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청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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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청우당 '''
'''天道敎靑友黨 | Chondoist Chongu Party'''
'''약칭'''
천청
'''중앙위원장'''
리명철
'''창당'''
1946년 2월 8일
'''당가'''
없음
'''슬로건'''
없음
'''중앙 당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청년조직'''
없음
'''국내조직'''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국제조직'''
없음
'''당원'''
200여 명
'''후보당원'''
22 명
'''최고인민회의'''
22석 / 687석
'''이념&정치노선'''
주체사상
'''정치적 스펙트럼'''
혼합정치
1. 개요
2. 역사
2.1. 발족과 창당
2.2. 1, 2차 전당대회와 당세 확장
2.3. 북한 내 탄압과 부활
2.4. 현재
3. 조직
4. 통일관과 대남관
5. 참고 문헌 및 자료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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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6년 설립된 북한의 정당. 민족 고유 종교인 천도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북한의 유일한 종교 기반 정당이다. 실제로는 조선사회민주당과 마찬가지로 구색정당이다.

2. 역사



2.1. 발족과 창당


일제강점기1919년 김기전이 창당했던 '''천도교청년당'''의 후신이다. 당시 일제의 탄압에 의해 해체된 이후 해방을 맞은 1945년 9월 14일 재조직되었고, 1946년 천도교 북조선종무원이 동년 2월부터 소련군정의 인가를 받아 포교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정당을 발족하기도 전에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자, 소련은 오히려 이를 포섭해 이용한단 방침을 세우게 된다. 결국 천도교 고원군종무원장이던 김달현[1]이 농민층을 기반으로 2월 8일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을 창당했다.[2]

2.2. 1, 2차 전당대회와 당세 확장


창당 1년 후인 1947년 4월 1차 전당대회에서 대체로 김일성이 제시했던 ‘20개 정강’에 기초한 강령을 채택한다. 이후 1948년의 2차 당대회 때는 민족자주의 이상적 민주국가 건설, 사인여천[3] 정신에 어울리는 새 윤리 수립, 회귀일체(回歸一體)의 신생활이념에 기반한 경제제도 실현 등 그나마 천도교적인 강령으로 수정된다. 그러나 동년 9월 북한정권이 수립된 뒤 일부 간부진의 교체와 함께 당 강령도 북한정권의 정책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다시 수정되었다.
즉, 1949년의 확대중앙위원회에서 수정된 행동강령 가운데 인내천의 신문화를 발양, 인간창조 및 민족문화 발전에 노력한다는 조항 이외에는 천도교적 성격에 상응하는 것은 전혀 없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과 중앙정부정강을 준수, 실천하며……''' 등 로동당의 방침에 철저히 순응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4]
실제로 한국전쟁 직전까지 북한 전역에 99개의 도• 군 종무원이 조직되는 등 비교적 전국적인 조직을 갖춰 나가며 세력을 가다듬었다. 당시 남한에서도 김병세를 중심으로 한 '''남조선천도교청우당'''이라는 이름의 정당이 존재했고, 청우당은 실제로 제헌 국회의원 총선거에 등록하여 참여하기도 했다. 링크 참조. 1948년에는 무려 서울의 '''천도교중앙본부'''에서 직접 3.1절 행사를 기해 거국적인 '''반공'''의거를 일으키라는 지령을 받았으나, 당수였던 김달현 입장에서는 사상이 사상인지라 이를 거부하게 된다. 이후 1950년 월북한 남조선청우당을 흡수해 '''조선천도교청우당'''을 발족하고 김달현이 다시 위원장이 되었다.

2.3. 북한 내 탄압과 부활


한국전쟁 기간 중에는 당내 사상 갈등이 고조되었다. 고위 당직자들 다수는 '''김일성을 지지'''하였으나, 일반 신도들은 상당수가 '''반공대열'''에 참가하기까지 하는 대조적인 양상을 보였다. 전쟁 이후에는 8월 종파사건과 얽히면서 김달현[5] 중앙위원장 마저 1958년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간첩 사건을 이유로 숙청당하게 된다. 이후 박신덕[6]이 새 위원장으로 피선된 후 지방조직이 거의 마비되었다고 한다.
이후 주요 국가행사나 대남성명 발표나 통일문제와 관련한 정당 및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개최될 때에 그 존재를 나타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는 북한 언론에서 천도교청우당을 언급할 때 중앙위원장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1970년대 남북대화 무드가 조성되자 청우당도 이에 참여해 1972년 8월 2일 부위원장인 강장수가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으로 참석했다.[7]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국회예비회담 자문위원으로 참석하는 등 통일전선전술에 비교적 자주 동원되었는데, 이는 북한이 남한 사회단체들과의 접촉을 중시하는 노선으로 대남(對南)정책을 바꾸면서 북측 사회세력이 얼마나 다양한지 보이기 위함으로 분석할 수 있다. 당시 남한의 육군 장성 출신으로 한때 외무부 장관까지 지냈던 최덕신 천도교 교령과 류미영 부부가 1986년 월북해서 천도교청우당 당수를 맡기도 했다.
1993년에 개정된 강령 및 규약은 '''동학인내천 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고 갑오농민전쟁, 3.1운동, 조국 광복을 위한 반일 성전에서 이룩한 선열들의 애국애족과 민족 단합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다.

2.4. 현재


2001년 7월 말 유엔인권이사회의 보고에 따르면 천도교 성직자는 250명, 신도는 15,000명 정도, 당원은 14,000명 정도 있다고 파악되었다.
2013년 제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는 총 687석 중 22석을 획득했다. 2016년 중앙위원장 류미영이 사망하면서 2020년 현재까지도 중앙위원장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있으며, 부위원장들이 중앙위원장의 자리를 대행하고 있다가 리명철이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었음이 확인되었다.

3. 조직


천도교청우당 조직은 당대회(당의 최고지도기관), 중앙위원회(전반적 당사업 조직지도), 중앙 검사위원회(재정ㆍ경리 감사), 상무위원회(중앙 위원회 권한대행), 검열위원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4. 통일관과 대남관


조선로동당의 통일정책을 이견 없이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1979년 10.26 사태 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최덕신이 수차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면서 북한의 통일방안 실현을 위해 앞장서자 북한은 천도교 전체에 대한 대대적인 재정비와 함께 그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한편, 박신덕의 뒤를 이어 1982년 8월 천도교청우당 제6차 당대회에서 재선된 정신혁 중앙위원장이 보고를 통하여 개편되고 개정된 중앙지도기관과 당의 강령 및 규약과 정책에 대해 공표했다. 정책의 경우 구색정당답게 그저 조선로동당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것이었다.
당시 보고에서는 이외에도 ‘북남, 해외의 각 당과 각 파 및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민족대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또한 같은 대회에서 채택된 "남조선과 해외 천도교인 등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는 연방제통일의 실현을 기해 연공합작과 민족대통일전선 형성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5. 참고 문헌 및 자료



6. 관련 문서



[1] 발족 당시에는 김달현 위원장을 위시하여 부위원장 박윤길, 김정주, 7명의 정치위원, 13명의 상무위원으로 중앙당의 진용을 갖추었다.[2] 이는 북조선민주당과 마찬가지로 다당제를 앞세운 소련의 북한 주민 포섭 정책의 결과였다.[3] 事人如天. 한울님을 공경하듯이 사람도 그와 똑같이 공경하고 존경하여야 한다는 천도교의 윤리 행위.[4] 따라서, 같은 우당인 현재의 조선사회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이념과는 관계없이 사회주의 사회를 신봉하는 종교정당에 불과하였다.[5] 당시 위원장임과 동시에 내각의 무임장관이었다.[6] 박신덕 본인은 진짜 '''천도교인'''이다. 일제시대 때 천도교인 주도의 사회운동인 공생조합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7] 남북적십자회담 당시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이었던 박신덕의 경우 천도교인임이 증명된 인물로써 일제시대 때 천도교인 주도 사회운동이었던 공생조합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장수의 경우는 천도교 교리도 모르는 청우당에 영입된 인물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