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집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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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昌慶宮 集福軒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인 창경궁에 있는 주거 건물이다. 양화당의 동쪽에 위치해있으며 영춘헌과 붙어있다.
‘집복(集福)’은 ‘복(福)을 모은다(集)’는 뜻이다.
2. 역사
원래 이 일대는 후궁들의 처소가 밀집된 영역이었으므로 집본헌도 후궁의 거처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기록 상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영조 때이다. 1730년(영조 6년) 4월에 집복헌과 건극당의 온돌 밑에서 뼛가루와 해골을 찾아내어 내전 영역 전체를 수리했다는 내용으로 처음 등장한다.#
1735년(영조 11년)에는 사도세자가#, 1790년(정조 14년)에는 순조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후 순조의 즉위 전 행적이 많이 이뤄졌는데, 돌잔치도 열렸으며#, 원자일 때는 이곳에서 사부와 함께 경서를 읽기도 했다.# 그리고 세자가 된 이후 관례와 책봉례를 집복헌 바깥채에서 행했고# 세자빈의 첫 간택도 여기서 이뤄졌다.#
순조 즉위 후엔 딱히 두드러진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1820년(순조 20년)에는 집복헌을 수리하기 위해 길한 날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아 이 때 보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30년(순조 30년)에 불탔고 1833년(순조 33년)에 재건되었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승정원일기》에 가끔 고종이 신하를 만났다는 내용의 기사만 드문드문 보인다. 가장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기록은 1894년(고종 31년) 5월 23일 자 《승정원일기》의 기사이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이 헐렸지만 집복헌은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 1833년(순조 33년)에 재건되면서 이전과 상당히 달라졌다. 과거에는 별개 건물이던 영춘헌과 합쳐져 두 전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원래 집복헌이 더 컸는데 이 때 영춘헌의 부속 건물이 되었다.
- 기단은 장대석 1벌로 깔고 정면에는 계단 없이 댓돌만 두었다. 그리고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홑처마에 공포없이 창방과 서까래가 바로 만나는 민도리 양식으로 되어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하였다. 단청은 긋기단청으로 칠해 소박한 느낌을 주었다.
- 평면도와 각 칸의 구성은 윗 그림을 참조. 오른쪽 붉은 사각형 안이 영춘헌과 겹치는 부분이다.
- 벽체의 경우, 온돌방 쪽은 전부 문선을 두고 가운데 창을 낸 뒤 나머지를 벽으로 마감한 모습이다. 대청의 바깥 면은 창으로 되어있다. 다만, 남쪽의 대청 2칸은 앞, 뒤로 문이 설치되어있어 출입할 수 있게 두었다. 가운데 마당에서 볼 때 북쪽에 있는 툇마루의 바깥 면은 창, 문, 벽 없이 바깥과 뚫려있어 현관 기능을 할 수 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