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안성캠퍼스

 


'''관련 문서'''
서울특별시 소재 대학의 서울 외 캠퍼스

1. 안성캠퍼스의 탄생
2. 안성캠퍼스의 단과대학
2.1. 생명공학대학
2.2. 예술대학[1]
2.3. 예술공학대학
2.4. 공과대학
2.5. 체육대학
2.6. 중앙대학교의 현실적인 문제
3. 신캠퍼스 추진
4. 캠퍼스 명칭변경
5. 교통수단
5.1. 버스
5.2. 철도
6. 건물
6.1. 정문 및 출입구
6.1.1. 등용문(정문)
6.1.2. 후문
6.1.3. 서문
6.1.4. 쪽문
6.2. 600번대 (음악학부, 전통예술학부 교사동 지역)
6.2.1. 601 교직원회관 1관
6.2.2. 602 교직원회관 2관
6.2.3. 603 교직원회관 3관
6.2.4. 604 평생교육원
6.2.5. 605 제1음악관
6.2.6. 606 제2음악관
6.2.7. 607 영신음악당
6.2.8. 608 국악관
6.2.9. 609 산학협력관
6.2.10. 610 학생복지관
6.2.11. 611 학생회관
6.3. 700번대 (기숙사 지역)
6.3.1. 701 예지 1동
6.3.2. 702 예지 2동
6.3.3. 703 예지 3동
6.3.4. 704 명덕 1동
6.3.5. 705 명덕 2동
6.3.6. 706 명덕 3동
6.3.7. 707 학생후생관(학생식당)
6.3.8. 708 생활복지관
6.4. 800번대 (주요 단과대 교사동 지역)
6.4.1. 801 중앙문화관
6.4.2. 802 교수연구관
6.4.3. 803 조소관 2관
6.4.4. 804 조소관 1관
6.4.5. 805관 공연영상관 1관
6.4.6. 806관 공연영상관 2관
6.4.7. 807관 공예관
6.4.8. 808관 조형관
6.4.9. 809 생명공학관 1관
6.4.10. 810 원형관
6.4.11. 811 창업보육관 1관
6.4.12. 812 선수생활관
6.4.13. 813 대학교회
6.5. 900번대 (체육대학 및 학교 본부동 지역)
6.5.1. 901 본관
6.5.2. 902 중앙도서관
6.5.3. 903 승차장
6.5.4. 904 생명공학관 2관
6.5.5. 905 생명공학관 3관
6.5.6. 906 창업보육관 2관
6.5.7. 907 수림체육관
6.5.8. 908 (청룡)체육관
6.5.9. 909 실험농장
7. 그 외 시설
7.1. LMO연구 유리온실
7.2. 버스차고지
7.3. 수상무대 & 청룡호수
7.4. 이내창열사 석조반신상
7.5. 청룡광장
7.6. 금잔디동산
7.7. 중앙마루
7.8. 가온광장
7.9. 대운동장
7.10. 골프장
7.11. 야구장
7.12. 축구장
7.13. 드론 실습장
7.14. 옥외변전소
8. 주변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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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맵 경기도 안성시에 위치한 중앙대학교이원화 캠퍼스에 대해 서술하는 페이지.

1. 안성캠퍼스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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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조감도

우리 대학은 10년 앞을 내다보고 있다.(중략) 일부 대학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 '''서울캠퍼스'''는 '''대학원 중심대학''', '''산학협동 중심대학'''으로 꾸려나갈 방침이다. 따라서 '''안성'''이 '''메인캠퍼스'''가 될 것이다.(1980년 3월 6일 이석희 총장 신년 인터뷰)[3]

안성캠퍼스의 설립은 1970년대 지방 분권화를 목적으로 각 유명 대학들에게 지방 분교를 만들라는 압박[4]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안성캠퍼스의 역사는 타 대학의 분교 설립과 구분되는 큰 차이점이 있는데 대부분의 대학들이 본교를 그대로 유지하고 별도의 분교를 창설했지만, 중앙대학교는 '''서울에서 안성으로 본교를 이전'''하기 위한 과정 중 안성캠퍼스를 설립하게 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서울캠퍼스에서 안성캠퍼스로 농과대학과 예술대학을 우선 이전 시킨것도 본교 이전을 염두에 둔 여러 과정중에서 진행된 하나의 행동이었다. 안성캠퍼스가 세워진 이후에도 총학생회 및 각종 학생회는 서울캠퍼스와 공동으로 주최하였으며, 서울캠퍼스와 안성캠퍼스의 총학생회를 분리한것은 학생회칙 개정안이 나온 1987년 11월인 한참 뒤였다. 이전까진 양 캠퍼스에서 1명의 총학생회장을 뽑은 후 총학생회장이 선출되지 않은 캠퍼스에서 부총학생회장을 뽑아 총학을 운영하는 부총학생 회장제를 도입했다.[5] 총장도 마찬가지다. 양 캠퍼스에서 총장을 선출한 후 총장이 선출되지 않은 캠퍼스에서 부총장을 뽑았다. [6]
왜 하필 이렇다 할 특징도 없고 서울에서 멀기만 한 안성에 캠퍼스를 위치시켰느냐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시 정부는 수도권 과밀억제 정책을 강하게 펴고 있었는데[7], 그로 인해 경기도를 5대 정비지역으로 나누게 된다. 이 정책에 따라 서울시는 물론 경기도에서도 정비촉진구역[8], 개발억제지역[9], 개발유보지역[10], 자연보호지역[11]으로의 대학 설립 및 캠퍼스 이전은 불허되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제2캠퍼스 설치지역은 개발'''유도'''지역인 경기 남부[12] '''군''' 지역인 용인군, 화성군, 안성군 등의 지역 아니면 아예 경기도 밖[13]으로 한정되었다. 당시 제2캠퍼스 설치지역은 위에 언급한 군 지역, 그것도 땅값이 저렴한 농촌지역으로 주로 선정되었는데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가깝지만 개발이 덜 된 용인군이 인기가 좋았다.[14] 대표적으로 경희대학교[15], 한국외대, 명지대, 강남대[16] 등.[17][18]
그리고 안성은 1970년대 이전만 해도 '''경기남부 최대'''[19]의 도시였다. 안성시장은 전국 3대 시장으로 손꼽힐 정도로 번화했다. 당시엔 먹고사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으나 안성과 평택, 이천은 경기 남부의 곡창지대로[20]서 굶을 일이 적었고, 특히 전국의 모든 공산품이 몰려드는 안성시장이 위치한 안성은 이 중에서도 부유한 도시에 속했다.[21] 지금은 안성에 전철이 없지만 당시 안성엔 안성선 철도가 지나가기도 했다.[22] 철도가 갈라놓은 안성과 평택의 미래 안성선 철도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배경 사유에 불과하다. 알려진 직접적 사유는 당시 중앙대학교 총장이었던 '''임철순씨의 결정''' 때문이다. 임철순 총장이 안성에 캠퍼스를 추진한 이유는 총장 스스로가 '''수도권의 개념을 확대'''해 보았기 때문이 첫째고, 둘째는 제2캠퍼스를 추진하면 '''학생수를 더 늘려 모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안성시에는 임영신 여사[23]가 소유한 500평 규모의 포도밭도 있었다. 이러한 배경을 사유로 안성에 캠퍼스 건립을 추진 했다는것이 공식적 이유다.[24]
1980년 3월에 발표한 이석희 총장의 신년 인터뷰처럼 안성에 서울캠퍼스의 모든 학과를 내려 보내기 전, 우선 '''농과대학과 예술대학을 먼저 이전'''시킨 이유는 '''농과대학'''의 경우 대학의 규모 및 연구역량을 확장케 한다는 표면상의 이유[25][26][27]와 함께 농과대학을 한독낙농시범목장이 있는 안성으로 이전시켜 시너지 효과를 내게 하면 박정희 대통령 눈에 긍정적으로 띌 수 있을것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이다.[28][29][30] 정치에 욕심이 있었던 임철순 총장은 국회에 입성하기 위해선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애지중지했던 '''한독낙농시범목장'''[31]에 주목하게 된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굶어죽는 사람은 없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새마을운동을 활발히 추진했던 때였다. 이러한 활동의 연장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독일 친선방문때 서독 카를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에게 "우리 국민도 우유 한번 마음껏 마셨으면 좋겠다. 자라나는 대한민국 아이들에게만은 영양분이 많은 우유를 충분히 먹이고 싶다" 라는 말로 설득해 1969년 10월 11일 안성에 한독낙농시범목장을 건립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 목장은 대한민국 축산업 발전이라는 큰 꿈을 가지고 세워진 시설이라 대통령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32]
'''예술대학'''의 경우 4년제였던 서라벌예술대학과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의 통합으로 '''단과대 덩치가 감당 못할 정도로 커졌지만'''[33] 협소한 흑석동 캠퍼스는 이 인원을 모두 포용할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공간문제'''가 불거져 학교가 매우 소란스러웠다. 이런 소란이 점점 커져 학생들의 다툼으로까지 발전하자 본부는 어떻게든 이 정원을 처리 할 방법이 필요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예술대의 안성 이전이 우선해 결정 되었다. 또한 규모가 컸던 예술대학을 내려 보냄으로서 빠르게 안성캠퍼스의 재학 학생수 증가를 도모 하는것도 가능했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원래 계획은 안성캠퍼스로 모든 중앙대 학과가 이전하여 '''서울캠퍼스'''는 '''연구 중심''', '''산학협력 중심''', '''대학원 중심'''의 캠퍼스로 만들고 '''안성캠퍼스'''는 '''메인 캠퍼스'''로 만들려고 했다. 때문에 농과대학과 예술대학을 먼저 내려보내고[34], 차후 서울의 모든 학과를 안성으로 이전시킬 계획이었다. [35] 그런데 문제가 터지게 된다. 1984년 서울캠퍼스 문리과대학 불어불문학과와 일어일문학과의 폐과를 시발점으로, 우선 문리과대학을 안성캠퍼스에 옮기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불어불문학과와 일어일문학과 학생들은 본부 앞에서 농성하게 된다. 그 후 1984년 10월 12일 문리과대학생 250명이 앞서 농성하고 있던 불어불문학과와 일어일문학과 학생들과 함께 대학본부로 진입하는 본격행사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 과정 중에 학생들의 진입을 막는 교직원들에게 돌을 던져서 홍기택 경제학과 교수 및 교직원 5명이 돌에 맞아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또 수백명이 던지는 돌팔매질에 본부의 모든 유리가 깨져 건물이 폐허가 된다. 그리고 학부모 50명까지 동반해 본부 점거에 나서자 본부에서 며칠간 나오지 못했던 이석희 총장은 탈진해 중앙대 부속 필동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때문에 총장 및 교무위원 모두가 2일뒤에 전원 사퇴하고 서울캠퍼스에서 안성캠퍼스로의 중앙대학교 본교 이전이 무산되었다. [36][37][38]그리하여 안성캠퍼스는 조성 당시 신설된 사회과학대학, 외국어대학, 가정대학과 서울캠퍼스에서 이전해 간 농과대학, 예술대학을 포함한 제2캠퍼스로 본격적인 역사의 첫발을 떼게 되었다.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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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성캠퍼스의 단과대학



2.1. 생명공학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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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생명공학대학의 전신은 1968년 개설된 농과대학이며, 약 50년의 세월동안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과 여러 연구활동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과 및 행보를 보여왔다. 또한 중앙대학교 '''생명공학대학'''의 연구역량은 중앙대 전체 학과와 비교 해봐도 손에 꼽을 정도로 매우 탁월하다.
최근의 성과만 보아도 생명공학대학은 2019년 '''QS세계대학평가'''에서 '''중앙대 최초'''로 농/임학 분야에서 '''150위권'''에 진입하는 기염을 토했으며[40], 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가 평가하는 '''산업계관점 대학평가'''에서도 매년 좋은 성적을 얻고 있다. 2014년엔 대학자체평가에서 중앙대 전체 학과 중 유일하게 동물생명공학과가 최우수 등급을 받기도 했다. 2015년 대학자체평가에서는 사범대학과 함께 '''생명공학대학이 자연계열 유일'''하게 최우수등급을 획득하기도 했다. 또한 우수등급에 생명공학대학의 학과들이 대다수 포함되었다.
'''산업계관점 대학평가'''에서 생명공학대학은 2016년 식품분야에서 식품공학부가 '''최우수''' 등급을 획득했으며, 2019년엔 바이오의약분야에서 시스템생명공학과가 '''최우수'''등급을 획득하기도 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마련한 기금으로 생명공학대학은 2014년에 CAU식품안전연구센터를 개소했고, 2016년 4월엔 CK-II 특성화 동물실험센터도 유치하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BK21+사업에 생명공학대학 식품안전특성화 전문인력양성팀이 선정되어, 7년동안 36억을 지원받기도 했다. 2018년엔 생명공학대학 생명환경연구원이 이공분야 대학중점연구소로 지정되 50억을 지원받는다.
생명공학대학에서는 중앙대학교 100년 역사 중, 총 5명도 안되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도 배출해 냈다. 또한 초대 한국동물생명공학회 회장 및 초대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장도 모두 생명공학대학에서 배출 되었다.

2.2. 예술대학[41]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은 '''중앙대 예술대'''와 1953년 개교한 '''서라벌예술대'''와의 통합으로 현 모습을 갖추게 된 역사성이 있다. 당시 규모에서나 학문 분야에서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선두주자였다. 특히 '''연극영화학과'''와 우리나라 최초로 개설된 '''문예창작학과''' 및 '''사진학과'''의 명성은 지금도 대단하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은 대한민국에 몇 안되는 '''종합예술대학'''으로 예술에 관한 모든분야가 망라되어 있는 단과대학이다. 때문에 예술에 관한한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중앙대 출신의 예술인은 반드시 있으며, 해당 분야에서 늘 두각을 나타내는 강한 면모를 보인다.
2019년 4월엔 사진학과를 졸업한 김경훈 기자가 한국인 사진기자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2019년 10월엔 전통예술학부를 졸업한 송가인이 자랑스러운 중앙인상을 수상하며 예술대학의 품격을 한층 더 높이는데 일조했다.

2.3. 예술공학대학


예술공학대학은 원래 본부가 프라임사업에 지원하면서, 예술대학의 정원을 빼내 설립하려는 계획으로 출발한 단과대학이다.[42] 문제는 프라임사업 수주에 실패한 이후에도 이 단과대학을 설립하는 작업은 계속 추진되었으며, 당시 대학본부는 이 단과대학을 설립할때 어떤 비젼이나 방향을 가지고 만들겠다는 로드맵을 밝힌것도 아니었다. 또한 안성캠퍼스의 남아있는 학과들과 이 단과대학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본부의 해명도 없었다. 때문에 단과대 신설을 의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43] 학내에선 단순히 예술대의 규모를 줄이는 구조조정의 연장이라 생각하여 잡음도 있었다.
결국 예술공학대학은 서울캠퍼스에서 교육부의 제재를 받아 넘겨받게 된 정원[44]과, 안성캠퍼스 예술대학 정원을 일부 떼어내 합한 정원을 가지고 신설되게 된다. 사실 예술공학대학은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완전한 신설 형태로 탄생된것은 아니다. 예술공학대학의 전신이라 할만한 학과가 이미 중앙대에 있었다. 서울캠퍼스 창의ICT공과대학의 융합공학부에 있던 디지털이미징전공이 바로 그것이다. 예술공학대학이 설립되게 되면서 서울캠퍼스의 디지털이미징전공은 폐과되었고, 교수들은 소프트웨어학부, 첨단영상대학원 혹은 예술공학대학으로 분리되어 배치되게 되었다.[45]

2.4. 공과대학


2021년 공과대학 첨단소재공학과가 안성캠퍼스에 신설되며 공과대학도 안성캠퍼스에 위치하게 되었다.

2.5. 체육대학


1998년 비교적 늦은 시기에 설립 되었지만 체육대학은 시작부터 비범한 행보를 보였다. 2005년에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실시한 체육학 분야에서 전국 '''69개 체육대학 중 최우수대학'''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사실 중앙대학교 '''체육인의 역사는 꽤 오래 되'''었는데, 체육대학의 개설시기와 중앙대 체육인의 오랜 역사는 잘 매치되지 않아 혼동하는 사람도 많다. 이것은 중앙대가 경희대처럼 캠퍼스별로 나뉘어 있는 체육관련 학과를 통합하지 않고[46], 각각 나누어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47] 체육대학이 설립된 이후엔 매체에 보이는 중앙대학교 체육인 관련 기사는 대부분 체육대학 재학생 혹은 졸업생들이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중앙대학교 체육대학'''의 활약상은 여기를 참조하기 바란다.

2.6. 중앙대학교의 현실적인 문제


중앙대학교의 모든 문제는 '''대학재정위기''' 문제에서 출발했다 보아도 된다.
1970년대 말 중앙대학교가 안성에 본교를 이전하기 위해 서울캠퍼스의 부지를 파는 조건으로 대출을 받았고, 담보로 서울특별시 필동에 있었던 중앙대학교 병원을 지정했었다. 그 후 서울캠퍼스의 학과를 안성캠퍼스로 하나 둘 이전 시키며 서울캠퍼스의 규모를 점차적으로 줄이는 작업에 들어갔었다. 임철순 이사장은 그렇게 하여 서울캠퍼스에서 발생되는 가용부지를 조금씩 팔아 안성캠퍼스를 조성하기 위해 빌린 대출을 갚는다는 전략을 짰었다. 그러나 엄청난 반발속에 임철순 총장이 중앙대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 뒤를 이은 이석희 총장 및 교무위원도 극심한 반발로 1984년에 전원 사퇴하게 된다. 이와는 별개로 위 본문에서 언급했던것 처럼 임철순 이사장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는데 정치에 입문하면서 불거져 나온 여러 의혹과 함께 중앙대학교가 서울캠퍼스 부지를 팔지 못하게 되면서 갚지 못하게 된 대출문제가 합쳐져 학교 안팍이 극심한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하여 1987년 재단의 비리 및 부도를 촉발한 부정예탁사건과 관련하여 중앙대의 부채가 700억에 달한다는 부채의 내용, 필동병원이 담보로 제공된 이유등을 소명하라는 학내의 시위로 학교 안팍이 매우 소란스러웠다. 이런 문제로 대학이 부도 위기에 처하자 1987년 10월 재단 이사진은 모두 사퇴하고 대학이 재일교포 김희수씨의 금정(金井)기업에 넘어가게 된다. 당시 김희수 사장은 중앙대학교를 인수하자 마자 700억에 달하는 빚을 1년만에 모두 청산했다. 대학을 인수하며 김희수 이사장은 "5년동안 1천억원을 투자해 아시아최고 대학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공약을 했다. 또한 김희수 사장은 중앙대학교 이사장의 취임식때 학교 발전 마스터 플랜이란 5개년 계획도 만들어 추진하게 된다. 이 계획에 따라 서울캠퍼스는 각 단과대학은 독립건물을 가지고 중앙도서관은 새롭게 신축하며 기숙사 건립을 추진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안성캠퍼스도 서울캠퍼스와 같은 3천석 규모의 대형 도서관과 기숙사를 가지는 방침이 추진 되게 되었다. 메디컬캠퍼스의 설치를 줄기차게 주장했던 의과대학도 이 계획에 따라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부지에 중앙대학교 병원을 설립하는 안이 추진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약속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의문이 들었고 대학의 인수과정도 석연치 않다는 문제를 제기한 총학생회는 1988년 10월 12일에 본관을 점거하고 재단 인수과정상의 의혹을 해명할것을 요구하며 밤샘 농성을 벌였다. 김희수 이사장은 약속대로 1989년부터 대대적인 투자를 진행하여 서울캠퍼스에선 전산센터, 법과대학 강의동, 경영대학 강의동, 대학원건물을 신축하고 안성캠퍼스에선 생활관과 건설대학관, 산업대학관, 교수숙소등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1992년부터 '''일본에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침체기가 시작되며 재일교포였던 김희수 이사장의 사업도 힘들어지게 되었다. 때문에 학교 계획에 따라 건물을 짓는데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또 협소한 서울캠퍼스 부지에 단과대학 건물 이외의 별도 건물을 짓는것은 불가능했다. 건물 건축과는 별개로 학교의 운영까지도 어려워지자 본부는 연구중심 대학이 되겠다는 포부와는 별개로 학과 신설을 통한 정원 증원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그래서 1987년부터 97년까지 서울캠퍼스는 667명의 정원이 증가하고, 안성캠퍼스에는 466명이 증원되었다. 1997년 11월에는 제1캠퍼스에 사회학과, 민속학과, 법학과를 2캠퍼스에는 사회체육학부 야간과정을 신설하며 전체 입학정원을 317명 늘렸다. 이렇게 학교 재단이 어려워지자 문제해결의 방법을 학생정원 증원에서 찾으려 했고, 더이상의 건물건축 없이 학생숫자만 증원하자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전 학과에서 공간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학교측에선 인원 증가는 중앙대학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원동력이 될것이라고 설명했으나, 학생회는 증원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학교에서 명확한 제반대책을 마련해야 된다고 맞섰다. 이때 아무런 제반시설 없이 학생수만 증원되다 보니 빈 교실이 있다면 어떻게든 우겨 넣기식으로 강의가 진행되는 아주 혼란한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 문제는 이 시기에 IMF까지 닥친것. 중앙대 내부의 문제도 버거운데 나라까지 휘청하자 학교의 존립을 걱정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48] 이때부터 본부가 본격적으로 대학의 입학정원을 줄여서라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내야 한다며 정부사업을 수주하는데 필사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1998년에 시작한 정원 조정은 서울캠퍼스와 안성캠퍼스 교수 및 학생들 거의 대다수가 개혁의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했던 조정이라, 두산이 재단에 참여한 이후 진행한 구조조정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어쨌든 이 개혁은 법인의 상황이 좋지 않아 시작된 개혁이었기 때문에 구조조정에 대한 이해는 했어도, 문제를 촉발한 재단에 대한 미움이 대단했기 때문에 잡음이 많았다.
이 어려운시기에 중앙대학교 10대 총장으로 취임한 이종훈 박사는 취임초 '''신 르네상스 운동'''을 발표한다. 신 르네상스 운동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예산편성 과정'''과 '''학문 구조조정'''으로 나눌 수 있다. 예산편성 과정에 따른 경영합리화 차원의 구조조정계획은 5단계로 진행 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중앙대 전체의 예산편성은 20% 줄이고 부서를 통폐합하여 고정 지출을 줄이는것이 목적이었다. 이때 학문 구조조정을 통해서 방대했던 학문단위를 줄이고 '''학문간의 벽을 허문다'''는 이론을 본격적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49] 그리하여 이때부터 중앙대 전체에 계열별 모집단위가 시작되게 된다.
본격적인 정원조정은 2000년도 부터 시작했는데, 1999년 10월 14일 중앙대학이 교육부에 제출한 2000년도 '''모집단위 입학정원 조정안'''에 따르면 20명의 입학정원을 줄이고(전자전기공학), 140명의 야간대학 학생을 주간대로 바꿔 선발한다고 되어 있다. 이때 중앙대는 '''모집단위 감원''', '''모집단위 정원조정''', '''모집단위 분리'''라는 3가지 영역으로 정원을 축소했다. 덕분에 교육인적자원부가 내놓은 입학정원 감원 부분을 충족하여 BK21사업에 참여해 예산을 따내기도 했다. 한마디로 입학정원을 마일리지로 돈을 받아온 것이다.[50]
2004년은 교육부가 사립대학의 입학정원을 8만명 가량 줄이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할 때인데[51] 이때 중앙대학교는 특성화정책에 연계하여 교육부의 '''수도권대학 특성화 지원사업'''에 지원하게 된다. 당시 교육인적자원부가 내놓은 당근은 총 800억에 달하는 예산지원이었고, 개혁성과에 따라 각 대학들에 지원되는 예산규모는 해마다 증액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런 지원을 받으려면 사립대학의 경우 입학정원의 약 10%나 달하는 인원을 감축 해야했고, 전임교원도 65%나 확보해야 했다. 법인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었던 대학은 교육인적자원부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했다. 학내 여론은 서울캠퍼스와 안성캠퍼스의 유사 중복학과를 없애서라도 이 돈을 타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안성캠퍼스와 서울캠퍼스의 중복 유사학과가 이때 통폐합 되었다.[52] 학교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 통합은 서울캠퍼스와 안성캠퍼스 모두에 어느정도 환영을 받았다.[53][54] 이런 구조조정으로 인하여 중앙대학교의 전체 입학정원은 110명 감축되었고, 감축된 정원은 모두 안성캠퍼스의 입학정원으로 충당되었다.[55] 이러한 노력(?)덕분에 대학은 2004년에 수도권 특성화 사업에 선정되어 4년간 160억을 지원받게 되었다. 하지만 대학은 2005년 10월 5일 교육인적자원부가 발표한 '''구조개혁 선도대학'''에는 선정되지 못했는데, 당시 선정된 대학들이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 경희대, 이화여대, 인하대등 총 8개대학이라 경쟁대학에 밀린것이 아닌가란 말이 많았다.[56]
중앙대학교의 구조조정은 12대 총장인 '''박범훈''' 박사가 취임한 이후로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57] 박범훈 총장은 2006년 '''대학특성화 지원사업'''에 참여하기 위해서, 210명의 입학정원을 줄이는 정원 및 모집단위 조정안을 교육인적자원부에 제출하였다. 이 지원사업에 뛰어들기 전 특성화 구조개혁 위원회 회장이었던 박범훈 총장을 중심으로, 기획조정실장, 동창회장, 교수협의회장, 노조위원장, 양캠 총학생회장, 대학원 총학생회장이 모여 구조개혁을 논의하였다. 논의 결과 양캠 18개 단대와 1개 대학원, 2개 전문대학원, 11개 특수대학원에서 자발적인 구조개혁 제안서를 제출 받기로 했다. 그리고 제출된 제안서에 따라 차후 교육부로부터 지원을 받는다면 평가 점수에 따라 차등 투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편 교육인적자원부의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선 대학 전체정원의 10%를 감축한다는 계획이 기본 전제였기 때문에 이 정원을 어떻게 줄일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처음 계획은 모든 단과대학에 일정부분 공평하게 같은 퍼센트로 입학정원을 줄이자는 합리적인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학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학교는 이 정원을 안성캠퍼스의 입학정원으로만 충당하여 감축했다. 이때부터 안성캠퍼스엔 '''공동화 문제'''가 슬슬 불거지기 시작했다.[58]
다행히(?) 2006년 10월 31일, 06년도 구조개혁 선도대학 지원사업에 중앙대가 선정되어 3년간 90억5100만원을 지원받게 되었다. 이 지원을 받기위해 서울캠퍼스는 41명의 정원이 감축되는데 그쳤으나 안성캠퍼스에선 350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입학정원이 감축되게 된다.[59] 이 돈은 2004년부터 추진되었던 교육단위 구조개혁의 연장으로, 주로 안성캠퍼스의 학과 및 입학정원을 폐과 혹은 감축했기에 받아낼 수 있었던 안성캠의 피땀방울이었다.[60] 한편, 독어학과와 불어학과 등 폐과된 학과의 학생은 통합된 1캠 학과에서 수업을 진행하였는데, 전부터 공간이 협소했던 서울캠퍼스에 갑자기 공간이 생겨날리 만 무리했다. 이때 본격적으로 공간문제에 대한 갈등이 노골적으로 표출 되었으며 서울캠퍼스의 공간 협소문제를 안성캠퍼스 학생들에게 전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61]
김희수 이사장의 양아들을 자처했다는(?) 박범훈총장은 2008년 두산에 대학을 넘기다시피 하게된다. 표면적으론 대기업에 학교가 넘어가면 앞으로는 돈걱정은 안해도 된다는 생각에 안성캠퍼스의 시련은 다들 끝난 줄 알았다. 당시 박범훈 총장은 두산에 3가지 핵심요구안을 요청했다는데, 그 안건 중 '''하남 글로벌캠퍼스'''건이 안성캠퍼스에 독이 든 성배가 될 줄은 그 당시엔 잘 몰랐다.[62] 아무튼 2008년 재단이 두산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2010년부터 거의 매년마다 안성캠퍼스에 구조조정이 진행되게 된다. 당시 18개 단과대학과 77개 학과가 10개 단과대학과 46개 학부(과)로 통폐합되는데 문제는 이렇게 통폐합된 단과대의 대부분이 안성캠퍼스 소재 단과대였단 것이다.[63] 또한 대학 동문과 교수, 총동문회가 배제된 상태에서 두산은 철저하게 기업중심의 구조조정을 대학에 도입하는데[64] 대학의 특성을 모두 무시한 기업적 컨설팅 업체의 시야 속에서, 수많은 학문들이 취업과 대학평가 등수에 도움이 안된다는 이유로 폐과 및 통폐합의 재물이 되었다. 때문에 매년 학교에선 구조조정 반대 집회가 열렸다. 그래봐야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폐과된 학과의 학생들은 결국 뿔뿔히 흩어졌지만... 이사장어록
본분교 통합 뒤에는 캠퍼스별 고정되어 있던 법적 정원을 지키지 않아도 되면서 본부는 더욱 노골적으로 안성캠퍼스의 입학정원을 줄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안성캠퍼스의 줄어든 입학정원은 고스란히 서울캠퍼스 입학정원으로 이전 되었다. 이 작업은 본분교 통합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작업이다. 또한 본분교 통합 이후 대학정원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한 캠퍼스에 올인한 대학은 중앙대학교가 유일하다.[65] 2013년엔 '''이용구''' 박사가 총장으로 임명되며 안성캠퍼스엔 더욱 가혹한 구조조정이 닥치게 된다. 당년 5월 27일 중앙대학교 본부가 발표한 학문단위 및 정원 재조정 결과에 따르면, 서울캠퍼스의 입학정원은 2,903명에서 3,265명으로 상승하고, 안성캠퍼스의 입학정원은 1,715명에서 무려 362명이나 줄어든 1,353명으로 결정된다. 아무튼 이 계획에 따라 본부는 2015년에 재정지원을 위한 대학구조개혁평가를 자발적으로 신청하게 되고[66], 이행해야 할 입학정원 감축분을 안성캠퍼스에서만 줄이게 된다. 2014년엔 교육부에서 진행한 수도권대학 특성화 사업(CK-2)에 참여하면서 148명의 정원을 감축하였는데 이 정원도 안성캠퍼스에서만 줄인 것이다. 또한 이 사업에서 가산점을 얻기위해 2017년에 추가로 37명의 입학정원을 감축했는데 역시나 이 정원도 안성캠퍼스 입학정원이다.[67] 덕분에 이 사업에서도 중앙대는 예산을 따내게 된다.
한편 이렇게 혼란한 시대에 박범훈 총장과 두산이 체결한 MOU의 하나였던 하남캠퍼스의 추진도 가시화 되었는데, 이 캠퍼스를 추진하는 주요 목적은 '''안성캠퍼스 소재 학과들의 정상화'''가 아닌 '''서울캠퍼스의 부족한 공간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 주요한 캠퍼스 추진 이유였다. 안성캠퍼스의 학과를 올려 보내는것은 나중의 문제고 서울캠퍼스의 학과를 어떻게든 내려보내 자연과학계열 캠퍼스로 만드는것이 본부의 관심사 였기 때문에 본부는 어떻게든 서울과 가까운 위치에서만 캠퍼스 부지를 알아보는 행보를 보였다.[68] 그래서 하남캠퍼스[69]가 무산되자 곧바로 알아본 것이 검단쪽 캠퍼스였다. 하지만 안성캠퍼스의 부지를 팔아 다른곳의 교지를 마련 하려던 법인의 단순한 생각은 교육법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단순히 캠퍼스를 옮기기만 하려해도 안성캠퍼스와 동일한 면적의 대체 부지가 있어야하나 서울근교에 이렇게 넓은 대학부지를 마련하는것은 불가능했다. 안성캠퍼스의 학과나 정원 이전을 추진 하려면 안성 지역주민들과도 타협해 양보와 이해를 이끌어 내야했지만, 번개불에 콩볶듯이 추진한 본분교 통합[70]때문에, 안성 주민들의 반대를 누그러뜨릴만한 충분한 시간을 본부가 가지지도 못했다.[71] 결국 주위의 격렬한 반발과 생각보다 부실한 두산의 자금 사정 때문에 중앙대학교의 제3캠퍼스 추진은 아예 흐지부지 되었다. 신캠퍼스 추진단도 해체되어 지금은 '''안성캠퍼스 발전추진단'''으로 변경 되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추진단이 안성캠퍼스의 발전계획을 내놓는다 해도 캠퍼스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상태라 아무런 아이디어도 내놓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72]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다. 한편 최근 본부가 안성캠퍼스 단과대학장들에게 발전안 계획서 제출을 요구했다는데 본부가 책임 부총장제를 실시하여 안성캠퍼스의 발언권을 솜털처럼 약하게 만든 상태에서 안성캠퍼스의 발전안을 제출하라는 것은 굉장히 무책임한 말이다.[73]
학생들이 안성캠퍼스의 투자를 요청할때면 본부는 10년동안 서울캠퍼스에 310관, 기숙사 및 여러 건물들을 짓느라 부채율이 높아졌기 때문에 하남캠퍼스의 건립때 까진 건물 신축 투자가 없을것이라며 안성캠퍼스 학생들의 이해를 바란다고 했다. 또한 하남 or 검단캠퍼스가 추진되면 모든것이 해결되니 기다리라는 말로 설득했다. 그리고 하남&검단캠퍼스가 최종 무산된 이후엔 캠퍼스에 남는 건물 이 많으니 건물 신축은 낭비라는 것으로 말이 바뀐다. 더 가관인것은 이렇게 안성캠퍼스가 공동화 현상을 띈 주요한 이유는 본부의 일방적인 구조조정 때문이었는데 본부는 이런 책임을 회피한다. 서울캠퍼스의 입학정원은 2011년 기준 2646명에서 3150명으로 대폭 늘었는데[74] 안성캠퍼스는 약 2300명에 달했던 입학정원이 1300명으로 줄었다. 최근 서울캠퍼스에서 넘겨받은 정원 108명 덕에 겨우 입학정원 1400대를 회복했지만 전체적으론 입학정원이 대하락했다.[75] 또한 본부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안성캠퍼스의 마스터플랜 혹은 캠퍼스 비젼을 밝힌적도 없다. 매년 안성캠스 총학생회가 지속적으로 안성캠퍼스의 비젼을 보여달라고 했지만 총장과 본부는 지금도 묵묵부답이다.[76]

3. 신캠퍼스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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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은 지리적으로보나[77][78] 인프라로 보나 썩 좋은 입지조건이라 보기 어렵기에, 두산재단과 중앙대본부 측에서는 캠퍼스를 이전시키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것을 알고 신캠퍼스 추진단을 2018년에 해체했다. 현재는 '''안성캠퍼스 발전기획단'''만 남아있는 상태다.
2007년 11월 하남 미군공여지에 중앙대는 '''하남캠퍼스''' 건립을 추진하기 위한 MOU를 체결하게 된다. 이 땅은 하남시 하산곡동의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인 미군공여지(옛 캠프 콜번) 30만6천731㎡로 이곳에 제3캠퍼스 형태의 글로벌캠퍼스를 건설할 예정이었다. 특히 이 땅 주변엔 학교법인 소유의 약 85만㎡의 땅이 있었다. 원래 개발제한구역엔 대학이 들어설 수 없도록 돼있다. 왜냐하면 개발제한구역의 지정 및 관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법을 회피하기 위해 반환 공여구역이나 주변 지역에 대한 발전종합계획 승인이 있을 경우 개발제한구역 지정을 해제할 수 있도록 하는 주한미군공여구역 주변지역 등 지원 특별법 을 개정하기 위해 중앙대학교와 하남시는 당시에 힘을 모으려 했다. 하지만 중앙대학교가 당초 하남시와 한 계약과는 달리 교지를 대폭 감축하고 하남시가 요구한 학생 1만명 유치도 수용하지 않아 하남시가 무산을 선언한다. 부랴부랴 중앙대는 하남시가 요구한 학생 1만명 유치는 수용하지만 토지이용 계획안은 하남시가 받아주길 원한다 했다. 하지만 캠퍼스 부지를 대폭 감축한상태에서 학생수 1만명을 유치하겠다는 중앙대의 의견은 이해할수 없는 안건이라며 2011년 하남시는 하남캠퍼스를 최종 무산시키게 된다.
2010년 중앙대는 인천시와도 신캠퍼스 건립을 위한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MOU를 체결하게 된다. 그러나 인천시가 중앙대에 직접적인 지원을 하는것이 불법이란 점과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사업추진의 어려움, 연세대 송도식의 특혜시비 등으로 신캠퍼스 MOU는 지연되었다. 그후 2013년 5월 13일 이용구 총장과 송영길 시장이 인천 캠퍼스 건립을 위한 기본협약을 체결함으로서 '''검단캠퍼스''' 건립안은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된다.
일단 계획은 2013년 안에 건립계획을 구체화 하고 2014년 초 착공에 들어간다는 것이였으나, 현실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사업주체가 대학에 2천억원의 지원금 및 조성원가 이하로 택지공급을 해주어야 가능했기 때문에 부담이 커서 어떤 사업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보다못한 인천시는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2천억원을 들여서 중앙대 캠퍼스까지 지하철을 연장해주는 계획을 발표했으나, 발표 이후에도 어떤 상황변화도 일어나지 못했고 2015년 5월 13일에 MOU기한만 1번 연장 조치했었다.
2014년 지방선거 이후 당선된 유정복 시장은 중앙대 검단캠퍼스 사업은 검단의 핵심 앵커시설로서 꼭 필요한 시설이라고 언급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인천시 내부적으로 사업전망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우세해졌다. 결국 15년 초 인천도시공사는 10만평의 대학캠퍼스를 포함한 30만평의 사업계획을 철회하고, 검단 1지구에 조성원가 수준으로 2만평의 대학병원과 의과대학 캠퍼스만을 옮기는 계획을 언론을 통해서 발표했다. 하지만 대학은 인천도시공사의 새로운 계획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원래 계획은 중앙대가 인천시로부터 2천억원의 지원금과 원가의 1/3이하로 10만평 부지를 공급받는 것이였으나, 인천시의 새로운 계획에 따르면 2만평의 부지를 중앙대가 조성원가수준으로 매입해야하고 병원과 의대캠퍼스를 대학의 예산으로 지으라는 통보였으니 대학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였을지도.
2015년 5월초 인천시는 변경된 사업을 다시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체결한 사업의 기본협약을 바꿔야 하나 중앙대 측이 이에 대한 협상을 나서지 않고 있고, 설상가상으로 박범훈 전 총장과 대학/재단에 대한 비리수사 및 막말 파문 때문에 재단이사장이 사퇴한 상황이라 사실상 중앙대 검단 캠퍼스 계획은 무산 직전이라고 밝혔다. 5월 13일 기본협약 만료시한을 앞두고 인천시는 중앙대에 협약 연장여부를 타진하는 공문을 보냈고, 중앙대가 인천캠퍼스 조성사업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의 회신을 보냈다고 밝힘으로써 무려 5년을 끌어온 중앙대 검단 신캠퍼스 사업은 결국 백지화되었다.
신캠퍼스 무산을 선포한 이후 총장직속의 '''신캠퍼스추진단'''은 안성부총장 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신캠퍼스 추진을 완전히 포기한다고 말한 2018년엔 신캠퍼스 추진단을 '''안성캠퍼스 발전기획단'''으로 변경하였다. 신캠퍼스가 무산된 이후부턴 중앙대는 광명에 종합병원을 건립하여 재단 수입 창출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역량을 집중하게 된다. 현재는 두산의 법정지원금도 줄어드는 추세라 중앙대학은 대체 자금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때문에 믿을건 병원뿐이라는 생각(?)에 2021년 3월 개원을 목표로 지하 7층 지상 14층, 690병상 규모의 광명종합병원 건립에 사활을 다하고 있다.[79] 하지만 이것도 전국 사립대학 중 부채총액 696억원으로 2위를 차지할 만큼 누적 건축 부채를 가지고 있는 중앙대가 어떻게 비용을 마련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에 잡음이 심하다.

4. 캠퍼스 명칭변경


안성의 낙후가 중앙대에 도움이되지 못한다는 의견이 대두되며 지역적 색채를 빼기위해 2014년 총학생회 주도로 캠퍼스 명칭변경에 관한 공모전을 진행한적 있다. 당시 축제와 더불어서 진행된 공모전엔 여러가지 안건이 나왔는데 그 중 '''다빈치캠퍼스'''가 선정되었다. 당시 다빈치캠퍼스란 명칭은 총학생회에 제출된 한장의 문서에 있던 3개의 명칭 중 하나였다고 한다.[80]
'''국제캠퍼스(International Campus)'''는 당시 안성캠퍼스가 구조조정중이었고 캠퍼스의 로드맵도 본부가 밝힌적 없으며, 검단캠퍼스의 향방도 오리무중이라 '''대중적인 이름'''을 생각했다고한다. 또한 안성캠퍼스의 공동화를 해결하려면 '''외국인 학생들을 유치'''하는 방법이 유일했기 때문에 제출된 이름이었다.
'''다빈치캠퍼스(Da Vinci Campus)'''는 당시 중앙대학의 모토가 융합 이었는데, 융합을 기반으로한 '''인문학적 감성'''과 '''공학적 이상'''을 품은 인재는 다빈치였다며, '''다빈치와 같은 인재들의 요람'''이란 의미로 제출 되었다. 다빈치는 당시 중앙대가 내세웠던 인재상으로, '''다빈치전형'''이란 입학전형도 있었다.[81] 다빈치라는 인물은 해부학·조각·건축·수학·과학·음악·철학에 통달했다는데, 당시 안성캠퍼스에 남아있던 단과대학의 장점을 모두 모아 융합 시켰을 때 나올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인재라 다빈치를 생각했다고 한다.
'''CENTRAL캠퍼스'''는 안성캠퍼스가 중앙대의 제2캠퍼스가 아닌 '''중심캠퍼스'''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제안했다고 한다. 또한 CENTRAL의 해석인 '''중앙'''과 대학은 매치되는 부분이 있어 친화력도 있고, 차후 구조조정이 마무리 될시 각각 영어단어에 신설되거나 남아있을 단과대명을 대입하면 되기 때문에 '''확장성'''이 있다고 제출 되었다. 또한 미국 미시간대학교와 듀크대학에서도 센트럴캠퍼스를 사용하고 있는 만큼 거부감도 없을것이라 했다.
다빈치캠퍼스가 공모전에서 선정 되었만 안성캠퍼스의 명칭으로 지정되진 못했다. 왜냐하면 본부는 당시에도 안성캠퍼스를 어떻게 꾸려나가야할지에 관한 로드맵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총학생회는 명칭공모에 선정된 이름을 홍보 하지 않았고, 단순히 본부에 제안서를 제출만 했다고 한다.[82][83]

5. 교통수단



5.1. 버스


경기도 남단에 위치한 안성시지만 생각보다 서울에서 오래 걸리지는 않으며 서울에서 고속버스로는 짧으면 50분에서 길면 1시간 10분이면 도달하기 때문에 통학하는 학생도 많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84]서울남부터미널에서 안성을 오가는 버스가 각각 15~25분 간격으로 있다. 상행과 하행 모두 중앙대 정문에서 정차한다. 그 외의 노선은 안성종합버스터미널 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통학용 버스는 매년 조금씩 바뀌지만 기본적으로 반포, 흑석캠퍼스, 신촌, 평택역 등의 노선이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 이 중 반포행 버스의 경우 교내에 아예 매표소와 정류장이 있다.
교내 순환 셔틀버스가 1대 다니는데, 경기도 유일의 디젤 팬더저상이라고 한다.[85] 원래는 현다우관광에서 서울 차적지의 영업용 번호판을 달고 운행했으나, 2018년 내구연한 만료가 되고도 대차하지 않고 자가용 번호판으로 바꿔 그대로 우려먹고 있다. 요금은 당연히 무료이며, 대충 중대생처럼 보이면 아무나 탈 수 있다.
특이하게도 안성 시내버스 1번이 교내로 다닌다. 교문 앞, 중앙문화관 옆, 그리고 원형관 옆(회차점)에 정류장이 있다. 교문이 학교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교내에서 교문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자주 이용한다. 교내 구간 한정으로 현금을 내면 500원에 탈 수 있다. 교통카드의 경우 버스비 전액을 내야 한다.
대학촌인 내리에는 안성 시내버스 1-3번과 1-5번이 다닌다. 모두 안성 시내 방향이다. 공도읍이나 평택시 방향으로 가려면 내리사거리나 정문 앞 정류장에서 갈아타야 한다.

5.2. 철도


서울 외 지역의 경우 철도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평택역에서 50번, 70번, 370번, 380번 등의 시내버스를 타면 중앙대 정문까지 온다. 평택역에서 버스 타면 30~40분 정도 걸린다. 단, 평택역에는 KTX가 운행하지 않는다. 굳이 고속철도를 이용한다면 SRT 평택지제역이 있는데 평택역에서 수도권 전철로 1정거장 거리이고 두 역 사이를 오가는 버스도 많으므로 시간을 잘 계산해서 지제역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학교에서 지제역으로 바로 갈 경우 정문 앞 정류장에서 시외버스 8455번, 8456번, 시내버스 50번, 50-9번을 타면 지제역으로 바로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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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부발선
타 대학과는 달리 안성캠퍼스는 가까운곳에 전철역이 없어 교통환경이 불편하다는 약점이 있다. 한때 황은성 전 시장때 추진했던 평택안성선 트램에 희망을 걸었으나, 타당성이 매우 낮았고 평택시도 반대하여 결국 부결되었다. 한가닥 희망을 걸 수 있는건 평택부발선이다. 이 노선은 제3차 국가철도망구축계획에 포함된 노선이기 때문에 착공은 반드시 하는 노선이다. 문제는 언제 착공하느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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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공항-동탄선
혹은 충북도청 차원으로 적극적으로 밀고있는 '''청주공항-동탄'''노선에 희망을 걸어보면 좋을지 모른다. 이 노선이 개통만 되면 안성캠퍼스의 교통문제는 한방에 해결이 가능하다. 서울에서 동탄까지 srt나 ktx를 타고오면, 동탄에서 안성캠퍼스까지 이 노선을 타면 이론상 편하게 등하교가 가능해 진다. 청주공항의 이용객을 늘리는 한편 전철역 하나없는 안성지역의 갈증을 해소한다는 차원에서, 이 노선은 제3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으로 세워진 평택 부발선보다 오히려 타당성이 더 높을 수 있다. 또한 충북도청이 적극적으로 밀고있는 노선이므로 기대를 걸어보고자 한다.

6. 건물


중앙대학교의 건물번호는 서울캠퍼스는 100번대에서 300번대 사이를 사용하고, 안성캠퍼스는 '''600'''번대에서 '''900번대''' 사이 번호를 사용한다. 건물번호는 구역에 따라 나뉘어 붙는데 주로 '''600번대'''는 예술대학 음악학부와 전통예술학부의 교사동 건물에 주로 붙고[86], 700번대는 기숙사와 기숙사 배후시설에 붙는 구역번호다. '''800번대'''는 예술대학에선 공연영상창작학부와 디자인학부, 미술학부, 글로벌예술학부가 사용하고, 생명공학대학과 예술공학대학 및 다빈치교양대학이 사용하는 건물 번호다. 즉 안성캠퍼스의 주 교사동 건물은 800번대 번호를 사용중이다. '''900번대'''는 본관을 중심으로 중앙도서관이 위치해 있으며, 생명공학대학 연구동과 주로 체육대학이 사용하는 건물들이 위치해 있다.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건물/시설 목록'''
'''번호'''
'''건물/시설명'''
'''용도/사용학과/시설'''
600
정문(등용문)
출입문
601
교직원회관 1관
남성 교직원 기숙사, 휴게실
602
교직원원회관 2관
여성 교직원 기숙사
603
교직원원회관 3관
남성 교직원 기숙사
603
교직원원회관 3관
남성 교직원 기숙사
604
평생교육원
평생교육원 강의실
605
제1음악관
예술대학 음악학부 강의실
606
제2음악관
예술대학 음악학부 강의실, 음악학부 행정실, 교수연구실
607
영신음악관
예술대학 음악학부 콘서트홀
608
국악관
예술대학 전통예술학부 강의실, 전통예술학부 행정실
609
산학협력관
경기남부벤쳐창업지원센터
610
학생복지관
사진관, 세탁소, 우리은행, 우체국 출장소, 편의점, 서점, 매점
611
학생회관
총학생회, 인권복지위원회, 교육방송국(UBS), 중대신문사 등 언론매체부, 학생처, 학생생활상담센터, 동아리연합회
701
예지 1동
여학생 기숙사, 독서실
702
예지 2동
남학생 기숙사, 독서실
703
예지 3동
남학생 기숙사, 독서실, 고시반, 자판기, 컴퓨터실
704
명덕 1동
여학생 기숙사, 독서실, 세탁실, 다리미실
705
명덕 2동
여학생 기숙사, 독서실, 세탁실, 다리미실
706
명덕 3동
여학생 기숙사, 독서실, 세탁실, 다리미실
707
학생후생관
학생식당, Project CAU, 영양사실, 커피숍
708
생활복지관
CAU몰, 식당, 무인택배함
801
중앙문화관
예술대학 디자인학부 행정실, 강당, 건강센터, 취업지원센터, Creative Studio, 다빈치인재개발원, 상담실
802
교수연구관
교수연구실, 글로벌라운지
803
조소관 2관
예술대학 미술학부 조소전공, 석조장, 목조장, 철조장
804
조소관 1관
예술대학 미술학부 조소전공, 조소전공 행정실
805
공연영상관 1관
예술대학 공연영상창작학부 사진전공, 무용전공, 문예창작전공, 글로벌예술전공 행정실, 암실, 세미나실
806
공연영상관 2관
예술대학 공연영상창작학부 문예창작전공, 세미나실, 예술연구소
807
공예관
디자인학부 공예전공, 공예전공 행정실, 금속공예실, 목공예실, 염색실, 도예실
808
조형관
예술대학 미술학부, 디자인학부, 미술학부 행정실, 디자인학부 행정실, '''예술대학 학장실''', 세미나실, 연구실
809
생명공학관1관
생명공학대학 대학원 행정실, 실험실, BT기기센터
810
원형관
생명공학대학 행정실, 예술공학대학 행정실, 다빈치교양대학행정실, '''생명공학대학 학장실''', '''예술공학대학 학장실''', 스터디룸, 학생회실, 연구실, 식품안전전문인력 양성사업소
811
창업보육관1관
창업보육센터, ROTC, 교직원식당
812
선수생활관
체육대학 기숙사
813
대학교회
교회
901
본관
대학본부, 중앙대학교 총장실, '''안성캠퍼스 부총장실''', 대회의실, 안성캠퍼스 발전기획단, 경기꿈의대학 사무실, 산업창업경영대학원, 대강당
902
중앙도서관
자료실, 열람실, 박물관, 인삼연구소, 평생교육원 행정실, 제본실, 팀플룸, 컴퓨터실
903
승차장
편의점, 커피숍, 버스매표소, 식당
904
생명공학관 2관
생명공학대학 연구소, 공과대학 사회기반시스템공학부 연구소, 식품안전연구센터, CK-2 특성화 동물실험센터, 불량식품사업단, 공동기기실, 세미나실
905
생명공학관 3관
생명공학대학 연구소, 공동연구실, 공동세미나실
906
창업보육관 2관
생산형창업보육센터
907
수림체육관
체육대학, 체육대학 행정실, '''체육대학 학장실''', 헬스장, 골프시뮬레이션 실습실, 대체육관, 소체육관
908
청룡체육관
체육대학, 농구장
909
실험농장
생명공학대학 식물생명공학전공

6.1. 정문 및 출입구



6.1.1. 등용문(정문)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의 정문은 현재 '''등용문(登龍門)'''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등용이란 의미는 물고기가 용문(龍門)이란 협곡을 거슬러 힘들게 올라가 마침내 용이되어 승천한다는 의미다. 중앙대학교의 상징이 청룡이고, 안성캠퍼스 입구부터 캠퍼스 기숙사까지의 통행로는 오르막길이라 의미 부여도 되기 때문에 여러모로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지만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 이 문의 이름은 태양문이었다. 때문에 정문의 모양이 태양이 떠오르는 모양에 햇살이 비치는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모양이 만들어진 이유는 당시 안성캠퍼스의 땅에 음기가 강하여 양기를 불러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어쨌든 지금은 등용문을 공식명칭으로 사용한다. 이 정문은 안성캠퍼스가 조성되었던 1980년대에 만들어지지 않았고, 1990년도 중반에 세워졌다.
다른 대학들이 강의실이나 교사동, 혹은 본부 건물을 정문 가까이 두는데 반해 안성캠퍼스는 정문 반대쪽에 이런 강의실 같은 건물들이 있고, 정문 가까운곳엔 기숙사가 위치한다. 이렇게 이상한 건물배치 구조를 가진 이유는, 캠퍼스가 처음 조성됐을 당시의 정문은 지금의 후문쪽에 위치했기 때문이다.[87] 당시 현 정문쪽 지역은 첩첩산중이었다. 후문쪽엔 그나마 작은 소로라도 있었고 안성 시내로 오갈수도 있었다. 또한 안성선 노선이 안성캠퍼스 후문쪽으로 지나갔다. 그런데 충남 서산부터 강원도 동해까지 연결되는 38번 국도가 후문쪽이 아닌 지금의 기숙사 방향으로 착공되면서 셈이 복잡해졌다.[88] 1994년 38번 국도 대덕구간이 완공되자 본부는 어쩔수없이 후문쪽에 있던 정문을 지금의 정문이 위치한 곳으로 옮기고, 등용문을 설치해 정식 정문으로 삼았다.

6.1.2. 후문


후문이라고 하지만 문이라 할 만한 건축물은 없다. 주변 시설들은 체육대학의 선수생활관과 야구장, 축구장 등이 위치해 있으며 체육대 학생이 아니면 이 문을 드나드는 일은 없다고 봐야한다. 산속길에 도로만 하나 있는 외진곳이었으나 아양-내리간 도로가 확포장 되면서 통행량이 증가되고 있다. 안성 내리를 갈거면 이 쪽 도로를 이용하는것이 더 빠르다.

6.1.3. 서문


인근에 신라아파트가 위치한 곳으로 이곳도 문이라 할 만한 시설이 없는 오픈된 공간이다. 기숙사와 가까워서 기숙사 학생들이 주로 이용한다. 차가 오고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지만 차량 통행은 금지되어 있다. 예전엔 이곳보다 쪽문 쪽이 훨씬 통행량이 많았으나 이곳에 내리 파출소(내리지구대)가 건립된 이후 치안이 좋아져 서문 주변의 통행량이 늘어났다.

6.1.4. 쪽문


8차 시설 옆에 위치한 쪽문은 점심이나 저녁을 먹으러 가는 재학생들이 내리를 가기위해 주로 이용하는 문이다. 차량통행은 불가능한 문이다. 이전에는 뻥 뚫린 공간으로 있었으나 쪽문에 문을 설치하여 야간통행을 금지시켰다.

6.2. 600번대 (음악학부, 전통예술학부 교사동 지역)



6.2.1. 601 교직원회관 1관


'''교직원회관 1관'''
준공
1983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2층
출입구
정문 1곳
연결건물
교직원회관 2관
엘리베이터
X

처음 건설되었을 당시 교수님 기숙사 용도로 세워졌기 때문에 교수회관1동으로 불렸다. 지금은 교직원들을 위한 기숙사 건물로 활용도가 바뀌었기 때문에 이름도 교직원회관으로 바뀌었다. 1983년에 지어진 교직원회관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건물은 지하1층, 지상2층 규모다. 건물. 휴게실과 13실의 침실, 대형 룸이 있다. 만들어질 당시 온돌을 가진 기숙사로 준공되었다. 정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이 이 건물이다.

6.2.2. 602 교직원회관 2관


'''교직원회관 2관'''
준공
1991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2층
출입구
정문 1곳
연결건물
교직원회관 3관
엘리베이터
X

1991년도에 두번째로 지어진 교직원 기숙사 건물이다. 교수회관2동이란 이름으로 불리다 최근 교직원회관2동으로 명칭 변경되었다. 1동과 비슷한 형식으로, 32실의 침실과 대형 룸이 있다. 이 건물은 여성 교직원전용 기숙사 건물이다.

6.2.3. 603 교직원회관 3관


'''교직원회관 3관'''
준공
2005
증축
X
규모
지상6층
출입구
정문 1곳
연결건물
교직원회관 3관
엘리베이터
X

2005년도에 비교적 최신식 건물이다. 겉에서 봤을땐 콘도느낌이 나는 이색적인 형태로 준공 되었다. 원룸형식으로 테라스를 갖추었다고 한다.
지상 6층 규모라 기숙사 예지 3동과 더불어 규모가 큰 기숙사다.

6.2.4. 604 평생교육원


'''평생교육원'''
준공
불명
증축
X
규모
지상1층
출입구
정문 1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제1음악관 뒷편에 위치한 컨네이너 형식의 건물이다. 이 건물이 정말 604관이 맞냐 하겠지만 건물에 크게 숫자가 붙어있는걸 보면 맞다. 여기선 평생교육원 사진관련 교육이 진행중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게 '''평생교육원의 본부'''는 '''중앙도서관'''에 있다.

6.2.5. 605 제1음악관


[image]
'''제1음악관'''
준공
1983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4층
사용학과
음악학부
출입구
정문 1곳
연결건물
제2음악관
엘리베이터
X

구 10차건물로 불렸던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83년도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지어진 음악학부의 최초의 건물이었다. 메인도로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음악학부생 외에는 찾아가는 사람이 적다. 이 건물엔 오케스트라 연습실과 피아노, 작곡, 성악 연습실등이 위치해 있다. 음악학부생들의 연습실이 주로 위치해 있는데 건물이 외진곳에 있어서 주변소리에 민감하지 않아 연습하기엔 최적의 위치다. 이 건물 뒤는 산인데 최근엔 산 위에 원룸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어서 예전만큼 고립되었다는 느낌은 많이 사라지는 추세다.

6.2.6. 606 제2음악관


[image]
'''제2음악관'''
준공
1984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3층
사용학과
음악학부
출입구
정문 1곳
연결건물
제1음악관
엘리베이터
X

구 11차로 불렸던 건물이다. 이 건물은 605관에 이어 두번째로 지어진 건물이다. 이곳에도 음악학부생들의 실기실이 밀집해 있어 제1음악관과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는것 같지만 이 건물엔 음악학부의 학과 사무실도 위치한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이 건물엔 교수 연구실도 위치해 있다.

6.2.7. 607 영신음악당


[image]
'''영신음악관'''
준공
1983
증축
X
규모
지상2층
사용학과
음악학부
출입구
정문 1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음악학부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거대한 콘서트홀 형식의 외형이 인상적이다. 내부에는 강당과 영신기념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신이란 건물명은 중앙대학교 설립자인 임영신 여사의 이름에서 따온것이다. 영신이란 이름을 쓴것은 김희수 이사장 전 재단때 세운 건물이란 의미기도 하다. 설립자의 이름을 건물명에 붙인것만 봐도 당시 음악학부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지금은 건물이 낡아서 비가 샌다는 이유로 리모델링 계획이 잡혀있다.

6.2.8. 608 국악관


[image]
'''국악관'''
준공
2005
증축
X
규모
지상4층
사용학과
전통예술학부
출입구
정문 1곳, 후문 1곳
연결건물
교X
엘리베이터
추가

구 15차(국악대학)로 불렸던 건물이다. 안성캠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대규모의 전통예술학부 건물이다. 건물의 외형은 기와를 엊은 모양에 산과 어울리는 형태로 지어졌으며 국악과 딱 어울리는 형태로 지어졌다. 건물 내부 2층엔 공연장인 국악당과 로비인 덧마루가 위치해 있고, 3층은 학생들의 개인 연습실이 위치해 있다. 예전에 국악대학으로 불렸던 적이있어 현판을 국악대학으로 걸어놨는데 아직도 이 현판을 교체하진 않고있다. 국악관 앞의 도로는 키스로드라고도 부르는데 안성캠퍼스의 명물이다. 봄에 벚꽃이 많이 피게되, 국악관 앞 고니가 살고 있는 청룡호수와 키스로드에선 벚꽃축제가 열린다.

6.2.9. 609 산학협력관


'''산학협력관'''
준공
1979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4층
사용학과
공과대학
출입구
정문 1곳, 후문 1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구 1차(생활과학관)로 불렸다. 안성캠퍼스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다. 예전엔 생활과학대학이 이 건물을 사용해서 생활과학관으로 불렸었다. 그러다학제개편 이후 생활과학대학이 폐과되며 한때 디자인학부가 이 건물을 단독 사용했었다. 하지만 건물이 너무 낡아 학습환경이 좋지 않자 지금은 디자인학부를 중앙문화관으로 모두 이전시키고 이 건물을 한동안 빈 건물로 두었다. 지금 이건물은 산학협력관으로 명칭 변경되었으며, 경기도가 운영하는 경기남부벤쳐창업지원센터를 입주시켜서 운영하는 중이다. 산학협력관에 창업지원센터를 유치함과 동시에 건물 내부 리모델링을 한차례 진행해 겉보기완 달리 내부는 상당히 깔끔하다.이 건물엔 굴뚝도 달려있는데 난방용으로 사용되던 굴뚝이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공과대학 첨단소재공학과가 이 건물을 교사동으로 사용한다.

6.2.10. 610 학생복지관


'''학생복지관'''
준공
1981
증축
X
규모
지상3층
출입구
지상1층 1곳, 지상2층 1곳
연결건물
학생회관
엘리베이터
X

옆 611관(학생회관)과 더불어 정문 / 기숙사쪽 학생 복지를 책임지는 건물로,1981년에 지어져 생각보다 역사가 오래된 건물이다.
3층 매점은 분식류라 김밥 등 간단한 먹거리를 판매하며, 분식집 아줌마가 친절하시다. 돈까스의 양이 매우 많으나 왠지 모르게 칼질된 후에 다시 튀겨진(돈까스는 옷을 입힌 후 튀기므로 덩어리째로는 고기가 안보이는게 당연하다) 조각이 발견되는 등 돈까스 한정 음식 재사용 의혹이 있다.
2층 우체국 출장소는 문자 그대로 '출장소'기 때문에 금융업무는 보지 않는다. 우편이나 택배 등과 관련된 업무 전용이다. 영업시간은 10시부터 4시까지. 업무처리속도가 굉장히 느리니 바쁜 금융업무가 있다면 이곳은 피하는것이 좋다. 서점은 전공서적이나 교양과목에서 지정된 교재 위주로 판매한다. 민원처리센터에서는 학생증과 각종 증명서를 발급 받을 수 있다.
1층 네스카페는 최근에 들어온 것으로, 원래 CAU카페가 있었다. 학생 반응은 좋은 편. 2016년 부로 CU편의점과 웨스턴애비뉴버거 라는 수제버거 집으로 변경되었다. 2018년 부로 웨스턴에비뉴 버거는 문을닫고 새로운 가게를 모집중이다.

6.2.11. 611 학생회관


'''학생회관'''
준공
1990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4층
출입구
추가
연결건물
지상 2곳
엘리베이터
X

이 건물엔 안성캠퍼스 총학생회, 인권복지위원회, 교육방송국(UBS), 중대신문사 등 언론매체부, 학생처, 학생생활상담센터, 동아리연합회를 필두로 한 각종 동아리들이 입주해 있다. 동아리 건물이라 하면 이 건물을 칭하는 것으로 학교활동을 활발히 한다면 자주 찾게되는 건물이다. 졸업식 사진도 이 건물에서 찍는다. 건물 앞엔 수상무대와 청룡호수가 있으므로 건물 주변의 풍광이 뛰어나다. 건물 바로 앞에는 서울캠퍼스와 같은 4.19 혁명 용사와 이내창열사 석비가 세워져 있다.

6.3. 700번대 (기숙사 지역)



6.3.1. 701 예지 1동


'''예지 1동'''
준공
1979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3층
출입구
정문 1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예지 1동은 1979년에 세워진 안성캠퍼스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기숙사 건물이다. 현재 이 건물은 여학생 전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문으로 올라와서 오른편에 바로 보이는 건물이 이 건물이다. 건물의 연식은 오래됐지만 내부 리모델링을 한차례 한적있어 내부 시설은 깔끔한 편이다. 예지라는 이름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禮智'''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래 기숙사 명칭변경에 관한 공모를 한차례 한적 있으나 흐지부지 되었다.

6.3.2. 702 예지 2동


'''예지 2동'''
준공
1979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3층
출입구
정문 1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남학생 전용 기숙사이며, 이 건물도 예지1동과 같이 지어졌던 건물이다. 예지1동과 겉모습도 비슷해 혼동하기 쉽다. 구분하는 법은 건물 중에서 기숙사식당과 가까운쪽 건물이 예지 2동이다.

6.3.3. 703 예지 3동


[image]
'''예지 3동'''
준공
2004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5층
출입구
정문 1곳
엘리베이터
X

남학생 전용 기숙사이며, 안성캠 기숙사 통틀어 가장 최근에 지어진 기숙사이기에 깨끗한 환경과 시설로 인기가 많았다. 규모가 가장 큰 기숙사 답게 옥상층은 3인실이며, 고시반인 수성초 / 내혜홀 기숙사가 입주해있었다. 내부는 기숙사, 간이 매점(자판기 뿐이다), 휴게실, 컴퓨터실, 독서실 등으로 이루어졌다.

6.3.4. 704 명덕 1동


'''명덕 1동'''
준공
1980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4층
출입구
정문 1곳
엘리베이터
X

이 건물은 여학생 전용 기숙사 건물로 기숙사식당과 가장 가까운곳에 위치해 있다. 명덕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기숙사는 모두 여성전용 기숙사로 '''명덕(明德)'''이란 '''더럽히지 아니한 천부의 본성'''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기숙사엔 휴게실, 세탁실, 다리미실등이 위치해 있다.

6.3.5. 705 명덕 2동


'''명덕 2동'''
준공
1979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4층
출입구
정문 1곳, 후문1곳
엘리베이터
X

이 건물은 1979년에 지어진 건물로 여학생 기숙사 중에선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안성캠퍼스 남문과 가까운곳에 위치해 있으며 최근엔 이 기숙사로 들어가는 소로에 출입문을 설치하여 밤에는 통행이 금지되게 하였다. 감시카메라가 많다.

6.3.6. 706 명덕 3동


[image]
'''명덕 3동'''
준공
1992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3층
출입구
정문 1곳
엘리베이터
X

1992년에 세워져 여성기숙사 중에선 비교적 최신식 건물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본관격 건물 한채에 4동의 기숙사 건물들이 연결된 형태를 띄고있다. 기숙사 중 가장 외진곳에 위치해 있으나 감시카메라가 사방에 있다.

6.3.7. 707 학생후생관(학생식당)


'''학생후생관'''
준공
1980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1층
출입구
지상 3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이름은 학생후생관이나 학생식당으로 주로 불린다. 학생식당은 두메푸드사가 운영을 맡고 있다. 2017년 말에 백반의 가격을 "안올리면 기존 4찬을 3찬으로 줄일 수밖에 없다", "올리면 더 잘나올거다" 식으로 거의 매달려가며 300원 인상한 것이 무색하게 학식의 품질은 2019년에도 영 답이 없다. 물론 위생상태는 깔끔하고 식재료도 신선하다. 욕을 먹는건 메뉴선정.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비린내를 풍기는 해물완자튀김이라거나 케찹 칠한 고기완자 등의 반찬이 백반에 자주 등장하고, 맛다시 비빔밥이 제2 선택지(평일 점심과 저녁식사에 한해 선택지가 세개다.)로 나오는등...이런 날은 학생들이 카우몰이나 내리로 내몰린다. 물론 불만 없이 잘 먹는 학생들도 많다. 국밥충되기 딱 좋다. 실제로 학식 먹을 돈에 조금 더 얹으면 내리 가서 뜨끈-한 순대국 한그릇이 가능하다.
워낙 학교가 외져서 매년 입찰을 하면 이 회사밖에는 응찰하지 않는지라 앞으로도 품질 향상의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다만 운영업체도 난감한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매일 학식을 먹는 인원 수가 고정적이지 못하고, 그러다보니 잔반에 의한 손해가 꽤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학식은 어디까지나 학생복지차원에서 운영하는 것이므로 돈 없는 학생들도 고려해야 하니 가격 인상도 어렵고... 아무리 대량급식이어도 3~4천원가지고 한끼 식사 만들기 쉽지 않긴 하다. 그냥 멀쩡하게 나오는 날이나 공강시간이 빠듯한 날은 학식을 이용하고, 영 맘에 안드는데 돈이 좀 있다면(내리에서 7천원이면 국밥, 1만원이면 무한리필 고기다) 내리로 나가자.
이 건물엔 한때 중앙대학교 기념품점이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장사가 잘 안돼서 현재는 Project CAU라는 예술학부의 공예품을 파는곳으로 바뀌었다. 이 건물엔 커피숍도 있으므로 카페처럼 활용하는것도 가능하다.

6.3.8. 708 생활복지관


'''생활복지관'''
준공
1993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3층
출입구
정문 1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기숙사 행정실과 CAU몰이라는 매점 비슷한 시설이 있다. 각종 식품,학용품,생활용품,전공관련 용품등을 판매하며, 주인 내외가 운영하는 작은 식당도 있다. 학식 메뉴가 별로인 날엔 이곳으로 사람들이 몰리기도 한다. 꽤 맛있고 저렴하니 기숙사생이라면 야식으로 배달음식 대신 이용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현관에 무인택배함이 설치된 예지 3동을 제외하고, 나머지 기숙사학생들의 택배는 이곳 무인택배함으로 배달되니 알아두자.

6.4. 800번대 (주요 단과대 교사동 지역)



6.4.1. 801 중앙문화관


[image]
[image]
'''중앙문화관'''
준공
1981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3층
사용학과
디자인학부
출입구
지상 4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과거 외국어대학이 사용했던 건물이다. 때문에 초창기 건물 명칭은 외국어문학관이었다. 이 건물은 2014년 외국어대학이 구조조정으로 사라진 이후에도 '외국어문학관' 명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학우들 사이에서 새로운 명칭으로 바뀌어야 되는것이 아닌가라는 의견이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9년 1월 '''패션디자인전공 학생회장의 주도로 실내환경디자인전공 학회장과 함께 '''[89] 공동 설문조사를 진행하여 두 전공 학과장에게 801관 명칭변경건의안을 제출한 것을 시작으로, 3월 전체교수회의에 두 전공 학과장의 공동 건의안이 제출되었다. 그리고 예술대학생회와 예술대운영위원회, 중앙운영위원회, 예술대학장 등의 지지를 받아 공간조정위원회에서 본격적으로 건물명칭변경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2019년 12월 13일부터 '''중앙문화관'''(약칭 '중앙관')으로 명칭 변경이 확정되었다.
현재 이 건물은 크게 보면 3개의 건물이 구름다리로 연결된 형태를 띄고있다. 건물 '''A동(교양관)'''에는 건강센터와 인재개발원이 있지만 주로 교양수업이 진행되는 교양건물로 운영되고 있고, '''B동(디자인1관)'''은 실내환경디자인과 패션 전공이 사용하는 전공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C동(디자인2관)'''은 컴퓨터 실습실 및 각 전공 동아리방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상1층엔 건강센터와 취업지원실, Creative Studio가 있고, 2층엔 다빈치인재개발원과 상담실이 있어서 취업을 앞둔 4학년은 자주 찾게 될 건물이다. 건물 입구쪽에는 상베르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었으나 2019년 2학기에 문을 닫고 팬도로시라는 이름으로 다시 오픈했다.

6.4.2. 802 교수연구관


'''교수연구관'''
준공
1982
증축
X
규모
지상3층
출입구
정문 1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교수연구관은 예전에 경영경제대학과 외국어대학 교수님들이 주로 사용하시던 연구실 건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양학부 및 예술대학 교수님들이 주로 사용하시는 연구실로 바뀌었다.건물에 들어가보면 한가운데가 뻥 뚫린상태에서 가장자리에 방들이 나열되어 있는 형태를 띄고 있다. 건물 리모델링을 한차례 한적 있어서 내부가 상당히 깔끔하다. 지상 1층엔 예술문화연구소와 국제교류팀이 위치해 있다. 특히 글로벌라운지도 이곳에 위치해 있으니, 캠퍼스에서 외국인학생들과 교류를 가지고 싶다면 한번 방문해보자.

6.4.3. 803 조소관 2관


[image]
'''조소관 2관'''
준공
2004
증축
X
규모
지상1층
사용학과
미술학부 조소전공
출입구
정문 1곳
연결건물
조소야외실습장
엘리베이터
X

이 건물은 2004년에 지어진 건물로 원래는 공연영상창작학부 공간연출전공이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따라서 초기의 이름은 무대장치제작소였다. 그러다 공간연출전공이 서울캠퍼스로 이전되면서 조소전공이 제2관으로 이 건물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때 현재의 이름인 조소관 2관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 건물엔 주로 3학년 4학년생들을 위한 석조장, 목조장, 철조장이 위치해 있다. 건물옆엔 조소전공을 위한 야외실습장이 있어 대형구조물 제작을 위한 실습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6.4.4. 804 조소관 1관


'''조소관 1관'''
준공
1989
증축
X
규모
지상2층
사용학과
미술학부 조소전공
출입구
지상 2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이 건물은 미술학부 조소전공이 사용하는 교사동 건물이다. 810관에서 중앙문화관으로 교양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목에, 이 건물이 위치해 있다. 이 건물은 조소전공이 아니면 가까이 가본 사람도 없을것이다. 건물 앞 잔디마당엔 조소전공 학생들이 만든 예술품들이 나열되어 있어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있다.

6.4.5. 805관 공연영상관 1관


[image]
'''공연영상관 1관'''
준공
1982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2층
사용학과
공연영상창작학부 사진전공,무용전공,문예창작전공, 글로벌예술학부
출입구
지상 2곳
연결건물
공연영상관 2관
엘리베이터
X

이 주변의 건물들은 대부분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던 건물들이다. 때문에 시설이 상당히 낡아서 리모델링을 추진한다는 계획이 장기계획으로 있다. 공연영상관 1관은 공연영상창작학부 중 사진전공과 무용전공, 문예창작전공이 교사동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 중앙대학교가 안성캠퍼스의 국제화를 추진하며 새롭게 신설한 '''글로벌예술학부'''도 이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과 조형관 사이엔 카메라모양의 조각이 세워져 있어 익살스러움을 더한다. 이 건물을 사용하는 사진전공과 문예창작전공은 우리나라 차원에서도 매우 유명한 학과다.

6.4.6. 806관 공연영상관 2관


[image]
'''공연영상관 2관'''
준공
1998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2층
사용학과
공연영상창작학부 문예창작전공
출입구
1층 1곳, 2층 1곳
연결건물
공연영상관 1관
엘리베이터
X

이 건물은 1998년에 준공되어 주변 다른건물에 비해선 신식건물이다. 초기엔 공연영상관 증축동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지금은 공연영상관 2관으로 명칭이 확정되었다. 이 건물은 주로 문예창작학과의 교사동 건물로서 사용되고 있다. 문예창작전공 학생회실은 공연영상관 1관에 있으니 혼동하지 말자. 이 건물엔 예술대학 세미나실이 있고, 3층엔 예술연구소도 위치해 있다.

6.4.7. 807관 공예관


'''공예관'''
준공
1982
증축
X
규모
지상2층
사용학과
디자인학부 공예전공
출입구
지상 1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이 건물은 예술대학 디자인학부 공예전공이 사용하는 교사동 건물이다. 1층엔 금속공예실, 목공공예실이 위치해 있고 2층엔 염색실과 학생회실, 대학원 목공예실이 위치해 있다. 3층엔 도예실이 있다. 810관 건물에서 나와 쪽문으로 가는 길목에 이 건물이 있음으로, 한번 정도는 다 쳐다는 봤을만한 건물이다. 건물은 약간 언덕이 있는곳에 세워져 있으며 입구엔 공예관이라고 타일위에 글자를 적어 놓았다.

6.4.8. 808관 조형관


[image]
'''조형관'''
준공
1982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4층
사용학과
미술학부, 디자인학부
출입구
지상 2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이 건물은 예술대학 미술학부 한국화전공과 서양화전공, 디자인학부 산업디자인전공과 공예전공이 주로 사용하는 교사동 건물이다. '''예술대학 안성캠퍼스 학장실'''도 이 건물에 위치해 있다. [90] 건물 중앙부에 예술대학이라 큼지막하게 글자가 적혀있어 이 건물 주변이 예술대학이 사용하는 지역이란 것을 잘 말해준다. 건물 앞쪽엔 잔디밭을 넓게 꾸며 놓아 풍광이 멋지다. 최근엔 알루미늄이 아닌 PVC로 창호로 바꿨고, 건물도 리모델링해서 전보다 내부 시설은 많이 좋아진 편이다.

6.4.9. 809 생명공학관 1관


[image]
[image]
'''생명공학관 1관'''
준공
1986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3층
사용학과
생명공학대학
출입구
지상 2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이 건물은 생명공학대학의 연구실로서 사용되는 건물이다. 설립 당시엔 산업대학 실험관으로 불리다가 한차례 자연공학관 1관으로 바뀐 후, 지금의 생명공학관 1관으로 명칭이 정해져 내려오고 있다. 건물 1층엔 주로 식품공학전공 교수님들이 사용 중이고, 2층엔 동물생명공학전공 교수님들이 사용 중이다. 3층은 식물생명공학과 교수님들이 사용중이다. 건물 오른편엔 서울캠퍼스 공동기기센터의 산하기관이였던 안성캠퍼스 기기센터가, 2017년부터 독립 기기센터로 격상되 생명공학대학 산하의 BT기기센터가 되어 이 건물에 위치하게 되었다. 안성캠퍼스의 대학평가 부분 중 연구역량 및 산학협동 지표는 다 이 건물에서 나온다고 봐도 무방하다. 안성에 있다 할 뿐이지 생명공학대학의 역사는 농과대학 역사를 포함하면 '''50년'''에 가까울 정도로 꽤 길고 연구역량도 탁월하다.

6.4.10. 810 원형관


[image]
'''원형관'''
준공
1985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7층
사용학과
생명공학대학,예술공학대학,다빈치교양대학
출입구
지상 2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O

이 건물은 위에서 바라봤을 때 가운데 홀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복도가 있는 형태를 띄고 있다.[91] 원형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보면 가운데가 뻥 뚤려있고 강의실이 가장자리에 배치된 형태를 띄고 있다. 이 건물은 단과대학 3곳이 교사동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수강기간땐 건물내부가 복잡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 힘든편이다. 건물 뒷편 계단을 이용해 건물 위로 올라갈 수도 있으니 운동삼아 계단으로 가보자. 계단이 있는쪽 부근엔 그라지에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다.
원래 이 건물은 생명공학대학과 경영경제대학이 같이 사용했었다.[92] 후에 경영경제대학의 남은 학생들이 모두 서울캠퍼스로 올라간 이후 비어있던 공간에 예술공학대학이 신설되어 사용하게 된다. 또한 생명공학관 2관에 있던 다빈치교양대학의 행정실도 원형관으로 이전하면서 예전에 비하면 건물이 북적북적해졌다.
건물 1층엔 영어강의실이나 SW교양전공 PC실과 스터디룸이 있고, 2층엔 식품영양전공의 학생회실과 강의실이 있다. 3층엔 동물생명공학전공과 식물생명공학전공, 시스템생명공학전공 및 생명공학대학 학생회실이 모두 밀집해있다. 4층엔 다빈치교양대학 행정실이 위치해 있고 5층엔 생명공학대학 행정실과 학장실이 있다. 또한 식품안전전문인력 양성사업팀 사무실도 이곳에 위치한다. 6층부터는 예술공학대학이 사용중인데 예술공학대학 행정실과 학장실, 전임 교수 연구실, 두 곳의 강의실과 Creative Library가 위치해있다.
예술공학대학이 들어온 해인 2019년 여름 이후에 7층에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진행하였고 두 곳의 강의실과 많은 LAB실을 만들었다.

6.4.11. 811 창업보육관 1관


[image]
'''창업보육관 1관'''
준공
2001
증축
O
규모
지하1층,지상3층
출입구
지상 2곳, 지하 1곳
엘리베이터
X

초기 창업보육센터라는 명칭으로 불리다가 최근에 창업보육관 1관으로 명칭 변경하였다. 이 건물은 2001년 교직원 후생관 3층에 증축된 건물로, 정부의 중소기업 창업지원의 일환인 벤쳐육성을 목적으로 중앙대학교가 이 사업에 선정됨에 따라 세워진 건물이다. 여기엔 창업보육관 뿐 아니라 ROTC, 교직원식당도 위치해 있다. ROTC는 이 건물의 지하에 위치해 있으나, 사실 지대가 아래에 위치한 것 뿐이라 밖에서 ROTC 입구는 잘 보이는편이다. ROTC입구 앞에는 소규모의 잔디 연병장도 있다.
2019년 겨울 이후로 교직원식당은 707관에 위치한 학생식당과 합쳐져 평일 점심때 학생 식당에서 교직원 식단을 먹을 수 있다.

6.4.12. 812 선수생활관


'''선수생활관'''
준공
2004
증축
X
규모
지상4층
사용학과
체육대학
출입구
지상 1곳
연결건물
교X
엘리베이터
X

중앙대학교 농구부, 축구부, 야구부 선수들 전용 숙소로 사용되는 기숙사건물이다. 2004년에 세워져 비교적 최신식이다. 대학 후문쪽 외진곳에 위치해 체육대생이 아니면 이 건물을 보거나 방문할 재학생은 드물것이다. 이 건물 아래는 모두 체육대학의 시설들이지만(야구장,축구장,청룡체육관) 타 단과대학 학생들의 시설은 없으므로 재학생들이 이 건물 외에 다른시설들을 구경할 일도 드물다.

6.4.13. 813 대학교회


'''대학교회'''
준공
1998
증축
X
규모
지상3층
출입구
지상 1곳, 지하 1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1998년에 준공된 대학교회다. 정식 명칭은 중앙대학교회. 교회의 운영은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신 분들이 하고 있다. 원형관 뒤편에 위치해 있어서 이 교회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도 의외로 꽤 많다.

6.5. 900번대 (체육대학 및 학교 본부동 지역)



6.5.1. 901 본관


[image]
'''본관'''
준공
1997
증축
X
규모
지상6층
출입구
1층 1곳, 2층 1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O

각종 교내 행정업무 전반을 처리하는 곳으로 안성캠퍼스의 '''본부''' 건물이다. 건물을 외부에서 보면 CAU 엠블럼 뒤에 무언가 둥그런것이 있는데, 그건 중앙대학교 구 마크다. 구 마크를 없애지 않고 그 위에 CAU엠블럼을 박았기 때문에 구마크와 신마크가 모두 본관에 박혀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건물에서 일하는 교직원들은 9시~9시 10분 [93] 부터 업무를 보기 시작하여 4시 반에 마친다.
이 건물엔 총장실[94]과 안성부총장실 및 총무처, 대회의실등이 위치해 있다. 또한 안성캠퍼스 발전기획단과 경기꿈의대학 운영실도 이 건물에 있다. 시상식이나 성금전달식은 모두 이 건물에서 열린다. 또한 체육대학의 졸업식도 이 건물에서 열린다.
한편 가끔 본관앞에 리무진이나 에쿠스, BMW, 벤츠 등등의 외제차가 즐비하게 늘어선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건물에 있는 산업창업경영대학원의 수업을 듣기 위해 온 원우들이다라고 한다.

6.5.2. 902 중앙도서관


[image]
'''중앙도서관'''
준공
1989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5층
출입구
지하 1곳, 지상1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O

중앙도서관은 1989년에 준공된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의 건물이다. 김희수 이사장이 재단을 인수한 후 안성캠퍼스에 가장 먼저 지은 건물이 이 도서관 건물이다. 안성캠퍼스 중앙도서관은 1800여석의 열람석 및 50만여권의 장서와 각종 비도서자료를 보유하고 있으며 약 2,000여 종의 정기 간행물과 학위논문 25,600여 원문 DB, E-BOOK 33,500여권을 소장하고 있다. 또한 국회전자도서관 자료와 소장자료를 검색할 수 있는 온라인 정보검색실과 인터넷 복합공간인 전자정보실을 갖추고 있으며 각종 참고도서실 및 스터디룸이 있는 중앙도서관은 학생들이 원문 DB와 소장자료 등 다양한 자료를 검색, 대여할 수 있다.
건물 외형은 하나의 거대한 장군총 같은 돌무덤 모양을 띄고있다. [95] 버스 승차장쪽에서 도서관으로 가면 나오는 층이 지상1층이며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나오는곳이 지하1층이다. 지하 1층으로 내려오다보면 잘 보이는 곳에 원래 제본소가 있었다. 지금은 도서관 건물 한쪽 공간으로 옮겼다. 특이하게도 안성캠퍼스 도서관엔 '''박물관'''도 위치해 있다. 지하 1층쪽에 박물관이 있으나 존재를 알고있는 재학생은 극히 드물다. 그리고 중앙대학교 평생교육원행정실도 도서관에 위치해 있다.
서울캠퍼스 도서관에 비하면 최신식 건물이었으나, 두산이 들어오고 나서 서울캠퍼스 도서관에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고나선 빛이 바랬다. 지속적인 리모델링이 되고 있으나 3천명에 달했던 입학정원이 1천명대로 줄어 들면서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도 많이 줄어들게 됐는데 이런이유 때문에 최근엔 리모델링도 뜸했다. 2020년에 또 한차례 소규모 리모델링이 진행될 것이라는데 지켜봐야 할것.
이 도서관은 중앙대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안성지역 주민들도 같이 이용할 수 있다. 타 대학에 비해선 비교적 자유롭게 외부인이 시설 내부로 들어올 수 있으므로 지역 도서관보다도 인기가 좋다.

6.5.3. 903 승차장


'''승차장'''
준공
2004
증축
X
규모
지상2층
출입구
지상 1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승차장은 2004년 2월에 준공된 비교적 최신식 건물로 편의점과 커피판매점과 버스매표소가 위치해 있다. 2층엔 식당도 있으나 인기가 그리 좋진 않다.

6.5.4. 904 생명공학관 2관


'''생명공학관 2관'''
준공
1991
증축
O
규모
지하1층,지상3층
사용학과
생명공학대학
출입구
지상 2곳
연결건물
생명공학관 3관, 생명공학실습관
엘리베이터
X

이 건물은 1991년에 준공된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이다. 1999년에는 한차례 증축되었는데 건물 왼편 생명공학실습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건물이 이때 증축된 건물이다. 원래 이 건물은 건설대학이 사용하던 건물이라 한때 건설대학관이란 명칭으로 불렸었다.[96] 그러다 자연공학관2관으로 한차례 개칭된 후 지금의 생명공학관 2관이 되었다. 현재는 생명공학대학의 실험실 및 연구실로 사용중이며 그 중 식품영양학전공의 주 연구실로 사용중이다. 이 건물 1층엔 불량식품사업단과 공동기기실이 있고, 2층엔 식품안전연구센터CK-2 특성화 동물실험센터가 있다.

6.5.5. 905 생명공학관 3관


'''생명공학관 3관'''
준공
불명
증축
X
규모
지하1층,지상2층
사용학과
생명공학대학
출입구
지상1곳, 지하1곳
연결건물
생명공학관 2관
엘리베이터
X

생명공학관 3관은 생명공학대학의 실험 실습실로 사용되는 건물이다. 건물 지하에 해당하는 곳은 철재문으로 닫혀있으며 이곳을 통해 외부로 실험기기를 옮길 수 있게 해 놨다.

6.5.6. 906 창업보육관 2관


'''창업보육관 2관'''
준공
2004
증축
X
규모
지상2층
출입구
지상 1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설립당시 명칭은 생산형창업보육센터였다. 지금은 창업보육관 2관으로 명칭 변경되었다. 이 건물은 창업보육을 위한 건물로 주로 생산을 위한 용도로서 사용된다. 안성캠퍼스의 외진곳에 위치해 있어 실험농장으로 실습가는 식물생명공학과 학생을 빼면 이 건물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6.5.7. 907 수림체육관


[image]
[image]
'''수림체육관'''
준공
2001
증축
X
규모
지상4층
사용학과
체육대학
출입구
지상 1곳, 지하1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수림체육관의 명칭은 전 김희수 재단이사장의 호에서 따온 이름이다. 수림체육관은 2001년에 준공된 지상 4층, 연건평 2,400여평 규모의 건물로 체육대학 행정실이 위치해 있다. 또한 대체육관, 소체육관, 유도/레슬링실, 에어로빅실/댄스스포츠실과 같은 최첨단 체력단련실을 비롯하여 강의실과 멀티미디어실까지 갖춘 체육관이다. 수림체육관은 대학 구성원뿐만 아니라 인근지역주민들에게도 개방되어 있다. 2015년 8월 9일엔 수림체육관에 골프시뮬레이션 실습실을 새로 마련해 골프전공의 수업환경이 많이 좋아지게 되었다.

6.5.8. 908 (청룡)체육관


'''청룡체육관'''
준공
1983
증축
X
규모
지상2층
사용학과
체육대학
출입구
지상 1곳
연결건물
X
엘리베이터
X

체육대학 농구부 학생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공식명칭은 아무 수식어도 없이 그냥 '''체육관'''이나, 서울캠퍼스 체육관과 헷갈리기도 하고 수림체육관을 그냥 체육관이라 부르기도 해서 혼동이 와 지금은 청룡체육관으로 고정해 부르고 있다. 청룡의 이름은 중앙대학교의 상징인 청룡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진짜 이유는 이 체육관을 사용하는 중앙대학교 농구부의 별칭인 '''청룡군단'''에서 따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건물은 중앙대학의 외진곳 중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해 건물의 존재조차 모르는 재학생이 많다. 중앙대학교의 마스코트인 청룡군단으로 불렸던 농구부였지만 이런 외진곳에 경기장이 있고 응원해 줄 관람객도 없어 힘이 빠진다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래서 2019년부터는 안성 청룡체육관에서만 경기를 가지지 않고 서울캠퍼스 체육관에서도 경기를 갖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6.5.9. 909 실험농장


'''실험농장'''
규모
비닐하우스 3동
사용학과
생명공학대학 식물생명공학전공

생명공학대학 식물생명공학과 재학생들의 실험 실습을 위해 조성한 농장이다. 비닐하우스는 총 3동 규모로 되어 있으며 대학원생이 1동을 이용하고, 나머지는 재학생들이 이용한다.

7. 그 외 시설



7.1. LMO연구 유리온실



생명공학대학의 유리온실로 LMO연구를 위한 격리시설이다. 원형관에서 대학교회쪽으로 가다보면 보이는 유리온실이 바로 이 건물이다. 여긴 식물생명공학과의 박사급 학생과 교수님들이 사용하시는 곳이라 다른학부 재학생들은 출입이 통제된다.

7.2. 버스차고지



생명공학관 2관에서 창업보육관 2관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나오는 컨테이너 건물이다. 중앙대의 시외버스들은 모두 이 건물을 기점으로 출발한다. 현재 중앙대학교의 교내 버스업체는 현다우관광이다.

7.3. 수상무대 & 청룡호수



키스로드를 마주하고 있고 대운동장의 길 건너에 위치한 수상무대이다. 전통예술학부의 악기 연습소리도 간간히 들려 귀도 즐겁다. 봄엔 벚꽃축제 및 공연이 열리고 졸업사진도 이곳에서 찍는다. 수상무대 아래엔 천연기념물 고니를 위한 집이 마련되어 있다.
청룡호수 가운데엔 분수대가 있는데 2014년에 총학생회가 추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청룡호수 주변엔 조형물도 많고 정자 아래에선 햇빛도 피할 수 있어 지역 주민들에게도 상당히 인기가 많다.

7.4. 이내창열사 석조반신상



중앙문화관과 공연영상관1관 사이에 위치한 석조 반신상이다. 1989년 8월 15일 의문사한 이내창열사를 기리기 위한 용도로 세워졌다. 당시 이내창은 예술대학 조소전공으로 입학해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7.5. 청룡광장



수림체육관과 본관 사이에 위치한 소규모의 야외 공연장이다. 본관에서 수림체육관 사이로 내려오다 보면 계단이 있는데 조금만 더 내려오면 이 광장이 있다. 이곳은 수림체육관의 전경을 잘 볼수있는 위치에 있으며 주변이 조용해 사색에 잠기기 딱 좋은곳이다.

7.6. 금잔디동산



예지2동 기숙사와 학생후생관 옆에있는 잔디공원이 바로 여기다. 금잔디동산엔 안성캠퍼스 동문회가 기증한 의혈이라 써진 석조비석도 위치해 있다. 탁트인 조경과 넓은 면적 때문에 피크닉 용도로 인기가 좋았다. 안성캠퍼스의 축제중 일부행사가 여기서 열리도 한다.

7.7. 중앙마루



조형관과 중앙문화관 사이의 넓은 공원을 일컬어 중앙마루라 한다. [97] 마루라는 말에 어울리게 이곳은 안성캠퍼스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이곳엔 종이비행기가 하늘로 날아가는듯한 조형물도 있는데 한국에서 세계로 날아가는 중앙인을 표현한 작품이다.[98]

7.8. 가온광장



본관 앞 원형로터리를 일컬어 부르는 말이다. 가온은 중앙의 순 우리말인 가온데에서 따왔다. 이름 그대로 이곳은 안성캠퍼스의 중심주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직원전용 버스들의 주차장식으로 격하되어 사용되지만 예전에 이곳엔 태극문양에 건곤감괘가 있는 우리나라 국기가 그려져 있던 곳이었다.

7.9. 대운동장



안성캠퍼스에서 가장 큰 운동장이다. 각 단과대학의 체육대회나 단합대회는 이곳에서 열린다. 다만 산을 깍아 구릉쪽에 운동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비가 오면 가지 않는것이 좋다. 2010년대만 해도 스탠드가 없었으나 이후 스탠드를 설치해 밤에도 운동할 수 있게끔 바뀌었다. 한때는 안성시청의 지원을 받아 대운동장을 잔디운동장으로 바꾸는 계획이 세워졌었다. 하지만 캠퍼스 이전 문제가 불거진 이후 이러한 지원안이 쏙 들어가게 된다. 대운동장 옆에는 테니스장과 농구장이 설치되어 있는데 주로 교수님들이 이용하시고 계시다. 중앙문화관쪽 방향에서 내려와 대운동장을 가로지르면 학생복지관쪽으로 올라가는 비탈길도 있다. 이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면 복지관 옆에 풋살장이 있으니 이용하면 좋다.

7.10. 골프장



예지3동 뒤편에서 후문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있는 망 골프장이다. 골프전공들이 사용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7.11. 야구장



체육대학 스포츠과학부의 야구부 학생들이 이용하는 구장이다. 캠퍼스 완전 외진곳에 있어 이곳의 존재를 모르는 재학생들이 많다. 이곳 옆에 있는 도로도 편도 1차로인 소로라 오가는 차량도 적었다. 하지만 아양-내리간 도로가 편도 2차선으로 확장되고 아양지구와 내리를 오가는 차량이 많아지면서 야구장 주변을 통행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특히 도로가 안성캠퍼스와 가까운 방향으로 확포장 되면서 야구장이 도로에서 바로 보일정도로 가까워졌다. 또한 안성천 주변도 공원화 되어 지역주민들이 산책코스 겸 야구부의 경기를 관람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7.12. 축구장



안성캠퍼스에 대운동장 외에 또 다른 축구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소수다. 이 축구장은 청룡체육관 맞은편 캠퍼스 가장 남쪽 구석에 있어 지도로 보지 않으면 황무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시설은 엄연한 축구장이며 현재 체육대학이 사용하고 있다.

7.13. 드론 실습장



2018년에 만들어진 드론실습장이다. 생명공학관3관 옆으로 내려와 생명공학대학 실험농장쪽으로 오다보면 빈 공터가 있는데 이곳에 조성되어 있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졌는데 외진곳에 위치해 있어서 존재를 모르는사람이 많다.

7.14. 옥외변전소


학교에서 쪽문쪽으로 나와 왼편에 보이는 건물이 이 건물이다. 생명공학대학의 실험기기에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8. 주변시설


안성캠퍼스의 개교와 더불어 발달해온 후문 부근의 자취촌을 '내리'라고 통칭한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내리이기 때문.개교 당시에는 논밭 사이에 술집 두어 곳이 전부였던 내리가 현재는 수백 채의 원룸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으니 실로 상전벽해다. 후문 부근에 위치한 카페 TARA에 가면 새하얀 눈밭 사진이 벽에 걸려 있는데, 그게 80년대의 내리다.
학기 중에는 내리에 학생들이 상주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상권은 형성되어 있다. 중소규모의 마트, 분식점, 식당, 술집, 피씨방, 당구장, 문구점 등이 성업중이다. 개중에는 20년 넘게 장사한 가게도 있었으나, 제3캠퍼스 소식 이후 동네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면서 많은 가게들이 장사를 접었다. 최근에는 수시로 폐점하고 개점하고 하는 통에 한 학기 휴학했다 돌아오면 단골집이 사라지거나 한다. 학교에서 내리를 관통해 더 내려가면 죽리가 나온다. 심야에 산책하기 좋다. 금융시설은 교내에 위치한 우리은행, 내리 한쪽에 위치한 농협이 있다. 다만 국민은행의 ATM은 예술대 로비 등 몇 곳에 설치되어 있다. 그 외에는 안성 시내나 평택으로 가야 있다.
기존에는 대학 후문에 위치한 내리 외에는 이렇다 할 상권이 없었으나, 2016년 1월에 정문 대로 맞은편에 2,320세대의 롯데캐슬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어울초등학교도 개교해서 정문쪽의 상권도 약간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더이상의 상권은 생기지 않는데 이유는 '''롯데캐슬아파트주민들'''과 '''상가주인들'''의 다툼 문제 때문이다. 원래 중앙대 정문엔 안성 최대규모의 상업지대가 조성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롯데캐슬주민들이 아파트 앞 상가로 들어가는 차량들의 통행을 막고 지속적으로 민원을 올리는 바람에 흐지부지 되었다. 이 갈등은 안성시청이 롯데캐슬아파트가 건립되기 전 미리 도로계획을 잘 세우고 아파트 건축을 추진케 했어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함이 문제가 되어 촉발되게 된 갈등이다. 상가가 지어지는 도중 아파트주민들의 민원 및 문제제기가 시작되자, 안성시청은 상가건축허가 조건으로 '''중앙대 앞 주차장'''을 상가주차장으로 이용케하는 중재안을 내놓는다. 그래서 겨우 추가공사가 가능하게 되어 지금의 상가가 완공되게 된다.
그런데 길건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왕복8차대로[99]를 건너가 상가를 이용하라는 이런 방침은 손님의 입장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 상가를 이용할 손님들은 당연히 상가 가까운곳에 주차장이 있을것이라 생각하여 상가 입구가 있을만한 곳인 아파트 정문쪽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서 상가 방향으로 유턴하기 위한 중앙선 부근엔 주민들이 차단봉을 설치해 놨고, 아파트를 경유해 유턴을 하려해도 아파트 정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니 아파트주민들과 상가이용객들이 격렬하게 싸우는 일이 잦을수밖엔 없었다. [100] 이런식으로 상가 손님들을 내쫓으니 당연히 상가 장사가 잘 될리가 없어 공실률은 계속 늘어났다. 또한 안성시청의 막장행정으로 추가 상가건축계획을 잡을만한 도로도 확보하지 못해, 중앙대정문엔 지금처럼 상가 몇개만 들어선 황량한 모습이 되었다.
대형 할인점은 공도읍의 롯데마트 안성점과, 안성 시내의 이마트 안성점, 안성농협 하나로마트가 가깝다. 영화관은 안성시내 방향 이마트 옆에 CGV가 있으며, 공도방향으로 가면 롯데마트에 롯데시네마가 있다. 의료 시설의 경우 내리에는 병원이 없고 약국만 있으며, 정문의 롯데캐슬 단지에 치과와 일반 의원이 하나씩 있다. 그 외에는 안성시내의 경기도의료원이나 시내 병원 혹은 평택쪽 병원을 이용해야한다.

[1] 공연영상창작학부 연극,영화, 공간연출전공은 2007년 해당 학과의 동문들이 기금을 모아서 동숭동 대학로에 교육 공간을 확보해 서울로 이전했다.[2] 현재 건물명과 몇 개가 다른데, 업데이트가 좀 늦는 모양이다.[3] 안성캠퍼스를 메인캠퍼스로 만들 결정을 했기때문에, 1979년 10월 11일 오전 10시 30분에 개최된 개교 61주년 기념식은 서울이 아닌 안성에서 개최되었다.[4] 정확히 말하면 압박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서울의 비대화를 막기 위해(박정희 대통령이 행정수도의 충청 이전을 검토했던 때다) 서울지역대학이 정원을 늘려 뽑는것을 불허했을 때였다. 때문에 정원 확대가 필요한 대학들은 알아서 서울 외 지역에 제2캠퍼스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당시 정부는 지방 거점 도시(부산,대구,대전 등)나 그 인근에 분교를 세우기를 원했지만 대부분의 학교들은 서울에서 가까운, 그러나 개발되지 않은 지역에 분교를 세우게 된다.[5] 1984년까지만해도 안성캠퍼스의 메인캠퍼스화가 추진중이라 총학을 나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1985년 이 안이 최종 무산되자 안성캠퍼스의 학생자치권을 확보해 학교에 본격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하여 2년뒤 총학생회를 나눠 뽑게된다.[6] 이런 학칙 개정안을 추진하지 않은 대학원은 지금도 양캠퍼스 통틀어 총 1명의 대학원 총학생회장만을 선출한다.[7] 박정희 대통령의 유명한 행정수도 공주 이전이라는 소위 백지계획이 나왔을 때이다. 그정도로 1970년대 후반엔 서울 및 수도권 억제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정책은 1981년서울올림픽 이후 많이 완화되게 된다.[8] 의정부시 등 서울 바로 북쪽. 신규 개발은 막고 기존에 개발된 곳을 재정비.[9] 수원시, 성남시 등 서울 남부 '''시''' 지역. 수도권 과밀우려로 추가 개발을 가급적 억제[10] 파주, 연천 등 휴전선 접경지역으로 군사목적으로 개발 유보.[11] 가평, 양평 등 한강수계. 상수원보호를 위해 개발억제. 지금의 상수원보호구역과 비슷하다.[12] 당시는 북한과의 실질적인 교전도 잦은 때라 경기 북부는 모두가 꺼려했다.[13] 주로 철도교통이 편리하여 서울 접근성이 경기남부보다 더 좋은 충청남도 천안시가 많이 선택되었다.[14] 용인이 요즘처럼 개발되고 인구가 늘어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15] 많은 이들이 수원시로 알고 있는데 정확히는 용인시 기흥구 서천동 소재다.[16] 여긴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학교가 4년제 정규 대학 인가를 받으면서 아예 통째로 용인시로 이전했다.[17] 한양대는 화성군 반월리에 캠퍼스를 세웠다. 안산시로 승격한 것은 한참 뒤의 일.[18] 수원에 제2캠퍼스를 추진한 성균관대는 특이한 이력이 있다. 당시 성균관대는 재단이 유림에서 삼성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재단으로 들어온 삼성은 유림이 제2캠퍼스로 추진하려 했던 안양땅을 삼성계열사인 중앙개발에 팔게한다. 그리고 성균관대가 안양땅을 팔아 쥐게된 돈으로 삼성이 공장부지로 낙점했던 수원땅을 사게 만들어 지금의 성균관대 자연캠퍼스를 세우게 했다. 때문에 학교의 돈이 삼성에 흘러갔다며 학내 잡음이 심해졌고 삼성문화재단이 철수하는 촉매가 된다. 아무튼 서울과 거리가 더 가까웠던 안양땅을 팔고 거리가 먼 수원으로 옮겨갔다는 배경 때문에 성균관대는 수도권 과밀억제 정책에도 불구하고 서울 근교인 수원에 캠퍼스를 마련할 수 있었다.[19] 경기도청도 원래는 서울에 있다가 67년에 현 수원으로 이전하게 된다.[20] 지금의 경기미도 이쪽 지역에서 나오는 쌀이다.[21] '''안성맞춤'''이란 단어도 안성시장에서 팔았던 유기그릇에서 비롯된 말이다. 하지만 경부선 전철이 안성이 아닌 평택으로 지나갔고 경부고속도로도 개통되며 물류의 흐름이 안성에서 안성 서쪽 평택 지역으로 변경되었다. 때문에 안성은 급격히 세력이 줄어들게 된다.[22] 이 안성선은 1989년 1월 1일에 폐선되어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이 노선은 천안과 이천을 잇는 노선이었다. 현재 안성캠퍼스 주요 교사동 건물이 북쪽이 아닌 남쪽을 향해있는 이유는 이 경기선 안성역이 남쪽으로 지나갔기 때문이다. 재밌는건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와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는 이 안성선으로 캠퍼스가 연결된 적이 있다. 안성캠퍼스 아래쪽과 천안캠퍼스 한가운데로 안성선이 지나갔기 때문이다.[23] 임철순 씨는 임영신 여사의 수양아들이다.[24] 1987년 9월 12일 동아일보[25]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안성캠퍼스는 예술대학이 아닌 '''농과대학을 위해 만들어진 캠퍼스'''였다. 1968년 12월에 조성된 평택군 장당동 산 25-1번지에 있던 농과대학 실험농장과 안성캠퍼스는 위치상 가깝기도 했다. 이 농장은 1987년에 지금의 위치인 안성시 보개면으로 이전하게 된다.[26] 당시 중앙대학교 농과대학장은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의 대부'''였던 정영채 박사로 그는 1981년에 서울대학교 농대 교수와 함께 새마을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분의 후학이 중앙대 100년 역사 중 5명도 안되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인 '''방명걸''' 교수다. 정영채 박사 이전의 농과대학장은 중앙대학교 총장을 지내기도 한 '''문병집''' 교수로 그는 지역사회개발학 및 농촌경제학의 선두주자였다.[27] 1983년 5월 농촌경제연구원은 도마다 한곳씩 농촌중심도시로 집중 육성케 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경기도에선 안성이 선정되었다. 당시엔 농촌 개발이 생산기반확충 등 경제적 측면에 치우쳤기 때문에 이것을 탈피해 도로교통망, 교육시설, 관광유원지, 의료망, 거주지를 연관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으로 이때 계획되어 만들어진 것이 현재의 '''대림동산'''이다. 이 대림동산이 만들어지는데 가장 핵심되는 역할을 중앙대학교가 했다.[28] 아이러니하게도 안성캠퍼스에서 61주년 개교식을 거행한 뒤 2주 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다.[29]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임철순씨는 안성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지 않았고, 1981년에 서울 관악에 출마했다.[30] 안성캠퍼스에 외국어대, 사회대등을 먼저 만든 이유는 서울에서 안성으로 전 학과가 이전할 것이다는 계획을 불신한 예술대와 농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의도였다는 얘기도 있다.[31] 지금의 안성팜랜드[32] 2014년 박근혜도 안성을 방문하면서 이 목장을 방문했던 기억이 인상 깊었다는 말을 했다.[33] 1개의 캠퍼스에 2개의 사립대가 들어선 형국이었다.[34] 서울에서 내려갔다는 역사성 때문에 지금도 생명대와 예술대는 서울에서 졸업식을 치룬다.[35] 재단은 서울캠퍼스의 안성 이전을 전제로 서울캠퍼스 토지를 팔아서 안성캠퍼스를 조성하는데 빌린 부채를 갚을 생각을 했다. 때문에 금융권에 막대한 돈을 대출받게 된다. 이 돈은 앞서 언급한 임철순 총장의 정치 자금으로 쓰였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중앙대학의 안성 본교이전이 좌절되고 서울캠퍼스 부지도 매각하지 못 한채 대출한 돈의 만기가 돌아오자 결국 학교는 자금난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당시 중앙대 재단은 학교를 김희수씨에게 넘기게 된다. 재일교포였던 김희수씨는 학교 인수 후 즉시 700억이 넘는 부채를 상환했으나 1년 뒤 바로 일본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되면서 학교에 투자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36] 최초 계획이 백지화 되고 나서도 전체 정원의 1/3 수준이 이동했는지라 소규모라 말할 수는 없다.[37] 비슷한 사태가 '''경희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에서도 일어났었다. 1982년 10월 12일 '''경희대학교'''에서 안치열총장을 비롯한 부총장, 교무처장, 기획관리실장, 단과대학장 등 보직교수 28명이 무더기로 사퇴했다. 또 1984년 10월 26일에도 제2캠퍼스 문제 때문에 심태식 총장과 이영재 부총장을 비롯한 전 교무위원이 사퇴하기도 했다. 성균관대도 제2캠퍼스를 추진하면서 문제가 불거져 1977년 9월 26일 성균관대생 1천여명이 수원 이전 반대 시위를 진행하다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당시 재단 이사장이었던 이병철 삼성회장 및 전 이사진이 1977년 10월 4일에 사임하고 성균관대에서 완전히 손 뗐었다. 이런 학내 사태가 비슷한 시기에 제2캠퍼스를 추진한 '''단국대, 한양대'''가 아닌 '''중앙대''', '''경희대''', '''성균관대'''에만 국한되어 나타난 이유는, 앞의 대학들과는 달리 이 대학들은 '''본교의 단과대학'''을 '''제2캠퍼스로 옮기기 위한 과정을 진행'''했기 때문이다.[38] 하지만 모든 대학이 서울에서 경기도로의 본교 이전이 실패한 것은 아닌데, 대표적인 성공의 예로 명지대학교경기대학교가 있다. 물론 이들 대학도 저항이 매우 거셌지만.. 흔히 이 둘 대학의 본교를 서울로 착각하나 명지대의 본교는 용인이고 경기대의 본교는 수원에 위치해 있다.[39] 85학년도에도 중앙대학교 농과대학은 본교로서 입학정원을 모집했다.[40] 중앙대 내 학과 중 세계대학 학과별 순위에서 150위권에 진입한 단과대는 '''생명공학대가 유일'''하며 또한 '''최초의 기록'''이다.[41] 공연영상창작학부 연극,영화, 공간연출전공은 2007년 해당 학과의 동문들이 기금을 모아서 동숭동 대학로에 교육 공간을 확보해 서울로 이전했다.[42] 한마디로 예술대의 규모를 줄이고 염원했던 공대정원 1500명을 만들기 위한 목적에서 이 단과대학의 설립안이 시작된 것이다.[43] 소프트웨어대학만 해도 총장이 나서서 성대히 창단식을 가졌으나 예술공학대학은 너무도 조용했다.[44] 넘겨받은 108명 중 일부는 생명공학대학에 분배됐다.[45] 원래 창의ICT공과대학의 융합공학부는 서울이 아닌 안성에 존재 했어야 한다. 이 학부를 안성에 만들고 단과대학으로 규모를 늘렸다면 '''예술과 생명공학 모두를 융합'''시킬 수 있는 큰 그림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해당 학부의 소개를 보면 '''IT(정보기술)+BT(생명공학기술)'''='''바이오메디컬공학'''이고 '''IT(정보기술)+CT(문화콘텐츠기술)'''='''디지털이미징전공'''이었다. 안성캠퍼스에 남아있는 학과들을 '''IT기술에 기반하여 차세대 신기술로 융합, 발전'''시키는것을 가능하게 했던 융합공학부의 존재는 안성캠퍼스에 '''반드시''' 필요했었다. 또한 중앙대가 중점적으로 밀고있는 학과가 안성엔 하나도 없는데, 이 융합공학부가 안성에 존재했다면 안성캠퍼스의 잔존한 학과들을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하면서 캠퍼스의 간판역할도 도맡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것을 서울캠 안에서만 한정해 만들다 보니 결국 안성캠퍼스 회생의 마지막 씨앗이었던 이 단과대학을 서울에 신설하는 촌극을 빚었다. 이제서야 실수를 알았는지 융합공학부를 조금씩 떼서 안성에 들이는 모양세.[46] 경희대학교는 서울캠퍼스 '''체육대학'''과 국제캠퍼스 '''체육과학대학'''을 통합해 지금의 체육대학을 만들었다.[47] 중앙대는 서울캠퍼스의 '''사범대학 체육교육학'''과, 안성캠퍼스의 '''체육대학'''으로 체육관련 학과가 나뉘어져 있다.[48] 더 가관인것은 등록금 동결상황에 IMF까지 터지면서 어려운 학교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교과목 통폐합이 진행되었고 때문에 학생들은 학습권을 침해받게 되었다. 일방적인 건물 조기 소등도 진행되어 야간 실기작업을 해야했던 예술대의 학습권도 침해 받았다.[49] 학문간의 벽을 허문다는 말이 최근에 생긴것으로 잘못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나, 사실 이 문장은 학문 구조조정의 일환인 '''모집단위광역화'''의 한 축으로 이때 시작된 것이다. 학과 정원조정 관리를 폐지함으로서 교육구조의 재편과 학내 교수들의 새로운 교과과정개발이라는 장점도 있었지만, 돈이 되지 않는다면 감봉 및 고용 조정의 과정도 존재 했음으로 어둠과 빛의 양면성이 뚜렷한 정책이었다.[50] 이때만 해도 서울과 안성은 구분없이 학생정원을 줄였었다.[51] 교수충원과 입학정원을 감축할 시 대학의 교육여건을 개선하게 해주고 대학 스스로 대학단위 특성화를 유도하겠다는것이 주요 내용.[52] 외국어대학 독어학과, 불어학과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 건설대학 건축학부[53] 당시 서울캠퍼스 행정학과 학부와 대학원 학생회에선 통합을 환영한다는 문구가 게재된 현수막을 걸어 통합을 지지했다.[54] 반대로 안성캠퍼스 독어학과와 불어학과는 학과를 없애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구조조정을 시작하는것에 매우 반대했다.[55] 폐과된 학과의 정원 중 남는 정원은 안성캠퍼스의 남아있는 단과대학에 분배되었다.[56] 실제론 교육인적자원부가 요구한 정원 감축분을 모두 이행하지 못해서 참가를 포기했다.[57]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의 흑역사는 박범훈 총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해도 큰 무리가 없다. 박범훈 총장의 딸이 전통예술학부 교수가 된것에 대한 잡음도 당시 심했다.[58] 이때 2006년 5월 29일 중대신문과 인터뷰한 박범훈 총장은 안성캠에 공동화 문제가 불거지는데 어떻게 생각하냔 물음에, 안성캠퍼스를 작지만 강한 대학으로 키우겠다고만 했다. 마음속에 공동화따윈 없다는것.[59] 중앙대가 줄인다는 총 입학정원은 501명 이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서울캠퍼스의 정원은 251명 줄어든다고 했으나 251명 중 210명의 입학정원은 공대와 미디어 공연영상대학에 재배정 되어서 실질적인 감축은 41명에 불과했다.[60] 이때 안성캠퍼스는 문화예술 및 과학기술을 융합한 신학문 특성화에 지원금을 주었다. 노골적인 예술대 편파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이때 산업대(현 생명공학대학)는 생명환경분야 특성화를 주장하며 환경학과 창설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1] 공간 문제의 원인은 법인이 충분한 논의나 시설도 없이 통폐합이란 성급한 결단을 내렸다는게 주된 이유다. 이렇게 성급하게 대학을 운영할 수 밖엔 없을정도로 중앙대의 사정은 매우 좋지 않았다.[62] 총학생회 및 학생들이 안성캠퍼스에 투자 좀 해달라고 요청하면 본부는 하남캠퍼스가 추진되면 안성캠퍼스에 투자하는건 돈낭비라면서 투자 면피용으로 있지도 않은 하남캠퍼스를 잘 써먹게 된다.[63] 남아있게 된 10개의 대학 중 안성캠퍼스에 학장이 소재하게 된 단과대학은 예술대학, 체육대학 단 '''2곳''' 뿐이었다. 생명공학대학은 당시 자연과학대학에 포함되 학장이 서울에 있었다. 그전 단과대 숫자는 '''서울캠퍼스 10곳''', '''안성캠퍼스 8곳'''으로 거의 1:1의 균형을 유지했었다. 그러나 구조조정 이후 대학장 수가 '''1:1에서 1:5''' 비율로 벌어지고, 부총장 숫자도 '''1:7'''로 크게 벌어지면서 안성캠퍼스의 발언권은 급격히 약해지게 된다. 당연히 안성캠퍼스에 대한 투자 요청 목소리도 크게 나올수가 없었다.[64] 이런 구조조정의 중심엔 기업의 인수 합병을 전문으로 했던 컨설팅업체인 '''액센츄어'''가 있었다.[65] 당시 같은 시기에 본분교 통합을 했던 대학 중 이렇게 한곳의 캠퍼스에 입학정원을 올인한 대학은 전국에서 중앙대학교가 유일했다.[66] 당시 평가팀 팀장은 1년에 100억이 들어오는 재정지원을 받지 못할 경우 재정적 손실이 크기 때문에 평가 제외를 신청하지 않았다고 했다.[67] 안성캠퍼스는 중앙대학교의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68] 서울 근교의 땅값이 쌀리도 없었다. 또한 안성캠퍼스 부지를 팔아서 나온 자금으로 이 캠퍼스를 조성하려고 했기 때문에 서울과 안성 사이쯤에 위치한 지자체에 제3캠퍼스를 만든다는 생각 자체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검단이라는 뜬금없는 장소가 하남캠퍼스 무산 이후 대체 캠퍼스 예정부지로 진행된 것이다.[69] 하남캠퍼스가 무산된 표면적인 이유는 중앙대가 당초 계획을 변경해 학교 규모와 학생 수를 크게 줄이고 남는 부지를 개발해 캠퍼스를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당연히 땅 장사로밖엔 볼 수 없었던 하남시는 캠퍼스 이전 계획을 무산시켰다.[70] 본분교 통합은 전국에서 중앙대학교가 가장 먼저했고, 경희대학교는 그 다음에 했다. 또한 경희대보다도 중앙대가 유사학과 통폐합을 먼저 시작했다. 다만 그 이유는 학교의 재정난 때문이었지만. 하지만 박범훈 총장이 이명박 정부의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수석'''을 지내지 않았다면 경희대학교도 본분교 통합이 불가능했다. '''중앙대 덕에 경희대가 이득'''을 본것.[71] 너무 급하게 본분교 통합을 하다보니 통합시 필요한 서울캠퍼스의 교지 확보율도 이행하지 못해 2017년에 서울캠퍼스 정원 이전이라는 제재를 받는다.[72] 본부의 이런 말도안되는 구조조정 때문에 서울캠퍼스의 교지확보율은 전국 꼴찌수준이 되었고, 안성캠퍼스의 공동화는 너무 심해져서 캠퍼스로 들어온 편의시설도 도로 나가는 형국이다. 보통 대학의 경우 이런 편의업체가 서로 들어올려고 치열하게 경쟁한다는데 안성캠퍼스에선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최근 햄버거 가게와 커피가게도 학생수가 적다는 이유로 모두 입점을 거절했다.[73] 안성캠퍼스엔 임원급 인사가 '''안성부총장 단 한명''' 뿐이다. 하지만 서울캠퍼스는 임원급 인사가 '''총장, 행정부총장, 교학부총장, 연구부총장, 의무부총장, 간호부총장''' 등 '''6'''명이나 된다. 이 상태에서 협상해봐야 나올 결론은 '''서울캠발전'''이란 단어 딱 하나 뿐이다. 또한 실무진들이 모두 모여 역량을 합해야만 실질적인 발전안을 계획해 추진할 수 있는데 이런 역량을 모을 수 있는 행정직원과 임원급 인사들이 모두 서울에 있다.[74] 교육부 제재로 서울캠퍼스 정원 108명을 안성으로 이전해서 이정도 선에서 끝난것이다. 원래 서울캠퍼스에서 안성캠퍼스로 최대 보낼수 있는 정원은 170명이었다. 그러나 본부는 한명이라도 안성으로 적게 보내려고 꼼수를 써서 108명으로 줄여 안성으로 보낸것이다. 서울은 과밀화가 문제고, 안성은 공동화가 문제라면서 정원 조정에 이렇게 소극적인건 너무나도 노골적인 처사다.[75] 무려 입학정원의 절반이 날아간 셈이다. 1000명의 입학정원을 재학생 기준으로 단순 환산해 본다면 약 1만명 가까운 학생이 캠퍼스에서 사라진 셈. 이러한 이유로 안성 내리 원룸의 공실률이 커졌고, 빈자리를 외국인 노동자들이 채우며 지역문제로까지 발전했다. 덕분에 지금까진 안성캠퍼스 근방에 파출소를 설치해달라는 건의를 계속해도 콧방귀만 끼던 안성경찰서가, 갑자기 외국인 범죄율이 늘어나니 사태의 위급함을 깨닫고 부랴부랴 내리파출소를 건립하게 된다.[76] 사실 100주년 기념식때 이런 로드맵이 나올 줄 알았다..[77] 사실 지리적인 단점을 더욱 크게 부각시키는 요인은, 안성은 경기남부에서 '''유일하게 전철역이 하나도 없는 지자체'''란 점이다. 경부고속도로(원래 평택소사벌은 안성땅이었다.), 중부고속도로, 평택제천고속도로,서울세종고속도로(예정) 등등 고속도로가 4개나 지나는 도로교통편의성은 있으나, 전철역이 하나도 없어 교통 선택권이 좁다는것이 안성의 현실적 한계. 때문에 안성시청과 안성시민들이 지금 사활을 걸고있는것이 '''안성역 복원건'''이다.[78] 경부고속도로가 안성 가장자리 끝에 겨우 걸쳐서 지나는것처럼 보이나, 사실 경부고속도로 안성ic주변은 평택이 아니라 모두 안성땅이었다. 그러다 1983년 1월 10일 공포된 대통령령 제11027호 로 안성군 원곡면 용이리 죽백리 청용리 월곡리와 공도면 소사리가 평택읍에 포함되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79] 사실 평택이 브레인시티에 성균관대를 유치 하려다가 무산된 이후, 이곳에 중앙대병원을 유치 하려던적이 있는데 중앙대가 거절했다는 썰이 있다. 광명이 아닌 평택에 중앙대 제2병원을 지었다면 단국대처럼 생명대와 바이오의공학분야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을텐데 아쉬운 부분. 지금 이 병원 부지엔 아주대학교 평택병원이 들어선다고 한다.[80] 이 종이에 적혀 있던 안건은 국제캠퍼스, 다빈치캠퍼스, Central캠퍼스 3개.[81] 또한 다빈치인재개발원도 있었다.[82] 명칭이 선정된 사유와 제출자가 명칭을 생각하게 된 이유를 중대신문에 보내지 않아서 신문에서 대놓고 선정된 명칭에 대한 혹평을 써냈다고 한다.[83] 해당 공모전에서 선정되 상금을 받게된 학생은 상금을 모두 학교에 기부하여 "이 행사가 개인의 이득으로만 그치지 말고 모두의 이득"이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84] 티머니 E-Pass 이용가능하기 때문에 수동으로 검표하지 않는다.[85] 고작 대학 셔틀버스 주제에 하차벨까지 달려있다...[86] 교직원 기숙사와 학생회관도 600번대이다.[87] 안성캠퍼스 계획 조감도도 수림체육관 방향이 정문으로 되어 있다.[88] 또한 안성선도 폐선되어 대학이 고립상태가 된다.[89] 2019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디자인학부 패션디자인전공 학생회장 최원석, 실내환경디자인전공 학생회장 주연성 공동 건의[90] 예술대학 서울캠퍼스 학장실은 301관 중앙문화예술관에 있다.[91] 보다시피 이 건물은 산위에 지어진 건물이다 보니 풍속이 장난아니게 강하다. 때문에 이 건물이 위치한 지대엔 폭풍의 언덕이라는 별칭(?)도 있다.[92] 잠깐이지만 에너지시스템공학과도 이 건물을 사용했었다.[93] 직원들이 매일 출퇴근버스로 출근한다.[94] 총장실은 서울캠퍼스와 안성캠퍼스 모두에 있다.[95] 혹자는 피라미드라 하고 혹자는 커맨드센터라는 별명으로 부른다.[96] 때문에 지금도 이 건물 일부는 공과대학이 실험실로서 사용하고 있다.[97] 중앙광장, 중앙마당은 서울캠퍼스에 있다.[98] 여기서 '''한국의 중앙에서 세계의 중앙으로''' 라는 표어가 생겨났다.[99] 고가도로구간도 포함하면 10차로[100] 심지어 아파트 내부로는 절대 들어올 수 없으니 왔던길 그대로 후진해서 가라 했다. 덕분에 진절머리 난다고 손님들이 상가도 방문하지 않은채 그냥 가버리는 일이 빈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