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분실
對共分室 / 保安分室
1. 개요
경찰청 보안국이 설치했던 기관.[4] 보안분실이라고도 부른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인 남영동 대공분실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
설치 당시 형식상 목적은 간첩과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조사하는 것이지만 정작 대중들에게는 군사독재 시절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린 사람들을 이곳으로 연행해(필요하다면 추가 혐의까지 추가해) 당사자가 죄를 자백하거나 인정할 때까지 각종 고문을 자행해 심신을 반신불수로 만들거나 죽여서 내보내던 곳으로 유명하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경우 후술되어 있듯이 '민주인권 기념관'을 조성할 것이다.
2. 역사
경찰청 인권센터 홈페이지의 역사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5]
남영동 대공분실의 경우 피고문자의 정신을 피폐하게 하고 공산주의 사상범으로 조작하기 위해 허구의 조서에 담긴 내용을 모두 시인하게 하기 위해 고문실의 내부또한 특이하게 개조되었다. 바닥과 벽면을 모두 붉은계열의 페인트로 칠하고 수용자의 자살방지와 고문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나무보드 흡음재가 벽면에 부착되어있었다. 하지만 경찰청 인권센터로 탈바꿈된 이후 이러한 잔혹한 고문의 흔적을 은폐하기 위하여 바닥과 벽면을 연두색 페인트로 칠하고 본래 욕조가 있던자리에 세면대와 변기를 놓아두고 바닥에 나사로 고정되는 의자까지 떼어버리는 현장왜곡을 실시하였다. 실제로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실마다 있는 라디에이터를 기울이거나 흡음재의 구멍을 자세히 살펴보면 미처 왜곡되지 않고 원형을 보존하고있는 새빨간 벽면과 페인트자국을 볼 수 있다. 또한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도 모르는 기이한 구조의 방이 주 고문실로 사용된 5층에 다수 존재한다. 2019년부터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서 대공분실을 민주운동기념관으로 변모시키고 폐기되거나 용도변경되어 그 잔혹한 흔적이 감춰진 대공분실의 원형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치안본부 대공분실은 1948년 10월 대간첩 수사 업무를 위해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앙분실로 발족하였으며, 1970년 10월 정보과 공작분실로, 1976년 5월에는 치안본부 대공과 대공분실로 바뀌었고, 1983년 12월에는 좌경의식 수사 업무를 흡수하고 제4부 대공 수사단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경찰청 대공수사 1단․2단, 대공2부, 보안3과 등으로 직제가 개편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 청사는 업무 특성상 ‘○○해양연구소’라는 간판으로 철저히 위장, 1970~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많은 인사들을 취조․ 고문하던 곳으로 특히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한국일보에서 360도 카메라로 구현한 대공분실 가상체험
화면을 직접 드래그하면서 건물 곳곳과 박종철 조사실을 볼 수 있는데 실제 피해자들이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리모델링이 현재까지 꾸준히 진행된 탓에 박종철 열사 조사실만이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데, 화면으로 보다 보면 이 건물이 고문과 취조, 보안을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설계됐는지 알 수 있다.
3. 현실
목적이야 진짜 간첩과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조사하는 것이지만 국가보안법을 전가의 보도로 휘두른 군사독재 시절에는 헌법상 보장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하거나 정권 입장에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던 악명높은 장소로, 검거된 사람들은 국민들과 언론의 관심이 차단된 밀실에서 엄청난 곤혹을 치러야 했다.[6] 경찰서들과는 달리 간판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지도에서도 나와있지 않다. 지번도에서도 정식 명칭은 나와있지 않고 번지수만 나와 있거나 위장명칭, 위장상호가 적혀있다. △△상사, □□산업 등으로 되어있고, 어린이집 명칭이 달린 곳도 있다. 이름 그대로 되어 있는 곳을 보고 일반 회사인 줄로 아는 사람도 있었다. 관련기사 또 소속 경찰관끼리 정식 계급을 붙이지 않고 ☆☆계장님, ○○사장님 식으로 말한다. 물론 굳이 위장을 할 필요가 없는 일부 보안수사대는 청사 내에 태극기를 상시 게양해 간판은 없더라도 최소한 공공청사임을 알 수 있게 해놓는다. 심지어 어떤 곳은 경찰 깃발도 게양해 놓는 곳도 있다.
군사독재 시기에 고문을 가해서 빨갱이로 몰았었던 과거사와 폐쇄적인 환경에 따른 인권침해 이유로 폐지해야 한다거나, 반대로 남북 대치 상황이라 존속이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있는데, 솔직히 지금 와서 굳이 따로 저런 걸 만들어 세울 이유는 없기는 하다. 워낙 정보가 빠른 시대라 저렇게 간판 뗀다고 해서 보안이 되는 시기도 아니거니와, 정작 중요한 보안성은 저런 곳보다는 차라리 국가정보원이나 경찰청사의 으슥한 곳으로 정보공개만 하지 않고 정식 절차대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 요즘은 일반 절차대로 수사해도 워낙 감시·검열·차단 자체가 용이한 시대라 별 문제가 없다. 옛날에 뭘 몰래 수작질해서 사보타주 할 수 있던 시대에나 작당모의해서 경찰서 터트리고 수송차량 박살내고 하는게 가능한 거지.
간판도 달지 않고 그나마 몇몇 있던 곳도 간판을 뗀 상황인데, 2015년 간판 30개를 다는 데 3억여 원이 넘는 예산을 신청해 논란이 되고 있다. 간판 1개당 천만 원 수준이다. 관련 기사
4. 목록
2012년 2월 17일 백재현 민주통합당 의원의 요청으로 경찰청이 공개한 전국 보안수사대는 아래의 표와 같다. 부산경찰청, 대구경찰청[7] 과 대전경찰청은 별도의 보안분실을 조성하지 않고 본청 내에서 수사한다. 이후에 상세 위치 및 현황에 대해 재공개하지 않았기에 폐쇄된 곳도 있을 수 있다. 한겨레 기사
[표]
5. 남영동 대공분실
이 문서의 첫 사진으로 나와있는 남영동 대공분실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71길 37(갈월동) 소재하며, 경찰청 보안3과로 사용되던 곳으로써, 1976년 당시 내무부 장관 김치열이 발주하여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설계, 건축되었다."남영동 5층 구석방에서의 23일, 이것은 지옥이었다. 독가스 대신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설치는 나치 수용소였다. 시간이 종국적으로 멈춰 버린 영원한 저주의 세계였다." - 김근태
2005년 7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경찰청 인권센터로 쓰였다. 현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건물 운영권을 이전했으며, 경찰청 인권센터는 이태원의 구 정보분실로 이전했다. #1 #2 민주화 운동가를 고문하던 곳으로 악명이 높았던 곳이기도 하다. '국제해양연구소'라는 위장명칭을 사용했다.[16]
이 건물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의 악명 높은 설계로 유명하다. 외관을 얼핏 보면 김수근 특유의 벽돌 기법과 입구 전이 공간을 지닌 것이 상당히 멋들어진데 반해, 내부 구조는 거의 마음 놓고 고문하기 좋게 되어있다는 설이 유력한 사실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다양하고 치밀한 기법을 찾아볼 수 있다.(대공분실 탐방 블로그/천재가 악마를 위해 짓다 참조.).
- 직원이 사용하는 정문으로 통하는 일반 계단과 수용자를 들일 때 사용하는 건물 뒤의 쪽문이 따로 존재한다.
- 수용계단이 나선형의 어둡고 좁은 원형의 철제 계단으로 되어있고, 다른 층을 통하지 않고 수용자를 뒷문에서 조사실로 곧바로 데려가는 방식이다. 계단 층수 표시도 없다. 얼굴에 검은 포대자루 같은 것이 씌워지고 몸은 밧줄로 묶인 채로 끌려가는 조사 대상자들은 자연스럽게 방향 감각과 고도 감각을 상실한다.[17] 공간이 협소하고 경사가 급해 아래에서는 누가 붙들려 올라가는지 알기 어렵다. 이 원형 계단은 1층 쪽문 출입구에서 취조실이 있는 5층의 복도로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18]
-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로 통하는 비상구나 통로 문도 다른 취조실과 똑같은 모양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빠져나가는 길을 찾기 어렵게 해서 조사받는 사람이 쉽게 탈출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다.
- 5층 조사실 복도 끝에 거진 80~90도 경사의 철제계단이 하나 더 있는데, 1층 정문 옆으로 이어져 용도가 긴급 상황 발생 시 경찰 탈출용으로 추측된다. 낮에 봐도 정말 소름끼친다.
- 방마다 문을 엇갈리게 설치했다. 설계도를 보면 알겠지만 문이 열렸을 때 보이는 것은 벽면뿐이다. 고문당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마주쳐서 연락을 주고 받는 상황을 방지하며, 건축적으로 시각적인 불안정을 야기시켜 공포감을 부추기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각된다.
- 복도의 천장이 높아 구두굽 소리가 크게 울려퍼진다.
- 조사실의 벽이 흡음판으로 도배되어 있어 조사실 내에서 들리는 고문 소리와 신음 소리가 외부로 전달되지 않는다. 특히 이 흡음판은 4층과 5층에만 설치하도록 했다. 고문 등으로 인해 5층 조사실에서 발생할 소음이 다른 층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미리 조처한 것이다.[19]
- 조사실의 문에는 보통 집의 현관문과 마찬가지로 외시경이 달려있는데, 일반적인 외시경과는 다르게 반대 방항으로 설치되어 문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구조다.
- 조사실 내부의 전등을 켜고 끌 수 있는 전등 스위치는 조사실 밖에 설치되어 있다. 철저히 통제자 위주의 구조이다.
- 조사실 전등에는 특정한 형태의 철제 덮개를 반드시 씌우고, 전등갓의 외면은 은회색 멜라민 코팅, 반사면은 백색 멜라민 코팅으로 해야 한다고 설계도 상에 일일이 지정했다. 외부 충격으로 전구가 깨질 것에 대비함과 동시에, 집중 조명을 연출하기 위한 목적이다.
- 위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밖에서 보이지 않게 세로로 길고 좁은 창문으로 되어있는 것이 전부 고문실 창문이다. 창의 폭이 불과 20cm 정도에 불과한데, 창문 유리를 깨더라도 사람이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을 뿐만 아니라, 채광량 자체도 적어 조사받는 사람의 공포감이 극대화된다.
- 취조실에 샤워기와 욕조가 설치되어 있는데, 당연히 물고문을 위한 용도로 쓰인다.[20]
몇 가지 고문 관련 사건은 1985년 이근안 등 경관 5명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김근태를 칠성판에 묶고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가한 사건과 1987년 박종철이 물고문을 당해 죽은 사건이 있다.[21]
'남영동 대공분실'이지만 정작 위치는 남영동이 아닌 갈월동인데, 근처에 남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이 쪽도 마찬가지로 소재지는 갈월동. 특히 대공분실 존속 시절에 '남영역에서 평소처럼 지하철을 기다리는 일반 시민과 대공분실에서 고문받는 시국사범'이라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에는 상술했듯이 경찰청 인권보호센터가 2018년까지 들어섰는데, 이는 과거 경찰이 행했던 과거를 반성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6월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을 민주인권 기념관으로 조성하겠다는 뜻을 밝힘에 따라 경찰청의 대공분실 소유·관리 역할은 2018년으로 종료되었다. 경찰 측이 인권센터를 한남동으로 이전하고 2018년 12월 26일에 이 건물을 경찰청의 상위 조직인 행정안전부에 넘겼다. 행정안전부는 향후 민주인권 기념관을 조성해 기념관 관리 권한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맡기게 된다.
6. 기타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캠퍼스에 있는 클럽 이름도 대공분실인데, 해당 캠퍼스가 옛 국가안전기획부 해외파트 건물이 있던 자리여서 그렇게 지어진 듯하다. 이 때문에 귀신을 목격했다는 학생들의 괴담이 속출하기도 했다. 이쪽은 약칭 DGBS라고도 하는데, 이 약칭은 과거 조선펑크의 산실이었던 홍대거리 드럭[22] 의 리스펙트를 겸하는 듯하다. 홍대거리 드럭은 보통 DGBD로 줄인 영칭이 있었다. 이쪽 대공분실에서는 주로 방송에 나온 적이 없거나 특성상 나오기가 힘든 사회파적 비주류 인디밴드의 공연들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2010년대 말 이후로는 인디밴드의 활동도 줄어들었고 이따금 Lost Air라는 단체가 DJ 공연이나 하는 듯하다.
7. 매체
- 영화 남영동1985
- 웹툰 비질란테: 작중인물의 말에 의하면 지금 운용되는 곳은 아니고 예전에 폐쇄된 곳을 조헌이 개인적으로 활용하는 곳으로 여겨진다. 별다른 생활 시설도 없이 철문 안쪽에 욕조만 있는 구조. 참고로 걸려있는 간판은 사랑의 치유센터(...)
- 영화 1987
8. 관련 자료
[1] 사진 오른쪽에 있는 고가도로는 내부순환로다. 해당 구간을 지나다 보면 철망으로 된 터널 형태로 설치된 구조물이 있다. 화염병 등을 투척하지 못하도록 하는 목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2]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사진원본)[3]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 있는 호텔로, 2020년 기준의 이름은 가야라트리호텔. 가야호텔 앞이 남영동 대공분실의 전면부가 보이는 곳이다. 2006년 박종철 19주기에서 인권연대 사무국장에 의하면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된 연행자 수가 너무 많으면 가야호텔도 빌려쓰기도 했었다고 한다.[4] 유사 기구로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있다.[5] 출처. 다만 약간의 오류가 있는데, 법령정보센터 자료를 보면 치안본부 산하에 대공과가 설립된 것은 전두환 정권인 1981년이다. 정확히 따지면 1976년 4월에 생긴 것은 치안본부 제3부 정보2과이며, 이 정보2과가 1981년 6월 대공과로 개편된다.[6]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보기관, 군 수사기관, 대공분실 외에 특수수사대 분실과 일반 경찰서 및 파출소에서도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고문하는 경우도 있었다. 군 수사기관의 경우 대통령 암살사건의 주동자급 가해자가 조사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당했다. 일반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를 들면 연행된 사람이 여자라면 성고문까지 했었고, 민주화 운동가가 빨갱이로 몰리는 것 말고도 연쇄살인사건이 터졌으면 증거가 없는 엉뚱한 용의자가 살인범으로 의심된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간첩조작 사건이 터질 시 일가 친척까지 불고지죄로 줄줄이 끌려와 고문을 당했다. 심지어 1983년에 섬유업과 관련된 대기업 이사가 특수수사대 요원들에게 고문을 당하다 죽기도 했으며 박종철을 고문하다 죽인 수사관도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특수수사대 요원에게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7] 2020년 9월 기존 대명동에 위치한 대공분실에서 지산동 본청으로 이동, 민원인 접견실 등을 마련하여 조금 더 인권친화적인 보안수사대 환경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기존 건물은 여성경찰관기동대가 사용한다. 관련기사 [8] 흔히 알려진 '''남영동 대공분실'''과 인접해있어서 같은 건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옥인동 대공분실은 1979년에 완공되었고 남영동은 1976년에 완공되었다.[9] 다음 로드뷰에서 해당 위치에 커서를 대면 나오는 명칭이지만 지도에서 직접 검색되지는 않는다. 실제 4기동단 41중대는 강서기동대에 주둔하고 있다.[10] 정말로 이렇게 나오는데, 주차장이 해당 위치에 있긴 있다. '''담벼락 안에.'''[11] 이곳에서 비탈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대구고검청과 대구고등법원이 나온다. 이 건물은 2018년 철거되어 부지에 범어2동 행정복지센터를 지어 사용하고 있다.[12] 광역시 승격 이전 및 울산청 개청 이전엔 경남청 소속이었다.[13] 이 주소는 실제 광주남부경찰서이다.[14] 2019년 2월 경기남부청 내에 있던 광역수사대와 부지 맞교환 참고 [15] 폐쇄된 것으로 추정[표] 이 표는 민주열사 박종철 기념사업회 웹사이트 중 대공분실 목록에 당당히 캡처되어 쓰이고 있다(...).[16] 영화 1987에서는 부국해양연구소라는 명칭으로 나왔다. 다른 대공분실과 돌려 쓰던 위장명칭 중 하나인 '부국상사'와 적절히 섞은 것으로 보인다.[17] 당시 근무하던 경찰의 증언으로는 이 계단은 끌고 가던 사람들도 불편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중앙 계단을 썼다고 한다. 혼자 올라가더라도 부주의하면 넘어질 위험이 있을 정도다.[18] 본래는 5층 건물인데, 증축을 통해 지금의 모습인 7층이 되었다.[19] 그렇지만 흡음판 또한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일부러 소리를 완벽하게 차단하지 못하는 ‘목재 타공판’을 사용 했는데, 목재 타공판이 제대로 흡수하지 못해 새어나간 비명소리는 낮고 음산한 소음이 되어 반대편 벽면으로 전달되곤 했다.[20] 준공된 1976년도에는 일반 가정집에 욕조와 샤워기가 결코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더욱이 욕실이나 화장실 용도로 별도로 마련된 공간이 아닌, 철문으로 폐쇄된 방방마다 욕조와 샤워기가 모조리 배치되어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21] 저 위에 박종철이 고문당한 방의 사진을 보자. 조사실에 욕조와 샤워기가 왜 필요했는가? 그런데도 1988년도에 치안본부의 모 대공차장은 대공분실에 욕조를 설치한 이유는 조사받는 사람이 목욕하기 위한 것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고문을 받다가 피를 많이 흘리거나 구토를 많이 할 경우 씻기는 씻기야 하겠지만... 물론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와서 실제로 목욕했다는 이가 없어 망언에 가깝다. 당시 기사1, 당시 기사2[22] 크라잉넛도 여기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