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금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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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昌德宮 錦川橋
창덕궁의 금천교이다.
금천교는 이름대로 금천을 건너기 위해 세운 돌다리이다. 금천은 풍수지리적인 이유[1] 와 외부와의 경계[2] 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의 정문과 중문 사이에 둔 인공 개천이다. 그래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중문인 진선문 사이에 위치한다.
2. 역사
1411년(태종 11년)에 처음 만들었다. 창덕궁 자체는 1405년에 처음 지었으나 먼저 내부 전각들을 다 건립한 후 궁의 영역을 확정했기때문에 창건한지 6년 뒤에야 세운 것이다.
이후 그 많은 화재와 전란 등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아 '''지금까지 그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즉, 현존하는 궁궐 안, 나아가 서울에 있는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되었다.'''
다만 1907년 이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했을 때 차량 통행의 편리함 등을 이유로 다리를 약간 북쪽으로 틀어 옮기긴 하였다.#
3. 금천
금천교 밑을 흐르던 창덕궁의 금천은 북악산에서 발원한 ''''북영천(北營川)''''이다.
원래는 지금의 청계 3가 부근에서 청계천으로 바로 합류하였다. 그러나 1421년(세종 3년)에 원래 종로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던 회동천의 물길을, 범람을 이유로 동쪽의 옥류천과 만나게끔 바꾸면서 북영천 역시 회동천에 흘러들었다.[3] 지금은 창덕궁 경내와 원서동 빨래터 일부를 제외한 전 구간을 도로로 덮어놓았다.
4. 구조
- 너비 약 12.5m, 길이 약 12.9m로 궁궐의 금천교 중 폭이 제일 넓다. 임금이 의장을 갖춘 정식 행차를 할 때에 맞도록 설정된 규모이다. 그리고 다리 위엔 귀틀석과 청판석을 교대로 배열하면서 3개의 돌길을 놓았다. 왕이 다니는 어도(御道)는 가운데에 있는데 높이가 가장자리 신하들이 다니는 길보다 조금 높아 서열을 분명히 구분하였다. 그리고 경복궁 영제교와 달리 어도의 넓이가 양 옆 신하들이 다니는 길보다 훨씬 넓다.
- 다리 윗 부분 동, 서 가장자리엔 각각 6개의 돌 기둥을 설치한 뒤 그 사이마다 난간을 설치하였다. 돌 기둥 중 엄지기둥[4] 의 머리 부분엔 서수를, 조각하여 올렸고 나머지 기둥엔 연꽃봉오리를 장식하였다. 그리고 기둥 사이마다 판석을 세웠는데, 판석은 하엽동자기둥[5] 모양의 부조[6] 를 중심으로 구멍을 2개 뚫어놓았고, 칸마다 4잎 형 안상을 투각하여 놓았다.#
- 엄지기둥을 제외한 나머지 기둥 밑에는, 멍엣돌에서 튀어나온 돌로 천록 머리 상을 조각해서 놓았다. 천록은 《후한서》 - 영제기에 나온 상상의 동물인데, 요사스럽고 나쁜 것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즉, 외부의 잡귀를 막는 상징적 경계인 금천에 사악하고 나쁜 것을 물리치는 동물인 천록을 둠으로써 궁궐의 신성함을 더욱 돋보이려 했던 것이다.
- 다리 아랫 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아치[7] 를 2개 만들었다. 아치를 받치는 돌을 선단석이라 하는데, 선단석은 1단으로 되어있으며 금천 바닥 밑에 박혀 있으나, 그 중 반 단은 밖으로 길게 빼놓았다. 그리고 선단석 밑에 지대석을 두어 더욱 튼튼하게 하였다. 그리고 선단석 위, 아치가 서로 만나는 부분에 청정무사로 불리는 도깨비 얼굴이 새겨진 역삼각형 석면을 배치하였고, 그 앞에 돌로 만든 동물 상을 설치했다. 남쪽엔 해태를, 북쪽엔 거북이를 환조[8] 로 만들어 놓았다.
- 2000년부터 2002년 사이에 발굴 조사를 하였다. 이 때 위에 언급한 금천교의 이전 설치와 관련된 유구를 확인하고, 금천교가 세워진 뒤 몇 차례 보수 작업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으나 정확한 이건 시기를 밝히진 못했다. 자세한 내용 및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조.
5. 여담
- 근대화, 산업화를 거치며 서울 시내 개발 등의 영향으로 창덕궁 금천의 물이 말랐다.[9] 문화재청과 현대건설[10] 이 창덕궁의 원형과 경관 회복을 하기로 협력하여, 그 일환으로 2012년 4월부터 금천의 물을 흐르게 하였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 현재는 다시 물이 말랐다.(...)
6. 매체에서의 등장
-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가 폭우를 맞으며 석고대죄를 하는 곳, 사도세자가 죽은 후 영조가 개선가를 울리며 지나는 다리가 바로 여기이다. 단, 영화에서는 폭은 좁으나 길이는 긴 다리로 나왔는데, 실제로는 짧고 폭이 꽤 넓다. 사실 실제 창덕궁 금천교에서 촬영한 게 아니고 경기도 성남시 분당중앙공원에 있는 돌다리에서 찍었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 것.#
[1] 궁궐의 앞쪽에 물을 흐르게 하여 풍수에서 가장 좋다는 배산임수를 구현하였다.[2] 물론 실제 궁궐과 외부의 경계는 문과 담이지만, 잡귀를 쫓아내고 또 외부인이 궁에 들어갈 때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는 의미로 금천을 상징적인 경계로 두었다.[3] 회동천도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다. 물론 지금은 복개.[4] 계단의 맨 밑이나 계단참 또는 꼭대기에 수직으로 서 있는 기둥.[5] 荷葉童子. 연꽃 잎 모양으로 조각하여, 난간에 세워 댄 낮고 짧은 기둥.[6] 한쪽 면만 입체로 조각한 형태.[7] 전통 건축에선 홍예라고 표현한다.[8] 한 덩어리의 재료 전부를 삼차원적으로 조각해 내는 일 또는 그런 작품.[9] 조선시대에도 사실 많은 물이 흐르진 않았다.[10] 창덕궁 바로 옆에 사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