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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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지정환(池正煥, 1931년 12월 5일 ~ 2019년 4월 13일)은 벨기에 태생 천주교 전주교구 소속 원로사목자 신부이다. 본명은 '디디에 엇세르스테번스(Didier t'Serstevens)'.[1][2]
벨기에계 한국인으로, 2016년 2월 4일 법무부에서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자에게 수여하는 국적 증서를 받아 법적인 한국인이 되었으며, '임실 지씨'로 창성창본하였다.[3] 따라서 한국벨기에이중국적자이다.
오늘날의 임실 치즈를 있게 한 인물. 또한 동시에 오늘날 대한민국에 치즈가 있게 한 인물이다. 명실공히 한국 치즈의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겠다.

2. 생애


1931년 12월 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한 귀족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 1958년 가톨릭 사제가 된 그는 당시 한국전쟁의 여파로 아프리카보다도 가난하다는 한국으로 파견 갈 결심을 하고, 그 이듬해 부산항에 발을 딛었다.
천주교 전주교구에 배속된 그는 전주시 전동성당의 보좌신부로 발령받았다. 그러다 1961년 7월, 인사이동으로 부안성당 주임신부가 되어 부안군으로 떠나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가난 때문에 어렵게 사는 농민들을 구제하고자 30만평에 이르는 땅을 간척하게 하고 간척에 참여한 농민들에게 그 땅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어럽게 일구어 낸 땅들은 고리대와 노름을 통해 부자들에게 넘어가고 말았고, 이를 보며 분통이 터진 지정환 신부는 '다시는 한국인들의 (경제적인) 삶에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러나 1964년 척박한 산골 동네인 임실군에 위치한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그는 다시 가난으로 불쌍한 삶을 사는 농민들을 대면하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조금만 개입할 생각으로 풀밭이 많은 임실에서 자라기 쉬울 산양을 길러[4] 산양유를 생산하였으나 당시 한국에서 낯설었던 산양유가 잘 팔리지 않고 남은 것이 버려지게 되자, 그 젖으로 치즈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다.[5] 곧 이를 더 크게 벌여 군민들의 삶을 돕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벨기에의 부모님으로부터 2,000달러를 받아 허름한 치즈 공장을 세웠다.[6]
하지만 치즈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3년이 지나도 성과가 나오지 않자, 프랑스이탈리아 견학까지 가서 기술을 배워와서 1969년에 비로소 치즈 생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치즈 산업체에서는 산업 기밀이라며 기술을 알려주는 걸 꺼렸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탈리아 공산당 당대표 비서로 일한 젊은이가 노트에 기술을 적어서 신부에게 주었다고 한다. # 3달만에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보니, 그동안 같이 치즈 생산 작업을 했던 청년들이 계속 된 실패에 좌절하고 신부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1명만 남고 다 떠나버려서 다시 불러모았다고 한다. 제대로 된 치즈 공장 하나 없던 시절에 임실 치즈는 서울의 특급 호텔에 납품될 정도로 유통망을 넓혀갔다. 후에 지 신부는 이 치즈 공장의 운영권, 소유권을 모두 주민협동조합에 넘겼다.
지 신부는 한국의 민주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유신 체제에도 항거하여,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저항운동을 하였다. 이 때문에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 시위 중에 체포되어 국외 추방의 위기까지 갔으나, 당시 정권도 치즈 산업으로 농촌 경제 육성에 이바지한 그의 공적을 인정했기에 추방 명령은 집행되지 않고 경찰에게 감시받으며 사는 정도로 끝났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는 시민군에 제공할 우유를 차에 싣고 홀로 광주에 갔다가 참상을 목격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피로 누적 탓인지, 그는 1970년대부터 오른쪽 다리에 다발경화증을 앓게 되었다. 몸의 신경을 조금씩 마비시키는 이 병으로 인해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었다. 3년간 고국인 벨기에로 돌아가 휴양 겸 치료를 받고 1984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재활센터인 '무지개 가족'을 전주 인후동에 설립하였으며, 2004년 일선 사목에서 은퇴해 후임 신부에게 물려준 후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해 죽을 때까지 운영하였다.
이후 2019년 4월 13일 오전에 숙환으로 선종했다. 향년 87세. ‘임실 치즈 아버지’ 지정환 신부 숙환으로 13일 별세 임실치즈 만든 지정환 신부, 선종 순간까지 치즈 걱정
선종 이틀 후인 4월 15일 정부에서는 영양 공급이 부족했던 어려운 시기에 선진국에서 젖소를 수입해 국민에게 제공하는 등 한국 치즈 산업을 태생시켜 임실을 치즈 산업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킨 공로를 인정하여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3. 여담


한국에서 50년을 넘게 생활했기 때문에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것도 전라도 사투리를 말이다. 2018년 8월에 경향신문 기자가 인터뷰를 하러 가서 신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다른 차가 깜빡이를 켜지 않고 옆차선에서 불쑥 들어오자 “저런 썩을 눔” 하며 호통을 쳤다고. 자기 스스로를 시골놈으로 칭했다.
다발성신경경화증에 걸렸지만, 노환이 심해지기 전까지 날마다 3천보씩 목발을 짚고 걷는 연습을 했었다. 중증 장애인을 위해 본인이 건립한 무지개 가족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비장애인도 미사 내내 앉아서 있게 하는데, 이는 장애인들이 거리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말년에는 조선 후기에서 구한말에 활동했던 신부들에 대한 기록들을 정리해 편찬하는 작업을 했다.
언론에서 영웅처럼 다뤄지는 게 싫어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지라, 중앙일보에서는 설득 끝에 e-mail을 통해서 간신히 몇가지 문답만 주고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는 이곳. 다만 조선일보에서 성공한 인터뷰 기사와 후술하는 경향신문 인터뷰도 있긴 있다.
피자 프랜차이츠 중 '지정환임실치즈피자' 라는 지정환 신부의 얼굴을 내걸고 홍보하는 업체가 있는데, 말 그대로 얼굴과 이름만을 빌린 수준이다. 원래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설득 끝에 마음을 바꿨다.

“임실치즈가 잘 되면서 피자 브랜드까지 생겼어요. 그러다 나한테 와서 얼굴과 이름을 빌려달래요. 난 성직자일 뿐인데 무슨 사업이냐고 반대하다 피자가 잘 팔리면 임실치즈 소비에도 도움이 된다는 설득에 나중에 마음을 바꿨어요. 체인이 우후죽순 생기고 장사가 잘 되다보니 이권을 놓고 싸움이 벌어졌어요. 내가 이름 사용료를 받는 것도 아닌데 야단법석 통에 괴롭더라고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변호사와 당사자들을 불러놓고 내 이름을 사용할 거면 사용료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매달 130만원씩, 5년 전부터는 매달 250만원씩 받는 돈이 장학재단에 큰 보탬이 됐습니다.”

-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 중에서 발췌
생전인 2018년에 본인의 장례식에서 노사연의 노래 '만남'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훗날 노사연이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게스트로 출연했을때 이 이야기가 첫 문제로 출제되었고, 지정환 신부의 관이 운구될 때 모든 사람들이 만남을 부르는 자료영상을 보고 깜짝 놀란 노사연은 "알았으면 갔었을 거야, 버선발로 달려가서 마지막을 함께 했을 텐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1] 본래 이름인 디디에에서 성(姓)인 지, 이름을 지어준 김이환 신부의 이름으로부터 환을 따왔고, 정의가 환하게 빛난다는 뜻이라고 한다. 훗날 지정환 신부는 자신의 이름을 설명할 때 "'''정'''의가 '''환'''히 빛날 때까지 '''지'''랄한다"(!)는 뜻이라고 약간 각색하였고, 그게 실제로 언론에 타기도 했다.[2] 이름인 디디에는 프랑스식이고 성인 엇세르스테번스는 네덜란드식이다. 벨기에의 네덜란드계 주민들은 이름은 프랑스식이면서 성은 네덜란드식인 경우가 많다. 옆동네인 룩셈부르크의 독일계 주민들이 이름은 프랑스식이면서 성은 독일식인 것과 비슷한 케이스.[3] 다만 결혼이 불가능한 가톨릭 신부였기 때문에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므로, 지정환 신부가 선종한 현 시점에서 임실 지씨는 대가 끊어진 상태다.[4] 다른 교구의 신부로부터 받은 산양 2마리였다.[5] 그러나 정작 신부 본인은 어려서부터 치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6] 지정환 신부의 아버지는 아들이 치즈 산업을 위해 돈을 지원해달라고 하자 "치즈를 싫어하는 네가 무슨 치즈를 만든다는 거냐?"하고 황당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