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리 존슨

 

1. 스컹크 웍스의 항공우주공학 엔지니어
1.1. 소개
1.2. 일화
1.3. 제작에 관여한 항공기들
2. 야구선수


1. 스컹크 웍스의 항공우주공학 엔지니어


[image]
'''Clarence Leonard "Kelly" Johnson'''
1910년 2월 27일 ~ 1990년 12월 21일

1.1. 소개


켈리 존슨은 스컹크 웍스 항목에서처럼 여러가지 의미로 철두철미한 공학자였으며 극도로 실용성을 강조하였다. F-104의 전방동체를 U-2에 활용하는 등의 예로도 잘 드러나 있다. 다만 켈리 존슨이 엄청난 괴수다 보니 매드 사이언티스트처럼 보일 뿐... 애초에 자신이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기체는 만들거나 제안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 설령 경쟁자가 고객의 적절치않은 요구나 입맛에 맞는 제안서를 내어 계약을 따내고 이후 설계를 수정하는 행태가 만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외에도 이 때문에 록히드는 LWF(경량전투기) 사업에서 홀로 공군의 요구와는 동떨어진 설계안(더 큰 익면적과 중량, 연료탑재량 등)을 내서 초반에 탈락하였는데[1] 이후 최종경쟁자였던 노스롭과 경쟁에서 승리하여 공군과 계약한 제너럴 다이내믹스의 최종 설계안과 시제기는 결국 중량과 익면적, 연료탑재량을 늘려 설계되게 된다. 그것이 바로 YF-17과 YF-16이다. 결국 승리자인 제너럴 다이내믹스와 F-16이 록히드 마틴에 인수되어 버린걸 생각하면 굉장한 아이러니이다. 그리고 노스롭 역시 YF-17을 기초로 만들어진 F/A-18이 삽질로 맥도널 더글라스(현 보잉)로 주계약이 넘어가 버린걸 생각하면... 그 외에도 SR-71의 원형 즉 CIA 정찰기 사업에서도 다른 제작사의 제안이나 정부 및 국방부의 제안에 과장된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지적할 정도로 그 신념은 확고했다. 어느정도냐 하면 초도예산이 거의 1억달러에 달하는 수소추진 공군정찰기 연구 및 개발을 하면서 무슨수를 써도 원하는 항속거리가 안나온다고 결론이 나오자 바로 gg치고 사용한 600만 달러를 제외한 9천만 달러를 바로 정부에 돌려주었다. 만약 다른 기업들이었으면 이를 숨기고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며 연구비를 쓰려 했을걸 생각했을때 켈리 존슨의 대인배적 기질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밀덕, 그중에서도 항공기 덕후라면 여러번 들어보고 남았을 항공업계의 전설적인 괴수다. 이분이 중심으로 개발된 항공기만 따져도 후덜덜한데 실제 미군이나 CIA에 의해 사용된 것만 해도 쌍둥이 악마란 별명이 있던 P-38, 미 최초의 제트기 F-80 슈팅스타, 최초로 마하 2를 돌파한 전투기 F-104, 운용고도 7만 피트급 고공정찰기 U-2와 최초의 M.3 급 항공기기이자 U-2를 넘어서는 고공정찰기인 SR-71. 물론 항공기 설계에 있어서도 천재였지만 항공 및 군사 업계에서 레전드라 할 수 있는 스컹크 웍스[2]를 직접 만들어 25년을 장으로 지낸 만큼 조직관리에 있어서도 천재, 조직 내에서는 Organizing genius로 불리신 모양이다.[3] 물론 항공기 설계에 관해서도 상도 여러번 수상[4]하였으며 라이트 형제의 첫 비행 100주년을 맞아 Aviation Week & Space Technology지에서 뽑은 항공기 역사상 손꼽히는 인물 100인 중 8위에 들기도 하였다.[5]
미시건 주의 이쉬페밍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는 둘 다 스웨덴 이민자였다. 집이 가난하였기에 뛰어난 실력으로 이를 만회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13세에 첫 비행기 설계로 수상하게 된다. 한편으로 학창 시절에는 Clarence라는 이름때문에 클라라(Clara)라고 놀림을 받게 되고, 놀리던 친구의 다리몽댕이를 분질러준 것을 계기로 켈리라는 별칭을 얻게 되고, 이 별칭이 우리가 흔히 아는 이름인 '켈리 존슨'이 되게 된다.[6]
미시건 대학에 다니며 록히드 모델 10 엘렉트라 여객기의 풍동 실험을 하던 도중, 비행안정성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고, 1933년에 석사 취득 후 록히드에 취직하게 된다. 공구 디자이너로 취직하게 된 그였지만 당시 수석 엔지니어인 홀 히버드에게 모델 10 엘렉트라의 문제를 보고하여 다시 여러번의 테스트 후 록히드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H형 수직미익을 장착하고 여러 문제점을 성공적으로 고쳐 내자, 록히드의 높으신 분들의 눈에 띄게 되어 항공 기술자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후 시험비행 기술자, 피로 분석 등의 일을 하다 1937년에 경리부서의 Althea Louise Young과 결혼하기도 하였고, 1938년에 수석연구기술자가 되며 1956년엔 연구개발 부사장까지 승진한다. 이후 58년엔 고등개발과제(ADP) 부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75년에 벤 리치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하게 된다. 은퇴 후에도 스컹크 웍스의 자문을 맡았으며 83년에는 이 분의 50년 근무를 기념하는 차원에서 Lockheed Rye Canyon Research and Development Center의 이름을 켈리 존슨 리서치 센터로 바꾸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1955년엔 CIA의 의뢰를 받아 네바다주의 그룸 호수에 그 유명한 AREA 51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이는 U-2의 시험비행을 극비리에 하기 위함이었다.
1985년에는 Kelly: More Than My Share of it All이라는 이름으로 자서전도 냈지만 아쉽게도 한글 번역판은 없다.

1.2. 일화


원문[7]
1.

동료 : "어이, 켈리. 그 괴상한 전투기는 뭔가? 설마 P-38?"

켈리 : "응." (슥슥슥)

동료 : "...그런데 주익 그리면서 계산은 왜 안하나?"

켈리 : "하고 있는데?"

동료 : "어디에?

켈리 : "머릿속에."

(그런데도 잘만 날아다녔습니다.)

2.

후배 : "아,U-2의 도안입니다."

켈리 : (슥 보며)"목표고도가 성층권을 넘어갔었지?"

후배 : "넵!"

켈리 : "익면적 늘려. 8% 정도."

후배 : "예?!"

켈리 : "안그러면 안 올라가. 수식 검산해보고."

후배 : (계산해보고) 헐 진짜다..."

3.

벤 리치 : "선배님, 새로운 초고속 정찰기에요."

켈리 : "오오, 가변식 덕트인가?"

벤 리치 : "네, 여기부터 여기까지..."

켈리 : "...그러면 덕트가 한 20% 가까이 낭비일거 같은데? 너무 크니까 줄여."

벤 리치 : (계산해보고) "...18%"

4.

엔지니어들 : " 자 , 이제 차세대 전투기를..."

켈리 : "뭐야, 후퇴각 좀 더 주지? 5도쯤 더 밀어야 최적화 될텐데."

엔지니어들 : (계산해보고) "...저 스웨덴놈 눈엔 공기가 보이나?!" [8]

5.

동료 : 여기 RS-71(SR-71)의 도안입니다.

켈리 : 수직미익에 저항이 너무 커, 거의 1600도 가까이 올라갈 거야.

동료 : (계산 후) 1580도...

은퇴 후에 후임자인 벤 리치의 책임 아래 제작된 F-117의 처음 모양을 보고 크게 화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똥덩어리가 날 것 같냐!"고 성질을 냈다고 하는데, 당시 F-117의 디자인 철학은 그 비행기를 설계하던 스컹크 웍스의 현직 설계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심했기 때문에 특별히 켈리 존슨의 능력을 의심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설계 당시 공기역학 담당자가 스텔스 담당자와 '''현피'''를 뜨려고 했을 정도. 공기를 본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던 그에게, 공기역학을 희생하다 못해 무시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날으는 다리미'는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물건이었음에 틀림없다. 실제로 F-117은 공기역학적으로만 보면 매우 불안정한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컴퓨터로 제어하여 안정적인 비행이 가능하게 된 것이므로 기존의 상식으로 보았을 때에는 실패한 설계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

1.3. 제작에 관여한 항공기들


일단 스컹크 웍스 시작때부터 일한 만큼 스컹크 웍스의 최근 항공기를 제외하고는 전부라고 할 수 있다.
  • Orion 9D
  • Model 10 일렉트라
  • Model 12 일렉트라 주니어
  • Model 14 슈퍼 일렉트라/허드슨
  • Model 18 로드스타/벤추라
  • P-38 라이트닝
  • 록히드 컨스텔레이션 시리즈 : 참고로 파생형이 10가지가 넘는데 전부 다 관여했다.
  • P-80 슈팅스타
  • T-33/T2V 훈련기
  • P-2 넵튠
  • XF-90: 장거리 대 요격기용 전투기, 폭격기 호위용으로 개발되었지만 2기의 시험기만 만들어지고 대량생산되지는 않음
  • F-94 스타파이어
  • X-7: 램제트 엔진 및 미사일 유도기술 실험용 시험기.
  • F-104 스타파이터
  • C-130
  • U-2
  • SR-71 블랙버드 시리즈(A-12, YF-12, SR-71)와 무인기 (M-21, D-21)
[1] 공군은 연료 탑재량 5000(약 2.3톤)파운드, 주익면적 275 ft²의 17000파운드 급(약 7.5톤 가량) 기체를 요구했는데 이게 뭔소리냐면 F-20보다 1.5톤, 주익면적은 38%, F-5에 비하면 3톤, 주익면적은 48% 더 큰 기체에 연료탑재량은 같은 전투기를 요구한 거다. 기체 중량으로 따지면 F-8, J35와 동급이고 주익면적은 작다. 전투기는 커녕 단거리 요격기에 붙어도 시원찮을 요구사항인 셈이다. 이에 스컹크 웍스는 19000파운드, 연료탑재량 9000파운드, 주익면적 310 ft²의 기체를 제안했고 당연히 서류에서 탈락했다. 이후 선정된 제너럴 다이내믹스이 안은 F-16이 되면서 19000파운드, 연료탑재량 7400파운드, 주익면적 310 ft²가 되었다. YF-17은 21000파운드, 연료 7400파운드, 주익면적 350 ft².[2] 뛰어난 기술로 유명하지만 그 뿐만 아니라 공학, 산업계에서 기술 및 생산 연구 관리까지 혁신의 대명사로 통한다.[3] 실제 스스로도 항공기 설계 능력은 물론이고 조직관리에 있어서도 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벤 리치가 HBS(하버드 경영 대학원)과정을 이수하고 싶다고 했을 때 보내주겠다고 말하면서도 '나라면 반나절이면 그딴 HBS에서 가르치는 것 보다 더 잘 경영자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전수해 줄 수 있다. 그리고 나서 남는 시간인 저녁엔 나랑 한잔 하러 가면 됨.ㅇㅋ?' 라고 했을 정도. 벤 리치는 HBS를 이수하고 돌아와선 켈리에게 2/3 HBS = BS 라는 공식을 선물했다. 뜻은 HBS의 2/3은 Bull Shit이라는 것. 켈리는 크게 웃으면서 액자에 넣어 걸어뒀다고.[4] 콜리어 트로피도 두번이나 수상했다.[5] 당연한 일이겠지만 1위는 '''라이트 형제'''이다. 비행기를 최초로 만든 사람들이 1위가 아니면 그게 이상한거다. 2위는 베르너 폰 브라운. V2를 만든 사람이며 나치 사람이었지만 항공기에 대한 머리는 매우 뛰어났다. 특히 로켓. 3위는 현대 로켓공학의 아버지 로버트 고다드, 4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5위는 '''미국 최초의 파일럿 라이센스 습득자''' 글렌 커티스, 6위는 '''최초의 단독 무착륙 대서양 횡단'''을 한 찰스 린드버그, 7위는 '''현대 미 공군 탄생의 기틀'''을 세운 윌리엄 미첼.[6] 켈리는 아일랜드 계(및 콘월, 데본 출신)의 이름이다. 실제 켈리 존슨은 전술하였듯이 스웨덴계. 그의 한 성깔 하는 성격이 아일랜드계 같아서 붙은 별명.[7] 링크와 아래의 예시의 경우 실제 일화와는 발언자나 기종이 다른 것도 몇개 있다. 저런 일화가 있었다는 것 자체는 관계자의 증언 등이 있기 때문에 사실이다.[8] 벤 리치의 자서전에서는 해당 발언을 한 이가 히버드라고 밝히고 있다. 엘렉트라의 쌍수직미익 개조 이후에 있었던 일이며, 켈리 본인은 이를 가장 큰 칭찬으로 여겼다고 한다.


2. 야구선수


이름
켈리 존슨 (Kelly Andrew Johnson)
생년월일
1982년 2월 22일
국적
미국
출신지
텍사스 주 오스틴
포지션
2루수[9]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2000년 드래프트 1라운드 38순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지명
소속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2005~2009)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010~2011)
토론토 블루제이스 (2011~2012)
탬파베이 레이스 (2013)
뉴욕 양키스 (2014)
보스턴 레드삭스 (2014)
볼티모어 오리올스 (2014)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2015)
뉴욕 메츠 (2015)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2016)
뉴욕 메츠 (2016)
[image]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전 내야수 유틸리티 플레이어. 지금은 유틸리티 플레이어지만 전성기에는 2루수로서 20개 이상의 홈런을 치기도 했던 슬러거였다. 커리어 요약을 보면 알겠지만 엄청난 저니맨으로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의 모든 팀에서 뛰어본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텍사스에서 고교야구 유격수로서 이름을 날린 뒤 2000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10]에서 1라운드 지명을 받은 켈리 존슨은 많은 삼진에도 불구하고 슬러거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포지션이 겹치는 유넬 에스코바와의 공존 문제로 마이너에서부터 외야 수업을 받기도 했는데, 2005년 데뷔한 뒤 2006년에는 외야에서 스로잉을 하다가 팔꿈치 부상을 당하여 토미 존 서저리를 받게 된다. 결국 팔꿈치에 부담을 덜 주는 2루 포지션으로 옮긴 그는 리드오프 자리에서 활동했지만 윌리 해리스에게 자리를 내주며 고전을 하는가 했지만, 결국 유넬 에스코바의 2루 파트너로서 활동하며 주전 자리를 꿰찼다.
그러나 2009년 연봉조정 1년차 시즌, 타격 어프로치 수정이 말을 듣지 않으며 매우 심한 부진을 겪었고 결국 애틀랜타는 그를 논텐더로 방출했다. 그는 결국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로 이적했다. 그리고, 2010년에 커리어 하이를 찍고 말았다. 비록 공갈포스러운 면모가 여전했지만 .284 .370 .496 26홈런 71타점은 흡사 로빈슨 카노체이스 어틀리를 연상시키는 스탯이었다. 문제는, 이게 정말 커리어 하이라서 '''내리막'''이 찾아왔다는 것(...) 2011년에는 영 좋지 않은 스탯을 찍으며 어영부영 자리만 차지하다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플레이오프 승부수를 던지며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애런 힐과 존 맥도널드를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 마침 토론토는 유넬 에스코바라는 예전의 파트너도 있겠다 하며 부활을 기대했지만... 망했어요. 결국 2012년에는 리그 최고의 삼진머신 노릇이나 하며 재계약이 불발되었다. 2013년에도 유넬 에스코바와 함께 탬파베이 레이스로 향했지만... 유넬 에스코바는 유격수 자리라도 지켰지 켈리 존슨은 벤 조브리스트의 존재로 2루 자리마저 빼앗기며 외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2014년에 다시 둥지를 옮겨서 뉴욕 양키스의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2014시즌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그러나 한 달후(...)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2015년 1월 21일 친정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메이져 팀으로 승격된 후 .275 타율을 치는 등 백업 멤버로서 어느 정도 제 역할을 하던 도중 후안 유리베와 함께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 되었다. 대상은 마이너 레벨의 우완 투수 2명. 포스트시즌 로스터에도 들었으나 큰 활약 없이 조용히 시즌을 마쳤다. 시즌이 끝난 후 FA로 풀렸고 2016년 1월 8일,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 1년 2M의 계약을 맺었다. 눈에 띄는 활약없이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역대급 부진에 묻혀 평범하게 뛰던 중 어쩌면 점점 더 답이 없어져 가는 뉴욕 메츠의 타선 강화를 위해 마이너 리그 투수인 아킬 모리스와 현금을 받는 조건으로 팀에서 트레이드 되어 다시 뉴욕 메츠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시즌후 방출되며 그대로 은퇴했다.
[9] 2012년 이후로는 다른 포지션을 겸업하고 있다. 사실상 유틸리티로 활동.[10] 이 해는 상위픽들이 딱히 흥하지 못한 드래프트로, 1순위 아드리안 곤잘레스와 15순위 체이스 어틀리, 29순위 애덤 웨인라이트 정도만이 1라운더로서 흥한 사례가 되었다. 켈리 존슨이 딱히 돋보이는 커리어는 아닌데도 1라운더 중 통산 rWAR 순위에서 4위를 마크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