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머런 매킨토시

 


'''Sir Cameron Mackintosh'''[1]
[image]
'''본명'''
캐머런 앤서니 매킨토시 (Cameron Anthony Mackintosh)
'''국적'''
'''영국''' [image]
'''출생'''
1946년 10월 17일, 영국 런던 엔필드
'''직업'''
뮤지컬 제작자
1. 개요
2. 경력
3. 참여작
4. 기타
5. 흑역사


1. 개요


영국의 뮤지컬 제작자. 뮤지컬 업계에서의 입지는 가히 빌 게이츠급인 프로듀서로[2], 세계 4대 뮤지컬[3]로 일컬어지는 캣츠, 레 미제래블,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이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하거나 최고의 흥행작으로 탈바꿈했으며, 웨스트엔드에는 그의 회사가 소유한 뮤지컬 극장이 일곱 곳이나 된다. 때문에 리즈 시절 뮤지컬 업계에서는 '''마이더스의 손'''으로 통했고, 지금도 그가 만든 작품들의 주연 배역들은 뮤지컬 배우들이라면 누구나 가질법한 로망이자 목표가 되었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 같은 대단한 작곡가도 매킨토시의 기획과 마케팅, 인사 등에서의 공로[4]가 없었다면 오늘날만큼의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을거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

2. 경력


1968년부터 업계에 입문하여 첫 작품 <Anything Goes>를 내지만 '''2주만에''' 막을 내리는 등 커리어의 출발은 영 좋지 않았다. 그래도 70년대에 <마이 페어 레이디>, <올리버!>를 비롯한 여러 리바이벌과 신작들이 좋은 성과를 올렸는데, 70년대부터 성공가도를 달리던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작곡했지만 뮤지컬 무대에서 하기엔 좀 힘들지 않겠는가 싶다는 평이 있던 캣츠를 기획하여 대박을 터뜨리면서 '''화려한 80년대가 시작되었다.''' 웨버와 함께 만든 또다른 작품은 오페라의 유령(뮤지컬)로, 이것 역시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평가받는 대박. 그리고 프랑스에서 비평가들에게 괜찮은 평가를 받았지만 정작 흥행은 꽝이라 3개월만에 막을 내리는 안습한 처지에 놓인 뮤지컬 하나를 영어로 개사하고 손질하여 웨스트엔드에 올렸더니 이것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레 미제라블(뮤지컬)[5], 그리고 레미즈를 작곡한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미셸 쇤베르크와 작사가 알랭 부브릴 등과 아예 처음부터 호흡을 맞춘 미스 사이공까지, 오늘날 4대 뮤지컬로 평가받는 대작이 다 이 사람의 손에서 80년대에 쏟아져나왔다. 이후에도 80년대의 사기적인 명성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리바이벌/창작 기획으로 웬만한 프로듀서들은 상상도 못할 규모의 성공을 거뒀다. 영어권, 특히 매킨토시의 본고장인 영국의 뮤덕을 자처하면서 매킨토시 뮤지컬은 한번도 안 봤다고 하는 사람은, 뮤덕이 아닐 것이다(...)
1998년에는 그의 공로를 기리는 공연인 'Hey! Mr. Producer!'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물론 작곡가들과의 협의를 거쳐 선발하는 것이긴 하지만, 배우를 보는 눈도 좋아서 무명배우가 매킨토시의 작품을 거쳐 유명세를 타게 된 케이스가 꽤 많다. 레아 살롱가가 대표적인 예. 또한 좋은 퍼포먼스를 펼친 배우들은 웬만한 이들이 한번 주연 따내기도 힘든 매킨토시의 주요 작품 중 여럿을 섭렵하는 경우도 더러...가 아니라 '''매우''' 많다. 특히 장 발장팬텀을 모두 거친 배우들이 매우 많다. 장 발장 초연배우 콤 윌킨슨부터가 두 작품의 초연 당시 레미즈/오유 중 하나를 골라서 뛸 수 있었고, 결국 오유의 캐나다 프로덕션에서 팬텀을 맡는다. 또한 2010년/2011년 각각 있었던 레미즈/오유의 단역/앙상블 출연진들을 보면 양쪽 모두에 출연한 배우들이 굉장히 많다. [6] 또한 매킨토시에게 제대로 인상을 심어주는 경우 고딩 나이인 일개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4년 후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요 배역을 따내는 경우도 있다. 사만다 바크스는 실력도 수준급이지만 업계의 높으신 분의 버프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듯(...)
2010년대부터 대작 뮤지컬들의 영화화라는 크고 아름다운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모양이다. 첫타자 레 미제라블이 뮤지컬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쓰는 흥행성적을 찍어서 후속작 제작이 확실하다. 마이 페어 레이디올리버!, 미스 사이공(!!!), 오페라의 유령(...?!)[7] 등의 떡밥이 나온 가운데 올리버!의 영화화가 확정되었다. 사만다 바크스가 낸시 역을 다시 맡을 가능성이 높다. 미스 사이공 역시 팬들이 크게 기대했지만 유럽/아시아 혼혈 배우를 많이 뽑아야 하는 문제가 걸리는 듯.
이런 크고 아름다운 뮤지컬 분야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레미즈 10주년이 지나고 오페라의 유령 10주년이 된 1996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고, 1998년에는 업계 입문 30주년을 맞아 뮤지컬계에서 30년 동안 같이 일한 거물급 배우들이 매킨토시의 뮤지컬 주요 넘버들을 부르는 콘서트가 있었는데, 엘리자베스 2세 부부가 공연을 찾았다. 업계의 다른 거물들인 스티븐 손드하임앤드루 로이드 웨버 역시 참가.

3. 참여작



4. 기타


동생인 로버트 역시 뮤지컬 제작자다.
공개적인 동성애자인데, 파트너가 사진작가라서 그의 여러 작품들에서 사진 작가로 활동하기도 한다. 시중에서 레미즈 같은 매킨토시 뮤지컬의 캐스트 앨범을 사면 소책자에 화보가 끼여있는 경우가 많은데 대개 매킨토시의 파트너가 찍은 작품이라고. 또한 HIV 예방 협회를 후원하는 등 사회활동에 적극적이며 1998년 알려진 바에 따르면 노동당의 가장 큰 후원자 중 하나로 꼽힐 정도의 열렬한 지지자... 였으나 노동당 치세 12년을 겪은 후 노동당 지지를 후회했다.
한편으로 레미즈 25주년 콘서트에서 마지막에 나왔을 때 "50주년 되면 내 나이가 90은 될텐데 그때 저는 뭘 하고 있을까요?" 하는 드립을 쳤다. 60대 중반에도 뮤지컬이나 영화 찍는거 일일이 보러 돌아다니는거 보면 지금도 멀쩡한데, 아흔이 되어도 심슨 가족번즈 같은 모습으로 뮤지컬 업계를 조종하고 있을지도(...). 아 그렇다고 이양반이 번즈처럼 사악한 존재라는건 아니고...
한국에서는 저작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90년대에 레미즈나 올리버!가 한국에서 라이선스 없는 해적판으로 공연이 열렸을 때 귀신같이 그 소식을 듣고는 로열티 내놓으라고 갈궈서 결과적으로 공연을 내리게 만든 흑막으로 지목되어 을 탄압하는 수퍼 , 수전노(...) 같은 영 좋지 않은 이미지로 알려지기도 했다. 물론 지금 시대에 와서는 해적판 공연 올리면 로열티 내놓으라고 갈구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국제적인 소송을 걸어서 프로덕션 사장을 몹시 곤란하게 할 수도 있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그때 공연 억지로 중단시키지 않고 로열티만 내면 공연 계속해도 된다고 한 것은 오히려 대인배적인 면이라 할 수 있다.

5. 흑역사


하지만 그런 매킨토시도 흑역사가 없지 않다. 배우 출연 문제로 인해 흥행 신작이 나올 때마다 브로드웨이 배우 노조와 쌈박질을 벌인 것은 유명하다. 70~80년대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는 교류가 뜸했고, 올리버!의 브로드웨이 리바이벌에서 아트풀 도저 역의 영국 아역 배우 데이비드 갈릭을 브로드웨이 캐스트에 넣자 영국 아역 배우가 브로드웨이 공연을 뛰는 것이 올리버!의 브로드웨이 초연 당시 도저 역의 데이비 존스 이후 근 20년만이라고 대서특필될 정도여서 그 영향으로 양측 배우 노조의 배우 교환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데, 문제는 웨스트엔드 배우들 중 브로드웨이 진출이 허락되는 이들은 영국인 배우들에 한정되었던 것. 때문에 레 미제라블(뮤지컬)에서 아일랜드 출신인 장 발장 초연배우 콤 윌킨슨의 국적 문제로 브로드웨이 배우 노조가 태클을 걸어서 공연이 초연 전에 취소될 위기가 있었고, 오페라의 유령(뮤지컬)까지 연계된 협상으로 기어이 다음 수출작 오유는 주연 3명을 모조리 웨스트엔드 초연배우들로 넣었다. 미스 사이공에서도 국적 문제로 브로드웨이 입갤이 힘들었던 킴 역 레아 살롱가의 문제가 있었고, 유럽/아시아 혼혈 배우들이 모조리 유럽계 백인으로만 뽑힌 것에 대해 브로드웨이 측에게 까이다가 엔지니어 역의 조나단 프라이스와 레아 살롱가를 겨우 지켜냈다. 일단 그건 매킨토시 잘못이 아니라지만 당시 브로드웨이 관계자들은 그를 좋은 눈으로만 보진 않았다고.
다른 흑역사로는 스코틀랜드에서 토지를 사서 별장을 지으려다가 가축 방목을 위한 목초지로 남겨둬야 한다는 농장주들과의 논쟁에 휘말리며 홍역을 치렀...던 것을 넘어 지금까지 티격태격하고 있고, 2013년 7월에는 미국의 사무실에 택배를 배달하던 페덱스 직원이 지나치게 깨끗한(?) 사무실 바닥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장애를 입게 되어 19년간 일해온 일자리를 잃게 되자 290만 파운드에 달하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당한 적이 있다.(...)
[1] 1996년 Knight Bachelor 기사작위를 받아 Sir가 붙는다. Knight Bachelor만 받은 인물은 이름 앞에 Sir만 붙을 뿐, 이름 뒤에 붙는 건 없다. 자세한 설명은 기사작위 항목 참조.[2] 뉴욕타임스에서는 그를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영향력이 있으며, 강력한 제작자'''라고 평했다.[3] 사실 우리나라 뮤지컬 업계의 상술로 생겨난 명칭. 정확히는 그냥 매킨토시 4대 뮤지컬, 조금 더 확장하자면 영국 4대 뮤지컬 정도로 명명할 수 있다. 미국 브로드웨이에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시카고, 맨 오브 라만차 등 많은 간판작이 존재한다. 그리고 초기 작 캣츠의 경우 미국 브로드웨이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와 일맥상통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만들었고, 거기에서 다시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이 캣츠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뮤지컬 감독으로 활동하는 김문정 음악 감독이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언급하였다.[4] 특히 1980년대 중반 영국 연극계는 불황을 겪고 있었는데 매킨토시는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을 뮤지컬 쪽으로 끌어들였다.[5] 다만 원래 평가가 좋았던 1980년 파리 초연의 시놉시스와 넘버들을 흥행요소를 첨가하고자 여러가지로 뜯어고치는 바람에 프랑스 공연을 봤던 평론가들에게 너이색히! 나의 레미즈는 이렇지 않아!라며 까였다. 다만 입소문을 타고 번진 흥행 면에서는 전례가 없는 대박. 흥행성이란 요소를 넣기 위해 고심하던 매킨토시가 당시 일감이 부족하여 고사할 위기에 놓여있던 연극계의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을 끌어들여서 판이 꽤 커졌다. 실제로 초연 극장인 바비칸 극장은 당시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이 주로 공연하던 곳. [6] 물론 이런 현상은 은근히 잘되는 놈들만 잘되고 잘되는 작품들만 잘되는 뮤지컬 업계의 특성상 스타급 배우들을 고액의 개런티로 캐스팅할 수 있는 작품들이 전부 거기서 거기인 것도 있고(초연부터 괴수급의 배우들을 모셔오려면 웬만큼 비범한 작품이 아니고서는 초연 전부터 금전적 여유가 넉넉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간 고생해준 배우들을 모두 기용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보니 일어난 현상이긴 하다. 바꿔 말하면 매킨토시와 ALW 같은 높으신 분들은 그동안 굴려먹은 몸값 비싼 배우들만 계속 굴려먹었다는 건지도 모르지만(...) [7] 2004년 영화화 당시엔 자신이 관여한 바가 전혀 없었고 영화 자체도 오유 뮤지컬 팬들 사이에서는 영 좋지 않다는 평을 받은지라 시도해 볼수는 있다. 문제는, 레미즈도 '''소설'''의 영화화 이후 14년이 지나서야 나온 거고 오유 영화화는 명백히 '''재시도'''인지라... 적어도 2020년 전후까지는 기다려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