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현진건
玄鎭健 | Hyun Jin-geon '''
'''아호'''
빙허(憑虛)[1]
'''본관'''
연주 현씨
'''출생'''
1900년 8월 9일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계산리
(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169번지)#
'''사망'''
1943년 4월 25일[2](향년 42세)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학력'''
보성고등보통학교 중퇴
일본 세이소쿠 영어학교
일본 세이조 중학교
상하이 후장대학교
'''직업'''
독립운동가, 소설가
'''주요 작품'''
운수 좋은 날
(1924)
무영탑
(1938)
[image]
1. 개요
2. 일생
3. 문학적 가치
4. 현진건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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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9년 전후 대구노동학교 춘기 청년회의소 기념사진.
앞줄 왼쪽 넷째 인물이 현진건.
앞줄 왼쪽부터 현진건, 김일엽, 이선희, 최정희.
뒷줄 왼쪽부터 김억, 김동인, 최서해, 김동환.
현진건(玄鎭健)은 일제강점기 조선소설가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2005년 8월 15일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월탄 박종화와 사돈이다.

2. 일생


현진건은 1900년 8월 9일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계산리(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에서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셋째 형 현정건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고생하다 출옥한 지 반년 만에 사망했으며,[3] 현정건의 아내인 윤덕경도 현정건이 사망한 지 41일 만에 음독 자살하였기에[4] 현진건은 더더욱 일본을 증오하게 된다. 이렇다보니 같은 시대를 살아간 많은 문인들이 친일파 논란이 있던 것과는 달리 현진건은 그런 논란이 아예 없다. 아예 목숨걸고 독립운동에 나선 이육사와 더불어 문인으로서 글로 항일하던 인물로 많이 평가받는다.
1915년 이순득과 결혼 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6년 2학년 재학 중에 자퇴 후 도쿄로 가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했다. 1917년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대구에서 백기만·이상화 등과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 그해 4월에 현진건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5년제 세이조 중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18년 상하이 호강대학교[5]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하여 1920년 졸업 후 귀국했다. 귀국 후 당숙이었던 현보운의 양자가 되어 친형들과는 6촌 형제가 되었다.
귀국 후 친척 현희운의 추천으로 개벽 11호에 "희생화"를 게재하여 문단에 등단했지만, 현진건 본인이 "희생화"를 습작으로 간주하여 일반적으로 현진건의 첫 작품은 "빈처"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6] "빈처"가 염상섭의 극찬을 받으면서 현진건은 문학 동인 "백조"에 들어가게 되어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등의 사실주의적 소설들을 잇달아 발표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1921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된다. 1924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있다가 이후 1927년 동아일보로 옮겨 1936년까지 사회부 부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후 동아일보를 퇴사했으나 1939년 학예부 부장으로 복직했다.
일제 말기 현진건의 삶은 비참한 모습 그 자체였다. 당시 일제를 위한 작품을 쓰지 않으면 취직이나 생계를 이어간다는 게 거의 불가능했던 시기였다. 그런 시대에서 현진건은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한 채 가난에 쪄들어 살면서 문학인으로서의 지조를 지키면서 여생을 보냈다. 이는 친일 문학가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광복 후에도 그게 뭐가 잘못이냐며 뻔뻔한 모습을 보인 김동인이나 주요한과 대조된다. 그 밖에 먹고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친일 활동을 했던 이효석이나 채만식도 있긴 한데 그나마 이들은 이걸 후회하고 죄의식을 느꼈다.[7] 음악가 홍난파흥사단가를 작곡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잡혀 복역했고, 결국 석방된 후 친일 활동을 하긴 했다. 이후 시골에서 양계업을 하며 한편으로 동아일보에 1939년부터 장편 소설 "흑치상지"를 연재했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연재가 중단되어 끝내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그 뒤 어려운 나날을 보내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별세했다.[8]
유언에 따라 화장되고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매장되었으나 그 후 남서울 개발관계로 묘소가 사라져 유해는 한강에 뿌려졌다.
현진건은 친일행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9] 사생활도 깨끗했다. 이광수 이래 일제시대 문인들이 기생 끼고 살거나, 두집 살림은 기본적으로 벌인 사람이 태반인데 현진건은 아내에게만 충실했다.

3. 문학적 가치


한국문학의 발전 양상을 살펴보면 고전소설에서 근대소설로 넘어가는 사이에 신소설을 쓴 이인직과 이해조가 있고, 본격적으로 근대소설을 도입한 이광수가 등장하며 그뒤를 이어 1920년대 활약한 이들이 김동인, 염상섭, 현진건이었다. 그리고 현진건은 그 3명 중에서 (행적은 무시하고) 문학적으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음은 물론이려니와 30~40년대 후배 소설가들보다도 세련되어 한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대단한 점은 빈처 이후의 작품들이 모두 일정 수준 이상으로 작품의 질이 굉장히 균일하다는 점이다. 기복이 심해서 습작 수준의 작품이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같은 일본 작가들의 영향력하에 있는 작품이 많은 김동인, 삼대 이상의 작품을 못 써낸 염상섭보다 확실히 우위에 있다.
형과 형수 내외가 일제에 의해 죽거나 죽은 거나 다름없는 데다가 일장기 말소 사건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숨기지 않았던 소설가로 그의 소설들은 일제의 지배하에 놓인 식민지 조선에서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많다.
"빈처", "술 권하는 사회"등은 식민지 시대를 사는 지식인의 자화상을 묘사한 소설이라고 볼 수 있고 "운수 좋은 날"등은 하층민들의 삶을 리얼하게 묘사했다는 평을 받는다. 한편으로 불국사 석가탑에 얽힌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을 소재로한 "무영탑"과, 백제 멸망 이후 백제의 재건을 위해 싸웠던 백제 장수 흑치상지의 이야기를 다룬 "흑치상지" 등 역사 장편소설들도 있다. 장편보다는 단편들이 더 많고 단편 소설들이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현진건이 대한민국 문학사에 이바지한 것은 '''문장'''과 '''서사방식'''. 이광수의 작품들이 아직은 신소설에서 볼 수 있는 문장에 계몽사상을 주입하는 방식이지만, 현진건의 경우는 '''최초의 근대식 문장'''과 '''리얼리즘'''을 한국문학에 성공적으로 이식한 공로가 있다. 그의 문우들로부터는 '''조선의 안톤 체호프'''[10]라고 불리기도 했다.
소설가인 상허 이태준과 대단히 친했고 그의 작품 중간 중간에 이태준을 연상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이태준의 토끼에서는 아예 주인공이 먼저 간 현진건을 추억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였으니... 물론 이태준도 현진건과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야 하지만 1946년에 월북한 이유로 대한민국에서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가 이후 해금됐다.
2005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현진건문학상이 제정되었다.

4. 현진건의 작품들


  • 빈처(1921)
  • 술 권하는 사회(1921):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는 표제작이 되는 <타락자>와 함께 1922년 단편집으로 출간되었다.
  • 운수 좋은 날(1924)
  • 할머니의 죽음(1925)
  • B사감과 러브레터(1925)
  • 불(1925): <운수 좋은 날>, <할머니의 죽음>, , <불> 등을 포함하여 <우편국에서>, <까막잡기>, <그리운 흘긴 눈>, <발>, <새빨간 웃음>, <사립정신병원장>, <고향> 등 11편의 단편이 1926년 <조선의 얼굴>이라는 단편집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 고향(1926)
  • 무영탑(1938): 1939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970년 신영균, 김지미 주연으로 영화화되었고 2015학년도 수능 국어 A/B형 공통으로 출제되었다.
  • 불국사 기행(1929)
  • 적도(1939)
  • 흑치상지(1939, 미완성): 사실상 그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한 작품인데 이 작품이 일제의 강압으로 연재 중단되자 그는 큰 상실감에 빠져 자주 과음하고 결국 과음으로 인한 장결핵으로 사망한다.

[1] 빈 것에 의지한다는 뜻이다.[2] 시인 이상화와 같은 날 사망하였다. 같은 도시에서 태어나 같은 날에 사망하였고 둘 다 일제말기에 붓을 꺾고 친일을 하려하지 않은 점에서 굉장히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3] 호는 읍민(揖民)으로 1887년생이라는 설과 1893년생이라는 설이 있다. 임시정부에서는 경상도 대표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훗날 개조파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4] 현정건의 아내인 윤덕경은 현정건이 사망하고 41일만에 음독자결하여 1933년 당시 신문에서 '결연 20년에 동거는 반년'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기도 하였다.[5] 현 화둥사범대학. 피천득, 주요섭 등이 졸업한 대학이기도 하다. 최근 중국의 고유명사를 중국 만다린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다보니 '후장대학교'(...)라고 소개되기도 한다.[6] 물론 현진건 본인은 희생화를 처음 기고할 때는 투르게네프의 작품에도 은근히 비길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며 내심 기뻐했지만, 문학평론가 황석우는 희생화를 두고 "이건 소설도 뭣도 아니고, 작자가 뭘 쓰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도 아니고 독백도 아닌 것이 뭔가 예술적 형식을 갖추지 못한 일개 무명의 산문이다."라고 아주 철저하게 밟아버렸고, 현진건은 '당장에 황석우라는 놈을 찾아가서 때려죽여도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을 정도로 분개했지만 다시 "당신이 일개 무명의 산문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소설은 투르게네프도 이미 몇 편을 썼다"고 항의했지만,(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작품 "희생화"가 소설의 형식을 갖추지 못한 무명 산문이라는 황석우의 비판에 대해 '이 글이 소설이 아니고 무명 산문이면 내가 문학의 신영역을 개척했다는 이야기이니 과찬인데, 사실 이런 글은 투르게네프도 쓴 적 있다'는 식의 비꼬기였다) 시간이 흐른(이후로도 몇 편 글을 더 쓰면서 작가로써의 경륜이 조금 쌓인) 뒤에 다시 희생화를 읽어보고서 '이제 와서 보니 좀 부끄럽긴 하더라'(...그냥 좀 부족하더라도 아니고, 이제 다시 읽으니 진짜 소설의 형식을 못 갖춘 무명 산문이라고 겸허하게 인정했다!)고 인정했다. 참고로 현진건이 희생화를 발표했을 때의 나이는 20살이었다.[7] 이효석은 "조선 총독부에 근무하면서 호강을 부리던 놈이 객기로 그만둔 것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나, 먹고살고자 다시 왜놈에게 아첨을 하는 글을 쓰는 건 두고두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오."라고 지인들에게 토로했다는 증언이 있고, 채만식은 해방 이후에 민족의 죄인이라는 중편을 써서 자신의 친일 행적을 고백했다.[8] 평소 빙허는 과음을 자주 했고 형 정건이 죽은 뒤 형을 기리기 위해 흑치상지란 장편소설을 집필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고 결국 상심하여 더욱 심한 폭음을 일삼은 나머지 장결핵으로 죽고 말았다.[9] 굳이 들추자면 1940년 『춘추』라는 잡지에 소설 「선화공주」를 연재했는데 이 잡지가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된 양재하(梁在廈)가 만든 잡지였다. 다만 4월호부터 쓰기 시작했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9월호에서 중단했고,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걸 읽어봐도 딱히 반민족적이거나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을 찬양하는 내용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서 이걸 친일이라고 몰기도 민망하다.[10] 체호프도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현진건과 비슷한 나이에 사망했다. 현진건은 43세. 체호프는 4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