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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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雪野
1900년 8월 3일 ~ 1976년?
1. 개요
2. 생애
3. 관련 문서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겸 문학가. 본관은 청주(淸州)[1]#이며 본명은 한병도(韓秉道)이다. 한설야 이외에도 설야(雪野)·만년설(萬年雪)·한형종(韓炯宗)·김덕혜(金德惠)·윤영순(尹英順)·H생 등의 필명을 사용한 바 있다.

2. 생애


1900년 8월 3일 함경남도 함흥군 주서면 하구리[2]#(현 함주군 주서리)에서 1894년(고종 31) 진사시에 급제하여# 삼수군수를 지낸 바 있는 지주 한직연(韓稷淵:1863.4.1 ~ 1926)과 전주 이씨 이병호(李炳浩)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청주 한씨 예빈윤공파로 대대로 함흥 인근에 세거하였는데, 직계 10대조 이후로 1대도 거르지 않고 벼슬을 했을 정도로 명문가였다.[3] 아버지 한직연은 1909년 2월 삼수군수에서 해임된 이후 1914년 진남포부에서 의사로 개업하였고[4], 1915년과 1916년 두 차례 다른 사람의 철광산을 양도 받는 등## 광산업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한설야의 집안은 명문 양반가로서 가세가 매우 풍족했음을 알 수 있다.
1915년 아버지를 따라 상경해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후일 정적이 되는 박헌영과는 아이러니하게도 동기사이. 그러나 새어머니와의 극심한 갈등으로 인하여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떠나 전학, 졸업은 함흥에 위치한 함흥고등보통학교에서 하였다.
함흥고보 졸업 무렵 전국을 뒤덮은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그 결과로 3개월 정도 옥고를 치루었다. 함흥고보 졸업 후 함흥법전으로 진학하였지만 반일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제적되었다.[5] 이후 일본니혼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유학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 일본의 사회주의자들과 교류를 하며 사회주의에 본격적으로 입문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에 귀국, 고향으로 돌아가 교사생활을 하였다.
1925년 1월 단편소설 「그 날 밤」(『조선문단』)으로 문단에 등단하였다.[6] 아이러니하게도 이광수의 추천을 통해 등단하였다.[7] 이 가운데 1926년 아버지를 잃고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 현 랴오닝성 푸순시에서 생활하였다.[8] 그리고 1927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고, 카프에 가맹하였다. 그리고 그의 글에 따르면 이 시기 이기영조명희를 알게 되고 친해진다.

말하자면 그 때 포석(조명희)와 민촌(이기영)과 나는 한 가지로 문학에 뜻을 둔 청년이었다. (중략) 사실 나는 그들의 문학론보다도 그들의 작품보다도 인간으로서의 그들을 더 좋아하였던 것이다. - 「포석과 민촌과 나」(1936)

당시 한국의 문단을 주도한 흐름은 소위 ''''경향주의'라 불리는 사회주의 계열'''이었고, 이 경향주의 성향의 작가들이 한 데 모인 조직이 바로 카프였다. 이윽고 한설야는 카프의 주요한 멤버로 발돋움하였고, 1927년 카프의 새로운 강령에 초안이 되는 「프로 예술의 선언」(동아일보, 1926년)을 발표하였다.

'사회를 위한 예술.' 이것이 우리 프로(프롤레타리아) 작가들의 기치에 새겨져 있는 선언 강령이다. - 「프로 예술의 선언」의 마지막 부분.

이 시기부터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본격적으로 발산하며 카프 논쟁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1928년 창작을 위하여 자신의 눈으로 직접 노동자 생활을 보고 경험하려는 목적으로[9] 자신의 고향인 함경도로 돌아가 1년간 생활하였다. 이를 통하여 「과도기」, 「씨름」 등의 작품을 창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 조선일보 함흥지국에서 기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활발한 사회주의 운동과 창작활동을 벌이다가 1934년 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1년간 투옥되었다.[10]
1935년 석방 이후 자신의 첫 장편소설인 황혼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였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도 비밀결사 조직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 문학계와 정치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945년 북조선 문학예술 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당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의 함경도 대표를 지냈다. 그리고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교육문화상(장관급) 등의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나중에 박헌영숙청 당하면서 남로당 계열의 문인이었던 임화, 김남천부터 이태준에 이르기까지 싸그리 숙청 당한 것에 비하면 대조적이다.[11]
하지만 1960년대 당시 사석에서 김일성을 비판하는 말을 했었고, 이로 인하여 얄짤없이 팽당한다. 이후 자강도의 수용소로 추방되었다가 1976년 사망했다.[12] 말 그대로 토사구팽.[13] 그래도 오늘날까지 북한에서 완전히 '친일반동분자'로 매장된 남로당계열 작가들과는 달리[14] 1980년대를 넘어가면서는 어느 정도 복권되었고, 북한의 국립묘지격인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점은 그만큼 그의 문학이론과 작품이 북한의 문예이론 형성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다. 사실상 그를 제외하면 북한에서 문학이론을 설명하기 힘들어지니... [15]

3. 관련 문서


[1] 예빈윤공파 23세 병(秉) 항렬. 일부 자료에서는 본관을 안변이라고 하는데, 청주 한씨 예빈윤공파를 후손들 중 안변 한씨로 칭하기도 했던 것은 사실이나#, 한설야의 15대조 한익지(韓翼之)의 1486년(성종 17) 생원시 급제 당시 사마방목을 보면 당시 이미 본관을 청주(淸州)로 환원했음을 알 수 있다.#[2]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3] 10대조 한곽(韓廓) 선원전참봉 - 9대조 한기천(韓紀千) 1663년(현종 4) 진사시/1675년(숙종 1) 문과/사헌부감찰 - 8대조 한재원(韓在垣) 1682년(숙종 8) 진사시/1702년(숙종 28) 문과/순천부사 - 7대조 한석건(韓錫健) 참봉 - 6대조 한종제(韓宗濟) 1733년(영조 9) 문과/부총관 - 5대조 한백림(韓栢林) 1777년(정조 1) 생원시/서흥부사 - 고조부 한홍빈(韓弘玭) 1805년(순조 5) 생원시/지릉(智陵)참봉 - 증조부 한용근(韓用近) 1848년(헌종 14) 진사시 - 조부 한봉현(韓鳳鉉) 통덕랑; 생조부 한귀현(韓龜鉉) 1852년(철종 3) 진사시 - 부친 한직연(韓稷淵) 1894년(고종 31) 진사시/삼수군[4] 1914년 6월 14일 면허 등록. 등록번호 490번. 당시 거주지는 진남포부 원당면 비석동.#[5] 정확히는 동맹휴학을 주도했다고 한다.[6] 사실상 작품이 창작된 연도와 잡지가 발간된 연도는 1924년도이기에, 북한에서는 1924년에 「그 날 밤」을 쓰고 등단했다고 이야기한다.[7] 이광수는 『조선문단』 창간호부터 1925년 1월호까지 주재자였다.[8] 이는 이후 그의 작품에 형상화 된다.[9] 물론 당시 카프 내부 논쟁에서 비판을 받았던 것도 한몫한다.[10] 카프 제2차 검거사건 때 함께 검거된다.[11] 한설야는 북한 김일성 정권을 창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당시 이들의 숙청을 주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12] 이 사망연도도 어디까지나 학계의 추정이지 정확한 정보는 아니다.[13] 단편소설 「개선」(1948)을 시작으로 장편소설 『역사』(1953) 등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적극적으로 부각시켜주었던 소설을 썼던 걸 생각하면...[14] 이들은 그냥 애초부터 나쁜놈으로 설명된다.[15] 그의 작품은 공산권 국가에 조선문학을 대표하는 소설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졌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사실상 1950년대 북한의 국민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