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군

 



1. 進軍


적과 맞서 싸울 목적으로 군대가 나아가는 것을 뜻하는 단어. 어떤 일을 여러 사람이 활기차게 행하러 가는 모양새를 빗대는 말로도 쓰인다.

2.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陳羣
진군
'''
'''시호'''
정후(靖侯)
'''작위'''
창무정후(昌武亭侯) → 영향후(潁鄕侯) → 영음후(潁陰侯)
'''최종직위'''
사공(司空)
'''성씨'''
(陳)
'''휘(諱)'''
(羣)
'''자(字)'''
장문(長文)
'''조부'''
진식(陳寔)
'''아버지'''
진기(陳紀)
'''숙부'''
진심(陳諶)
'''장인'''
순욱(荀彧)
'''생몰기간'''
?년 ~ 236년
'''고향'''
예주(豫州) 영천군(穎川郡) 허현(許縣)
'''사공 재임기간'''
226년 12월 ~ 236년 12월 24일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가. 자는 장문(長文). 예주 영천(허창) 사람.
대학자 진식의 손자, 진기의 아들, 진심의 조카, 순욱의 사위, 진태의 아버지.

2.1. 생애



2.2. 초기 생애


대대로 청류파로 이름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진군이 어렸을 때, 조부인 진식은 항상 그의 재능을 특별하게 생각하고는 종족의 장로들에게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진원방(진기)의 아들 진장문(진군)과 진원방의 동생 진계방(진심)의 아들 진효선(진충)이,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덕이 더 훌륭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말이 나지 않아서 할아버지인 진식에게 판정을 내려주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진식은 "형이 낫다고 하기도 어렵고 동생이 낫다고 하기도 어렵구나."라고 대답한 데서 난형난제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노나라 사람 공융은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오만했다. 나이는 진기와 진군의 중간이라서 먼저 진기와 교우를 맺었고 후에 진군과 사귀었고 진기를 위해 절까지 하자 이로부터 진군의 명성도 올라갔다.

2.2.1. 유비 휘하에서


처음에는 예주자사로 있던 '''유비에게 앞서 출사'''했었다.[1][2] 별가 자리에서 일했는데, 194년에 서주목 도겸이 죽어 서주가 혼란해지자 유비가 서주를 아우르려 할 때 "원술은 아직도 세력이 강대하므로 지금 동쪽으로 간다면 반드시 그와 싸우게 될 것입니다. 또 여포가 만일 장군의 뒤를 습격한다면, 장군은 설령 서주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일은 반드시 성공할 수 없습니다."라고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후에 정말로 여포가 쳐들어와 유비는 진군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달아났다. 진군은 아버지와 함께 야인으로 물러나 피난살이를 했으며, 문재로 천거되어 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2.2.2. 조조 휘하에서


198년에 조조가 여포를 멸하자 조조의 밑에 들어가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왕모와 주규를 천거했을 때 진군은 ​이들이 악하다고 반대했지만 조조는 진군의 말을 듣지 않고 이들을 등용했다. 후에 왕모와 주규는 잘못을 저질러 처형되었고 조조는 진군에게 사과했다.
진군은 진교와 대건을 조조에게 천거했는데, 진교는 명신이 되어 상서령까지 올랐고, 대건은 오나라 사람이 모반하자 충의를 다하여 위험 속에서 죽었다. 당시 사람들은 진군이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214년에 어사중승의 자리까지 올랐다.
조조가 육형(肉刑)[3]을 부활시키려고 하였을 때, 부적절한 사형을 줄일 수 있다는 관점에서 종요와 함께 찬성했다. 그러나, 왕랑(王朗) 등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다.
곽가전에 따르면 진군은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대단히 엄정하였는데 조조의 최측근 모사인 곽가의 행실이 바르지 못한 것을 지적하여 여러차례 고발했다. 조조는 곽가를 감싸주었지만, 진군의 엄정함도 높이 평가했다.
유이는 동생이 위풍과 반역을 도모한 것에 연루되어 사형당하게 될 위기에 처했다. 진군이 조조에게 청하자 조조는 유이를 사면해주고 유이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유이가 진군에게 감사해하자 진군은

"대체로 형벌에 대한 논의는 국가를 위한 것이지 사사로운 정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것은 성명한 군주의 의향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내가 어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라고 답했다.

2.2.3. 조비 휘하에서


조비가 태자가 되었을 때, 진군을 매우 존경하여 예의바르게 대했고 항상 감탄하며

"나에게 안회가 있은 후부터 문인들은 날마다 나를 가까이 하는구나."

라고 말했다.
조조가 죽고 조비위나라를 세울 때에도 전심으로 협력해 조비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220년에는 구품관인법을 제정하였으며 상서령의 자리에 진군대장군의 자리까지 올라, 손권과 싸울 때는 수군을 지휘하는 직책에 있었다. 조비가 탁고하는 자리에서 조진 그리고 사마의 등과 함께 뒷일을 부탁 받았다.

2.2.4. 조예 휘하에서


조예의 대에도 중신으로 대우받아 사공의 자리까지 올랐다.
조진이 황제에게 표를 올려 촉을 토벌해야 한다고 몇 차례 진언하고 사곡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가려고 했다. 진군은 식량이 준비되지 않았고 사곡의 지세가 험난하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예는 진군의 의견을 들었다.
이번엔 조진이 표를 올려 자오도로부터 촉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진군이 다시 표를 올려 시행하기가 불편하다고 말하고, 아울러 군사를 다루는 계책을 말했다. 조예는 조서를 내려 진군의 건의를 조진에게 주었고, 조진은 그의 건의에 따라 시행했다. 마침 며칠 간 장마가 내렸고, 진군은 조서를 내려 조진에게 돌아오도록 해야만 된다고 주장했으며, 조예는 진군의 의견을 따랐다.
조예의 딸 조숙이 병으로 죽자 시호를 평원의공주로 추증했다. 진군은 조예에게 여덟 살 이하의 어린애가 죽었을 뿐인데 어찌 한 달이나 장례를 치르면서 조정의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고 아침 저녁으로 통곡하게 하냐고 상소를 올렸다. 조예는 듣지 않았다.
조예가 궁궐을 건축하여 백성들이 힘들어하자 진군이 궁궐공사에 대해서 상소를 올렸다. 진군은 우임금도 요순을 계승했지만 검소했다. 지금은 전란이 있은 이후로 백성들은 지극히 적어 한나라 문제와 경제때와 비교하면, 그 당시의 큰 한 군에 불과하다. 게다가 변방에는 일이 있어서 장수와 병사들은 수고로운데, 만일 수재나 한재의 근심이 있게 된다면 국가는 커다란 걱정이 있게 될 것이고 아울러 오와 촉이 아직 멸망되지 않았으므로 사직은 불안한데 궁궐 짓는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옛날 유비가 성도에서 백수까지 역사를 만들어 많은 인력을 소모한걸 보고 위무제가 백성을 피곤하게 하는 짓이라고 비판했는데 똑같은 짓[유비가]하지 마시라고 했다.
조예가 왕자(王者)의 궁전은 응당 (오나라와 촉나라를 멸망시키는 것과) 더불어 진행해야 한다. 적을 멸망시킨 다음에는 다만 역을 면하고 지키기만 해야지 어찌 다시 요역을 일으키겠는가? 그러므로 이는 그대의 직무이자 소하의 큰 계략이다[4]라고 반박했지만 진군이 그것과는 경우가 다르다고 하며 '옛날 한고조는 단지 항우와 천하를 다투었는데, 항우는 멸망하고 궁실은 타버렸기 때문에 소하가 무고와 태창을 만들것을 건의하였던 것이며, 이런 것들은 모두 긴급히 필요한 것들이었지만, 한고조는 그것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지금 두 적(촉한, 손오)은 평정되지 않았으니, 진실로 옛날과 똑같이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중략)'이라고 또 반박하자 조예는 궁전의 건축을 감소시켰다.
이 시기 부하가 진군의 추천으로 관직에 오른다. 부하가 209년생이니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까지 인재 보는 안목이 탁월했던 것.
236년에 세상을 떠나자, 조예는 그의 공덕을 추모하고, 식읍을 분할하여 한 아들을 열후로 봉했다.
위서에 따르면 진군이 황제에게 상소할 때마다 그 초고를 없애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군이 그렇게 간언하는지 모르고 진군은 침묵만 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진군 사후, 정시 연간(240년 ~ 249년)에 신하들이 올린 상서 중에서 명작(?)들을 뽑아서 공개했는데, 이때서야 신하들이 진군의 간언 내용을 볼 수 있었고, 모두들 경탄해 했다고 한다.

2.3. 구품관인법


진군이 중국 제도사에 남긴 중요한 업적으로 221년 위 성립과 함께 제정한 구품관인법이 있는데 구품중정제라고도 한다. 제 아무리 삼국지가 '교과서의 몇 줄 분량을 열 권 분량으로 늘린 것'이라지만 이건 세계사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중요하다. 게임 삼국지에서 관직을 구품관에서 일품관 이런 식으로 구별한 것은 바로 이 구품관인법을 반영한 것을 들 수 있는데, 그간 호족의 추천이나 채용관의 의사가 개입되기 쉬웠던 인재 등용 절차를 체계적으로 정비한 것으로 각 지방에 중정관을 설치해(중정) 사관 희망자의 재능과 덕행을 심사하여 9등급(구품)으로 나눠 내신서를 작성하고 매긴 등급보다 몇 단계 낮춰 초임시키는 형식을 골자로 삼고 있다.
본래 목적은 객관적으로 개인차에 따른 인재를 선발하려는 것이었지만 갈수록 변질되어 세력 있는 자가 높은 등급, 그렇지 못한 자가 낮은 등급으로 고정되고 높은 등급에 임용될 목적으로 돈을 푸는 등 매관매직의 폐단을 재차 초래하게 되었다. 이 제도는 남북조 시대에 가장 융성했으며, 중정을 통한 관리 선발 제도는 가 전국을 통일한 뒤 과거 제도로 대체되었으나 관품제도는 남아서 청나라 말기까지 실행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관리의 품계를 정 1품부터 종 9품까지 나눈 것이 진군의 영향이다.
실제로는 중국 전체 역사로 보면 별달리 중요하지 않은 시기인 위진시대에서 후대에 까지 남을 업적을 남긴 3명의 인물 중 한명. 나머지는 조조와 도교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장로 정도가 꼽힌다. 그 외에는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태평도의 교조 장각이나 베트남에 중국 문물을 전파한 사섭이 있다.

2.4. 미디어 믹스



2.5.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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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비가 승하할 때 부른 3명의 대신 중 하나로 등장한다.

2.5.1. 삼국지 시리즈


[image]
[image]
100만인의 삼국지
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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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구품관인법 업적을 반영해 위나라의 장소라 해도 좋을 만큼 정치력이 두드러지는 인물로 등장한다.[5] 삼국지 4삼국지 5 시절에는 지력이 높아 군사로 활약하던 때도 있었다. 이후 정치력은 그대로 놔두고 지력은 점점 칼질되어 70대까지 내려갔다. 삼국지 5 이후로는 유비에게 잠시 출사했던 것을 근거로 군웅할거 시나리오(194년 무렵 시나리오) 때 유비의 부하로 설정되어 있다. 이 시나리오가 아니면 보통 허창에서 재야로 있거나 이미 조조의 부하가 되어 있다. 군웅할거 즈음 시나리오에서 유비의 부하로는 기껏해야 유비 3형제와 간옹 뿐이라서 진군은 정말 소중한 인재가 된다.
삼국지 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1/무력 48/지력 91/정치 90/매력 74, 특기는 정보, 인재, 제조, 풍문, 낙석, 혼란, 수복, 허보로 좋은 능력치와 알짜배기 특기는 다 가지고 있으며 군사,시중 모두 가능하다. 조비가 황제로 나오는 221년 시나리오에서 정치력은 위나라 TOP3, 지력은 TOP4다.
삼국지 5에서는 장소와 더불어 '''정치력 최고치'''(98)를 기록했다. 지력도 93이나 되며 조조의 대두(194년) 시나리오에선 유비의 부하로 있기 때문에 소패, 하비 2개의 땅을 가지고 있는 유비는 이 시나리오에서 엄청 할 만하다. 단 초기 충성도가 86에 유비랑 궁합이 안 맞기 때문에 재수 없으면 첫 턴이 오기도 전에 타 세력에 뺏기는 수가 있다. 보통 금 600정도를 쓰면 무난하게 충성도를 100으로 만들 수 있다. 또한 하비가 거점인 유비완 다르게 진군은 소패 소속으로 있으니 참모로 임명하고 바로 하비로 불러오는 건 필수. 안 그러면 유비군의 참모는 초기 설정 대로 관우가 된다.
삼국지 6도 5와 마찬가지로 장소와 더불어 정치력 최고치 99를 기록한다. 통솔60/ 무력38/ 지력87/ 정치99/ 매력78에 꿈은 대의, 성장은 보통이다. 지력역시 꽤나 높게 설정되어 있고 매력도 80에 근접하기에 탑클래스 문관이다. 군웅할거 시나리오에서는 유비군에 종사하고 이후 시나리오는 조조군에 종사한다. 군웅할거에선 유비군의 군사를 맡지만 나이와 내무경험이 쌓이지 않아 지력이 썩 좋지 않은 편이다. 어떻게 해서든 서서를 빠르게 수색해 군사를 갈아치우는 편이 낫다. 조조군에서는 진군보다 훨씬 지력이 좋은 모사가 많고 정치와 매력은 성장을 크게 타지 않아 계략이나 전쟁보다 내정과 인재등용에 요긴하게 쓸 수 있다.
삼국지 7에서는 이상하게 장양의 부하가 되는 일이 잦으며, 장양이 죽은 후 장양의 후계자 1순위라 '''진군군'''이라는 괴랄한 세력이 자주 만들어진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1/무력 7/지력 72/정치력 95. 책략계 병법인 매도 하나 밖에 없다. 능력치도 능력치지만 다른 A급 내정용 문관과는 달리 그 흔한 모략계 병법 하나 없어 도저히 전장에서는 못 써먹는다. 매도는 혼란보다 한 수 아래고 병법 숙련도도 0이다. 내정용으로나 굴리자.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8/무력 14/지력 78/정치력 97/매력 77에 특기는 6개지만 농업, 상업, 기술을 모두 가지고 있는 내정계의 스페셜리스트. 나머지 특기는 보수, 항변, 명사. 후방에 태수로 놓는다면 물자, 병력을 쉽게 불려놓는지라 든든하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2/무력 14/지력 74/정치력 96/매력 73으로, 정치력은 높으나 무특기인 것까지 장소와 흡사하다. 곽가를 탄핵한 건 반영되지 않아서 곽가와 혐오무장 관계는 아니다. 능력연구를 통해 능리 특기를 부여해주면 매우 쓸만하다.
삼국지 12에서는 그의 가장 큰 업적인 구품관인법을 황제에게 상주하는 모습이 일러스트로 나왔다. 그러나 정치력이 장소보다 낮은 96이다. 다만 지력이 75인데 정치력이 96이라 적당히 잘 굴릴 수가 있고, 전법이 '''파괴력약화'''라서 수성의 달인이다. 물론 통솔력과 무력이 너무 낮아서 전투에 쓰기가 그렇지만.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2/무력 14/지력 75/'''정치력 96'''으로, 삼국지 13에 등장하는 인물 중 정치력이 3번째로 높다.[6] 중신특성은 합리철저이고 정치력도 90이 넘어서 내정중신으로 최적인데 조조군일 경우는 군주인 조조가 이미 합리철저를 가지고 있기때문에 중신특성은 좀 잉여가 된다. 근데 또 농업중시나 상업중시 가지고 있는 다른 장수들은 정치가 90이 안되는 경우가 많아 보통은 조조군에서도 내정중신으로 많이 쓰인다. [7] 전법은 후방지원으로 못 쓸 정도는 아닌 전법이나, 진군의 병과적성은 모두 C이며 전투 능력치도 저렇고 특기도 없으니 내정관으로나 쓰자. 특기는 농업 3, 문화 8, 교섭 7, 언변 7로 전수특기는 문화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32, 무력 14, 지력 74, 정치 97, 매력 73으로 전작에 비해 정치력이 1 상승한 대신 지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명성, 법률, 교화, 능리, 안목, 주의는 예교, 정책은 정령철저 Lv 5, 진형은 방원, 전법은 치료, 친애무장은 사마의, 순욱,[8] 오질, 조비, 주삭, 포훈, 허정,[9] 혐오무장은 없다. 여담으로 진등과 같은 성을 가진 무장 중에서 정치력이 제일 높다.

2.5.2. 반삼국지


반삼국지에서도 짤막하게 등장한다. 촉군이 낙양을 함락한 이후, 위의 중신들이 대거 잡히게 되는데, 이때 진군도 끼여 있다. 그리고 자결을 명받게 되어 자결한다.

2.5.3. 삼국전투기



꽤 네임드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전투기에서는 그동안 출연이 없다가 죽기 직전에 딱 1회 출연했다. 사실 석양 전투(3)에서 이름은 나왔으나 모습은 등장하지 않았다.# 전투외편 8-2에서 구품관인법의 설명하는 부분에 4컷에만 다시 등장. 패러디는 UP의 칼 프레드릭슨.

2.5.4. 삼국지W


진교와 더불어 이 게임에서 가장 푸대접을 당한 인물이다. 뛰어난 정치력을 가진 장수로 나오긴 하는데 이 게임에서 정치력이 높은 장수는 그렇게 쓸모있는 편이 아니라 특정 상황이 아니면 잘 안 쓰이고 제작사까지 진군의 존재를 잊어버린 바람에 굉장히 오랫동안 신규 카드가 나오지 않았었다. 어느 정도냐면 제갈량이 북벌하는 시점이 되어서야 간신히 3성 장수로 재등장했을 정도. 사실 이것도 그나마 나은 거고 진교의 경우는 더욱 비참하다. 이 쪽은 첫 등장을 제외하고 정식 에피소드에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가 아주 최근에서야 간신히 다시 나왔기 때문이다.

2.5.5.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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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엔 공명전에서만 낙양전투2에서 궁병으로 나왔지만 온라인에서는 등용하면 선택장수로 조조전 연의에 출진 가능하다. 성우는 이현. 원작의 대사를 거의 복붙한 조조전이므로 진군은 사용 가능하다는 것 뿐 연의 비중은 제로. 도트를 크게 확대하면 들고 있는 목간에 구품관인법이 한자로 써져있는 깨알 디테일이 있다.
유일한 방어 능력 전환 풍수사로 회심 공격 면역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풍수사 중 맷집으로는 최강이다. 문제는 코스트가 18이나 되는데, 고대무장 출시 이후 풍수사는 가볍게 가는 게 추세가 되었고 방능전까지 너프되어 섬멸전에서는 코스트만 퍼먹고 다른 유틸은 하나도 안 되는 문제 탓에 사장되었다. 핵심으로 삼던 가장 단단한 몸빵도 강화와 보패가 정립되기 시작하면서 유승금루옥의를 착용한 다른 풍수사에 비해 좋은 점이 하나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나 섬멸전에서의 성능이 그렇다는 것이고, 방어 특성을 2개나 들고 있고 또 다른 특성인 주위 각성이 천리행, 사신전처럼 상태이상이 까다로운 컨텐츠에서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가장 안정적인 풍수사로 손꼽힌다. 보통 초보자에게 추천하기보다는 장수가 어느 정도 쌓이고 안정성을 추구하기 시작할 때 쯤 최종 승급을 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진군은 서포터인데다가 등용에만 10000 금전 가까이가 드는 금전장수인 탓에 필수는 아니지만 일단 넣어두면 좋은 장수.
재미있게도 아들인 진태도 특성 조합이 섬멸에선 애매해서 (폭풍 금지 이후) 섬멸전에서는 사장되었지만 그 외 컨텐츠에서는 서포팅용 특성을 다 들고 있어 1티어로 취급받는다는 점에서 닮았다. 둘 다 코스트가 18인 것도 같다. 각성청룡에서는 부자가 쌍으로 청룡을 두들겨패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2.5.6. 대군사 사마의


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사마의가 오관중랑장 조비의 휘하에 들어가기 시작한 시점에 등장해 사마의의 가장 큰 조력자로 활약한다. 사마의는 진군을 "장문형"이라고 부르며 따르고, 조비가 황제에 오르자 황족에 대항하여 구품관인범으로 대표되는 개혁을 추구하는 동반자가 된다. 그러나 너무 똑똑한 사마의의 큰 그림을 읽지 못하고 종종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이는 등 개그캐의 역할도 겸한다.


[1] 진군의 아들 진태가 훗날 번번이 강유의 북벌의 발목을 잡는 미래를 생각하면 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2] 사실 생각해보면 출사를 유비 진영에서 하고, 조위의 명목적 창립자인 조비를 태자 시절부터 측근으로 보좌해 조위사우의 일원까지 되고, 같은 조위사우에는 사마의가 있었다. 삼국시대의 두 나라의 황제랑 최후의 승자인 서진의 지도자들과 모두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던 특이한 인물.[3] 신체를 손상시키는 형벌이다.[유비가] 왕을 칭한 후, 궁전과 관사를 짓고, 성도에서 백수까지 모두 4백곳에 관사 우정을 짓고, 대신들도 가만히 있지 않아서 백성들이 힘들어 했다.[4] 호삼성은 '이 일은 소하가 미양궁을 건설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주석들 달았다.[5] 실제로 사망한 해도 장소가 236년으로 흡사하다. 물론 까닭은 장소가 장수했기 때문이다. 출사한 시기로 따지면 진군은 170년을 전후한 출생자였을 것이다.[6] 1위는 순욱, 2위는 장소이다.[7] 본작에서 정욱이 안습인 이유... 정욱은 정치가 80대라서 내정쪽으로는 진군의 완벽한 하위호환이다.[8] 순상의 증손자 순욱이 아닌 위나라 중신으로 조조의 참모인 순욱이다.[9] 허저의 형인 허정이 아닌 촉나라 태부인 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