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형제
Wright Brothers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 1867년 4월 16일 ~ 1912년 5월 30일)
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 1871년 8월 19일 ~ 1948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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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03년 모든 비행기들의 조상인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기를 제작하여 성공시킨 미국인 윌버 라이트와 오빌 라이트 형제를 일컫는 말로, 항공계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라이트 형제가 없었어도 1906년 파리에서 "출발할 때 동력장치가 필요 없는 비행기"를 최초로 날린 브라질의 프랑스계 발명가 아우베르투 산투스 뒤몽(Alberto Santos Dumont, 1873~1932)같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비행기가 어떻게든 개발되었을 것이다.[2] 그래도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의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매우 거대하며,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타는 비행기는 지금과는 상당히 다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라이트 형제와 같은 비행기가 등장할 가능성은 물론 있다. 그러나 최소 수십 년이 더 걸렸을 수도 있다.
해외 언론사에서 '항공 역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 100선'을 만든 적이 있는데, 당연히 1위로 나왔다. 2위는 베르너 폰 브라운. 라이트 형제가 없었으면 '''사실상 오늘날의 항공기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3] 위대하고, 남긴 것도 많은 이들이다. 사실상 이 둘의 노력과 열정이 인류의 역사를 크게 바꿨다고 말해도 손색이 없다.
2. 가족사
아버지 밀턴 라이트(1827~1917)는 목사였으며 어머니는 수전 캐서린 코너(1831~1889). 가계는 부계가 영국계 및 네덜란드계, 모계가 독일계 및 스위스계이다.[4] 서민 출신으로 나오나 그들의 조상은 대단한 명문 자본가 가문 출신이다.
형 윌버 라이트는 인디애나 주 밀빌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오하이오 주 데이턴으로 가족이 이주했고, 이후 데이턴에서 오빌 라이트가 태어나 두 형제 모두 데이턴에서 죽었으므로 두 형제 모두 데이턴을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라이트 형제라고 하면 윌버와 오빌만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장남인 로이힐린 라이트(1861~1920), 차남인 로린 라이트(1862~1939), 누이동생인 막내 캐서린 라이트(1874~1929)가 또 있으며[5] 이 세 사람도 셋째 윌버와 넷째 오빌을 도왔음에도 실질적인 비행기 제조에 나선 이 두 사람의 이름만 잘 알려져 있다. 이들 남매는 이미 어릴 때 눈썰매경주 시합에서 개조 썰매로 우승하는 등 싹수(?)를 보였다.[6]
한때 다섯 남매는 지역신문사를 경영하면서 호황을 누리기도 했으나 메이저 대기업 신문사의 진출로 파산하여 자전거 가게를 하면서 살았다. 일설과는 달리 그다지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 밖에도 기계완구가게도 같이 하면서 작은 글라이더 놀이를 즐기면서 이걸 크게 만들면 어떨까하는 호기심을 가졌고[7] 독일의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 1848~1896)이 글라이더로 하늘을 날았다는 소식에 자신들도 연구하면 할 수 있다고 믿고 독자적으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릴리엔탈이 글라이더 시험비행 중 돌풍에 의해 추락사한 것을 알고 글라이더 말고 다른 것은 안 될까하여 비행기 연구를 시작했다.
3. 동력비행기 개발을 위한 노력
이들은 독자적인 연구만으로는 도저히 어렵다고 판단하여 미국 스미소니언 재단 과학협회를 찾아가 전문적인 과학자들에게 여러 정보를 듣기도 하며 열심히 노력한다. 결국 두 형제가 주로 비행기 연구 및 개발, 시험비행에 나서기로 하고 로런스와 토머스가 자전거 가게와 기계완구 가게를 맡고 캐서린은 초등교사로 돈을 벌면서 연구자금을 보태준다.
여러 연구와 같이 바람의 크기 및 일정 속도의 바람이 부는 곳을 찾아헤맨 끝에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 있던 당시 인구 1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 키티호크(Kitty Hawk)[8][9] 로 찾아간다. 그 곳을 연구거점으로 삼아 3년에 걸친 온갖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1903년 12월 17일''' 프랑스계 글라이더 조종사이자 비행기 연구가인 옥타브 샤뉘트(Octave Chanute, 1832~1910)를 포함한 5명이 보는 자리에서 라이트 형제를 태운 최초의 동력 비행기 플라이어 1호는 하늘로 날아올랐고 '''약 12초''' 동안의 짧은 비행에 성공했다. 바람이나 수소 같은 기체(氣體)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난 인류 최초의 비행 성공기록이었다.
마침내 인류는 숙원과도 같았던 '''스스로 하늘을 난다는 꿈'''을 이루어 냈고 '''그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
4. 알려지지 않은 수난
보통 위인전에 잘 넣지 않은 게 이들의 고생담이다. 동력 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미국 과학계는 축하보다는 분노와 시샘을 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형제를 방해한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라이트 형제가 직접 찾아가 가르침까지 구했던 새뮤얼 랭글리(Samuel Langley, 1834~1906)박사[10][11] 였는데 스미소니언 과학협회 간부이기까지 해서 당시에는 명망있는 학자 중 하나였다. 글라이더 비행에 성공한 랭글리는 이미 1897년부터 동력 비행기 개발에 힘을 기울여왔는데 듣보잡인 아마추어 형제들이 자신을 제쳐두고 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하필이면 1899년 라이트 형제가 랭글리 박사를 찾아와서 가르침과 자문을 받는 와중에 동력 비행기에 대한 정보를 들었기에, 랭글리 박사는 "나의 연구 성과를 허접스런 두 잉여놈들이 무단으로 훔쳐갔다!"라고 분노하며 이를 갈았다. 게다가 1903년 12월 8일 겨우 아흐레 전, 랭글리 박사는 동력 비행기 시험비행에 나섰다가 추락했기에 자신이 실패하고 라이트 형제가 성공했다는 것도 믿지 못했다.[12] 다만 라이트 형제의 방식과 랭글리 박사의 방식은 매우 달랐다. 랭글리 박사는 새나 비행선을 참고하던 다른 도전자들과 다를 게 없었지만 라이트 형제가 참고한 것은 선박과 물이었다.[13] 사실 라이트 형제는 새뮤얼 랭글리에게만 지식을 얻지는 않았다. 오토 릴리엔탈 같은 사람들도 라이트 형제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솔직히 말하자면 새뮤얼 랭글리가 발광한 이유도 라이트 형제가 제자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아닌 경쟁자였기 때문이다. 토머스 에디슨도 경쟁자들에게 배우기도 하고 협력 및 도둑질을 하기도 했으나 서로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1904년 7월. 랭글리 대 라이트 형제의 대결이 벌어진다. 둘이 동력비행기를 타고 2만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누가 잘 날아가나 시범을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라이트 형제 완승. 랭글리의 비행기는 힘없이 강물에 추락했지만, 라이트 형제가 탄 비행기는 잘만 날아갔다. 그것도 '''15분씩이나 400미터 위를''' 쌩쌩 날아갔기에 미국 언론은 이번이야말로 "라이트 형제 하늘을 날다!"라고 확인 보도를 해버렸다. 결국 랭글리는 패배에 좌절하여 모든 활동을 멈추고 폐인처럼 지냈으며, 평생 라이트 형제를 원수로 여기고 이를 갈다가 오래가지 못해 홧병으로 죽게 된다. 랭글리 박사가 죽기 전에 제자들과 지인들에게 라이트 형제를 이겨서 자신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설도 있는데, 후술할 랭글리의 제자 박사들이 한 행보로 봐서는 어느 정도 확실해 보인다.
랭글리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랭글리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스미소니언 과학협회는, 라이트 형제가 스승의 아이디어 및 여러가지를 도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라이트 형제는 1년이 넘는 온갖 조사와 수사를 받아야 했다. 물론 결과는 무죄. 어떤 증거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똑같다면 왜 랭글리 박사의 비행기는 추락하고 두 형제가 만든 비행기는 잘 나는데?"''' 라는 결과가 이를 입증했던 것.
이렇게 무죄가 입증되고 이들은 계속하여 여러 단점을 고쳐나가면서 개량된 비행기를 만든다. 1905년에 이들이 만들어낸 '플라이어 Ⅲ'은 선회·방향전환·원운동·8자비행이 가능했고, 30분 이상 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럼에도 스미소니언 협회는 라이트 형제가 도용했다고 정계, 재계, 학계, 인맥에 라이트 형제를 까내리는 흑색 선전을 계속했고 이런 여파로 인해 이들이 만든 비행기는 일절 팔리지 않았다. 하다못해 이들은 미 육군 측에 시험비행도 여러번 했지만 육군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14] 되려 유럽이나 아르헨티나(당시에는 세계적인 경제부국이었다.), 심지어 오스만 제국이나 일본에서까지 관심을 보이며 생산공장을 자국 안에 만들자고 온갖 조건을 제시하며 유혹했다.
그런 가운데, 라이트 형제를 꾸준히 지지하던 옥타브 샤뉘트가 조국이었던 프랑스에 열심히 이들을 알렸고 동력 비행기에 대한 걸 홍보한 끝에 결국 1908년 '''프랑스가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기 공장을 만들게 되었고''' 미 육군은 제시하는 시험비행을 성공시키면 구입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시험비행을 성공시켰지만 그럼에도 여러 조건이 안 맞는다면서 거부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생산에 주력하지만 결국 공짜는 없다는 듯이 제조기술이 유출되어버린다. 이 일로 프랑스는 독자적인 비행기 제작에 들어가고 더더욱 새로운 기술 등에 여러 모로 노력하면서 라이트 형제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이때 앞서 말한 두몽과의 최초 발명 여부가 논쟁거리가 되었으며,[15] 10여 년간 스승이자 친구였던 옥타브 샤뉘트가 기술 유출에 연루된 게 드러나서 라이트 형제와 샤뉘트는 엄청 다툰 후 결국 갈라섰다.[16]
이런 와중에 미국에선 글렌 커티스(Glenn Curtiss, 1877~1930)라는 후발주자가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와 어느 정도 비슷한 기술로 뒤늦게 특허를 낸 후에 공장을 차렸고 오히려 라이트 형제가 자신의 기술을 도용했다고 소송드립과 선동질을 하며 라이트 형제를 비난하고 몰아붙였다. 어처구니없게도 조국인 미국은 커티스의 주장에 동조하였고, 많은 사람들도 커티스가 라이트 형제를 향해 반박하는 논조에 따라주는 바람에 원조인 라이트 형제가 되레 온갖 고생을 해야했으며, 기나긴 소송이 시작되었다.
소송을 맡았던 것은 형인 윌버였는데 잦은 여행과 재판으로 인해 건강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1912년 보스턴으로 사업차 여행을 다녀온 후에, 티푸스 열 진단을 받았고, 몇 주 동안 의식을 잃었다 회복했다를 반복하다가 끝내 45세라는 아직 한창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다 1914년에 미국 상급 법원에서는 겨우겨우 라이트 형제가 무고하다고 판결을 내렸지만, 이번에는 언론과 사회에서 "라이트 형제가 기술 독점을 위해 커티스를 괴롭혔고, 재판을 유리하게 몰아 커티스의 기술도 빼앗아 탐욕을 부린다!"라고 기사화를 하여 맹비난을 퍼붓게 된다. 커티스의 항의와 소송으로 고생해 온 라이트 형제에게 이제는 커티스를 괴롭힌 가해자라는 꼬리표가 붙게 된 것이다.
5. 미국을 떠나서
조국에서의 푸대접과 윌버 형의 죽음으로 슬픔과 절망에 빠진 오빌은 다른 형인 로런스와 같이 미국을 떠난다. 슬픔을 떨치고자 그는 비행기 생산에 전력을 다했고 더 나은 발전을 위하여 연구했으며 프랑스 및 독일, 영국, 네덜란드와 멀리 아르헨티나를 오고가면서 비행기 홍보를 했다.
오빌은 1918년도에 1911년 모델B형을 마지막으로 조종하고는 비행기를 조종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여러 항공 위원회에서 우대받으며[17] 위원으로 활동을 했었는데, 그중에는 NASA의 전신인 NACA도 있었으며, 28년간 몸을 담았다.
1928년 오랜만에 미국으로 돌아온 오빌은 오랫동안 자신들을 곤경에 빠뜨렸던 불구대천지 원수 커티스가 사업실패로 부도에 빠지자 그간 모아온 돈으로 커티스의 생산공장을 인수하면서 복수에 성공했다. 그래서 이름이 커티스-라이트가 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라이트-커티스로 고치고 싶겠지만, 커티스가 자신과 견원지간이긴 했어도 그간 "비행기 개발" 관련으로 마케팅을 훨씬 많이 해 온 쪽은 커티스였고 그 덕에 비행기 하면 커티스라는 이름이 대중에 많이 알려졌기에 오빌은 차라리 커티스 이름을 앞에다 두는 것이 인지도와 점유율 면에서 훨씬 긍정적이라고 판단하여 일부러 자기 이름을 뒤로 양보하는 식으로 회사명을 짓는다. 되레 라이트 형제를 사기꾼으로 몰며 소송을 남발하던 커티스는 회사마저 넘어가자 눈앞이 캄캄했고, 역관광 당한 후 오래 못가 1930년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간 해온 행보를 보면 인과응보다. 일설에는 커티스가 랭글리 박사처럼 죽을 때 후손들에게 라이트 형제를 쓰러트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커티스의 비행기 공장을 넘겨받고, 그간 잃었던 로열티도 인정받아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없었으나 오빌은 미국이 자신들을 외면한 것을 잊지 않았다. 심지어 오빌은 1933년 키티호크에 세계 최초 동력비행 기념비를 세우고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도 주로 유럽 측 자금으로 지을 정도였다. 세월이 지나 1943년에 비행 최초 4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미국에서 조촐하게 지냈다.(2차대전 때문에 프랑스와 영국같은 나라는 정신이 없었기 때문) 이젠 로런스와 토머스, 캐서린[18] 같은 다른 형제들도 모두 죽었기에 홀로 자리에 참여한 오빌은 인터뷰로 한 말로 여전히 미국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참고로 세계 최초 동력 비행기인 플라이어 1은 바로 영국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오빌이 스스로 영국에 임대 기증한 것이었다. 단, 조국인 미국에서 원한다면 언제라도 돌려준다는 조건을 달아서 언젠가 미국이 자신들을 알아줄 것이란 전망을 했다."영국과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 벨기에... 유럽 각지에서 나(오빌)와 세상에 없는 윌버 형에게 훈장과 표창장을 주고 명예 시민, 명예 교수, 명예 학자 자리를 주며 인정했지만, 조국 미국은 그래본 적이 없다."
1944년 4월 19일 록히드 항공사의 록히드 컨스텔레이션 두 번째 생산분이 캘리포니아 주의 버뱅크(Burbank)에서 워싱턴까지의 거리를 6시간 57분으로 주파했다. 이 비행기를 조종한 사람 중 한 명이 하워드 휴즈였었다. 돌아오는 도중 이 비행기는 라이트 비행장에 멈춰섰고, 오빌은 생애 마지막 비행을 했다. 잠깐이나마 조종간도 잡았는데, '비행기의 날개 길이가 내가 처음 날았던 때보다 길어졌군.'[19][20] 이라는 말을 남겼다.
오빌은 2차대전의 대규모 폭격의 피해를 보며 이러한 말을 하기도 했다.
1948년 1월 30일, 오빌은 고향인 오하이오 주 데이턴 시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77세.[21] 첫 비행을 한 지 만으로 44년 만이었다. 며칠 전부터 혼수상태이던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우리 형제는 세계의 번영을 가져다줄 발명품을 원했으나 우리가 틀린것 같소, 물론 나는 우리 형제의 항공기 발명을 절대 후회하지 않지만 그 누구도 그것이 초래한 파괴의 원인중 하나인 나보다 슬플수는 없을거요. 나는 항공기가 마치 불과 같은것이라 생각하오, 나는 그 '불'로 인한 모든 끔찍한 피해에 대해 후회하고 있지만 그 '불'로써 할수있는 수천가지 좋은 일을 생각하면 인류 전체에게는 이득이라고 생각하오 "
마치 옛날 40여년 전을 회상하듯, 그 비행기를 띄울 때 모든 걸 잊고 비행기 연구에 전념하고 드디어 하늘을 날 때 벅차던 그 시절을 되새기며 눈을 감은 것으로 보인다.'''"바람은 높아......이제 날 수 있겠어."'''
말과 마차가 다니던 시대에 태어나 항공 시대를 열었던 오빌은 초음속 시대의[22] 태동기를 직접 목격한 산 증인이었다. 윌버와 오빌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아[23] 자식은 없었다.
6. 그 뒤에
오빌이 죽고 10년도 안 돼 미국에선 라이트 형제 붐이 일어난다. 2차대전 승리와 대영제국으로 알아주던 영국의 약화, 영국을 대신한 미국의 강세 속에 위대한 미국붐이 일어나면서 미국이 자랑할 이야기들이 떠오르며 미국은 뒤늦게 라이트 형제를 찾아나선다.
1955년에서야 라이트 형제의 위인전이 출판되었고 미국은 영국에 전시 중이던 플라이어 1호를 돌려달라는 요구를 한다. 이미 오빌은 영국 측에게 미국이 돌려달라면 언제라도 돌려줄 것을 조건으로 임대해준 것이었기에 별일없이 미국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미국에서 미국의 자랑으로 알려지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지만. 사실 좀 우여곡절이 있고, 사건도 오빌의 사망 이전이었다.
우선 미국이 돌려달라고 한 게 한두 번은 아니었다. 미국이 플라이어 1호를 돌려달라하자 영국 대영 과학박물관에서 플라이어 1호를 돌려주기를 거부했고, 미국은 데꿀멍했다. 사실 이전에도 오빌이 플라이어 1호의 반환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도 거절. 그런데 루프트바페의 런던 폭격으로 박물관이 박살날 가능성이 커져 기체를 지키기 힘들어지자 결국 플라이어 1호를 미국으로 보냈다.
7. 그 밖에
라이트 형제가 개발한 최초의 동력비행기인 '플라이어 1호'는 지금의 뒤쪽에 수평꼬리날개가 달린 일반적인 비행기와 달리 앞쪽에 카나드가 달린 비행기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안전을 위해서였다. 그들이 비행하기 몇 해 전에 글라이더 및 비행기 발전에 큰 공헌을 했던 오토 릴리엔탈이 자신의 글라이더를 타고 비행하던 중 추락하여 사망하였는데, 일단은 워낙 높이서 추락한 것도 문제지만[24] 오토 릴리엔탈의 글라이더는 앞쪽에 아무런 구조물이 없는 형태였기 때문에 추락하면 조종사가 직접 땅에 부딪히는 구조인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라이트 형제는 앞쪽에 승강타 역할을 하는 카나드를 달아서 설사 추락해도 앞쪽 구조물이 먼저 부서져 충격을 흡수하는 것을 노렸다. 또 한편으로는 조종사가 직접 승강타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아직 신뢰성이 부족했던 당시의 항공기를 조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전방 카나드는 유체역학적으로 공기저항을 심하게 받는 구조라 이후 항공기는 카나드 대신 수평꼬리날개가 있는 형태로 바뀌었다.
플라이어1호의 조종방식은 독특하였다. 지금의 항공기는 조종간과 페달로 움직이며 특히 조종간은 전후좌우로 움직였다. 그러나 플라이어1호는 조종간이 전후로만 움직인다. 조종간을 좌우로 움직이는 것에 해당하는 조작은 엎드린 채로 타는 조종사가 직접 허리를 좌/우로 움직여야 했다.[25] 조종사가 허리를 좌우로 움직이면 그에 맞춰 날개 왼쪽, 혹은 오른쪽이 비틀리면서 그쪽으로 기체가 기울어졌다. 이후에는 에일러론이라 하여 아예 날개 끝 부분이 위아래로 꺾이도록 경첩을 달았는데, 사실 이 부분이 바로 커티스와 특허 분쟁에 휘말렸던 부분이다.
라이트 형제는 자신들의 항공기에 붙어 있는 승강타 역할을 하는 카나드를 러더(rudder)라고 불렀는데, 이는 현재 항공기에서 방향타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라이트 형제의 플라이어1호는 사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매우 불안정한 항공기다. 조종사가 잠시라도 조종을 멈추면 항공기는 점차 방향이 틀어지거나 기수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는 잘못된 무게중심과 날개의 위치관계 때문. 그래서 조종이 매우 어려운 편이었음에도 라이트 형제가 자신들의 비행기를 제대로 날릴 수 있엇던 이유는 실제 동력 비행에 앞서 유사한 형태의 글라이더로 여러 번 비행연습을 하였기 때문이다.
라이트 형제는 비행에 앞서 모형을 가지고 실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이들은 모형을 가지고 실험한 결과 종전의 학자들이 계산/실험한 내용이 틀렸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라이트 형제의 실험결과가 틀렸다. 당시만 해도 아직 모형으로 실험할 때와, 실제 항공기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풍동실험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부족한 것이 원인인데 풍동실험에서 현실을 반영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상사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를 판단하는 수로 대표적으로 마하수와 레이놀즈 수가 있다. 여기서는 마하수 0.3 이하의 저아음속이므로 압축성 효과는 고려할 필요성이 작아 레이놀즈수를 중요하게 보는데 레이놀즈 수는 간단히 말하면 유동의 상대 속도가 빨라지면 커지고 물체의 크기가 작아지면 작아지게 된다. 즉, 풍동에서 작은 물체를 가지고 같은 레이놀즈 수를 얻으려면 속도를 높여야 한다. 그런데 이걸 만족시키지 못하면 풍동은 저 레이놀즈 수의 유동조건이나 현실에서는 그보다는 훨씬 높은 레이놀즈 수의 유동조건이 만들어져 큰 차이가 발생한다. 덕분에 이들은 날개를 최대한 얇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니 날개 구조강도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단엽기보다는 복엽기 형태의 항공기를 만들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인한 사망자도 공교롭게 이들 형제가 냈다. 1909년 오빌 라이트가 조종하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오빌은 늑골 4개와 왼쪽 다리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공식 관측자로서 탑승하고 있던 미 육군 장교 토머스 셀프릿지 중위는 두개골 골절상을 입고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부상이 너무 심해 그날 밤 사망했다.
8. 그들의 발자취 및 관련 문서
- B-29 - 1937년 5월에 처음으로 나온 라이트항공의 R-3350 듀플렉스-사이클론(Duplex-Cyclone) 엔진을 4기 장착하였다.[26] 참고로 그 엔진은 더글라스 A-1 스카이레이더, 록히드 컨스텔레이션, 록히드 넵튠 같은 항공기에도 사용되었으며, 특히 A-1의 경우 1985년까지 운용되었다.
- B-2 - 19호기의 기체명이 Spirit of Kitty Hawk이다.
- 노스 아메리칸 항공(North American Aviation) - 1948년에 커티스-라이트의 항공사업부를 인수하였다. 이후 노스 아메리칸 항공은 록웰 인터내셔널로 재편되고, 그리고 록웰 인터내셔널은 분할매각되어 항공부문은 보잉으로 승계된다.
- 아폴로 11호 - 플라이어 1호의 날개 천 조각을 싣고 달에 갔다. 닐 암스트롱이 탄 바로 그 미션이다.
- 록히드 마틴 - 오빌 라이트가 매각한 라이트사와 글렌 마틴(Glenn Martin)의 회사가 1916년에 합병한 이후 1917년에 해산했다. 이후 글렌 마틴의 회사는 마틴 마리에타로 재편되고, 이후 1995년에 록히드 마틴으로 합병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보잉 - 노스 아메리칸 항공, 록웰 인터내셔널을 거쳐 결과적으로 라이트 형제의 항공기사업을 이어받은 회사.
- 커티스-라이트(Curtiss-Wright) - 오빌 라이트가 세운 회사를 전신으로 하는 항공, 원자력발전, 금속 방면의 대기업으로, 수차례의 인수합병을 거쳐 1929년 이래 현재의 형태로 존속해 있다. 인수합병의 역사 자체가 라이트 형제의 수난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 프랫&휘트니 - 1925년 당시 라이트항공의 대표이사에 있었던 프레더릭 렌트슐러(Frederick Rentschuler)가 사임하여 코네티컷주 이스트 하트포드시에서 세운 회사로 세계 3대 항공기 엔진 메이커이다.
- CVL-49/CC-2 라이트 경항공모함/지휘함 - 사이판급 경항공모함의 2번함으로 1945년 9월 1일 취역해 실전엔 참여하지 못했다. 배수량 14,500톤급으로 에섹스급 항공모함보다는 소형이었으나 최고속도 33노트를 발휘할 수 있어 전투함대와 공동작전이 가능한, 에섹스급과 호위항공모함 사이의 능력을 가진 경항공모함이었다. 1962년에는 지휘함으로 개조돼 CC-2 라이트로 재지정됐으며 1970년까지 활동했다.
- 키티호크급 항공모함 - 네임쉽 키티호크는 라이트 형제가 첫 동력비행실험을 성공했던 키티호크에서 따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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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폴로 14호 - 사령선 모듈 이름을 키티호크라 지었다.
- 라이트-패터슨 미합중국 공군기지: 고향 오하이오주 데이튼에 소재한 윌버의 이름을 따온 윌버 라이트 필드가 오늘날에는 확장되어 공군기지로 쓰이고 있다. 이곳을 주로 관장하는 사령부는 비행기 만드는게 주 업무인 미 공군 군수사령부.
9. 미디어
시간탐험대에서 주인공 일행이 만난다. 1903년 비행기를 시험운전하던 이 형제를 주인공 일행은 라이트 형제라는 걸 알고 성공할 것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선 레프트[27] 라는 사내가 라이트 형제와 반목한다.[28] 그는 사람은 새처럼 스스로 날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글라이더 비슷한걸 만들지만 연이어 실패했다. 그러다가 램프의 바바를 보곤 하하하하하~웃으며 램프의 바바 옷차림을 하고 날아보라는 샬랄라 공주 말대로 하는데 물론 즉시 추락하기 일쑤. 되려 이걸 보던 돈데크만이 라이트 형제처럼 비행기로 날아야 한다고 어이없어했다. 결국 라이트 형제는 실제 역사처럼 플라이어 1호를 몰고 하늘을 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정신이 나간 건지 레프트가 여전히 램프의 바바 옷차림을 하며 하하하하하하 웃음과 같이 하늘을 날려다가 계속 넘어지며 이 에피소드가 끝난다.
똑같이 시간여행이 주 테마인 시공탐정 겐시군(한국판 제목은 사차원 탐정 똘비)에서도 등장한다. 여기서는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윙이라고 하는 타임몬스터가 그들 옆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참고로 이 에피소드에서 동생 오빌의 목소리를 맡은 성우는 무려 피카츄의 성우로 유명한 오오타니 이쿠에. 형 윌버의 성우 역시 쿠도 신이치와 괴도 키드 등으로 유명한 야마구치 캇페이[29] 이다.
그밖에 과거, 국내 어린이전용 TV 프로그램, 교육용 만화같은 서적 등을 보면, 대략 '인간이 하늘을 나는건 개소리야!' 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하늘을 날아보려고 팔에 날개를 달고 뛰어내리는 등. 무모한 행동을 일삼는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등장하곤 했었다.
이전에 '기구'와 '글라이더' 도 있었고, 더 나아가서 이미 이전부터 연구되고 있던 글라이더를 토대로 비행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지만, 아직까지도 적지 않은 매체들에서 최초로, 말 그대로 그냥 '''"하늘을 난 것"'''과 '''"최초의 동력비행"'''을 혼동하고 있으며 잘못된 양력의 원리에서 1순위로 등장하는 동시도착론과 함께 잊을 만하면 또 다시 튀어나온다.[30]
문명 6 오프닝에서도 잠깐 등장하고, 박물관이 살아있다 2에서도 등장하는데, 아멜리아 에어하트를 보고 '여자 파일럿이라니 세상 말세야.'라고 하자 아멜리아 에어하트는 '세상 고쳐먹으세요.'하고 한다. 뭐 영화상 개그로 넣은 것이지만, 오빌 라이트가 살아있을 때 이미 여성 조종사들이 여럿 나왔고 오빌 라이트는 반대하지 않았기에 고인모독 개그...
[1] 왼쪽에 콧수염이 있는 쪽이 오빌이다. 형 윌버는 키가 커서 192cm에 달했는데 동생 오빌은 175cm... 몸, 다리 길이 차이가 상당하다.[2] 당시 뒤몽의 기체는 헬리콥터에 더 가까웠다. 뒤몽은 수륙양용기도 시도한 뛰어난 발명가였다. 하지만 그는 늘상 우울증에 시달렸고, 자신이 만든 비행기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투기로 사용되는 데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1932년 상파울루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하였다. # 그래서 프랑스는 자기들이 비행기를 발명했다고 코웃음 친다고. 브라질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내용을 보면 알겠듯이 브라질이 먼저란 소린 헛소리다. 해당 블로그 글 역시 미국의 역사왜곡이라 주장하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고 있으니 그냥 '두몽이란 사람도 비행기를 개발했다' 정도로만 참고하자. 다만 뒤에서 보듯 프랑스가 최초로 비행기 대량생산을 한 건 사실.[3] 바로 위의 두명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없었다면 폰 브라운의 V2도 전혀 다른 형태로 나올지도 모른다.[4] 이런 다양한 혈통의 배경 덕분인지 훗날 미국을 떠나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의 여러나라를 거치면서 외국어를 구사하는 데에 어느 정도 비중있는 도움이 되었다. 이는 학문적인 도움도 되었다. [5] 오티스와 이다라는 쌍둥이도 있었지만 1870년 태어나자마자 죽어 의미는 없다.[6] 당시 사용하던 보통의 경주는 네모난 나무 상자 밑에 썰매날을 달아놓은 형태였지만 라이트 남매(월버, 오빈, 캐서린)가 끌고 나타난 것은 오늘날의 스켈레톤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상자 부분을 아예 없애버리고 썰매날 위에 사다리 모양 틀을 올려놓아 공기저항이 매우 적었던 것.[7] 이들 형제가 처음으로 비행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79년에 부친이 여행 선물로 프랑스의 페노라는 사람이 고안한 장난감 헬리콥터를 선물한 이후부터라고 알려지고 있다. 비록 장난감이었지만 헬리콥터의 모형은 연날리기를 무척 좋아하던 이들 10대 소년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들은 곧 지방의 연날리기 클럽에도 가입하게 된다. 두 형제는 공부도 무척 잘했는데, 원래 형 윌버는 예일대학교에 진학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려는 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스하키 도중 그만 거의 모든 이가 부러지는 커다란 사고를 당하게 된다.[8] 지금은 인구가 늘어나서 2014년 인구가 3400명 정도이다. 종종 항덕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지금이야 인구도 늘고 라이트 형제가 머물고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기가 난 곳이라고 기념비 세우고 그걸로 홍보하지만 1903년 당시에는 그야말로 변두리 마을로 당시 먼저 가서 머물던 윌버는 오빌에에게 편지로 "우리가 찾던 기상조건에는 어울리지만 살아가는 곳으로는 전혀 안 어울리는 거 같다!" 라고 하소연했다...[9] 키티호크급 항공모함은 이 지역의 이름을 딴 것.[10] 버지니아주에 소재한 NASA 랭글리 연구소가 이 사람의 이름을 따왔지만 같은 주의 CIA가 위치한 동네도 있어서 아주 유명하지는 않다.[11] 최초의 항공기 사출장치를 제작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최초의 항공모함이 이 사람의 이름을 따왔다.[12] 심지어 랭글리는 패배하자 폐인이 될 정도로 정말 엄청난 노력을 하였지만 라이트 형제는 그렇게까지 노력하지도 않았다. 비행기 개발에 사용한 돈과 시간을 비교하면 랭글리와 수십 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랭글리는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어떻게 보면 라이트 형제가 같은 미국인들에게 수난을 받은 이유일 수도 있다. 당시 슬슬 노력을 숭배하는 분위기가 자라나고 있었는데, 자기들이 보기에 노력을 별로 하지 않은 인간이 너무 뛰어난 결과를 내놓았으니... [13] 그래서 조선 과학기술자들은 비행기와 은근 관련성이 높다. [14] 당연히 당시에는 공군이 세상에 없었는데 세계 최초로 전투기를 따로 군대를 조직한 나라는 다름아닌 오스만 제국이었다.[15] 유럽에서는 1903년의 첫 비행 등이 인정받지 못한 상황이었다.[16] 옥타브 샤뉘트와의 관계는 이미 라이트 형제의 성공에 대해 얼마만큼 그가 기여했는지를 두고 사이가 삐그덕거리던 상태였는데, 재판 후 샤뉘트가 라이트 형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라이트 형제가 샤뉘트의 장례식에도 참가하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끝장났다.[17] 1918년이면 비행기가 국익에 막대한 도움이 된다고 인정받게 된 이벤트의 막바지이다. 그 4년 동안 항공기의 위상은 말도 안 되게 뛰었다. 분야의 개척자로서 우대 안 받는 게 이상하다.[18] 오빌은 캐서린과 사이가 나빠진 상태였다. 캐서린은 1926년에 결혼을 했는데, 오빌은 이에 크게 분노하고는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얘기조차도 하지 않으려 했다. 토머스가 고집을 부려 캐서린이 죽기 전에 겨우 만났다.[19] 컨스텔레이션은 전폭이 37.49미터에 이르는 초거대 레시프로 여객기이다.(초기형인 L-049 기준)[20] 라이트 형제의 플라이어 1호는 최초 비행에서 12초동안 37미터를 비행하였다.[21] 미국보다 시간이 빠른 다른 나라에서는 위대한 위인이 암살 당하였다.[22] 오빌이 사망하기 3개월 전인 1947년 10월 17일 척 예거가 벨 X-1 실험기를 타고 음속 장벽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23] 윌버는 '''비행기와 아내 모두에게 쓸 시간은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24] 글라이더가 제대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려면 절벽이 필요했고, 그래서 릴리엔탈은 절벽에서 글라이더를 타고 뛰어 내렸다가 곧 돌풍을 만났다[25] 이후 개발한 항공기들은 좀 더 편하게 앉아서 타는 형태로 바뀌었다.[26] 1929년 이후에는 커티스-라이트의 한 사업부로 남아 있었다.[27] 라이트(오른쪽)의 반대라 레프트(왼쪽)인 듯(...) 참고로 라이트 형제의 철자는 오른쪽과 관계가 없다.[28] 생전 라이트 형제와 반목했던 글렌 커티스에게서 따온 듯.[29] 해당 작품에서 나루가미 쿄이치로 역할을 같이 맡았다.[30] 환빠나 국뽕들이 흔히 최초의 비행기로 주장하는 비차 역시 글라이더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글라이더는 상당히 오래된 개념이며, '''9세기경''' 중국의 기록에도 원시적인 형태의 글라이더가 언급된다. 물론 기록을 보면 10미터(...)도 못 날았다. 그래서 회의론자들은 그냥 사람 태워놓고 물에 대고 힘껏 집어 던져서 대충 10미터 튕겨보낸 거 아니냐고(...)까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