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왕

 


'''辰爾王
진이왕
'''
'''성씨'''
부여(扶餘)
''''''
진이(辰爾) / 지인(智仁)
'''사성성씨'''
스가노아손(菅野朝臣)
'''생몰연도'''
음력
? ~ ?
'''섭정기간'''
음력
600년
1. 개요
2. 생애
3. 오우치씨 족보에서의 기록


1. 개요


백제의 왕족으로 진사왕의 5대손이다.[1] 토요타씨 족보에서는 법왕무왕 사이 즉위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링크 일본서기에서 그가 고구려의 상표문을 해독한 일화가 실려있다.

2. 생애


진손왕이 일본으로 망명한 이후 그의 집안은 대대로 천황을 근시(近侍)하는 자리에 있었으며, 그의 세 형제는 모두 부여씨가 아닌 스가노아손(菅野朝臣)씨로 기록되어 있다.
572년 고구려에서 보내온 외교문서의 내용이 난해하여 왜왕이 그것을 손수 대신에게 주면서 여러 후비토(史)를 불러 모아 해독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3일 안에 모두 해독하지 못하였고, 왕진이만이 훌륭하게 해독하여 왜과 대신 모두로부터 크게 찬미를 받았다. 이로 인해 왜왕이 거처하는 전중(殿中)에 근시하게 되었다.
또한 이 때 고구려의 외교문서 중에 글자를 까마귀 깃에 써서 보낸 것이 있었으나 아무도 해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까마귀 깃을 밥김에 쐰 다음 흰 비단 위에 박으니 글자가 또렷하게 나타났으므로 조정에서 다시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는 그의 박식함과 기지를 잘 보여주는 사화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그의 후손이라 전해지는 미마츠(三松)씨 족보에 의하면 비다츠 덴노 치세(572~585)에 백제왕신사(오사카부 히라카타시 소재)를 세우고 그의 조상을 제사지냈다고 한다.

3. 오우치씨 족보에서의 기록


初代 百済國大祖 都慕大王、第二代 直支王、第三代 阿美王、第四代 腆支王、第五代 久爾辛王、第六代 毘有王、第七代 蓋圖王、第八代 文園王、第九代 三斥王、第十代 東城王、第十一代 武寧王、第十二代 聖王、第十三代 威徳王、第十四代 惠王、第十五代 法王、第十六代 辰爾王、第十七代 武王、第十八代 義慈王、第十九代 豊璋王、第廿代 禅廣

'''토요타씨 족보'''

삼국사기에는 무왕법왕의 아들이지만, 위덕왕 사후 혜왕법왕이 연이어 사망하는 이변이 발생한다. 위덕왕의 뒤를 이은 혜왕의 재위 기간이 2년, 법왕의 재위 기간이 1년[2]밖에 되지 않고, 뚜렷한 행적이 보이지 않는 등 석연치 않은 점이 존재한다. 또한 이전부터 무왕은 위덕왕의 아들설과 손자설이 모두 있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강가에 사는 과부가 검은 용[3]과 통정하여 얻은 아들이 서동, 그러니까 무왕이라고 기록됐다.
중국 북사에서는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었고, 한때 위덕왕의 아들로 일본으로 건너간 아좌태자무왕의 아버지로 추정되기도 했다.
무왕과 서동에 대한 여러 이설이 존재하는 가운데 1398년 일본의 호족 오우치 요시히로가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조선 조정에 족보를 보내오면서 진이왕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일본 토요타씨 계보와 신찬성씨록 등에서는 법왕무왕 사이에 나타난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정식 국왕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시호가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섭정이나 찬탈 형태로 올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를 고려하면 법왕무왕 사이에 왕좌 공위기가 있었고, 일본 측에서는 백제왕신사의 제사장인 그를 정통성 있는 백제 국왕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1] 진사왕 - 진손왕(辰孫王) - 태아랑왕(太阿郞王) - 해양군(亥陽君) - 오정군(午定君) - 왕진이(王辰爾)[2] 5개월 또는 6개월 설도 있다.[3] 왕 또는 왕자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