때, 음악가이자 제주 4.3 사건의 학살자 중 하나인 탁성록이 참여한 바 있으나, 그의 범죄들은 국방경비대 장교가 된 이후에 벌였고, 해안경비대에 참여한 기간도 짧아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장교로서 힘을 쓰기 힘든 군악 쪽에 계속 종사했으면, 마약 중독 말고는 문제없이 살다 사람도 안 죽이고 갔을 것이니 되려 안타까운 부분일 수도 있다.

3. 기구도(1947.02.08.당시)



4. 주요 인물



[1] 실제 모표는 아니고, 재현한 모습이다. 원본은 모두 자수로 수놓아져 있다.[2] 국내경비부(國內警備部)라고도 하며 미군정청에서 국방부 역할을 했다.[3] 일본해군병학교는 종전시까지 식민지 및 외국인 생도를 일체 받지 않아 장교가 될 가능성이 없다시피했고, 수병에 한하여 1943년부터 조선인 지원자를 모집했다. 그나마도 사보타주 등을 우려해 함정이 아닌 육상경비대 등 육상근무에 배치했다. 이들 일본 해군 출신 육상경비대원들은 만주군 육군 출신들과 함께 훗날 대한민국 해병대의 창설 주체가 된다. 비록 해군에서 근무했다고는 하나, 해병대는 함정 운용에 관여하지 않고, 대신 상륙작전이나 항만 해안 경계 등 해군이 필요로 하는 지상전에 종사하므로, 기능적으로 합리적인 인사이기도 하다. 공군 전역자라도 헌병 출신이라 전투기는 먼발치에서 구경만 한 사람을 항공사에서 정비사로는 안 쓰겠지만 보안부서에선 채용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