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마츠 성(사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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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松城(1588? ~ 1869년). 현재는 다카마쓰 성터(高松城跡)와 다마모 공원(玉藻公園)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인다. 일본 100명성에 속한다.
카가와현 타카마츠시에 남아 있는 사누키노쿠니의 성. 평성(平城)에 가까운 구조지만, 바다 근처에 자리하며 해자를 바닷물로 채운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기에 보통 수성(水城), 혹은 해성(海城)으로 불린다.
1588년, 이코마 치카마사에 의해 축성이 시작되었으며 완공되자 사누키 통치의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이코마 가문이 대대로 성주를 맡아 다카마쓰 번을 통치하였지만 1640년에 발생한 이코마 소동(生駒騒動)으로 인해 이코마 가문은 데와노쿠니로 전봉 당하게 되었고, 막부에 의해 사누키는 동서로 나뉘게 되었다. 그후 동쪽에는 미토계 마쓰다이라(松平) 가문이 들어서게 되었고 이코마 가문이 하였던 것처럼 타카마츠 성을 중심으로 다카마쓰 번을 통치, 메이지 유신 때까지 그 영향력을 이어갔다.
사누키노쿠니는 예부터 국가의 요소로 평가받아 고대에도 방어를 위한 성이 세워졌으며 중세가 되자 중앙의 무사들은 사누키를 거점으로 세력싸움을 진행하기까지 하였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쇼군의 일족, 호소카와 가문이 지방 토호들과 함께 사누키를 통치했으나 센고쿠 시대가 되자 아와노쿠니를 다스리는 아와슈고(阿波守護) 호소카와 모치타카와 미요시 짓큐가 사누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아와의 지배자가 사누키의 전토를 관리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호소카와 가문과 미요시 가문의 사누키 지배력은 약해져 갔고 이 틈을 노려 도사노쿠니의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사누키를 정복하면서 사누키의 대부분은 조소카베 가문의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시바 히데요시의 시코쿠 원정으로 인해 마지막에는 센고쿠 히데히사가 대부분의 사누키의 영토를 제 영지로 얻게 되었다.
근세의 바람이 불어오는 와중에 센고쿠 가문과 비토 가문은 규슈에서 저지른 실책으로 가이에키 당하고 이내 이코마 지카마사가 사누키로 들어오게 되었다. 1587년, 지카마사는 해로를 이용해 히케타 성으로 들어와 히데히사가 본성으로 이용한 쇼쓰지 성(聖通寺城)[1] 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1588년에 사누키 중앙에 있는 노하라(野原) 지역을 타카마츠로 개명한 뒤 축성을 개시한다.[2]
곧 성은 완성되었고[3] 지카마사는 타카마츠 성으로 본거를 옮겨 이곳을 중심으로 사누키의 통치를 시작하였다.[4] 이후로 이코마 가문은 조선 출병을 거쳐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의 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살아남아 에도 바쿠후 시대에도 다카마쓰 성을 중심으로 타카마츠 번을 다스렸다.
하지만 4대 번주 이코마 다카토시(生駒高俊)의 시대가 되자 이코마 가문은 내분으로 골머리를 앓았으며 결국 1640년에 가이에키라는 최악의 판결을 받아 다카토시는 데와노쿠니 중 현재의 아키타현에 해당되는 지역[5] 으로 전봉되어, 4대 54년에 해당하는 이코마 가문의 사누키 통치는 막을 내렸다. 이코마 가문의 꼴을 본 막부는 사누키의 영토를 동과 서로 나누었고 동 사누키에 마쓰다이라 요리시게(松平頼重)를 번주로 임명하였다. 요리시게는 히타치노쿠니에서 사누키까지 건너와 1642년 8월 28일에 다카마쓰 성에 입성하였으며 타카마츠 번은 존속되었다.
마쓰다이라 가문은 1670년부터 타카마츠 성을 크게 개수하기 시작하였다. 덴슈를 수리하여 새로 만들었고, 히가시노마루(東ノ丸)와 기타노마루(北ノ丸)를 신설하여 성의 나와바리를 확장시켰다. 또한 쓰키미 야구라(月見櫓)와 우시토라 야구라(艮櫓)를 신설하였으며 성의 정문인 오테몬을 이축하여 우리가 현재 보고있는 다카마쓰 성터의 기본 나와바리를 완성시켰다.
개수된 타카마츠 성은 마쓰다이라 가문이 11대 228년이라는 시간 동안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시간이 흘러 1869년, 일본에서는 판적봉환을 실시하며 번정은 중지되었고 번정의 중심이던 타카마츠 성은 1870년에 폐성되어 그 모습은 사라졌다.
메이지 시대가 되자 성터의 건축물들은 대개 해체되었으며 성의 소토보리(外堀)는 메워져 시가지의 발전에 사용되었다. 바다와 맞닿은 북쪽의 나와바리에 간척을 진행하여 바다를 메웠고, 나카보리(中堀) 안쪽은 병부성이 이용하여 성터는 크게 훼손되었다. 남은 덴슈는 1884년, 노후화를 사유로 해체되었다. 1890년에는 다시 마쓰다이라 가문이 타카마츠 성터의 소유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덴슈가 해체된 덴슈대(天守台)에 마쓰다이라 타카마츠 번의 초대 번주를 기리는 다마모묘(玉藻廟)를 건설하였고 1914 ~ 17년에는 12대 당주 마츠다이라 요리나카(松平頼寿)가 성주의 거처인 고텐이 위치했던 산노마루에 히운카쿠(披雲閣, 피운각)를 세우고 도쿄에서 정원사를 불러 히운카쿠 정원을 만들었다.[6]
이후 전쟁이 끝나면서 1954년에 타카마츠 성터는 타카마츠시의 소유가 되었고, 1955년에는 국가 사적(国史跡)로 지정되어 지금의 모습에 이른다.
일단 타카마츠 성은 타카마츠시의 중심이 되는 타카마츠역과 5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기에 관광하기에 매우 편리한 조건을 갖추었다. 천수각은 현존하지 않지만 세 야구라가 있고 바닷물로 채워진 넓은 해자로 둘러 싸여 있기에 천수대에 오르면 타카마츠 성의 경치를 조금 높은 곳에서 즐길 수 있다.
보통 타카마츠 성에 입장할 때는 타카마츠역 쪽에 있는 서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티켓 값은 성인 200엔으로 상당히 저렴한 편, 입장하게 되면 니노마루에 있게 것이 되며 직진하면 산노마루로 진입하며 성내를 둘러볼 수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덴슈가 있던 곳에 올라가 볼 수 있다.
오른쪽으로 향하면 사야바시(鞘橋)라는 다리가 나온다. 전쟁시에는 다리를 끊어 혼마루에서 마지막 저항을 할 수 있도록 설계해 놓은 다리로, 현재의 다리는 옛날보다 길이가 길어진 형태다. 덴슈대에는 덴슈 내부 지하 1층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설치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비록 낮은 높이지만 타카마츠 성 일대를 둘러볼 수 있다. 다마모묘는 2005년부터 시작된 이시가키 해체수리 당시 같이 해체되어 복원되지 않았기에 지금은 직접 볼 수 없다.
직진하여 성내로 들어가면 현존 유적인 쓰키미 야구라와 미즈테고몬(水手御門), 와타리 야구라(渡櫓)를 볼 수 있다. 이 망루들은 건설된 당시부터 무너지지 않고 수리를 받아 현재까지 내려오는 현존 유적으로서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된다. 옛날엔 미즈테고몬을 나서면 바로 바다로 이어져 있었다고 하며, 번주들은 이 문을 통해 바다로 이동하거나 바다 위에서 유희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쓰키미 야구라와 와타리 야구라는 평소엔 잠겨있지만 일요일에는 야구라 내부를 무료 개방하므로 타카마츠 성을 들를 땐 가능한 일요일에 들르도록 하자. 야구라 안은 목조 건물이며 야구라에 대한 설명과 몇 가지 자료들이 놓여 있다. 쓰키미 야구라는 3중 3계의 구조를 가져 1, 2, 3층을 전부 돌아 다니는 것이 가능하며 3층에서는 히운카쿠의 전경과 타카마츠 항, 세토내해를 조금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 수 있다. 미즈테고몬 또한 일요일에는 문을 열어두기 때문에 한때 는 바다였던 육지에서 야구라를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히운카쿠가 나온다. 정원은 국가명승으로 지정되어 있고 히운카쿠는 회의, 다도회, 전시회 등의 회장으로 쓰인다. 히운카쿠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타카마츠 성의 자료를 전시하는 진열관이 있으며, 더 남쪽으로 내려오면 바바(桜の馬場)와 우시토라 야구라를 볼 수 있다. 상기의 사진이 우시토라 야구라이며 현존 유적이자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원래는 히가시노마루의 북동쪽에 있었지만 1965년 해체수리를 하며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북쪽에 있는 야구라들과 다르게 일반인은 출입이 불가능한 것 같으며 우시토라 야구라의 앞은 오테몬이 자리한다.
이외에도 수성이라는 특수한 구조를 이용해 가이드와 함께 조각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해자를 둘러보는 것이 가능하며, 이곳 저곳 설치된 뽑기에서 100엔으로 물고기 사료를 뽑아 해자에 사는 도미 따위 바다 물고기들에게 던져 줄 수 있다.
타카마츠 성을 에히메현의 이마바리 성, 오이타현의 나카츠 성과 합쳐 '''일본 3대 수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타카마츠 성이 지어지기 이전인 중세 시대에도 다카마쓰 성이 언급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기오카 성(喜岡城)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 타카마츠는 기오카 성 주변의 지명이었으며 기오카 성 또한 타카마츠 성이라 불렸으나, 지카마사가 노하라 지역을 타카마츠로 이름을 바꾼 뒤에는 후루타카마츠(古高松)로 이름을 바꿔 타카마츠와 구분하였다. 현재까지도 후루타카마츠란 명칭이 쓰인다.
아쉽게도 설명문에는 일본어와 영어만이 쓰여 있다. 표지판에는 한국어가 표기되었지만 유적의 이름만이 조그맣게 쓰여 있기에 한국어만으론 유적에 대해서 많이 알 수가 없다.
21세기 들어 천수각을 복원한다곤 하나 그 경과는 시원치 않아 보인다. 천수각이 기록된 사료가 부족한 것이 1차 원인으로 지목되며 2016년이 되자 타카마츠시가 천수각과 관련된 자료에 현상금을 걸 만큼 덴슈를 복원하는 데 열성을 쏟는다.
성터의 동쪽에 가가와현립 박물관이 있다.
보통 일본의 성 옆에 일본식 정원이 있는 경우가 많기에 리쓰린 공원이 타카마츠 성 주위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둘은 도보로 약 30분쯤 떨어져 있다. JR 시코쿠와 코토덴이 두 곳을 전부 통행하므로 편하게 이동하고 싶다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걸 추천한다.
高松城(1588? ~ 1869년). 현재는 다카마쓰 성터(高松城跡)와 다마모 공원(玉藻公園)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인다. 일본 100명성에 속한다.
1. 개요
카가와현 타카마츠시에 남아 있는 사누키노쿠니의 성. 평성(平城)에 가까운 구조지만, 바다 근처에 자리하며 해자를 바닷물로 채운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기에 보통 수성(水城), 혹은 해성(海城)으로 불린다.
1588년, 이코마 치카마사에 의해 축성이 시작되었으며 완공되자 사누키 통치의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이코마 가문이 대대로 성주를 맡아 다카마쓰 번을 통치하였지만 1640년에 발생한 이코마 소동(生駒騒動)으로 인해 이코마 가문은 데와노쿠니로 전봉 당하게 되었고, 막부에 의해 사누키는 동서로 나뉘게 되었다. 그후 동쪽에는 미토계 마쓰다이라(松平) 가문이 들어서게 되었고 이코마 가문이 하였던 것처럼 타카마츠 성을 중심으로 다카마쓰 번을 통치, 메이지 유신 때까지 그 영향력을 이어갔다.
2. 역사
사누키노쿠니는 예부터 국가의 요소로 평가받아 고대에도 방어를 위한 성이 세워졌으며 중세가 되자 중앙의 무사들은 사누키를 거점으로 세력싸움을 진행하기까지 하였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쇼군의 일족, 호소카와 가문이 지방 토호들과 함께 사누키를 통치했으나 센고쿠 시대가 되자 아와노쿠니를 다스리는 아와슈고(阿波守護) 호소카와 모치타카와 미요시 짓큐가 사누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아와의 지배자가 사누키의 전토를 관리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호소카와 가문과 미요시 가문의 사누키 지배력은 약해져 갔고 이 틈을 노려 도사노쿠니의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사누키를 정복하면서 사누키의 대부분은 조소카베 가문의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시바 히데요시의 시코쿠 원정으로 인해 마지막에는 센고쿠 히데히사가 대부분의 사누키의 영토를 제 영지로 얻게 되었다.
근세의 바람이 불어오는 와중에 센고쿠 가문과 비토 가문은 규슈에서 저지른 실책으로 가이에키 당하고 이내 이코마 지카마사가 사누키로 들어오게 되었다. 1587년, 지카마사는 해로를 이용해 히케타 성으로 들어와 히데히사가 본성으로 이용한 쇼쓰지 성(聖通寺城)[1] 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1588년에 사누키 중앙에 있는 노하라(野原) 지역을 타카마츠로 개명한 뒤 축성을 개시한다.[2]
곧 성은 완성되었고[3] 지카마사는 타카마츠 성으로 본거를 옮겨 이곳을 중심으로 사누키의 통치를 시작하였다.[4] 이후로 이코마 가문은 조선 출병을 거쳐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의 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살아남아 에도 바쿠후 시대에도 다카마쓰 성을 중심으로 타카마츠 번을 다스렸다.
하지만 4대 번주 이코마 다카토시(生駒高俊)의 시대가 되자 이코마 가문은 내분으로 골머리를 앓았으며 결국 1640년에 가이에키라는 최악의 판결을 받아 다카토시는 데와노쿠니 중 현재의 아키타현에 해당되는 지역[5] 으로 전봉되어, 4대 54년에 해당하는 이코마 가문의 사누키 통치는 막을 내렸다. 이코마 가문의 꼴을 본 막부는 사누키의 영토를 동과 서로 나누었고 동 사누키에 마쓰다이라 요리시게(松平頼重)를 번주로 임명하였다. 요리시게는 히타치노쿠니에서 사누키까지 건너와 1642년 8월 28일에 다카마쓰 성에 입성하였으며 타카마츠 번은 존속되었다.
마쓰다이라 가문은 1670년부터 타카마츠 성을 크게 개수하기 시작하였다. 덴슈를 수리하여 새로 만들었고, 히가시노마루(東ノ丸)와 기타노마루(北ノ丸)를 신설하여 성의 나와바리를 확장시켰다. 또한 쓰키미 야구라(月見櫓)와 우시토라 야구라(艮櫓)를 신설하였으며 성의 정문인 오테몬을 이축하여 우리가 현재 보고있는 다카마쓰 성터의 기본 나와바리를 완성시켰다.
개수된 타카마츠 성은 마쓰다이라 가문이 11대 228년이라는 시간 동안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시간이 흘러 1869년, 일본에서는 판적봉환을 실시하며 번정은 중지되었고 번정의 중심이던 타카마츠 성은 1870년에 폐성되어 그 모습은 사라졌다.
메이지 시대가 되자 성터의 건축물들은 대개 해체되었으며 성의 소토보리(外堀)는 메워져 시가지의 발전에 사용되었다. 바다와 맞닿은 북쪽의 나와바리에 간척을 진행하여 바다를 메웠고, 나카보리(中堀) 안쪽은 병부성이 이용하여 성터는 크게 훼손되었다. 남은 덴슈는 1884년, 노후화를 사유로 해체되었다. 1890년에는 다시 마쓰다이라 가문이 타카마츠 성터의 소유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덴슈가 해체된 덴슈대(天守台)에 마쓰다이라 타카마츠 번의 초대 번주를 기리는 다마모묘(玉藻廟)를 건설하였고 1914 ~ 17년에는 12대 당주 마츠다이라 요리나카(松平頼寿)가 성주의 거처인 고텐이 위치했던 산노마루에 히운카쿠(披雲閣, 피운각)를 세우고 도쿄에서 정원사를 불러 히운카쿠 정원을 만들었다.[6]
이후 전쟁이 끝나면서 1954년에 타카마츠 성터는 타카마츠시의 소유가 되었고, 1955년에는 국가 사적(国史跡)로 지정되어 지금의 모습에 이른다.
3. 유적과 관광
일단 타카마츠 성은 타카마츠시의 중심이 되는 타카마츠역과 5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기에 관광하기에 매우 편리한 조건을 갖추었다. 천수각은 현존하지 않지만 세 야구라가 있고 바닷물로 채워진 넓은 해자로 둘러 싸여 있기에 천수대에 오르면 타카마츠 성의 경치를 조금 높은 곳에서 즐길 수 있다.
보통 타카마츠 성에 입장할 때는 타카마츠역 쪽에 있는 서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티켓 값은 성인 200엔으로 상당히 저렴한 편, 입장하게 되면 니노마루에 있게 것이 되며 직진하면 산노마루로 진입하며 성내를 둘러볼 수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덴슈가 있던 곳에 올라가 볼 수 있다.
오른쪽으로 향하면 사야바시(鞘橋)라는 다리가 나온다. 전쟁시에는 다리를 끊어 혼마루에서 마지막 저항을 할 수 있도록 설계해 놓은 다리로, 현재의 다리는 옛날보다 길이가 길어진 형태다. 덴슈대에는 덴슈 내부 지하 1층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설치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비록 낮은 높이지만 타카마츠 성 일대를 둘러볼 수 있다. 다마모묘는 2005년부터 시작된 이시가키 해체수리 당시 같이 해체되어 복원되지 않았기에 지금은 직접 볼 수 없다.
직진하여 성내로 들어가면 현존 유적인 쓰키미 야구라와 미즈테고몬(水手御門), 와타리 야구라(渡櫓)를 볼 수 있다. 이 망루들은 건설된 당시부터 무너지지 않고 수리를 받아 현재까지 내려오는 현존 유적으로서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된다. 옛날엔 미즈테고몬을 나서면 바로 바다로 이어져 있었다고 하며, 번주들은 이 문을 통해 바다로 이동하거나 바다 위에서 유희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쓰키미 야구라와 와타리 야구라는 평소엔 잠겨있지만 일요일에는 야구라 내부를 무료 개방하므로 타카마츠 성을 들를 땐 가능한 일요일에 들르도록 하자. 야구라 안은 목조 건물이며 야구라에 대한 설명과 몇 가지 자료들이 놓여 있다. 쓰키미 야구라는 3중 3계의 구조를 가져 1, 2, 3층을 전부 돌아 다니는 것이 가능하며 3층에서는 히운카쿠의 전경과 타카마츠 항, 세토내해를 조금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 수 있다. 미즈테고몬 또한 일요일에는 문을 열어두기 때문에 한때 는 바다였던 육지에서 야구라를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히운카쿠가 나온다. 정원은 국가명승으로 지정되어 있고 히운카쿠는 회의, 다도회, 전시회 등의 회장으로 쓰인다. 히운카쿠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타카마츠 성의 자료를 전시하는 진열관이 있으며, 더 남쪽으로 내려오면 바바(桜の馬場)와 우시토라 야구라를 볼 수 있다. 상기의 사진이 우시토라 야구라이며 현존 유적이자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원래는 히가시노마루의 북동쪽에 있었지만 1965년 해체수리를 하며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북쪽에 있는 야구라들과 다르게 일반인은 출입이 불가능한 것 같으며 우시토라 야구라의 앞은 오테몬이 자리한다.
이외에도 수성이라는 특수한 구조를 이용해 가이드와 함께 조각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해자를 둘러보는 것이 가능하며, 이곳 저곳 설치된 뽑기에서 100엔으로 물고기 사료를 뽑아 해자에 사는 도미 따위 바다 물고기들에게 던져 줄 수 있다.
4. 기타
타카마츠 성을 에히메현의 이마바리 성, 오이타현의 나카츠 성과 합쳐 '''일본 3대 수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타카마츠 성이 지어지기 이전인 중세 시대에도 다카마쓰 성이 언급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기오카 성(喜岡城)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 타카마츠는 기오카 성 주변의 지명이었으며 기오카 성 또한 타카마츠 성이라 불렸으나, 지카마사가 노하라 지역을 타카마츠로 이름을 바꾼 뒤에는 후루타카마츠(古高松)로 이름을 바꿔 타카마츠와 구분하였다. 현재까지도 후루타카마츠란 명칭이 쓰인다.
아쉽게도 설명문에는 일본어와 영어만이 쓰여 있다. 표지판에는 한국어가 표기되었지만 유적의 이름만이 조그맣게 쓰여 있기에 한국어만으론 유적에 대해서 많이 알 수가 없다.
21세기 들어 천수각을 복원한다곤 하나 그 경과는 시원치 않아 보인다. 천수각이 기록된 사료가 부족한 것이 1차 원인으로 지목되며 2016년이 되자 타카마츠시가 천수각과 관련된 자료에 현상금을 걸 만큼 덴슈를 복원하는 데 열성을 쏟는다.
성터의 동쪽에 가가와현립 박물관이 있다.
보통 일본의 성 옆에 일본식 정원이 있는 경우가 많기에 리쓰린 공원이 타카마츠 성 주위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둘은 도보로 약 30분쯤 떨어져 있다. JR 시코쿠와 코토덴이 두 곳을 전부 통행하므로 편하게 이동하고 싶다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걸 추천한다.
[1] 佐藤竜馬는 히데히사가 쇼쓰지 성이 아닌 자신이 새로 개수한 히라야마 성(平山城)을 본거로 이용했다는 사실과, 지카마사 또한 쇼쓰지 성이 아닌 히라야마 성에 입성하였으며 사누키 입부 당시부터 히라야마 성을 본거로 이용할 생각이었다는 주장을 피력했다. - 香川県埋蔵文化財センター 考古学講座 18 p.5[2] 지카마사의 축성에 도움을 준 다이묘가 있으며 도도 다카토라, 구로다 요시타카, 호소카와 다다오키 중 한 사람이라고 전해진다.[3] 보통 1590년에 성이 완공되었다고 하지만, 佐藤竜馬 및 大嶋和則 등은 1차 사료는 커녕 2차 사료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찾아볼 수 없다 하여 1590 완성 설은 근거조차 발견되지 않은 낭설에 가깝다고 정의했다. - 四国の近世城郭 p.80 [4] 지카마사는 좌우로 넓은 사누키를 통치하기 위해 히케타 성과 마루가메 성을 개수한 다음 자신의 아들을 성주로 임명하여 동, 서 사누키의 통치 거점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최근엔 아마타키 성(雨滝城) 같은 중세 유력 호족의 본성에도 이코마 가문의 개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이 밝혀졌다.[5] 쉽게 설명하자면 우고노쿠니가 되겠지만, 우고는 보신 전쟁기에 데와에서 분리설치된 구니이기에 적당한 설명은 아니다.[6] 에도 시대에도 같은 지역에 현재보다 약 2배 정도 큰 히운카쿠가 있었으나 메이지 시대에 노후화를 이유로 해체되었다.