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금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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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문
1. 소개
2. 이름
3. 역사
4. 구조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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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昌德宮 金虎門
창덕궁의 궁문이다. 돈화문의 서북쪽에 있으며 금천교와 마주본다.
정문인 돈화문을 주로 왕의 행차 같은 큰 의례에 이용하였기에 사헌부 대사헌을 제외한 승정원, 홍문관 같은 궐내각사[1]에 근무하는 관원들이 주로 이용했다.[2] 조선 후기에 각 문마다 출입하는 사람들을 관행적으로 고정하였는데, 이 때 금호문은 조정의 관리인 조신(朝臣)들이 이용하는 문으로 기능하였다. 1789년(정조 13년)에 정조가 그러지말고 각자 다니고 싶은 문으로 다니라고 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도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입장은 할 수 없고[3] 나가는 것만 가능하다.

2. 이름


이름은 당나라의 서쪽 궁문 이름에서 따왔다.# ‘금(金)’은 오행에서 서쪽을 뜻한다. ‘호(虎)’는 호랑이로, 역시 서쪽을 나타내는 동물이다. 즉 서쪽 문이라는 뜻이다.

3. 역사


태종창덕궁을 창건하면서 같이 지은 듯 하다. 원래는 이름이 없었다. 그러다 1475년(성종 6년)에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금호문이란 이름을 지었다.#
1645년(인조 23년)에는 궁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금호문으로 드나들자 근처에 있는 서연청에서 세자가 조용히 공부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폐쇄당했다.# 그리고 3년 뒤 다시 열렸다.# 이후에도 여러 번 폐쇄와 개방이 반복되었다.#

4. 구조


  • 정면 1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를 얹어 마감했고 용마루 위에 용두를 올렸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공포는 초익공으로 익공의 끝을 둥글게 처리한 몰익공 형식이다.
  •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에 달았다. 양 측면의 칸 마다 중인방을 끼우고 위, 아래 를 초록색 나무 으로 마감하였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하였고, 위에는 홍살을 두었다. 단청은 긋기단청[4]으로 입혔다.
  •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이며, 궁 바깥 쪽 방향의 홍살에 걸려있다.

5. 여담


  •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들이 창덕궁으로 들어갈 때 이용하였던 문이다. 금호문의 수문장 박효립이 문을 열고 반정군을 들여보냈다.##
  • 1926년 4월 28일에 송학선 의사가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암살하려다 실패한 의거의 현장이다. 거사 이틀 전에 순종황제창덕궁에서 승하했다. 그리고 창덕궁 내 빈소로 가는 출입문을 금호문으로 정하였다. 송학선 의사는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이 문상을 하러 금호문을 드나드는 것을 보고 사이토가 지날 때를 노려 암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4월 28일에 일본인 3명이 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나올 때 뛰어들어 안에 타고 있던 일본인 2명을 죽이고 달아났다. 그러나 송학선 의사가 죽인 인물은 사이토가 아닌 다른 일본인이었다.[5] 결국 송학선 의사는 체포당한 뒤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5월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현재 창덕궁 앞에 ‘송학선의사 의거터’란 표지석이 있지만 금호문이 아닌 돈화문 근처에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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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선 의사 의거 터 표지석


[1] 궁궐 내의 행정관청.[2] 위치도 궐내각사와 가깝다.[3] 돈화문으로만 입장이 가능하다.[4] 가칠단청 위에 만 그어 마무리한 단청이다. 가칠단청은 무늬없이 단색으로만 칠한 단청이다.[5] 죽은 일본인은 국수회(國粹會) 지부장 다카야마(高山孝行)와 경성부회 평의원 사토(佐藤虎次郎)였다. 함께 탑승했던 평의원 이케다(池田長次郎)도 칼에 맞았으나 중상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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