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호(야구)
1. 소개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동했던 전직 야구 선수.
선수 시절 선동열에게 첫 홈런을 쳤고, 2번의 홈런을 친 4인 중 한 명으로도 유명하다.[1]
2. 선수 시절
대건고등학교와 건국대학교를 졸업한 뒤 군 복무를 위해 공군 소속의 성무 야구단에 입단하여 야구 선수 생활을 했으며, 군 복무를 마친 뒤 1983년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프로 야구에서 선수 생활을 하였다.
[image]
프로에서는 1루수와 지명타자를 오가며, 1990 시즌에는 지명타자로서 110경기에 출전하여 0.307의 타율, 75 타점, 홈런 20개,[2] 0.505의 장타율을 기록하였고,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을 수상하며 자신의 선수 경력에서 최고의 해를 보냈다. 하지만 1990년을 제외한 나머지 시즌에선 대체로 2할 중후반대의 타율과 4할대의 장타율을 기록하며 아주 뛰어난 선수로 기억될 만큼의 활약은 펼치지 못했다. 그는 비록 1980년대 함께 뛰었던 팀 동료 이만수, 장효조, 김성래에 밀린 탓에 큰 존재감을 과시하지 못했고 커다란 업적을 남긴 선수는 아니었지만[3] 그래도 팀에서 꾸준히 제 역할을 한 선수였기에 통산 11시즌을 보내고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3. 지도자 시절
은퇴 이후 1994 시즌부터 1999 시즌까지 삼성 라이온즈에서 타격코치로 일했다. 그는 5년 코치 생활을 하는 동안 1995년 좌완투수로 입단한 신인 이승엽에게 타자로 전향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는데, 당시 백인천 감독, 박흥식 코치와 함께 이승엽이 대형 타자로 성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2000년부터 박승호는 SK 와이번스로 팀을 옮겨 4년간 타격 코치로서의 일을 계속 이어 나갔고, 2004 시즌부터는 KIA 타이거즈로 팀을 옮겨 김성한 감독, 서정환 수석코치의 지휘 아래 타격 코치 생활을 했다. 2006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는 KIA 타이거즈 코칭 스태프 개편을 통해 서정환이 감독으로, 박승호가 수석코치로 승격되었다. 2007 시즌 전반기에는 팀 성적이 최하위에 머물면서 6월에 대대적인 코칭 스태프 개편이 있었고, 수석코치로 있던 박승호는 2군 감독으로 보직이 이동되었다. 2007 시즌이 끝날 때까지 끝내 최하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KIA 타이거즈는 서정환 감독을 경질하였고, 2007 시즌 중 배터리코치로 영입했다가 시즌 후 후임 감독이 된 조범현이 코칭 스태프를 새로 구성하면서 그는 구단과 재계약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2008년부터 2010년까지 공주고등학교의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2011년 김경문 감독의 요청으로 두산 베어스 2군 감독으로 프로야구에 복귀했다. 여담으로 삼성시절에도 김경문과 3년간 한솥밥을 먹은적이 있다.
한국프로야구 2010 시즌 7월, 올스타전이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치뤄지면서 "삼성 라이온즈 레전드 올스타" 행사도 열렸는데, 박승호가 레전드 지명타자로 선정되어 오랜만에 삼성의 고전 유니폼을 입고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2011년 10월 4일, NC 다이노스로 소속을 옮겼다. 2013 시즌에 수석코치를 맡았으나, 시즌 후 잔류군 총괄로 보직 변경되었다.
2015년 2군 타격코치로 시즌을 시작했으나 4월 NC의 팀 타격이 부진이 계속되자 1군에 복귀함으로써 김광림 코치와 함께 시즌 끝까지 1군 타격코치를 맡았다.
2016년에도 NC의 1군 메인 타격코치를 맡았다. 팀이 득점, 타율, OPS 등 각종 타격지표에서 2위를 기록하는 등 전체적으로는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9월 이후 나성범 등등 주요 선수들의 타격 부진과 한국시리즈의 빈공으로 인해 팬덤에서 크게 비판을 받았다.
결국 시즌 후 사임했다. 그러나 후임자가 팀의 타격을 완벽하게 망치고 있어서 재평가되고 있다. 한국시리즈에서의 부진은 둘째 치더라도, 시즌 내내 슬럼프는 있더라도 전체적으로 고른 타격감을 유지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도형은 현역 시절 타격에 일가견이 있던 선수가 아니었던지라, 골든글러브 수상자였던 박승호 코치의 노하우나 경험은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는 중.
4. 해설가 시절
2020년부터 부산MBC 라디오에서 롯데 자이언츠 홈경기 중계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
5. 연도별 성적
[1] 나머지 3인은 류중일, 김동기, 전대영. 선동열은 선수생활 중 '''정규리그 11시즌 동안 28홈런밖에 맞지 않았으며 한 명에게 3번의 홈런을 맞은 적이 없다.'''[2] 같은 해 장종훈(28개), 이만수(26개)의 뒤를 잇는 리그 3위의 기록이었다.[3] 어찌보면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전업 지명타자로서 성공한 사례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적지 않은 업적을 남긴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