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폰 합스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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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프란츠 요제프 오토 로베르트 마리아 안톤 카를 막스 하인리히 식스투스 사비에르 펠릭스 레나투스 루트비히 가에탕 피우스 이그나티우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Franz Joseph Otto Robert Maria Anton Karl Max Heinrich Sixtus Xavier Felix Renatus Ludwig Gaetan Pius Ignatius von Habsburg-Lothringen)
'''출생'''
1912년 11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버외스터라이히 라이헤나우안데어락스 바르톨츠 성
'''사망'''
2011년 7월 4일 (98세)
독일연방공화국 바이에른주 푀킹
'''장례식'''
2011년 7월 16일
카푸친 교회
'''재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수장
1922년 4월 1일 ~ 2007년 1월 1일
'''배우자'''
작센마이닝겐의 공녀 레기나 (1951년 결혼 / 2010년 사망)
'''자녀'''
안드레아, 모니카, 미하엘라, 가브리엘라, 발부르가, 카를, 게오르크
'''아버지'''
카를 1세
'''어머니'''
부르봉파르마의 공녀 지타
'''형제'''
아델하이트, 로베르트, 펠릭스, 카를 루트비히, 루돌프, 샤를로테, 엘리자베트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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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노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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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의 문장
1. 개요
2. 생애
2.1. 마지막 황태자
3. 기타
4. 매체에서


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의 장남이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마지막 황태자.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2. 생애



2.1. 마지막 황태자


1912년에 태어나, 1916년 아버지 카를 1세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이자 헝가리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황태자/왕세자가 되었다. 그가 '프란츠 요제프'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기 때문에 그의 즉위명은 '''프란츠 요제프 2세'''가 될 예정이었다.[1]
부모 대관식 때의 기록화. 가운데 소년이 오토 폰 합스부르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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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부부와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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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6살 때인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멸망하고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스위스포르투갈령 마데이라 제도 등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1922년에는 아버지 카를 1세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토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지만 어린아이였던 그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 지타 황후는 오토에게 "아버지는 영원한 잠에 드신 거야. 이제부터 네가 황제이자 왕이란다."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카를 1세의 죽음 이후 오토의 가족은 바스크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사실 오토는 오스트리아 본토로 이주하기를 희망했으나, 1919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모든 합스부르크 가문 남성 구성원의 오스트리아 입국을 영구 금지하면서 불가능해졌다.
성인이 된 후에는 벨기에 플란데런의 루뱅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해 1937년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3]
젊은 시절에는 호르티 미클로시와 협상하여 구 오헝제국의 구성국 중에서 유일하게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헝가리의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주변의 조언이 많았지만, 오스트리아의 제위를 노린 까닭인지 이를 거부했다. 1934년 오스트리아 연방국이 수립되고는 복벽설이 비중 있게 다뤄지기도 했다.# 사실 호르티는 오토의 아버지인 카를 1세의 헝가리 왕위 요구도 무시한 바가 있기 때문에, 과연 오토 대공 측에서 타진했다고 해도 이루어졌을지 의문스럽기는 하다.
나치 독일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때 오스트리아가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병합되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4]
망명 후에는 반나치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으며,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오스트리아 제국 복원을 건의했지만 루스벨트의 반대로 인해 제정 복고는 무산되었다. 종전 후 1950년 서독 바이에른 남부의 푀킹(Pöcking)에 정착한 뒤로는 사회 활동에 전념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이슬람, 유대교 등과의 화해를 주장하며,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필요한 부분에서는 진보적인 면을 가지고 있어 유럽 정계에서 "과연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손답다"며 존경받았다.[5]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만큼 유럽의 다른 왕실에서도 그만한 예우를 해 주었다고 한다.
1961년 스페인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 스페인의 왕위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당시 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에 포함되어 있긴 했지만 합스부르크가 스페인계와 오스트리아로 갈라지고, 스페인계의 부계가 절손되어 모계를 통해 부르봉으로 넘어간 지 200여년이 넘어서 50위권 수준이라 사실상 의미가 없었고, 이에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상속 1순위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집안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거절하였던 것이다.[6] 게다가 당시 스페인은 파시스트 색채를 드러낸 폭압적인 독재정권으로 다른 유럽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 정부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따라서 스페인 왕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칫 나치에 항거했던 자신의 이력에 오점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 동안의 인연으로 인해 프랑코와 개인적인 관계는 나쁘지 않았던 모양으로 오토 폰 합스부르크 본인은 프랑코가 히틀러나 무솔리니와는 비견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옹호하기도 하였다.
1966년 제위 계승 주장을 포기하고 스스로 '공화국의 충성스러운 시민'을 자처했다. 1989년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무너진 후 헝가리 정치가들의 초청으로 헝가리 국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부다페스트를 방문했지만 왕정복고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헝가리 여론도 방문에 우호적인 정도였지 왕정복고를 바라는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정치적 성향은 중도우파였고 기독교사회연합 당원으로 유럽의회의 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했다.
1988년 유럽의회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연설을 하는 중 북아일랜드 출신의 골수 반가톨릭 친영파 출신 의원이었던 이언 페이즐리 의원이 중간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 "교황은 적그리스도다"라는 팻말을 들고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의 반 가톨릭 선언문을 외치는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교황이 공개적으로 모욕당하는 걸 보고 화를 참지 못한 나머지 뒷자리에서 책상을 벌떡 뛰어넘어 팻말을 빼앗고 페이즐리의 얼굴에 펀치를 날리기도 했다. 이후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 1년 전인 2004년 선왕인 카를 1세가 복자로 시복되었을 때, 다시 교황을 알현했다.
당시 비디오. 뒷자리에서 날아와 손에 들고 있는 삐라를 빼앗는 사람이 오토 폰 합스부르크 공이다. 관련 영상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팻말을 찢어내자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나왔고 의장이 페이즐리의 퇴거를 명하자 다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후 페이즐리 의원은 회의의 보안 담당자에게 "내가 맞을 동안 뭐 했냐"고 항의하여 사과를 받아내긴 했다.
공산주의를 싫어해 전후 냉전 시기에는 반공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도 했고, 1980년대 후반 동유럽민주화 열풍에도 호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동독을 탈출하고자 했던 사람들을 헝가리를 통해 오스트리아로 빼내는 것을 지원하기까지 했다. 2004년에는 블라디미르 푸틴을 '''보통 사람들의 정신 상태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푸틴이 장차 유럽의 안보에 지대한 위협을 끼칠 것이라 경고했는데 그의 경고는 10년 후 사실로 드러났다.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된 지 70주년이 되던 2008년 오스트리아 국회에서 '유럽에서 오스트리아보다 나치의 희생물이 된 나라는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좌파 계열인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우파 계열인 오스트리아 국민당에서 급히 실드를 치는 등 떠들썩한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다.

2.2. 선종



영상에서 불리는 노래는 하이든이 작곡한 '황제 찬가'. 들어보면 알겠지만, 현재의 독일 국가에서 가사만 다를 뿐 같은 노래다.
2010년에 아내 레기나 대공비가 선종한 뒤에는 공적 활동을 중단하고 자택에 칩거했고, 2011년 7월 향년 98세로 선종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에 따라 유해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카푸친 교회(홈페이지)에서 관리하는 황실 묘지에, 심장헝가리의 퍼논헐머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이렇게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 간단히 줄여서 합스부르크 왕가도 역사가 되었다. 물론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오토 황태자의 아들인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를 수장으로 계속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지위만 잃었을 뿐 물려받은 재산으로 잘 나가는 일부 독일 공작, 왕가 자손들처럼 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도 잘 나가는 정치인이고 부자였다. 게다가 오토 황태자의 어머니는 보르보네-파르마 가문의 공녀였기 때문에 혈통만 보면 100% 황족인데다, 본인도 작센마이닝겐의 공녀 레기나와 결혼했다. 상기 표현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이 제위를 누리던 시절을 경험한 마지막 인물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의미.
그의 장례식에는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 리히텐슈타인 대공 한스 아담 2세, 불가리아의 전 차르인 시메온 2세, 몰타 기사단장, 요르단 왕자, 보헤미아 공작, 오스트리아 전 총리'''를 비롯한 '''전세계의 왕족과 명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가?"'''

오토 폰 외스터라이히(Otto von Österrich)[7]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이시며, 웅가른,[8] 뵈멘,[9] 달마티엔, 크로아티엔, 슬라보니엔, 갈리치엔, 로도메리엔 그리고 일리리엔의 왕세자이시며, 토스카나 그리고 크라카우의 대공이시며, 로트링겐, 잘츠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크라인, 부코비나의 공작이시며, 지벤뷔르겐의 대후작이시며, 메렌의 변경백이시며, 오버·니더슐레지엔, 모데나, 파르마, 피아첸차, 구아스탈라, 아우슈비츠, 차토어, 테셴, 프리아울, 라구자, 차라의 공작이시며, 합스부르크, 티롤, 키부르크, 괴르츠 그리고 그라디스카의 제후백[10]이시며, 트리엔트, 브릭센의 후작이시며, 오버·니더라우지츠 그리고 이스트리엔의 변경백이시며, 호에넴스, 펠트키르히, 브레겐츠, 조넨베르크 등의 백작이시며, 트리에스트, 카타로, 빈트 변경주의 영주이시며, 보이보디나, 제르비엔[11] 등등 보호령의 보호자이시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모른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 박사. 국제 범유럽연맹의 회장이자 유럽의회 의원이자 최고의장이며, 수많은 대학교들의 명예박사이자 중부 유럽의 수많은 자치단체의 명예 시민이며, 유서 깊은 학술원과 협회들의 회원이며, 국민의 자유, 질서, 정의를 위한 그의 수십 년 동안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수여된 최고로 높은 교회 명예장과 훈장들의 소유자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모른다."'''

'''오토, 한낱 죄 많은 인간입니다.'''[12]

'''"그렇다면 들어오라."'''

장례식 당시 관이 빈에 있는 카푸친 교회에 들어갈 당시 관례에 따라 입장을 거절당하는 의식을 치루었다.[13] 처음 들어갈 때는 오스트리아 제국 황태자로서의 공식 작위들을 열거하며 '황태자'가 입장함을 나타내고, 두 번째로 들어갈 때는 각종 학위 및 수여받은 훈장을 통해 '공인'이 입장함을 나타내며,[14] 마지막으로 '오토'라는 일개 죄인이 교회에 입장함을 나타낸다.
동영상에서 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에서 부르는 성씨가 다른데, 첫 번째의 외스터라이히는 오스트리아의 독일어 발음이며 귀족들이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의 이름을 차용하여 성씨로 삼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성씨에 오스트리아라는 국명을 넣는다는 것은 오스트리아를 영지로 다스리는 군주 가문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두 번째에는 본성인 합스부르크를 쓰는데, 이건 오스트리아의 군주가 아닌, 대대로 물려받은 혈족의 성씨이다. 황족으로서의 성과 개인으로서의 성이 다르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부분.[15][16]
이처럼 왕족으로서의 직함과 현대 사회에서 명예로 인정받는 공인으로서 직함을 둘 다 나열하고서 "그런 사람 모르오"라고 거절당한 후, '자연인 오토'라고 알린 후에야 비로소 "들어오시오"라고 입장이 허용되어 영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출은 그가 역사속 과거와 현대의 유럽 사이를 살았던 인물이란 상징성을 뚜렷이 보여준다.[17]
이는 합스부르크 황실에서 전통적으로 행하던 의식으로, 아무리 생전에 지위가 높고 권력이 강했다고 해도 죽음과 하느님 앞에서는 한낱 유한하고 죄 많은 인간일 뿐임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문 안쪽에서 초를 들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황실 묘지가 있는 카푸친 교회를 관리하는 카푸친 수사들이다.

3. 기타


막내딸 발드부르가(1958~)는 남편의 나라 스웨덴의 국회의원을 8년간(2006~2014) 지냈다. 당적은 중도당.
그의 손자이자 장남 카를(현 합스부르크 왕가 당주)의 외아들인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은 1997년생으로, 현재 카레이서로 활동하고 있다.[18] 손녀 엘레오노레 합스부르크는 1994년생으로 패션 모델로 일하며, 마찬가지로 본문의 인물의 장남 카를의 딸이라 앞의 페르디난트의 친누나다.
차남 게오르크는 2004-2012년 헝가리 적십자사 총재를 거쳐 2020년 12월, 프랑스 주재 헝가리 대사로 임명되었다.#[19]

4. 매체에서


Hearts of Iron 시리즈의 모드인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독일이 세계대전에서 승리했고 오스트리아도 살아남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국가원수로 등장한다. 하지만 게임에서 이중제국은 위성국들이 맹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뭉친 상태라서 이벤트를 잘 타야 이중제국을 제대로 통합할 수 있고, 마지막에는 오헝제국이나 다뉴브 연방으로 바꿀 수 있다. 설정이 바뀐 이후엔 그의 아버지 카를이 계속 재위를 유지하고 있어서 오토는 선거 이벤트에서만 등장한다. 애초에 전쟁에서 이겼고 현실의 사인도 망명하다 치료를 못받아 그런거니 아버지 카를 1세가 재위에서 물러날 일이 없는 셈.
Hearts of Iron IV에서는 Death or Dishonor DLC가 있고 헝가리로 플레이할 때 국가 중점을 합스부르크 왕조 복원 트리로 타면 국가원수가 호르티 미클로시에서 오토로 바뀌고, 오스트리아를 무력으로 병합하거나 평화적으로 흡수한 뒤 중점을 하나 더 찍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변하며 세력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그 후 옛 오헝제국의 영토와 슐레지엔, 이탈리아 북부, 팔레스타인[20]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고 이 영토들을 모두 수복하는 도전 과제도 있지만 결국 추축국, 연합국, 코민테른[21]과 모두 싸워야 하기 때문에 난이도가 높다.
AI는 잘 선택하지 않지만 한다면 헝가리 왕국 상태에서 이미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독일 혹은 오스트리아에 독립보장을 걸고 이를 침략하려는 독일에게 무의미한 저항 시도를 하다 헝가리도 병합당하는 결말을 맞곤 한다. 설령 운좋게 오헝제국을 설립하더라도 전쟁중 추축국 편에 가담하게 될 확률이 높다. 합스부르크 옹립 시 세 진영 전체가 불쾌하단 반응을 보이는데, 헝가리의 NF는 주로 연합 소속 국가와 싸우게 되고 코민테른은 관계가 호전되지 않으며 그나마 연합과의 전쟁에 쓸모있다고 판단한 추축국이 오헝제국을 받아준다.
Waking the Tiger DLC가 있고 플레이어가 독일일 때 히틀러를 몰아내고 빌헬름 2세를 복위시킨 후, 영불과 맞서는 루트로 진행하면서 중점을 찍다 보면 오헝제국 재건 중점이 풀린다. 이 중점을 완료하면 오, 헝, 체코의 비동맹주의 지지도가 과반수일 때 오헝제국으로 합쳐지는데 이 때 만들어지는 오헝제국은 오스트리아의 코드와 중점을 쓰며 오토가 집권한다.[22] 1.5.4에서는 이 상태에서 오헝제국이 컴퓨터일 때 플레이어인 독일제국에게 통합을 제의할 수도 있는데 통합을 받아들이면 오헝제국의 영토와 병력이 모두 독일에게 귀속되는데, 독일이 OP가 되는 지름길이라 1.6 이후로 사라졌다.

[1] 만약 제국이 이어졌다면 68년간 재위한 프란츠 요제프 1세에 이어 89년(...)간 재위한 장수라인이 될 뻔했다.[2] 참고로 사진에서 카를 1세가 쓰고있는 왕관은 헝가리 왕국의 왕관이다.[3] 루뱅 가톨릭대학교는 이후 네덜란드어를 쓰는 뢰번 대학교가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4] 아돌프 히틀러가 왕정과 왕족을 싫어하는 공화주의자라는 점도 있었고 어쨌든 합스부르크 가문과 나치 정부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다는 점도 있었다. 몇몇 오스트리아 귀족들은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즈음에 오히려 중도좌파로 정치 성향이 바뀌어 사회민주주의적 입장에서 나치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시 외국으로 망명한 귀족 중 일부도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었다.[5] 합스부르크 가문은 역사적으로 종교와 관련해서는 보수적이지만, 이외 나머지는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굉장히 진보적인 왕가였다. 종교 문제에서도 레콩키스타로 탄생한 스페인을 통치하던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인 압스부르고 가문의 인물이 아닐 경우, 상당히 관대했었다. 이는 종교전쟁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가장 보수적이었던 페르디난트 2세는 자신이 예수회 신자였을 뿐 아니라 여동생의 남편이자 자신의 6촌이던 스페인펠리페 3세에게 지원을 받아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6] 사실 옆 동네 루이필리프처럼 상속서열을 뛰어넘어서 군주가 되는 경우 다른 왕족들이나 귀족들에게 왕따당하기 좋은 구실이다. 루이필리프도 별명이 '''폭동'''왕이었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왕위계승으로 간주되었다.[7] 오스트리아의 통치 가문임을 뜻하여 "오스트리아의 오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래 유럽의 왕가들은 자신의 성씨보단 국호를 성씨처럼 사용하기에 합스부르크 대신 국명인 오스트리아(외스터라이히)를 사용한다. 합스부르크라는 성씨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조가 합스부르크의 백작이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의"라는 의미를 가진 '폰 합스부르크'가 성이 된 것이다.[8] 헝가리의 독일식 표현이다.[9] 보헤미아의 독일식 표현이다.[10] 제후백(gefürsteter Graf)은 황제로부터 일반적인 백작 이상의 권위를 인정받은 작위다.[11] 세르비아의 독일식 표현이다.[12] "Otto, ein sterblicher, sündiger Mensch (a mortal, sinful man)."[13] 1분 21초부터. 영상의 초반부 장면은 루돌프 황태자의 장례식을 묘사한 영화의 한 장면이다. 영어권 국가에서 제작한 뒤 독일어로 억지로 끼워맞춘 탓인지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장례식에서 말하는 것과 영화 대사가 판이하게 다르다.(실제 장례식: '누가 들어오려 하는가?'/영화: '누가 왔는가?' 등등)[14] 합스부르크 왕가가 제위에 있던 시절에는 이 2번째 보고에서 그냥 고인의 왕정 지위(예: 황제, 황후, 황태자) 하나만 읊었는데, 오토 대공은 왕정 폐지 후에 활동한 인물이라서 다른 직함, 경력들을 읊는 분량이 많아졌다.[15] 루이 16세가 본성인 카페라는 성씨를 쓴 루이 카페의 이름으로 처형당한 것처럼 군주 가문인 표현을 빼는 경우, 군주가 되기 전에 가지고 있던 가문 대대로 물려받은 본성을 쓴다. 하나의 왕조가 수백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설령 정치적인 난국으로 인하여 왕이 폐위되더라도 왕호를 박탈할지언정 본명이 아닌 '군'의 호칭은 남겼던 한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문화. 다만 폐위당했다고 이씨도 아니다 라고 한적은 없으니 아주 틀린건 아니다.[16] 동양에도 비슷한 문화가 있었는데 성과 씨가 다른 개념이었다 성은 가문이고 씨는 지역개념이어서 강태공의 경우 강성 여씨라 강상 또는 여상이라고 불리운다. 이개념은 한국과 일본에도 수출되었고 중국의 경우 한나라 시기쯤 되면 성씨가 합쳐지지만 일본의 경우 에도막부시기 우지라는 이름으로 역사깊은 무사가문에 남아있었다.[17] 지난 1989년 오토의 모친이자 오스트리아 최후의 황후인 지타의 장례식 때도 이 의식이 있었고 영상으로 남아있다.[18] 포뮬러 3 Carlin 팀 소속이며, Weathertech SportsCar Championship에서는 재키찬 DC 레이싱 Jota 팀 소속으로 참전했으나 현재 포뮬러 3 위주로 출장하고 있다.[19] 헝가리어 이름 Habsburg György. 1993년 이후 헝가리에 살고 있고, 세 자녀도 헝가리에서 낳았다.[20] 오토를 포함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가주는 예루살렘 왕국의 명목상 국왕 칭호도 갖고 있다.[21] 부코비나 및 폴란드 쪽에 오헝제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영토를 소련이 먹을 경우.[22] 오스트리아의 고유 중점은 없다. 그냥 오스트리아나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오헝제국 루트를 타지 않았을 때)로 땅을 얻어서 디시전으로 만드는 오헝제국에선 오토가 집권하지 않는다. 오헝제국 루트일 때 헝가리로 디시전을 누르면 딱히 상태가 바뀌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